오히려 조선 지식인들, 엘리트들의 사대주의의 뿌리는 고려에서, 그것도 고려초기에서 출발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이 시기 고려 사관 및 각종 저술자들은 사소한 사건조차도 중국 고사를 인용해 설명하거나 평가하는 경우가 거의 다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례로 왕건의 선조 누구가 당황제의 아들이 표류해서 만나서 어쩌구 저쩌구 했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는데 그게 다 그런겁니다.
고려의 기틀을 마련하고 유교정치를 출발시킨 광종에 있어서 이는 도를 넘어서서 중국서 온 쌍기에 감복한 광종은, 멀쩡한 조정의 관료들을 죄다 중국 한족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을 정도입니다. 이에 반대했던 서희의 강직한 아버지 서필이 죽으며 비로소 광종은 그 뜻을 꺾습니다만.(단순히 독자적 연호를 썼다는것만으로 고려조 최고의 왕으로 평가하던데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광종의 순수하지만은 않았던 의도들 때문에.. 물론 잘한것들도 있긴 합니다. 고려가 유지되는 기틀을 거의 그가 세웠죠.)
고려는 전체적으로 요(거란)과 송의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했다고 하나 이도 거란의 군사력에 질린 나머지 송과 완전히 연합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송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던 고육책의 성격이 짙습니다.
고려의 왕들은 어땠나.
가관이었습니다. 혹평하면 제대로 된 왕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젊어서부터 호족들이 바친 딸들을 죄다 부인으로 삼으며, 부하들의 부추김으로 왕이 되어, 호족들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왕권을 휘두르는 나쁜 시스템을 초래한 호색한 왕건의 후손이 어디 가나요? (심한 말이지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렇게 많은 자식을 뒀건만 제대로 된 군주감이 없어 항상 외척집안에 시달리고 말이죠.(급격한 외척집안의 상승은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시대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자겸같은 이의 경우 빈한한 출신이면서 외척으로 세도를 누려 나중엔 사위인 왕까지 죽이려하다가 되려 축출되죠.) 외척이 급격하게 힘을 키운데는 고려 전체에 일관된 뇌물정치,세도가 정치에 기인함이 큽니다. 어느 한쪽으로 힘이 몰릴 경우 우루루 그쪽에 줄을 대려하는것 말이죠.
고려의 왕은, 두가지더군요. 나쁜짓을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일찍 죽은 왕이고 오래 산 왕은 꼭 싸이코짓을 합니다.-아니 싸이코가 아닌 왕은 일찍 죽었다는 패턴도 있군요. 제 개인적으로 독살이 다반사였던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조선왕들도 대개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본적도 있습니다.
집권초에 의욕적으로 뭘 하려했던 왕은 곧 흐지부지하거나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버리고 말죠. 오직 제대로 된 인품의 왕은 강감찬 장군 시절 거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현종뿐이 아닌가 싶은데 이 분의 경우 출생부터 왕실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으로 정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산 분입니다. 다소 창피하지만 후비인 어머니가 유폐중 간통한 결과로 낳아졌는데 마침 그 아버지가 왕족이었고 어머니의 본 남편인 목종이 인간미가 있는이여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왕비가 왕이 죽은후 파렴치한 동기에서(궁에 들어가기전의 연인과 대놓고 간통하고 임신을 하게되자 현종을 죽이려 함) 승려로 살려는 현종의 목숨을 계속해서 독살,자객등으로 노리고 현종은 하늘이 도와 그때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합니다.
이 악독한 왕비를 보다못해 한 신하가 왕명을 위조 변경수비대를 궁으로 진입케하고 이 변경수비대장은 엉겁결에 왕비 무리를 처단한 후 현종을 왕으로 앉힙니다.(무력 쿠데타는 고려에서 무신정권기 태동을 제외하고도 상당히 다반사였습니다.) 현종이 왕위에 앉자마자 거란이 고려의 창피한 일련의 사태를 빌미로 처들어오고 현종은 반십년을 최고사령관으로 거란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정열을 쏟다 모든 침공이 끝나자마자 고단한 일생을 마감하고 마는데요 귀주대첩과 거란침입의 경우 현종의 (왕건 핏줄에서 드물게 나타난..) 인재를 보는 안목과 용병술에 공이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그는 고려문화의 금자탑인 팔만대장경의 시작이라 할 고려대장경의 축조를 시작해 국가를 정신적으로 단결시키려 했습니다.
'제국의 아침'으로 잘 알려진 광종의 경우 최초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된 행정관료들을 몰아내기위해 유학적 교양을 갖춘 신진사대부들로 관료층을 바꿀때까지는 잘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고분고분한 꼭둑각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며 이들을 또다시 자신의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려 하죠. 이미 호족의 기를 꺾기위해 피가 흥건하도록 칼을 휘둘렀기에 노년을 안심할 수 없었던 그는 전제적인 독재왕권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타락하고 그 결과 쌍기를 위시한 한족 출신 관료들로 조정을 물갈이하려 합니다. 이는 고려인 관료들의 사유재산을 무자비하게 압수, 한족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짓을 하기에 이르고 이에 강직한 서필(훗날 거란을 외교적으로 물러가게 한 서희의 아버지)이 직언을 하다 목숨을 잃습니다. 신망을 얻던 서필마저 죽이고 정신을 차린건지 아니면 비난을 두려워한건지 광종은 미친짓을 그제야 거두고 맙니다.
충..자가 앞에 들어간 임금들이 고려의 원에 대한 굴복 이후의 임금들이란건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실텐데 이들은 첫 임금인 충렬왕부터 모두 외할아버지가 원의 황제 내지 왕가입니다. 즉 피의 절반만 고려인인 왕들이었고 이는 조선의 건립을 민족의 혈통주의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바탕이 된다고 봅니다.(당시 백성들은 왕으로 그들을 승복할 수 없었을겁니다. 지금이라도 혼혈대통령을 쉽게 받아들이기가 대다수 국민들은 어려울테니까..)
이 '충'자로 시작하는(공자 시작 왕들도 마찬가지) 왕들은 거개가 하나같이 가관인 인품과 자질이어서, 충렬왕의 경우 고려는 외할아버지로부터 하사받은 자신의 놀이터쯤으로 생각하는 왕이었죠. 따라서 사실 이 왕의 행적을 보고 사대적이라고만 욕할 수 없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아들 충선왕의 경우 불과 아홉살때, 추수기에 사냥을 나가는 아버지에게 백성들을 돌보라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뭇 감동적인 얘기가 있습니다만, 고려를 자신의 원래 바닥인 세계제국 원에 비하면 참을 수 없이 작은땅이라 여겨 초반 잠시 국정에 힘쓰는 듯 하다 중반 이후 쭉 원에서 원격경영을 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예를 남겼습니다. 황태자 시절부터 그는 이미 원에서 머물렀고, 중간중간 왕실이 환관과 세도가들로 어지럽혀질때 불쑥 나타나선 몽골 특유의 무자비함으로 싹 청소하곤 다시 원으로 날라가곤 했죠.
'충'자임금들 집권기간 내내.. 몽고에서 온 새 왕비들, 즉 몽고왕실의 공주들은 고려왕실을 뭐처럼 알고 오만의 극을 달립니다. 이에 대해 고려 귀족과 지도층들은 알아서 기고..
몇대후의 충혜왕은, 우리나라에는 로마의 네로나 러시아의 이반 뇌제같은 싸이코 폭군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당연히 있었다"는 대답을 자랑스레(?) 할 수 있게 합니다. 아버지의 비들을 차례로 강간하고 신하의 부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딸,부인에 대해서도 그러했으며 온갖 패륜과 악행을 골고루 자행했던 이 왕은, 원한을 가슴에 품고있던 원래 몽골의 공주였던 전왕의 비가 몽골의 사신에게 강간사실을 털어놓으면서 몽골로 소환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소환을 반복하다가 방탕에 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몸으로 세번째 소환시 죽어버리고 맙니다
공민왕은 잘 알려졌듯 집권초기에는 원으로부터 독자성을 얻으려하고 민생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로 변태성욕자가 되어 정신이 파괴되고 맙니다. 그는 이른바 관음증 환자로서 자신의 부인을 친한 신하들로하여금 겁탈케하고 이를 몰래 지켜보았죠. 그런데 이는 아마도 그가 무정자증이어서 임신을 시키지 못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신하가 비를 임신시키자 그 아이를 태자로 삼으려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버리죠.
결국 이런 저런 싸이코 짓 끝에 자기도 살해당하고 맙니다.
고려때 그나마 문화군주라면 성종이 있겠는데 광종의 그늘에서 순조로이 문화정치를 펼 수 있었을 이 임금은 그 도가 지나쳐 광종이 의욕적으로 실행했던 노비안검법을 되돌려, 노비에서 해방되었다고 기뻐하여 십수년을 살아온 양민들이 하루아침에 다시 호족의 노비가 되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짓을 했지요.
이상에서 몇명을 통해 보듯, 고려사의 주요인물중 끝까지 존경받을 만한 이는 (이순신 장군을 위시해 고결한 인품을 가진 이들이 즐비한 조선시대에 비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인물로는 강감찬 ,서희,서필 정도가 아닐까 싶고(행적이 귀주대첩 이후 묘연하다는 점에서. 혹시 토사구팽??)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경우 당대의 권력자로서, 그 아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날뛰던 놈들이었는데 이들을 나무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충신들을 잡아 족치는 짓을 거리낌없이 했죠.
아마도 이때문에 조선은 지조와 개인도덕을 강조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고려의 병폐적인 가족중심주의는 정말 지나칠 정도여서 잘 알려진 호족의 할거가 이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이로부터 조선의 왕권강화가 나왔을겁니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무신정권에 그나마 질서를 가져온 최충헌의 경우도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이의민의 수하가 그가 기르던 비둘기를 훔쳐가는 사건으로 동생과 힘을 합쳐 이의민 무리를 뒤집죠. 형제는 용감했다!랄까요. 그러나 이 형제도 말미가 좋지 않아서, 그래도 신중함이 있고 도리를 알던 최충헌과 달리 괄괄하기만 한 최충헌의 동생은 우격다짐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려했고 이를 형이 말리자 먼저 형 최충헌을 죽이려하다가 최충헌의 부하들에게 자신만 목숨을 잃습니다.(이에 대해 당시 개성백성들은 손가락질을 했다하는데 고려사를 통틀어 이처럼 지도층을 한심스럽게 백성들이 욕하고 땅을 쳤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 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지도층에 대한 존경이 없어지고 노블리스 오블리쥬도 사라진 시기가 이 시기였던 듯 합니다.)
여진정벌의 경우는, 고려가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자의식이 있었으므로 고토회복의 차원에서 꾸준히 주장되었던 것 같습니다.(그렇지만, 중국이 변방민족에 대해 했던 무력적인 사전정지작업과 같은 응징의 성격도 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군사력은 준비되지 않다가, 거란에게 크게 당하면서 징병제적인 국민개병적 상비군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북진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견지명이 있다고 인정되던 관료들은 이를 처음부터 반대했는데 여진족의 땅에 대한 의지가 완강하고 전투력이 만만찮음을 작전반대론자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때문이었습니다.
윤관 장군의 여진정벌은 수월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고 고려군이 여진군을 기습작전(산악지대이다보니 주로 매복,기습 작전이 이뤄졌습니다.)으로 부대를 전멸시키면 여진군은 보복하여 고려군이 큰 피해를 입는, 한방을 때리면 나도 한방을 맞는 그런 형세였습니다. 월남전과 같다고 할 수 있을 듯...
고려군은 6진(사실 이 6진이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탈환작전에 돌입하는 초기에 신속했기에 그런 전술적 이점을 얻었을 뿐 그후는 출혈이 상당했으며 심지어 윤관장군이 행군중 기습을 당해 일행과 함께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적도 있습니다.
이런 최고지휘관의 전사를 막는데 또한 고려 특유의 드라마틱한 일이 있었으니 왕건에 대해 신숭겸이란 목숨을 바치는 부하가 있었듯 윤관에게는 척준경이란 인물이 있었죠. 이 인물은 상당히 독특한데, 아마 일선지휘관으로서의 무공에 있어서 한국역사를 통틀어 거의 꼭대기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래 뒷골목 깡패출신으로 목종의 어린시절 경호원격 종자로 들어갔다가 자진해 군대로 들어갔습니다.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초급지휘관때 문제를 일으켰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옛 주인의 배경을 등에 업을만도 한데 그러지는 않는 도리를 알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윤관이 인물 보는 눈이 있었던지 선처를 도와줬고 척준경은 6진개척 작전 내내 무공으로 그 은혜를 갚습니다. 대치 상태에서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파해 수명의 적 장수를 죽이고도 살아남아(조선시대에는 이런 예가 없는것 같은데요 신라시기 자주 발견되는, 대치상태를 깨기위한 화랑들의 자살적 단신 육탄돌격과 같은것이 고려시기까지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투 전체를 승리로 이끌고 윤관이 기습포위된 상황에서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구하러 들어가 퇴로를 열어주고 생환하는등 평생을 싸움에 관한 한 무적의 군인으로 산 사람이죠.
6진개척을 일단 정리하자면, 이 작전은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의 적대적인 전투의지가 팽팽하게 맞부딧힌 사투의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한강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간의 대치, 한국전쟁시 백마고지를 둘러싼 한국군과 중국군간의 그것을 상상하면 적합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 작전의 실패를 점친 전략가들의 선견지명도 무시할 수 없는것이 이들(여진족)이 결국 상승세를 이어나가 거란을 멸하고 중국본토마저 접수하여 전제주의 시기의 중국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중국을 통치했다고 인정받는 청을 이룩하는 저력을 미리 알아본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6진개척은 영토확장을 위해 국민군을 능동적으로 사용한 고려건국 이후 몇 안 되는 사례라는 의의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 입니다.(하지만 이때 호되게 당해 조선은 세종시를 제외하곤 북쪽민족과의 대결을 되도록 피하죠. "상종하기가 힘든 짐승들"로 봤기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고려때도 쓴 표현인데, 그때는 이 짐승을 잡아 다스려보겠다고 나섰던것이라고 보면 되려나?)
다시 척준경의 얘기로 돌아가서..
척준경은 하여튼 당대에도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의 무공이었기에 나라의 원로이자 실력자가 되었는데요, 간신 외척 이자겸과 사돈을 맺는 바람에 노년을 구겼습니다. 하지만 이 때도 이자겸의 꾐에 넘어가 왕과 궁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직전 왕의 지혜에 넘어가 마음을 돌리고 유폐는 면했죠. 그러나 그도 끝까지 좋진 않아서 세도를 무분별히 행사하다 유폐되어 죽고맙니다.
이자겸의 얘기가 나왔는데 왕마저 죽이려했던 이 인물이 목숨을 잃지않고 유폐된 채로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의 왕들이 얼마나 유약했는가를 보여줌과 함께 여성들에 고려남자들이 얼마나 휘둘려 살았나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때의 이런 풍조는 고려시대의 높았던 여권에 기인한 인상이 짙습니다. 이후의 조선은 여성의 기를 누르려했던 것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무신정권만 해도 중간중간 왕이 왕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심할 정도의 유약함으로 그러지 못하지요.
무신정권을 통해 150년 가량 고려를 지배한 무인들의 경우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첫 봉기도 사실 문신들 전부에게 분노를 돌릴 명분은 없었지요. 그리고 그 이후 정권을 잡은후 이들의 자질 부족한 모습도 익히 알려진 바고.. (때문에 문반적 소양도 강조한 조선의 무반 선발이 바람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짚고넘어가자면, 고려의 무관은 뚜렷한 선발형식에 얽메이기보다 상당히 유연한,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인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때문에 강감찬 같은 문신이 지휘관이 될 수도 있었으며 이의민과 같은 시골건달이자 범법자(형들과 폭력,절도사범으로 붙잡혀들어와 혹독한 고문을 받아 두 형이 죽었음에도 타고난 체력으로 살아남아 이에 감탄한 현감의 권유로 수도경비부대에 들어갔음)도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죠.
좋게 말하면, 오늘날 말해지는, 목적에 부합한 인재를 선발하는 시스템의 군대였다고 볼 수 있으며 (즉 전사는 적만 잘 죽일 수 있게 무술에만 능하면 되고 장군은 전투에서 이길 능력만 있으면 일체의 과거나 배경은 중요치 않은..) 이는 고려의 효율적인 전투능력을 가능케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잘 싸웠나 싶네요.
그리고 고려의 경우 미신과 유언비어(그 대부분이 풍수사상에서 나온)로 얼마나 큰 일들이 좌지우지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간접적으나마 목숨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비록 조선이 건국초기에 이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왜 그렇게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앞세우려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고려를 제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제목대로, 외강내유의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평등한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없어 노예계층은 피눈물 나는 삶을 살아야했고, 국가전반적으로 팽배했던 투쟁의식 속에 최고 권력자인 왕들은 역설적으로 유약함에 빠지거나 혹은 견제장치가 없는 무한권력자의 길을 걷다 불행을 초래했습니다. 힘만을 앞세워 키운 교양없는 무인들은 나라의 문화적 기반을 손상시켰고 그들에게 철퇴를 맞은 지식인들은 겉으로는 외쳤으나 문화적으로는 중국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선 법도가 깨져있었고(대표적으로는 문란한 성도덕-간통이 각계에서 다반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이끌어줄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시기가 많았습니다.
이상을 세부적으로 종합해볼때 그 대안은 결국 저로서는 (원래 좋아하지 않았으나) 조선이 택한 그 길뿐이란 생각입니다. 우리가 후대의 잣대로 조선의 유약함과 정신적 경직성을 탓하나 이는 고려의 심각했던 여러 병폐를 긴 안목에서 치유하기 위했던것이란 선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는 스스로 뿌리를 거부한(수백년전 사라진 정복국가 고구려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던 허상을 쫓으며 이상과 현실타협의 이율배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국가였던 반면) 조선은 비록 자랑스럽지 않으나(자신들의 실록을 여러권 만들어 보존했던 반면 고려사를 그처럼 복제하지 않았던 점으로 볼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 시기를 의식하며 자신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려했던 시기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게되고, 열받고, 한심하고 창피한 시기가 고려시대입니다. 고려에 대한 미사여구는 죄다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심하다손 싶더라도 고려가 잘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사료가 충분치 않아서라는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내세우기가 곤란한 사실들의 균등한 빈도로 존재하기때문에 일부러 언급을 국사학자들이 꺼리기때문으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고려는 민족사의 수치까지는 아니어도 잊고싶은 시기라는게 조금이라도 고려사 전반을 살펴본 이들의 공통된 심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려는 정말로 민중들에 의해 지탱되었을뿐 지도층은 있으나마나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의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과 주인의식이 싹트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말 민중사관을 이 시대에만은 적용해야 희석을 시킬 수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높이 평가할 건 위의 이야기들이 전부 고려의 사관들에 의해 후세에 기록으로 남겨졌다는겁니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수준의 고려왕조실록이 방대한 양으로 남겨졌었고 이것이 비록 임진왜란때 모두 불탔으나 미리 만들어둔 압축요약판인 고려사를 통해 우리는 상당부분 그 시대를 알고 있으며 비록 그 시기를 욕하나 그런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기록과 언론만은 보장했던 그 철저성에는 혀가 내둘러집니다.
이 글을 읽고나니...300, 500, 1000년 뒤 후세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라는 생각이드네요...쩝... 스스로 자립할 힘이 없어서 땅이 둘로 나뉘고,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 타국으로부터 군대를 빌려 방어하고, 아부떨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치를 하고, 제 나라 국민들 지킬 힘도 없고......너무 많네요. 나쁜게... 역사책 마지막 줄에 이 말이 하나 들어가겠네요. '그래도 문화는 발전했더라' 정도..너무 나쁘게봤나..
첫댓글 궁금해서 그런데 언론을 권력입맛에 맞게 길들이고 바꾸려는 어느 시기란게 정확히 언제를 말씀하시는지?? 지금까지 그렇지 않은 정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입니다만...
특히 군사정권과 노무현정부를 말하는 것같네요
띵동!!^^ 단 전체적인 글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한 귀절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은 좀 그렇네요....
언론을 권력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한시대는 현정권이나 김대중정권을 제외한 모든정권에서 일어나지않았나요? 가판신문을 처럼요
현 정권이 더합니다. 언론법을 보세요...^^ 총칼만 안들었지 마찬가지랍니다. 지금 아마 군사독재시대라면 더했을걸 뭘 그러십니까. 째영씨..^^ 알면서.
권력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서 조중동이는 이렇게 권력을 욕해대니 현 정권이 얼마나 무능한 지 알 수 있는 반증이로군요.(笑)
어떻게 현 정권이 더합니까ㅡㅡ;; 하다못해 땡전뉴스만 봐도 답이 나오겠네여... 현 정권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시는건 공감합니다만 어째 과거 정권의 문제점은 지적안하시는것 같아서 그렇네여
노통정부가 언론통제가 심하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통제시도라도.. 사실 세무조사를 할려고 했던 dj정권이나 통제를 안해도 알아서 기었던 ys정부이전과 비교해도 앞선다고 하기는 힘들어요.
50보 100보라는 말이 있죠... 50보 도망갔다고 100보 도망갔다는 사람을 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거를 연상해 보십쇼... 땡전뉴스이후에 노태우집권기부터 그런 뉴스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어떤나라든 대부분 전성기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300, 500, 1000년 뒤 후세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라는 생각이드네요...쩝... 스스로 자립할 힘이 없어서 땅이 둘로 나뉘고,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 타국으로부터 군대를 빌려 방어하고, 아부떨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치를 하고, 제 나라 국민들 지킬 힘도 없고......너무 많네요. 나쁜게... 역사책 마지막 줄에 이 말이 하나 들어가겠네요. '그래도 문화는 발전했더라' 정도..너무 나쁘게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