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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INTRO)
속지주의의 원칙에 따라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의 미사를 봉헌해야 하지만, 우리 루르 한인 성당은 독일에 거주하는 언어공동체, 즉 속지屬地가 아니라 모국어라는 언어 때문에 신앙공동체를 이룬 속인적屬人的 공동체이기에, 천주교 부산교구 교구장의 ‘교우들의 신심과 사목적인 효과를 증진하기 위해 오늘 주일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미사로 봉헌하라.’ 사목지침에 의거해 오늘 미사를 김대건 사제 순교자 미사로 봉헌합니다.
이미 7세기, 영국 귀족 보니파시오에 의해 가톨릭이 전파된 이곳 독일의 천주교회사와는 비길 수 없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선교사에 의하지 않고 자국민 스스로 진리의 빛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써 신앙을 지켜낸 교회라는 자부심만큼은 독일 땅에서 신앙하는 한국인 신자로서 마땅히 지녀야할 정신이자 자세라 하겠습니다.
그냥 신앙하지 않습니다. 죽을 각오로 했습니다. 믿음에 있어 간절함이 사라지면 신앙도 한낱 취미생활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죽을 각오로 기도하고 죽을 각오로 성체를 영하던 사람들,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맞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신앙의 자리를 돌아보게 됩니다. 잠시 침묵으로 이 미사를 준비합시다.
(강론)
<최선과 차선>
지난 10월이던가 부모님이 방문하셨을 때, 평소 혈압이 높으신 아버님께서 불안하셨는지 ‘혈압 재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신자분께 부탁해 전해드렸더니 쓸 줄을 모르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르쳐드리겠다고, “아버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하고는 제 팔에 먼저 혈압 압박기를 차고는 시범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런데 혈압계의 수치가 180-130이 나온 것입니다. 뭐 ‘혈압 때문에 죽겠다 죽겠다!’ 하시던 아버님은 정상이고, 새파란 아들 혈압이 180-130이 나왔으니 놀랠 수 밖에요. 그래서 올 초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한국엘 갔습니다.
물론 한국 병원에서는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못 먹을 정도의 약만 잔뜩 주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했지요. 혈압약을 입에 대기 시작하면 평생을 먹어야 한다는데 내가 벌써 이걸 먹어야 하나? 자고로 병은 소문내라 했다고, 흰쌀밥 먹지 말고 현미를 먹으라는 사람도 있고, 양파 껍질이 좋다고 우려내 먹으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신자는 피를 맑게 해주는 약도 가져다 주십니다. 이러니 신부들이 오래 사는구나!
감사한 마음으로 스트레스도 피하고 어지간하면 화 안내고 열 안 받으려고 하니 그럭저럭 혈압이 진정은 되는데, 결정적으로 의사가 하는 말이 ‘그렇게 약 먹기 싫으면 반드시 운동을 하라!’ 하십니다.
사실 신학교 다닐 때야 이것저것 운동했지만 신부되고 나서 특별한 운동이 뭐 있겠습니까? 마침 뮨스터 신부님들이 테니스를 하시길래 저도 좀 가르쳐 달라해서 난생 처음 운동다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하는 조깅이니 헬스는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 못하겠던데 함께 하는 운동인 테니스는 재미가 있습디다. 그 재미에 슬슬 빠지게 된 것입니다.
쉬는 날은 하루 종일 테니스만 하는 날도 있습니다. 책상에 앉아도 테니스 동영상만 보게 되고, 어떻게 하면 뮨스터 신부님들을 한 번이라고 이길 수 있을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1년 꼬박 연습했는데도 운동이라는 것이 참 안 늘더만요,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여엉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골이 나서 더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자다가도 신부님들이 ‘테니스 치자!’하면 벌떡 일어나 앉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건 운동이 아니라 병이다, 병!” 혈압 때문에 시작한 취미생활인 테니스가 어느덧 취미를 넘어 죽기 살기로 하려고 덤비니 이건 아니다!
내가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것은 취미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죽기 살기로 해도 모자랄 판에 젊은 신부가 건강 어쩌구하며 테니스 라켓을 하루 종일 놓을 줄 모르니, 이 나이에 무슨 선수 생활 할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다! 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적절하기가 어렵습니다. 적당히, 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게! 무엇을 한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중용이라는 동양 고전의 미덕을 익히며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나서지도 말고 쳐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고 바람 불면 숙이고 돌아가라 배웠습니다. 튀지 않아야 하고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고, 좋은 게 좋은 거다, 두루뭉수리하게 사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대단히 중용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중용이 아니라,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분자 인생들만 양산할 뿐입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처신하고 또 저럴 때는 저렇게 처신합니다. 그건 중용이 아니지요. 선과 악의 문제에는 중용이 없습니다!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일 뿐입니다. 최선과 차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무엇이 최선이어야 하고 무엇이 차선이어야 함이 명확해야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인생이 뭐 있느냐!” 합니다. 아닙니다! 인생에는 뭐가 있습니다! 아니, 인생에는 뭐가 있어야 합니다. 최선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좋은 것, 차선이 있습니다. 최선이 사라지면 아류만 넘쳐나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생각할 적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열여섯에 한국인 최초의 서양문물 유학생이 되셨습니다. 그 나이에 부모를 떠나 외국을 전전하며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집을 떠난지 6년 만에 중국 요동 땅에서 부모의 소식을 듣습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아들을 외국으로 보냈다하여 참수, 이미 3년전에 목이 떨어지셨고 어머니는 교우들 집을 전전하는 거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보면 김대건은 처음부터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신자이기 이전에 사대부의 유교적 질서 속에 자라왔습니다. 그에게 최선은 孝와 忠이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 이것이 최선이었고, 그 최선을 살기 위해서라면 그는 스물 둘에 그냥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죄를 갚고 어머니를 찾아 봉양해야 했습니다.
제 아무리 어린 나이에 떠났다 할지라도 그에게 어이하여 육정이 없고 그리움이 없고 죄책감이 없었겠습니까? 그랬던 김대건 신부님이 9년의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되어 정작 조선에서 사목한 시간은 8개월에 불과합니다. 사학의 수괴라는 죄명으로 칼을 받아 새남터에서 목이 잘리기 전 그는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작별의 편지를 하면 이렇게 적습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어머니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들을 보지 못하다가 며칠 동안 단 한 차례 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아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슬퍼하실 어머니를 부디 위로하여 주십시오.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제 아무리 하느님 때문에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다할지라도 그 또한 엄연한 아들이고 자식이었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마땅한 도리를 해야 함이 최선이었으나, 김대건 신부에게는 한 차원 더 높은 최선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천주이신 하느님께 공과 경을 다하는 것, 肉을 지음하시고 靈을 처리하실 그분께 충과 효를 다하는 것이 이승의 부모를 욕되게 않는 것이요, 저승의 부모가 바라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높아도 하느님보다 높을 수가 없고 육정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죽음 앞에서면 이별해야 합니다. 그 모두를 주관하시는 분만이 최선이시요, 나머지는 아무리 중차대해보여도 차선이라 믿었습니다. 최선을 취하면 나머지는 작아집니다. 최고를 가졌는데 나머지가 눈에 들어올리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모든 죽음은 이것을 증언해줍니다.
한국 순교자들의 숫자가 정확친 않습니다만, 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20,000의 숫자를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만 20,000이라는 소립니다. 그 20,000이 떠돌이 고아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부모가 있었고 자녀가 있었고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모질고 독했으면 부모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자녀까지 버릴 수 있었을까?
단지 신앙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문중에서 파문당하고 가족 전체가 노비로 전락하거나 귀향과 가산몰수, 그리고 성폭행과 고문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신앙이 그들의 현실을 바꿔낸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 때문에 그들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굴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여기에 최선과 차선이 있습니다. 당대의 가치가 악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부모를 모시는 것은 좋은 일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최고선의 가치가 있으니, 그것은 임금과 부모를 지음하시고 일으키신 생명의 본 주인을 알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 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孝를 버리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사람들은 무엇이 최선이요, 무엇이 차선인지를 분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면 임금을 배반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모시면 부모를 버리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숱한 순교자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선과 차선 때문에 아무도 우리에게 칼을 겨누지도 않고 위협하지도 않으며 구속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하느님을 최선으로, 세상을 차선으로 분명히 구분 짓고 사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자유로운 세월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영성체도 하지 못하고도, 최선을 위해 목숨마저도 차선으로 치부할 줄 알았던 순교자의 후예들인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최선을 명확히 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신앙인라면 그에게 하느님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교자들의 후손이라 불리는 한국인 신자들의 도리입니다.
여러분!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면 죽기 살기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차선은 많습니다. 건강도 차선이고, 명예도 차선이고, 돈도, 취미와 여가 모두 차선입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재미를 위해서는 죽기 살기로 뭣도 그리 많이 합니다. 학위를 따고 명예를 얻고 돈을 얻기 위해서도 죽기 살기로 합니다. 죽기 살기로 해야 할 것이 과연 그런 것일까? 아닙니다. 내 인생에 하느님이라는 최선이 먼저 분명해지도록 세우십시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을 하십시오! 이것이 오늘날의 순교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최선이 내 인생 안에 명확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꾸만 다른 것을 찾아 나서게 되어있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 그러고 의미 없다 그럽니다. 하느님이 내 인생의 최선이 되기까지 허무할 새가 어디있고 의미가 있네 없네, 하네 마네, 따질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팔자가 편하니 간절함이 없고, 배가 부르니 어만 것들로 싸우고 다투고 고통이네 마네합니다. 하기사 새파랗게 젊은 신부도 죽기 살기로 신앙생활할 생각은 않고 건강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겨우 제 목숨 반토막 산 선배 신부님의 발가락만큼도 못 따라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죽기 살기로 테니스를 치지 않을랍니다. 죽기 살기로 해야 할 것은 신앙생활이지, 취미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기 살기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최선이게 합시다. 나머지 것들은 차선으로 해나갑시다.
오늘 우리 성당에 새로운 신자가 오셨습니다. 이분들이 성당 신자들, 여러분들에게 “당신들은 뭤하는 사람이요?” 묻는다면, “우리는 그저 하느님 모시는 일을 최선으로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대답하실 수만 있다면, 오늘 독일 땅에서 봉헌하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후예들로서 부족함이 없다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