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업, 입학해서 첫 강의가 바로 ‘한국의 수필 문학‘ 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들어오신 교수님. 그런데 자신은 수필 문학을 가르치러 들어온게 아니라고 한다. 일단 앞으로 강의 계획을 말씀하시는데 기대했던 문학 강의라기 보단 철학에 가까운 강의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긴장시키며 마치 사냥개에 쫓기듯 살아간다는 등의 지금 껏 자신이 생각한 자아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는 다소 추상적인 강의 내용이었다. 머리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수님 말씀대로 그건 생각일 뿐이지 지금까지 나를 지배하던 인식들이 모두 뒤바뀌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자신의 강의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은 왠지 한학기동안 더 깊이 들어봐야 겠다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일에 확신이 있고 열정이 가진 사람을 나는 줄곧 신뢰해 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강의, 수강 변경한 학생들도 있어서 첫 강의시간 내용을 한번 더 말씀 하셨다. 그때 수업을 들으며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을 해 봤는데 나 역시 평소에 “그만 자야지” “지금 시험이 코앞인데 당구나 치며 뭘하는거지” 등의 내부의 외침들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이 거짓된 자아의 목소리에 나 자신이 따라주지 않을때는 스스로를 한심 스럽게 여기고 또 이로 인해 타인에게 뒤쳐진다던지 하면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거리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모습들이 예전에 군생활 하며 봤던 소설 ‘해변의 카프카’ 속 주인공과 오버랩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까마귀 소년’이라는 내면의 자아에게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까마귀 소년’은 늘 간섭을 한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기도 한다. 이런 내용을 보며 나는 주인공이 정신분열증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간과했지만 나 역시 소설 속 주인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질타하고 또 그로 인해 쫓기 듯 살아간다. 그럼 나는 비정상인가?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결국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늘 긴장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렇다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좌절에 빠지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설령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행복한가? 그 이룬 것을 지키기 위해 늘 조바심을 내고, 혹, 다른이가 더 큰 것을 성취했을 경우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진다.
나는 지금껏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상대적인 것, 즉 외부 요인에 인한 고통이라고 여겨왔다. 외부적인 요인이라면 나는 이런 삶에 고통을 수긍하며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세상 모두를 변화시킬수 없으니 힘들더라도 거기에 따라가며 위태롭게 사는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허나 교수님은 ‘관찰자는 관찰 당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그렇게 되면 얘기가 틀려진다. 교수님 말씀대로 나 자신이 거짓된 자아가 진정한 내가 아님을 깨닫고 나를 변화 시킨다면, 지금껏 나를 괴롭히고 죽을때까지 따라다닐 족쇄를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진정한 행복은 자유는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이 강의를 진지하게 임해야 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알아채기’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온다. 허나 학기가 끝나야 비로소 시작되는 강의라는 교수님 말씀처럼 이는 누가 가르쳐줘서,혹은 단번에 지각할수 있는 문제는 아닌거 같다. 조급하게 사냥개에 쫓길 필요없이 차분히 나를 죽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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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오늘도 학교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하숙집으로 향한다. 일단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 가야겠다. 밥을 먹고 나니까 졸린다. 어제 오랜만에 군대 동기들을 만나서 좀 늦게 들어와서 잠이 부족했던 것 같다. 도서관에 가는건 포기하고 두 시간만 자다가 일어나서 그냥 집에서 과제하고 전공 공부 좀 해야겠다. 헌데 이렇게 다짐하고 자리에 누우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몸은 귀찮아 자꾸만 잠을 청한다. 또 머릿속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큰일이다. 자꾸 이런식으로 나태해지다가는 전공 따라가기도 힘들텐데..우리과 애들은 교포가 많은건지 입학전부터 공부를 해오던 건지, 다들 스페인어가 익숙 한거 같던데.. 준비도 없이 덜컥 온 주제에 하루에 한 두시간이라도 공부해서 최소한 뒤쳐지지는 말자..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러면서도 몸은 자꾸만 근육을 이완 시킨다. ‘인제 입학한지 한달도 안됬는데 내가 너무 오버 하는거야.. 괜스레 조바심부터 내지 말자.’ 이런식으로 한 이삼십분을 누운채로 고민한다. 한참 의미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문득 이런 내 자신이 미련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거지? 공부를 해야겠다 느껴지면 그냥 자연스럽게 도서관에 가면 되는데.. 아니면 편히 자면 될일을 부질 없는 저울질로 나 자신을 옥죄며 괴롭히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 기분이 들고 바로 스르륵 잠들었다. 불안감 같은 건 없어졌다.
정확히 두시간 정도 경과 후 깨어나서 ‘알아채기’에 대하여 떠올려 보았다. 사실 알아채기에 대한 수업을 들은 당일 날은 알아채기를 경험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나름대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를 보냈다. 허나 그럴 만한 결정 사항이라던지 의미있는 일이 안 일어나서, 오늘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다가 잊은채로 이틀이 지났었다. 허나 방금 내가 잠들기 전 느낌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 이라던지 큰 관심사가 아니라 그냥 아주 사소한 일련의 사건이었다. 허나 곰곰히 되짚어 보면 이런 사소한, 어떻게 보면 시시한 일에도 나는 항상 고민해 왔다. 나는 지금껏 “신중”이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신중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늘상 나 스스로를 괴롭혀 왔다. 그리고 그런 내가 이해하고 있던 신중함에 착오가 생길 시에는 스스로를 ‘못난 놈’ ‘의지가 약한 놈’ 이라고 스스로를 비하 하며 살아왔다. 알아채기는 노력이 아니라는 교수님 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허나 그것을 늘 의식하고 사냥개를 발견해야 한다고.. 아까의 도서관을 가라 말아라 하던 ‘나’ 는 정말 나의 진실된 목소리였을까? 그렇진 않은거 같다. 다니던 학교 그만 두고 대학교를 늦게 왔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에 지방에 혼자 계신 어머님을 실망시키진 말아야지.. 서울까지 와서 고향 친구들 볼때도 기왕이면 딴 녀석들보단 내가 성공하려면... 이러한 주위 환경에 대한 압박감이다. 결국 이런것들은 2차적인 문제이다 정말 중요한건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원하는가 이다. 헌데 나는 지금껏 어땟는가. 이런 주위로부터의 명령들이 변질된 거짓된 자아의 외침에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끌려왔다. 결국 내가 다시 대학에 온 것은 정말 내가 원해서였을까? 나는 내가 나름대로 군대갔다와서 철들었다고 여겼었다. 허나 ‘철이들다’ 라는 표현이 사회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모습에 좀더 온순하게 따라오도록 진정한 나를 좀더 깊이 묻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인제 대학도 다시 왔으니 학점도 잘받고 해서 좋은데 취직해야지.. 누굴 위해서? 교수님께서 한주동안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올리고 수필로 써보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껏 진정한 스스로의 목소리에 한번도 귀기울여 보지 못하고 좀더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던 나의 삶 전체가 부끄럽게 느껴진다. 내가 과연 다시금 대학을 온 것은 내가 진정 원해서인가?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면 결국 원점에서 출발 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나는 ‘알아채기’가 자연스럽게 행해질 때도 스스로 모른 척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들 역시 그냥 사실로 두었으면 나에게 아무 영향이 없었을 것들도 나의 섣부른 사고로 계속해서 사냥개를 만들어 두려움을 늘려만 왔다. 그럴수록 더욱 불안에 시달리고, 또 이러한 불안감은 익숙해 지지도 않는다. 오늘 사소한 일에서 잠깐이나마 경험했던 ‘알아채기’로 인해 이런 불안감들을 하나 둘 떨쳐 낸다면 좀 더 진정한 자아의 이끌림에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교수님 말씀대로 이것은 나의 노력의 여부가 아니다.
자연스레.....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들도 사랑한다. 멋쩍어서 직접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사랑한다’ 고 말해본 적은 이제 껏 한번도 없지만 지금까지 내가 내 주위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항상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어제 강의 시간, 흔히 말하는 사랑 이라는 것은 모두 한낱 거래이며 각자의 필요에 따라 조건적으로 주고받는 행위일 뿐이다. 이 강의 내용을 처음 들었을 땐 태연히 수긍했고, 사실 예전부터 여러번 생각해봤었고 그렇다고 인정하고 있던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너는 진정한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봤느냐”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괴롭혀대면서 남을 사랑할수 있을거라 생각하느냐고 하시며 이제껏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여겨오던 것이 (어머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정말 절친한 친구와의 우정만은 나는 조건없는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왔다) 모두 내 착각이며 결국 거래라는 말씀에 적잖은 충격이 전해졌다.
다른건 몰라도 내가 어머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만은 정말 조건이 아닌 진심인데......계속 되뇌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런 갈등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결국 확신이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 만약 어머님이 어릴적부터 나를 애지중지하고 키운게 아니라 날 버렸었다면? 어머니가 만약 날 아들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이런 가설들이 내 머릿속에 난무한다. 내가 어떤 경우에라도 어머님을 진심으로 사랑할수 있을까? 결국 나의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머님이 이제 껏 날 길러주시고 아껴주신 것에 대한 보답, 즉 갚아야할 빚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어머니가 이만큼 고생해서 날 길렀는데 내가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며 나 스스로 기준점을 정하고 있지는 않았는가..사실 돌이켜 보면 어머님께 한번도 직접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 단지 쑥쓰러워 서였을까? 이성 즉 애인에게 그렇지 못한것은 내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진정 사랑함 없이 입으로만 시인하는 건 상대방 그리고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하지만 어머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생각해왔고 그것에 대한 추호의 의심 없이 살아왔었던 어머님께는 어째서 자연스레 “사랑해요 엄마”란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던것인가.. 난 정말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군생활 하며 다른 사람들이 애인 생각할 때 나는 어머님 생각을 했고 평소에도 늘 하루에도 몇 번씩 잘해드려야지 하고 다짐한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내 결심만큼 그렇게 썩 행복하게 해드린 것도 없다. 살갑게 대하지도 못하고 날 걱정해서 하시는 잔소리에 나는 짜증으로 답하며 당신께 상처가 될말도 내가 기억할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허나 나는, ‘내가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랬지..’ 라면서 잠깐동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앞으로 안그래야지’ 라며 가짜 수현은 늘 진정한 내 마음을 덮어 왔던 것이다.
사랑이 이성으로, 사고작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허나 나는 모순되게도 항상 그릇된 행동을 한 다음에 후회와 반성, 즉 ‘생각’으로만 사랑을 완성시키려 해왔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마음 먹은 만큼 어머님께 좋은 아들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마음먹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생각의 문제는 생각으로 풀 수 없다.. 단정지으려 애를 쓸 수록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후회만 남는다. 이성을 만남에 있어도 나는 내가 계산적이 되는 것이 혐오스러워 연애를 꺼린 면도 있고, 혹 가끔 사귐을 갖더라도 어느정도 선을 유지하려 애써 왔다. 이런 생각으로, 논리적이지도 않은 논리로 가득찬 심리 상태로 무슨 사랑을 내가 할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을 진정 이해하고 사랑하며 바로 볼수 있을 때, 나는 후회. 다짐, 반성들의 반복을 버리고 복잡한 사고 작용을 넘어선 자연스러움으로.. 저절로 말하고 싶다. 사랑해요 엄마..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외치지만 실은 어느 정도의 울타리 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출처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언젠가 책을 읽다가 본 구절이다. 이 구절을 처음 접했을 당시는 심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자유라는 것은 타인으로부터의 구속, 억압으로만 생각 했었기 때문 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다른 이들의 압력에 의해 장애가 생긴다면 거기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허나 자신을 가두는 틀이 또 아예 없어져 버린다면 사람은 무얼 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끼고 혼자라는 생각에 불안감을 느낀다. 그럼 결국 주위로부터 관계가 간섭과 억압이 되든 완전 멀어져서 외로움과 불안감이되든, 여하튼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교수님을 통해 크리슈나무르티를 접하고 난 후 나 자신의 자유에 대한 관점이 달라짐을 느꼇다. 앞서 나는 자유, 사랑, 고통 이러한 것들의 원인과 형태를 모두 나를 둘러싼 외적인 요인에서만 찾아왔기 때문에 나와 관계하는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 시달려 왔었다.
한주 한주 강의를 들으며 또 알아채기를 시도해 가면서 점점 내 시선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돌아옴을 깨달았다. 사실 우리는 경제적 여건, 혹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적 기대치,등등 외부 환경의 사실들, 이 사실들을 계속해서 생각 함으로 말미암아 돈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등이 발생되고 이러한 집착들은 왜곡된 자아로 사냥개가 되어 ‘삶은 고통이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를 괴롭힌다. 그렇다면 가령 이런 외부 요인들이 ‘생각’ 만큼 충족된다한들 진정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한다면 이런 것들은 금방 또 다시 과거가 되어버린다. ‘과거의 축적이 기억이니, 그 기억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과거와 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상 다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돌 도끼 대신 활. 활 대신 권총. 권총 대신 원자탄을 만들어 내어 왔는데 달라진게 있느냐’ 이 말처럼 결국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의 노력은 공허한 챗바퀴 놀음으로 세상을 점점 황폐하고 각박하게만 만들 뿐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이 진정 추구해야 할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들을 향해 지쳐 쓰러져가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간다. 돈, 명예 이런 것들은 상대적 가치일뿐이다. 결국 타인과의 비교우위를 점했을 때 만족감을 느끼고 이런 만족감은 늘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상대적 열등감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사람들끼리의 경쟁 상태를 조성하게 되고 서로가 진실한 사랑없이 자신에게 돌아올 상대적 손익에만 골몰하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사회적 가치를 얻었을 지언정 돌아오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지켜야할 짐이 늘어난 것이요 그 결과 즉 과거에만 더 매달리게 된다. 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안좋은 경우에 대한 불안감 역시 가중 된다. 자신을 좀 더 견고한 감옥으로 가두게 되는 것이다.
허나 생각보다 이러한 집착들을, 내가 이제껏 추구 해왔고 애써왔던 것들을 단순한 집착으로, 또한 과거로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머리로는 인지가 서서히 되고 있지만 내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 바꾸어 버릴만큼의 무언가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 계기는 교수님과의 만남,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이다. 이제는 나에게 달라 붙어있는 집착들로부터 해갈 되고 자유로운 상태. 모든 것을 ‘생각’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도록 나의 수업은 계속 된다.
#5
I am the world, the world is me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분 지을려 할 때 흔히들 ‘이성’을 내세운다. 항상 ‘이성’이라는 복잡한 사고 작용을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른 행동의 결과를 나름대로 계산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려고 애쓴다. 그 이성의 학문적 형태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며 인류는 이 과학을 통해 소위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다. 허나 과학을 통해 편리해질 것이라고만 믿었던 것이 환경 오염, 인간 소외 등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한계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이성의 한계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또 하나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종교이다. 허나 이 종교들도 결국 집단 속에서의 편가름으로 인한 일시적 안정에 지나는 경우가 허다하고 결국 같은 믿음을 지닌 자들끼리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분열되어 싸우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대의 ‘지성인’ 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진정한 종교인일까? 아니면 가장 이성적이고 박식한 지식인일까?
누구나 그렇듯 나도 ‘지성인’을 동경한다. 어릴때에는 단지 박식한 사람. 뭐든 척척 알고 어떤 일이든 잘 해내는 사람이 정말 ‘지성인’이라고 생각해왔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개혁자’ 들,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 보고 이를 투쟁이나 계몽 등의 형태로 바로 잡으러 애쓰는 이들이 ‘지성인’ 이라고 믿었다. 허나 역사속에서 이런 개혁자들이 자신이 권력자의 위치가 됐을때에는 과거 자신이 몰아냈던 이들과 결국 같아지는 모습을 보고 실망스럽기도 하였다. 그렇면서 역사는 결국 집권과 집권의 장기화로 인한 부패 그리고 개혁 이것의 반복이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렇다면 이 개혁자들이 어째서 내가 동경했던 제대로 된 지성인의 모습이 아니라 높은 위치임에도 근시안적 행동으로 폭력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만든 것일까?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강의를 듣게된 후, ‘이들도 사냥개에 쫓기고 있는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들도 결국 그나마 순수했던 시절의 열정이 자신이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 즉 그들이 책임져야 할, 그리고 지켜야 할 것들에 치중하느라 급급해서 진정 자아를 찾는데는 소홀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된 지성이 발휘가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자유, 지성을 잃어 버린 상태에서 백성을 사랑할수 있겠는가? 허나 갈수록 그나마 이런 불완전한 개혁자들 마저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인류가 존재하면서 점점 더 커진 부패한 여러 가치와 속박들이 개개인을 점점 움츠러 들게 하고 모두가 다 겉따라 사는 인생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이제껏 사회가 만들어 놓은 나의 인생을 따라가느라 정신없어 점점 나를 잃어 가고 있었으며, 동경하던 ‘지성인’ 과는 거리가 멀며 내 안위를 보장해 줄, 열정이 없는 상태에서 마지못해 습득하고 있는 ‘짧은 지식’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삐뚤어진 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 하고 넘어갈수 있는, 좀 더 비겁해질 수 있는 ‘훈련’을 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용기와 열정 따위는 사라진 내 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진짜 나의 자아를 좀 더 깊은 곳으로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성은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수 있는 관심, 아니 관심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비겁한 모습을 솔직히 볼수 있는 ‘용기’ 가 아닐까 생각 된다. 이렇게 자신의 사냥개를 던져 버리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야만 이 세상도 바로 보일수 있을 것 같다. ‘I am the world, the world is me' 이말은 결국 제대로 된 개인이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뜻 아닐까...
나는 오늘도 중간 고사에 대한 부담감과 기타 금전적 문제 등 여러 가지 나를 압박하는 요소들에 시달리며 편안히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이렇게 자기 전에 문득 오늘 시험을 만족스럽게 치르지 못한 것, 이미 지나버린 친구와의 말다툼 같은 과거의 사실의 생각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물론 이제까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계속해서 존재해 왔던 짐들이고 그 짐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거워지고 다양하게 나를 괴롭혀왔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제약하고 조건 짓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고 나 자신을 찾아갈 상태가 조금씩 이루어질 것 같다. Freedom from the known.. 사실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이 책에서 크리슈나 무르티는 구체적인 자신의 경험담이나, 깨달음과 자유를 얻기위한 ‘방법’ 같은 것은 제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여 자신의 관념을 남에게 이식시키고 따르게 만든다면 이는 그들에게 또 하나의 제약이되는 ‘틀’을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코 많은 내용은 아니지만 ‘awareness’하는 이들은 많은 변화를 가질 수 있도록 개개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할수 있다.
누구나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목적’에 대해 돌이켜 볼 때가 있다.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개개인의 조건과 상황에 맞춰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진정 자신이 갈망하는 인생을 주위에 구애받지 않고 살고 있다고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세기를 거치며 교육되어 오고 축적된 결과물이다. 선이나 악을 구분짓는 가치관 그리고 세상에 의해 만들어지고 규정지어진 행복을 좇아 세상 사람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괴로워하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후세에도 되풀이 된다. 나이를 들어가며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전통적인 접근 방법을 좀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아닌가. 이런 전통적 접근 방법이란 외재적 가치인 한정적인 물질적 요소들에 치중하는 것이고 이는 주위 사람들을 친구 이자 적으로 만드는 추악한 경쟁사회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통 즉 과거를 과감하게 부정하고 자유로운 현재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지식을 많이 쌓아 모든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야 하는가? 지식이란 것은 과거의 축적된 결과물이요 이도 결국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 자신을 이해함이 필요하다. Understanding is not intellectual process.
이해함이란 지적인 사고 작용이 아니다. 자신을 이해함은 학습이나 분석이라기보다 우선 자유롭고 겸손한 상태에서의 자아성찰이다. 이런 이해함은 자유와 하나이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챔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과거에 메여 사냥개에 쫓겨 다니는 자신의 상태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주위와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한다. 나 역시 상대적 기준, 사회속에서 나의 위치, 내가 속한 집단 등의 외적인 요소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부여했고 언제나 상대적으로 우월해지려고 애쓰게 된다. 이런 개인의 마인드가 집단 간의 상대적 경쟁으로 이어지고 결국 편가르기,폭력도 이와 관련있는 부분이라 할수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결국 defencive mechanism( 방어적 메카니즘 ),그리고image-forming(이미지 형성)에 근거하고 있다. 자신과 관계하는 타인,이 역시 진정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속에서의 다른 사람 즉, 자신이 필요로 하는 부분과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타인의 이미지와 관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속에서는 물론 진정한 사랑도 있을수는 없을 것이다. 집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하고 안전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의 집단의 이득을 위해 혹은 ‘자신의 편가르기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타집단에 대하여 폭력적이 된다. 여기서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폭력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슈나 무르티는 자신을 인도사람, 혹은 영국사람으로 부르는 것 조차도 폭력이라 말한다. 자신을 타집단과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결국 폭력을 키운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 나라는 정말 편가르기 문화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기 가족, 자신의 학교, 지역, 심지어 경제적 정도까지 들먹이며 어떻게 해서든 공통 분모를 찾아내어 집단을 구성하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가 점점 많아지면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이 결국 더 많은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런 편가르기에서 주동적인 사람이나 소외되는 사람이나 모두 외부와의 관계가 아닌 평온한 관조에 의한 자아성찰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공포, 그리고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폭력으로 분출 된다. 사회가 복잡화 될 수록 사람들의 관계도 점점 복잡해져가고 자신을 제외한 타인의 이미지도 점점 부분적이고 인간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폭력의 형태 역시 점점 교묘하고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압박해온다.
그렇다면 외부와의 관계에서가 아닌 자신을 알아채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attention' 즉 주의를 기울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서 attention 과 concentration을 동일시 여겨서는 안된다. 'Concentration is exclusion' 집중이란 말은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해 다른 모든 상황을 배제하고 목적한 그것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행위이지만 ‘attention’은 제외함이 없는 ‘total awareness’라 할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주의 상태를 뱀과 한방에 같이 있는 것 같은 상태로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민감하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알아채기 속에서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한순간에 드러난다.허나 우리를 이러한 주의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은 ‘생각’ 이다. 생각은 물질적인 것이다. 생각은 쾌락과 고통, 공포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원리이고 이는 과거에 메여서 살게되는 원인이 된다. 생각이란 기억으로부터 오고 과거에 묶여서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의 과거란 말은 연대적 순서의 과거라기보다 심리적인 지나간 시간을 뜻한다. interval between idea and action 행동과 생각 사이의 간격, 행동은 언제나 현재이지만 그 사이에 생각이 들어가게 되면 이것이 또 걱정거리, 혹은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사냥개가 되어 행동에 조건과 제약을 덧 붙이게 되고 우리를 과거에 머무르게 하는 이유가 된다. 나의 어릴적 꿈은 무인도에 가서 사는 것 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정말로 바닷가나, 산 같은 자연에 있는 것이 가장 행복했었다.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거나 산에서 동물들을 보는게 신기하고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허나 내가 지금 무인도에 간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관계하고 지금껏 해 왔던 생활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고 소위 말하는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이런 저런 생각들로 무인도 생활을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과거가 점점 늘어갈수록 행복의 범위는 좁아지고 제약과 조건은 늘어난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과거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자신을 알아챌 기회를 줄여가게하는 것이다. 그러다면 언제나 갈망하는‘자유’는 말뿐인 것이 되고 만다.
Freedom is state of mind - not freedom from something but a sense of freedom.
a freedom to doubt and question everything and therefore so intense, active and vigorous that it throws away every form of dependence, slavery, comformity and acceptance. Such a freedom implies bring completely alone.
자유는 어떤 것으로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자유는 온전히 혼자, 즉 관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이다. 인간 관계 그리고 사회속에서의 위치등에서의 관계에서 자유를 찾는 것은 다른 속박을 다시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온전한 주의 상태에서의 알아채기를 통한 고독(solitude)한 상태가 자유이다.여기서‘solitude’와 isolatio‘과는 차이점이 있다. ’isolation‘이란 주위로 부터의 고립, 즉 외부와의 관계에서의 홀로 떨어짐을 일컫고 ’solitude‘란 말은 스스로 자유로운 상태이다. 고립된 사람은 인류가 쌓아온 허울들을 좇으며 괴로워하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어 외부와의 단절로 도피하는 사람이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우울증이나 이로 인한 자살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은 사회가 점점 더 많은 과거를 지니게되고 복잡화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진정 자유로운 고독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에 있어서도 참다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언제나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화두이자 세상을 그나마 온기를 띌 수 있게 해주는 이 사랑도 조건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변질 되어 사랑을 운운하는 것들은 어딜가나 범람하지만 쾌락과 집착이 사랑으로 오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기 자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불행한 자신을 이해받고 위로 받으려 애쓰는것에 불과 하다. 상호간에 이런 관계속에서 조건적으로 필요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되려 사냥개만 몇 마리 더 늘리게 된다. 가족간에 대한, 연인에 대한, 나라에 대한, 인류에 대한 사랑이라 명명된 행동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 가면서 자기 만족의 형태나 심지어 보여주기 식으로 까지 행해지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 혼란스런 세계에 혼자 남겨져 있으며 스스로를 억지로 어딘가에 소속시키려거나 아니면 도피하여 고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관계들로부터 그리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수 있을때 세상 어떤것이라도 격렬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유와 사랑 그리고 진정한 앎이 모두 동일한 상태에서의 표출 방식인 것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과거들과 외부 환경들에 대한 용기있는 부정과 온전한 주의상태로 인한 끊임없는 알아채기로 나 자신을 찾을 때 참지성을 추구 할수 있고, 아름다운 고독을 만끽할수 있는 자유를 찾게 되고 세상 모든 것을 격렬히 사랑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I will try, I will think about it이 아니다. 하거나 안하거나 둘중 하나이다. 망설이거나 결심하는 과정을 거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날 위해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It rained last night heavily. and now the skies are beginning to clear; it is a new fresh day. Let us meet that fresh day as if it were the only day. Let us start on our journey together with all the remembrance of yesterday left behind - and begin to understand ourselves for the first time.
지난 밤에는 폭우가 내렸고, 지금은 하늘이 개이고 있다. 새롭고 신선한 오늘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날을 하루뿐인 것처럼 만나자. 어제의 기억들은 모두 남겨두고 함께 여행을 떠나자. 그리고 먼저 자기 자신을 이해함부터 시작하자!!
나는 언제나 걱정거리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 넌 매사에 그렇게 부정적이냐” 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항상 어떤 행동을 행함에 있어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하려 애쓴다. 물론 그 가정 속에는 최악의 상황이나 안좋은 결과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허나 나는 친구들에게 핀잔을 들을 때마다 비관적이 아니라 신중한거라 반박한다.
오늘 강의에서 ‘혹시나로 시작해서 역시나로 끝나는 인생‘ 이란 문장을 듣자 마자 딱 내이야기라 여겨졌다. 물론 나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주로 지금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곱씹으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걱정으로 특히 내 또래의 젊은이들에게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고통스러워 한다. 그렇다. 내가 내 모습을 최대한 제 3자의 입장으로 보았더니 정말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다. ’영어 성적 하루 빨리 못 올리면 졸업할 때 아무데도 안 받아주는데‘ ’어떻게 해야 좋은 직장을 얻을까‘ 따위의 걱정들로 한시도 평정을 찾을 때가 없다. 선생님은 과거에 기억을 강조하셨다. 물론 과거 역시 좋은 기억은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대부분 어린 시절의 상처가 지금 성품이나 행동 성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거나 과거의 실수를 되새기며 반성이라는 명목으로 현재의 나를 감추고 앞으로의 나부터 짜맞춰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허나 사실 나는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고 느껴서인지 과거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중압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은 스트레스라고 한다. 스트레스란 무엇이겠는가? ’오전에 직장 상사에게 욕얻어먹었더니 오늘 하루종일 열받네‘’이번 시험 낙방하면 부모님 어떻게 보지‘ 등의 과거의 사실이나 미래에 대한 가정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나를 비롯한 모든이들이 이것을 알아채고 생각이라는 족쇄를 걷어버린다면 현대인 (이것도 사실 맞지 않는 표현인거 같다. 과거에 묶인’과거인‘혹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준비로 정신이 없는 ’미래인‘ 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수도 있다) 에게 스트레스라는 골칫덩이가 달아나 버릴 것이다. 그럼 내가 이런 생각 덩어리들에서 해방되어있는 순간은 언제일까?
선생님이 어린 시절 꿈이 화가였다는 수강생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진정 하고싶은 것을 잊고 살지는 않냐고 물으셨을 때 사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좋아했는지조차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있다가 이틀 후 잠들기 전(잠들기 전이 가장 알아채기에 좋은 시간인거 같다) 내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다가 불현듯 내 어릴적 꿈이 음악가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정말 거의 10년을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국민학교 때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은 잘하지 않는 피아노를 내 의지로 5년 가까이 치고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리코더를 혼자 연습해서 선생님 눈에 띄어 부산시 대회에서 1등했던 것도 생각났다. 그리고 친척분들께서 출장 갔다가 내가 악기 다루는 것 좋아하는 것을 알고 희귀한 악기들을 사서 나에게 주면 굉장히 기뻐하며 그 악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혼자서 언제까지고 연습하던 기억이 물밀 듯 떠올랐다. 주말에 어버이날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집에 갔을 때, 집을 막 뒤져보았더니 어릴 때 내가 모았던 악기들이 그래로 있었다. 지난 밤에 미처 기억못했던 더 다양한 악기들이 있었다. 야자수 속을 깎아서 만든 악기, 흙을 구워 도자기처럼 만든 오카리나. 그리고 무려 7개나 되는 리코더(리코더도 알토 소프라노 테너 등 음에 따라 크기가 틀림), 단소 등등 한 무더기를 어머님이 버리고 않고 보관해 두셨었다. 오랜만에 몇시간 동안 연주해보니 어린 시절 내가 정말 좋아서 연습하던 그때 그 느낌이 어렴풋 다시 느껴졌다. 이처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내 열정으로 할때는 그게 어린애이건 노인이건 진정으로 노력이 아닌 즐거움으로 파고들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하는 사람이 환경에 맞춰 노력으로 하는 사람보다 실력도 훨씬 출중하게 된다. 이 악기들을 만지며 어릴 적 플룻도 배워 보겠다고 어머니 친구 댁에 가자고 조르던 내가, 그리고 단소 처음 불 때 소리가 잘 안나 계속 연습하다가 산소 부족으로 현기증까지 났던 어릴적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혼자 바보처럼 히죽거리면서 웃었다. 나는 주로 관악기를 좋아했었다. 헌데 왜 내가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일찌감치 접었을까.. 돌이켜보니 주위에서 나보고 극구만류 했던 것도 아니다. 어릴적 나로 돌아가보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진학하던 시절 즈음에, 음악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성공하는 이들도 소수라는 등의 사실들에 이미 스스로 내 꿈을 접고 남들하는 공부에 따라가기로 결심해 버렸다.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교육제도 자체가 완전 잘못 됬다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정말 잘못되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미 주위의 정해놓은 틀에 어쩔 수 없이 맞춰갈 수 밖게 없게 되었다. 이미 어릴적부터 생각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나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극소수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그럼 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살아갈까. 사회가 정해놓은 가치에 자신의 꿈이 부합하는 경우가 드물고 결국 이런 정해진 틀을 따라가지 않았을 경우에 금전적이거나 다른 여러 문제들에 대한 걱정으로 주위의 압력으로 혹은 스스로(물론 근본적으로는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다) 미리부터 포기하고 자신의 열정을 일찌감치 눌러 버린다.이같은 똑같이 정해놓은 메커니즘에 모두가 맞춰가면서 행복과는 멀어져 간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이다. 답없는 노력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반성이라는 허울에 감춰진 자기 학대로 자신의 인생을 질질 끌고 나아간다. 이렇게 살아온 이들의 기억이란 곧 상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도 희망찬 미래가 아니라 불안감으로 우리를 잠 못 이루게 만든다. 나는 이제 종종 집에 내려가면 내 악기를 연주해 보면서 진정 기분 좋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한가지 하숙집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될까봐 못 가지고 오는게 아쉽기는 하다.
요즘 뉴스에서 자살, 우울증 같은 문제들이 자주 등장한다. 굳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던지‘우울증’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씩 안고 사는거 같다. 이런 심리적 고통은 생각들로부터 비롯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는 점점 더 나를 옥죄고 뚜렷한 결론 없이 신세 한탄내지는 자괴감에 빠져들게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물리적인 거리가 타인들과 멀어져 있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군중 속에 있더라도 그들과 정신적 교감없이 기계적인 관계를 가지고만 있는 상태라면 여럿이 몰려 다니더라도 외로움이나 무언가의 결핍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생각은 과거를 살게 하는 주 원인이다. 어떤 사실을 접했을때 생각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는 이미 본질을 소외시키고 그로 인해 발생될 가능성에 대한 조바심이나 두려움 혹은 이미 지나버린 일에 대한 계속되는 기억으로 인한 고통이 우리의 정신을 점점 더 황폐화 하고 이런 황폐한 인격을 가진 우리들이 모여 사는 이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은 우리의 삶에 또한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지만 이는 instrument로써의 필요성이지 이것에 의존해서 우리 삶을 이끄는 지표가 되어버려서는 안된다. 이를 활용할수 있는 단계, 즉 생각에 빠져버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선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씀을 빌리자면 we have to understand the structure of thought, memory and time. 먼저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인생을 고뇌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해는 머리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채기를 통해 생각의 개입이 없는 상태에서의 이해가 되어야 할것이다. 생각은 무엇을 occupy 하려는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점유 되어 버려서는 또 다시 생각의 족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사실 그렇다. 이 채워넣는다는 개념은 사람들은 상당히 좋아한다. 생각에 이끌려 살기 때문에 자연히 나오는 습성인 것 같다. 지식을 채워 넣으려 하고 돈을 채워 넣으려 하고 많은 인간 관계를 채워 넣으려 하며 빈 것을 불안해 한다.‘마음을 비운다’는 성인들의 말은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나는 내 마음이 잠시나마 빌 때가 있다. 바다를 떠올릴 때이다. 거의 20년을 바닷가에서 자라서 바다는 나에게 매우 친숙한 장소이다. 어릴 적에는 지금처럼 게임이나 컴퓨터가 없어서 항상 바닷가에서 헤엄도 치고 물고기나 게들을 잡으면서 놀았다. 그리고 조금 커서는 낚시를 다니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낚시를 하는 것이 고기를 잡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한 마리도 못잡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잡고 안잡고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낚시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냥 탁 트인 바다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으면 생각이 없다. 숙제할 걱정도 있고 엄마한테 혼났던 것도 잊는다. 말 그대로 그냥 나도 바다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정말 상쾌하다. 사람이나 책이나 tv 같은 것을 상대할 때는 생각이 개입하게 된다. 그 대상이 생각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자연과 함께 있으면 나도 자연에 동화가 된다. 선생님께서 학기 초에 자신의 부끄러웠던 모습에 대해 알아채기를 하라고 하셨을 때, 어린 시절을 돌아보다 해운대 바닷가 앞에 앉아있는 어린 나를 찾았다. 이것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다. 이 장면을 회상할 때는 정말 내가 다시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 눈을 감아도 눈 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행복을 느낀다. 부끄러웠던 기억을 떠올릴 때, 어릴적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어릴 적에는 그다지 부끄러운 기억이 없고 나이가 들수록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가 더해간다. 어릴수록 그나마 생각이 적었고 이 생각->기억 이라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잊혀진듯 하다가도 불현듯 혹은 내가 스스로 떠올려서 찾아와서 나를 괴롭힌다.
완전한 현재를 살아가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미 나를 메우고 있는 온갖 기억과 지식 생각들이 다양한 이유와 가능성을 늘어놓으며 나로 하여금 이를 떨치기 힘들게 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그나마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잠깐 채우는 것을 멈추는 수준이지 아직 이것을 비워내는 것은 잘 되질 않는다. 허나 나도 황폐한 삶을 살기는 너무 괴롭기 때문에 감히‘ 순 수’를 지향하려 한다. 사실들은 mind로 이해하기 보다 heart로 이해하고 생각을 도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게끔 순간 순간이나마 주의를 기울인다.
언제부터인가 웃음을 짓는 것이 어색하다. 거울을 보고 한번씩 씨익 웃어보면 왠지 어울리지 않고 안면근육이 점점 경직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가만히 하루를 되돌아보니, 이런!!..하루종일 한번도 웃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렇지... 최근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웃을 일이 별로 없어지고 웃는 것이 어떨 때는 노동이 될 때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혹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웃는 얼굴로 대하기란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항상 공부할때나 놀 때나 뭘 하든 항상 표정이 똑같냐? 무슨 tv의 정지화면을 보는거 같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얼굴에는 굉장히 많은 근육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 내가 사용하는 근육은 극소수였다. 난 감정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려 애쓰는 편이었고 너무 솔직히 감정을 표출하다가 예의없는 사람, 혹은 허술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이 싫었다. 그렇다보니 너무 경직된 표정으로 살았고 대신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억지 웃음을 짓는 것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정녕 인위적인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관계 속에만 있는 것일까. 사실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던지 혹은 유머나 tv의 코메디 프로를 볼 때면 반사적으로 웃는 경우는 물론 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거의 조건 반사에 가깝다. 만족감 혹은 행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엉뚱한, 그나마 이 갑갑한 가식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조그만 어긋남을 느꼈을 때 오는 어이없는 웃음, 혹은 조금은 통쾌한 웃음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웃음은 생명력이 짧고 잠깐의 위안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보기만 해도 생각만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관계, 이것은 내 자신의 사냥개에서 해방되어 있을 때,상대방 혹은 무언가를 이런 저런 생각을 하지 않고 대할수 있을때 오는 것 같다. 길을 가다가 귀여운 아기나 정신없이 뛰어 노는 꼬맹이들을 보면 이런 기분좋은 미소를 지을수 있다. 그들의 순수를 대하면 나 역시 잠시나마 순수에 동화됨을 느낄수 있다. 허나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의 관계에 있어서 규정 지어진 관계 속에서, 일정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부모님과 자식의 관계,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등등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학습된 모습대로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에 있어서 손익을 감안하여 관계를 맺게 된다. 애인이니 친구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아서인 경우는 거의 없다. 생각으로 고통 받고 갖가지 사회적 가치들을 쫓느라 지칠 대로 지쳐서 잠시나마의 위안거리로 찾는 것이다. 그래놓고 나는 이 여자를 진정 사랑한다고 그런 관계를 미화시키며 자위한다. 이런 관계들 속에서 정말 행복에 겨운 웃음을 지을 수는 없다.
요즘은 NQ(Network Quetient)가 중요한 시대라고 한다. 네트워크 지수 즉 인간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보력은 결국 인맥에서 나오고 이는 자신의 경쟁력이란 소리다. 허나 여기서의 수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사회가 바라는 결과물을 창출하는데는 되도록 많은 관계를 맺는 것이 용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기계적이고 복잡한 관계들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더 많은 생각거리를 만들고 관계 속에의 자신만을 만들려 하다 진짜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여 정체성에 혼돈만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먼저 많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깨끗이 하고 문자 그대로 사심없이 타인을 대할 때 진정 사랑으로 모두를 대할 수 있을것이다.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이다.
첫댓글 Freedom from the Known 감상문, 정말 인상적입니다. 정말 잘 정리되어 있고 중요한 점들이 부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깨달음'으로 가는 심리적 추이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정도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