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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이씨 공도공파 명겸(鳴謙 23世)반야월 문중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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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이씨의 세계(世系)와 열전(列傳) 택당(澤堂) 이식(李植) 지음 덕수현(德水縣)은 본래 고구려의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仁物))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덕수(德水)로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경기도에 속하여 해풍현(海豊縣)을 합하여 풍덕군(豊德郡)이 되었다. (개성부(開城府)와 접경하고 서울(漢京)과의 거리가 일백 칠십 구 리(里)이다.) 덕수현(德水縣)에 이씨(李氏)가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였으나 선대(先代)로부터 전하여 오는 보첩(譜牒)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나의 고조(高祖)이신 용재(容齋)(곧 이행(李荇)선생이 손수 초(草)하신 세계(世系)와 연보(年譜)에는 추밀공(樞密公) 양준(陽俊)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출처(出處)가 뚜렷하지 않으며, 율곡(栗谷) 선생댁에 전해오는 세계(世系)에는 중랑장(中郞將) 돈수(敦守)를 시조(始祖)로 하고 추밀공(樞密公)은 그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양천허씨(陽川許氏)와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족보에도 같은 내용이다.) 이제 율곡 선생댁에 전하는 세계에 근거하여 중랑장(中郞將)을 시조로 삼아서 세계도(世界圖)를 작성하는데 용재(容齋) 할아버지께서 손수 초(草)하신 연보(年譜)에 의거(依據)하여 추밀공(樞密公)으로부터 열전(列傳)을 만든다. (벼슬 이름을 첫머리에 써 넣을 때 혹은 증직(贈職)을 쓰거나 그대로 원직(元職)만을 쓴 것도 있으니 모두 선대(先代)로부터 호칭(號稱)한 것이고 지금 고친 것은 아니다.) 〔《고려사》(高麗史)의 조충전(趙沖傳)을 살펴보면, 고종(高宗) 4년(1217년) 거란(契丹)이 침입해 왔을 때 조중(趙沖)이 원수(元帥)가 되어 성천(成川, 평안남도 소재)에 이르러 각 도(道)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 按察使) 이적(李勣)이 병사를 이끌고 오다가 적(敵)을 만나서 전진(前進)하지 못하자 장군(將軍) 이돈수(李敦守)와 김계봉(金季鳳)을 파견(派遣)하여 이들 적군을 치고 이적(李勣)을 맞이하려 했으나 적군은 이미 두 길로 나뉘어서 곧바로 우리 중군(中軍)을 공격(攻擊)해 왔다. 이에 아군이 좌우익진(左右翼陣)을 펴서 북을 울리며 전진하니 적군은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서 도망갔으므로 돈수(敦守)등은 이적(李勣)과 만났다고 한다. 중랑장(中郞將)의 생몰년(生沒年)이나 관직(官職)을 지낸 경력(經歷) 등은 모두 고증(考證)할 만한 자료(資料)가 없으나, 추밀공(樞密公)이 중랑장(中郞將)의 아들로서 고종(高宗) 4년에 연령 16세가 되었으니 중랑장(中郞將)의 연령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유명(有名)한 인물로서 같은 성명(姓名)을 가진 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조충(趙沖)을 따라서 거란(契丹)군을 토벌(討伐)하고 중랑장(中郞將)이 된 사실은 의심(疑心)할 바가 없기에 이에 덧붙여 둔다.〕 세계(世系)와 열전(列傳) 제사(題辭)의 서로 다름을 고증(考證)함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지음 돌아가신 아버님(곧 이식(李植))께서 말년에 우리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종계분파도(宗系分派圖)를 만들고 또한 세계(世系)와 열전(列傳)을 손수 초(草)하시고는 그 제사(題辭:책의 첫머리에 적는 글)에 이렇게 적으셨다.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오는 보첩(譜牒)이 조금씩 다르다. 나의 고조부(高祖父)이신 용재(容齋,이행(李荇))선생이 손수 작성한 세계 연보(世系 年譜)에는 추밀공(樞密公) 양준(陽俊)을 시조(始祖)로 삼았으나 그 출처(出處)는 밝히지 않았으나, 율곡(栗谷) 선생댁에 전하는 세계(世系)에는 중랑장(中郞將) 돈수(敦守)를 시조(始祖)로 삼고, 추밀공(樞密公)은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충무공댁(忠武公宅)에 전하는 세계(世系)에는 신라(新羅) 사람 이허겸(李 許謙)의 후예라고 했으나, 그 중간의 세계(世系)는 밝히지 않은 채 또한 추밀공(樞密公)을 시조(始祖)로 삼았다. 대개 우리 나라의 이씨(李氏)는 신라(新羅) 6부(六部)에 사성(賜姓)한 것이 그 비롯함이니 지금의 경주(慶州)지방의 이름 높은 가문(家門)이 그 시초이다. 신라(新羅) 사람 허겸(許謙)의 후예라고 함은 6부(六部)의 첫째 성씨(姓氏)인 이씨(李氏)를 가리킨 듯하나, 다른 증명할 만한 뒷받침이 없으므로, 이제 율곡(栗谷)선생 댁에 전하는 것을 근거(根據)로 하여 중랑장(中郞將)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도(世系圖)를 만들고, 용재공(容齋公: 이행(李荇))께서 작성한 연보(年譜)에 의거(依據)하여 추밀공(樞密公)으로부터 시작하여 열전(列傳)을 만든다. 선친(先親, 곧 이식(李植))께서 이 열전(列傳)을 초(草)하고 원고(原稿)를 바꾸어 다시 쓰셨으나 교정(校正)은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까닭에 벼슬을 지낸 차례나 연월(年月)에 불충분한 점이 있었으므로 불초(不肖)가 삼가 연보(年譜)와 초고(草稿)를 근거(根據)로 하여 서로 차이(差異)가 나는 곳을 고증(考證)하여 그 뒤에 붙였는데, 30년 후에 충무공(忠武公)의 종손(從孫)인 지강(之綱)씨가 이 열전(列傳)을 보고 단하(端夏)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허겸(李許謙) 운운(云云)하는 말씀은 우리 집 선대(先代)로부터 들은 바가 없을뿐더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상고하면 이허겸(李許謙)은 본관(本貫)이 인주(仁州):인천(仁川)의 옛 이름) 사람으로서 그 조상(곧 허기(許奇))이 당(唐)나라에 들어가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는데 그 13세 손 때에 고려조(高麗朝)에 크게 출세(出世)했고 그의 8대손 화(和)가 비로소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왔다.”고 했으니 그가 보승장군(保勝將軍: 곧 이양준(李陽俊))의 선대(先代)가 아님이 명백하다. 지강(之綱)씨는 연세가 70이 넘은 데다 학식(學識)도 있었으며, 그 일가(一家)들이 아산(牙山, 충청남도 아산시)에 같이 사는데 그 집안에는 대대로 이러한 전설이 없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근거(根據)로 상고해도 이것이 사실인 즉, 단하(端夏)는 감히 선친(先親)께서 어디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아지 못하여 의아(疑訝)하게 생각하고 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먼 일가인 지정(之貞)을 만나서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자 지정(之貞)은 “우리 집에 대대(代代)로 이런 말이 과연 있었다.”고 말하기에 단하(端夏)는 그런 사실의 근거를 얻어보기를 원했다. 지정(之貞)이 돌아가서 그 선대(先代)의 가첩(家牒)을 상고해보니 ‘이허겸(李許謙)은 대광보국(大匡輔國)으로 신라(新羅) 사람이며 그 3,4대손 양준(陽俊)이 보승장군(保勝將軍)이 되어 몽고(蒙古, 곧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고 되어 있었는데, 본가의 자손들도 가첩(家牒)에 있는 이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제 살펴보건대 보승장군(保勝將軍)이 몽고(蒙古)에 사신(使臣)으로 간 사실은 <고려사(高麗史)>에 보이므로 나는 이미 본전(本傳)의 밑에 채록(採錄)했으나, 이허겸(李許謙)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바 성관(姓貫)이 스스로 구별되니 지정(之貞)의 가첩(家牒)에 기록된 것은 잘못 들은 데서 나온 듯하다. 지정(之貞)은 정정공(貞靖公) 변(邊)의 9대손이 되는 서출(庶出)로서 역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다. 정정공(貞靖公)은 충무공(忠武公)의 5대조이시며 지정(之貞)의 선대(先代)와는 같은 파(派)이며, 선친(先親)께서 충무공(忠武公) 집안의 가전(家傳)이라고 일컬어진 것도 지정(之貞)의 가첩(家牒)을 근거(根據)로 말씀하신 것 같다. 이제 서로의 차이를 고증(考證)한 것이 이와 같으나 열전(列傳)의 제사(題辭) 가운데 감히 그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간행(刊行)했으며, 또한 충무공(忠武公) 이하는 다른 고증(考證)의 뒷받침이 없으므로 77자를 지금 우선 삭제하고 그 까닭을 집에 간직하고 있는 본고(本稿)의 뒤에다 기록하여 뒷날 자손(子孫)들이나 종인(宗人)들이 다시 다른 증거(證據)를 상고하여 취(取)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라고 하겠다. 추밀공 양준(樞密公 陽俊)
추밀공은 1202년(고려 신종5)에 출생, 1221년(고종 8) 겨울 나이 20세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가 판의조승(判儀曺丞: 종8품)이 되었으며, 1224년 산원(算員: 정8품 무관직)을 거쳐 1227년 식목도감(式目都監)의 녹사가 되었다. 1228년(고종 15) 6월에 도병마사(都兵馬使)의 녹사(綠事)가 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다시 산원이 되고, 1230년 별장(別將 :정7품)이 되었으며, 이듬해 낭장(郎將: 정6품)을 거쳐 123년 전주판관(全州判官:정6품)이 되었다. 1234년(고종21) 6월 합천부사(陜川府使)로 옮겼다가 12월에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전보되었으며, 1236년 다시 낭장이 되고 1238년 삼사판관(三司判官: 정5품)을 겸직하였다. 그 후 1240년 이부원외랑(吏部員外廊:정6품)으로 옮겼고, 이듬해 용호군(龍虎軍) 중랑장이 되었다가 어사잡단(御使雜端: 정5품)으로 승진하였다. 1243년(고종30) 정월에 신호군(神虎軍) 중랑장이 되고, 뒤에 조산대부(朝散大夫:정6품)로 가자(加資)되어 흥위위 보승장군(興威威 保勝將軍)이 되었다. 돌아가신 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정3품)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어사대부(御史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는 권씨(權氏)로서 중랑장 극평(克平)의 따님이다. 〔권씨는 본관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응당 안동 권씨일 것이다.〕 이 분이 삼사공(三司公)을 낳으셨다. 〔묘의 소재지는 고증할 수 없다. 연보를 살펴보면 경력과 연월일이 모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으면서도 언행과 업적은 대략의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집안에 전하는 관고(官誥: 벼슬의 사령장)를 근거로 연보를 작성했기 때문에 지장(誌狀) 따위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말에는 공이 현리(縣吏)로서 집안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공이 나이 20세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갔으니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난 것은 아님을 알 만하다. 공은 해마다 관직을 제수(除授)받고 해마다 영전하여 여러 주․부(州․府)의 벼슬을 두루 역임했으며, 말년에 비로소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공훈이 뛰어나지는 못하였다. 생각건대 집안을 일으킨 것은 중랑장에서 비롯했고, 공은 그 음덕으로 일찍부터 출세한 듯하다. 「고려사」에 고종29년(1242) 5월 시랑(侍郞) 송언기(宋彦琦)와 중랑장 이양준(李陽俊)을 몽고에 파견하였다고 했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공의 이름 자취가 드러났으므로 이에 덧붙여 적는다.〕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충무공 순신(舜臣)의 자는 여해(汝諧)이며, 증(贈) 좌의정 정(貞)의 셋째 아드님이다.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 卞氏)로 1545년(인종1) 3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쾌활하여 구속을 받지 않았다. 아이들과 장난을 할 때 항상 진을 치는 모양을 만드는데 아이들이 공을 원수(元帥)로 추대했으며, 동네에 불쾌한 일이 있으면 번번이 이를 꺽어 버렸다. 자라면서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글을 읽어서 대강의 뜻에 통했으나, 글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무과에 열중하여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1576년(선조9) 무과에 급제했는데, 무경(武經)을 시험볼 때 장량(張良): 중국 한나라 고조 때의 명신)이 곡식을 없애버린 일을 강설(講說)한 것이 선유(先儒)들이 논한 바와 부합하므로 시험관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관직에 처음 오른 뒤로는 승진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 서녀(庶女)를 공의 첩으로 보내고 싶어했으나 공은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와서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발자취를 의탁하겠는가” 하며 선 자리에서 중매꾼을 거절해버렸다. 율곡 선생이 이조판서가 되어서 공의 사람됨을 들은 데다 또 동종의 정의를 베풀고자 사람을 통해 보기를 청했더니, 공은 “동종이니 만나 보는 것이 좋으나 이조에 있는 한은 뵈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훈련원 봉사를 거쳐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종9픔)이 되고, 이어 발포 만호(鉢逋萬戶)로 전임했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복직되었다. 이 무렵 적호(賊胡: 여진족)가 오랫동안 변경의 우환이 되었으므로 공은 이들을 유인하여 사로잡아 바쳤으나, 병마절도사는 그 일이 자기가 한 일이 아님을 꺼려서 도리어 군사를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구실로 조정에 처벌을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겼으되 포상은 하지 않았고, 예에 따라 참군(參軍)을 거쳐 사복시 주부에 승진시켰다. 이어 조산보 만오(造山堡萬戶: 종4품)에 발탁되어 녹둔도(鹿屯島)의 둔전(屯田)을 겸관(兼管)했다. 공은 군사가 적어 증원병을 요청했으나 병마절도사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가을이 무르익을 때 이르러서 여진족이 과연 군사를 일으켜서 방책을 업습해 왔다. 공은 솔선하여 항전하여 적을 쏘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둔졸(屯卒) 60여 명을 탈환했으나, 병마절도사는 공을 죽여 스스로 책임을 면하고자 하여 장차 공을 처형(處刑)하려고 했다. 그러자 군관들이 울면서 결별하며 술을 마시고 두려움을 억제하라고 권했으나, 공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술 마시고 취한들 무엇하랴.” 하고는 뜰에 나아가 항변하고 자인서(自認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병마절도사는 뜻이 꺽이자 공을 가두어 두고 상부에 알리니, 조정에서는 무죄임을 살피고 종군하여 충성을 다하라고 명했다. 얼마 아니 되어 배반한 여진족을 쳐서 수급을 바치어 사면을 받았다. 그 후 전라도 조방장(助防將)과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거쳐 정읍현감이 되어 치적을 올림으로써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전라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이 역모사건(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추궁을 당하게 되었다. 의금부 도사가 수사를 하는데, 공이 조대중과 문답한 서신을 보고 공에게 없애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비밀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공은 “이미 수사중에 있으니 상부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결국 연좌되지 않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차례에 구애 받지 않고 발탁되어 평안도의 사리진 첨사(沙里鎭僉使:종3품)에 임명되었다가 진도군수로 옮기고 다시 완도의 기리포진 첨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치 않다가 일약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발탁되었다. 그 무렵 왜국과 이미 틈이 벌어졌지만 조야가 태연했는데, 공은 병기를 수리하고 쇠사슬을 주조(鑄造)하여 진(鎭)어귀 바닷가의 항구를 봉쇄하였으며, 거북선을 창작하여 이것으러써 선봉을 삼아 항상 승전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25년)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영남을 거쳐 서울로 향하자, 공은 병력을 이동시켜 왜적을 치고자 했으나 휘하 장병이 모두 다른 도(道)로 가는 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공은 “오늘의 일은 오직 적을 치고 죽음이 마땅하다. 감히 불가하다고 말하는 자는 목을 치겠다.”하고는 드디어 모든 진보(鎭堡)의 군사를 모아서 출전할 즈음, 경상도 수군절도사 원군(元均)이 수군을 모두 잃어버리고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공은 즉시 배를 띄워 나가다가 옥포(玉浦)에 이르러 왜선 30척을 격파시켰다. 이로부터 혹은 본영에 돌아오고 혹은 구원을 나가서 노량(露梁)·당포(唐浦)·사량(蛇粱)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고 적의 장수를 죽였다. 또 당항포(唐項浦)에서 적을 격파하고 적선 40여 척을 불살랐는가 하면 영등포(永登浦)에서는 적을 격파하고 견내량(見乃粱)에 이르러 적을 유인하여 격파하니 비릿한 피가 바다에 가득했다. 또 안골포(安滑浦)에서 싸워서 적선 40여 척을 불사르고, 마침내 부산(釜山)으로 진격하여 적선 1백여 척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 무렵 육지에서는 각 방면의 군사가 모두 패하는 가운데 홀로 공만이 연이어 대첩을 보고하니, 왕은 글을 내려 포상하고 세 품걔를 더하여 정헌대부(정2품)에 이르렀다. 그리고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두어 겸직케 하니 진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겼다. 원균은 공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백방으로 무고하고 왜적도 또한 이간질을 하니, 조정에서는 양쪽을 다 믿어서 공을 마침내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대신들이 공을 변호하고 왕도 공의 공적을 생각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앞으로 충성을 다하라고 질책하는 것으로 그쳤다. 때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공은 분상(奔喪)차 즉시 떠나면서 “나의 한결같은 마음은 충효에 있었는데 이제 와서는 모두 잃고 말았구나” 하니, 군민(軍民)과 원근(遠近)이 모두 글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균이 대신 통제사가 되었는데, 그는 적의 속임수에 빠져서 군사는 궤멸당하고 자신은 달아나다가 죽었으며, 공이 축적해 놓은 양식과 병기는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적은 진격하여 남원을 함락시켰다. 공은 다시 통제사가 되어 십수 기(騎)로 달려서 순천부(順天府)지경에 들어가 도망병사 수백 명을 겨우 모아서 난도(蘭島)에서 적군을 격파했다. 조정에서는 공의 병력이 약하다 하여 육지에 올라 진퇴케 했으나, 공은 듣지 않고 “신이 한번 항구를 떠나면 적은 서해를 거쳐서 곧바로 올라가게 되어 서울이 위태롭다”고 하였다. 공은 피난민을 단속하여 배 1백여척에 싣고 군진 후방에 벌여 세워서 기세를 보이고는 혼자서 10여 척의 배로 전진하여 적선 수백 척을 맞아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대파하고 왜군의 명장(名將)의 목을 베었다. 첩보를 들은 왕은 숭품(崇品:종1품)으로 승진시키고자 했으나 공의 품걔가 이미 높다는 말이 있어서 그만두고 여러 장수 이하만을 표창하였으며, 명나라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도 은단(銀段)을 보내서 위로했다. 공은 비록 탈상 뒤에 다시 기용되어 군무에 종사하긴 했으나 오히려 소식(素食)을 했으므로 건강이 쇠약해졌다. 왕은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서 유지(諭旨):왕이 신하에게 내리는글)를 내리고 또 맛있는 음식을 내려 주었는데, 공은 울면서 마지못해 받았다. 1598년 진을 고금도(古今道)로 옮기고 백성을 모아서 농사를 지어 대진(大鎭)을 이루었다. 명나라의 도독(都督) 진린(陳璘)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왔는데, 진린은 평소에 사납게 굴고 거만했으나 공은 응접함에 방도가 있어서 진린의 환심을 샀다. 녹포만호(鹿浦萬戶) 송여종(宋汝悰)이 명나라 배와 함께 진격하여 적을 많이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는데, 명군(明君)은 아무 소득이 없어 진린이 부끄러워 화를 내자 공은 “대인이 와서 우리 군대를 통솔하는데 우리 군대가 어찌 감히 사사로이 노획했겠는가. 청컨대 모두 바치겠다”고 하니 진린은 크게 기뻐했으나 송여종은 실망했다. 이에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의 썩은 머리뼈를 명나라 사람에게 주는 것이 무엇이 아까운가. 너의 공은 너의 장계(狀啓)에 달려 잇는 것이다.”하니 송여종도 승복했다. 진린은 공이 군대를 다스리고 승리하는 것을 보고는 순순히 공경하고 승복하여 크고 작은 군무를 반드시 자문하면서 항상 말하기를, “공은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요, 만일 중국에 들어 간다면 당연히 천하의 상장(上將)이 될 것이다.”라고 했으며, 선조에게 글을 올려 “이 아무개는 경천위지(經天緯地)하는 공과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는 재능이 있다 했으니, 이 말이 비록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 심복해서 한 말이다. 명나라의 육근 제독 유정(劉綎)은 진린과 서로 약속하기를 장차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수군을 협공하기로 했다. 그 무렵 소서행장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죽음을 듣고 철수를 꾀했으나 우리 군대가 앞을 가로막을까 두려워하여 유정에게 미끼를 써서 공격을 늦추게 하고, 진린도 뇌물을 먹고 길을 빌려주고자 했으므로 공은 나무판자에 밀서(密書)를 써서 던져 보이니 진 제독이 부끄러워하면서 중지했다. 사천(泗川)에 있는 왜적은 곧 사쓰마(薩摩)의 군대로서 강용(强勇)하기 짝이 없었다. 소서행장이 위급한 것을 보고 대거 응원을 왔는데, 이날 저녁 큰별이 바닷 속으로 떨어져서 군중이 괴이하게 여겼다. 공은 명나라의 배와 더불어 노량(露粱)에서 왜적을 맏아 싸우는데, 수십 합(合)만에 적병은 패하여 물러갔으나 공은 홀연히 유탄(流彈)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공의 조카 완(莞)이 담력이 있고 용감하여 공의 주검을 안아서 방 안으로 모시고 깃발을 들어 독전하니 배에 탄 사람들이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는 왜선에 포위된 진 도독을 아군이 구해내니 적은 대패하여 달아났으며, 소서행장도 그 틈을 타서 먼 바다로 빠져나가 도망쳤다. 진 도독은 사람을 보내서 공의 죽음을 위로했다. 배 안에서 발상하자 진 도독은 의자 밑으로 쓰러져서 땅을 치며 통곡했으며, 양 진영에서도 모두 곡성이 바다에 울렸다. 왕은 제관을 보내서 조제(弔祭)하고 특히 우의정을 증직했으며, 아산(牙山)으로 반장(返葬)하는데 연도의 백성들이 목놓아 울며 제사를 지내는 자가 천 리에 끊이지 않았다. 휘하 부대에서 수영(水營)에 사당을 세우고 나라에서 충민사(忠愍祠)라고 사액(賜額)했다. 거제와 남해의 군사와 백성들도 사당을 세우는가 하면, 호남인들도 차령(車嶺)에 비석을 세워 슬픔과 사모하는 뜻을 표했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이래의 전공을 책록하는데 공을 첫째로 삼고 효충장의적의협책(效忠仗義迪毅協策) 선무공신(宣武功臣)의 호를 내렸으며,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 때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았다.〔주:뒷날 정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묘 앞에 어제(御製)의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어필의 전서(篆書)로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라 했다.〕 공은 안으로 행실이 독실하고 성품이 곧고 개결(介潔)하여 스스로 처신을 조심했으되, 뜻에 옳지 않으면 비록 높은 벼슬이나 요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받느시 의(義)를 준거로 부끄러움을 주어 굴복케 했다. 반평생 동안 뜻을 얻지 못하여 불우한 세월을 보냈으나 능히 알아주는 자가 없다가 왜란을 만나서야 뚜렷하게 쓰여서 계책을 짜내고 일을 재단함에 거의 실책(失策)이 없었으며, 용기를 떨쳐 기회를 결단함에 앞에 강적이 없었다. 또 군대를 다스리는 것이 간략하면서도 법도가 있어서 방녕되게 한 사람도 죽이지 않으니 삼군(三軍)이 한 뜻이 되어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며, 싸움에 임해서는 생각이 태연하고 여유가 있어서 나아가야 할 때는 나아가고 어려움을 만나면 물러나되 반드시 나팔을 세 번 불고 북을 세 번 쳐서 군대의 위심을 떨친 뒤에 회군했으므로 몸이 죽는 날에도 기율과 절도가 오히려 평시와 같이 침착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항상 척후를 멀리 보내고 경계를 엄하게 해서 적이 오면 반드시 먼저 알게 되니 군사들이 쉬게 했고, 자신이 직접 화살을 관리하여 평상시에는 빈 활만 사수들에게 주었다가 적이 앞에 육박한 뒤에야 화살을 나누어 주었으며, 또 자신도 활을 당겨 같이 쏘았다. 노량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알을 맞고서도 오히려 활을 놓지 않았고, 전투가 끝나고서야 군중이 비로소 알고는 장병들이 공이 다시 총알을 맞을까 염려하여 겨드랑이를 부축하며 그만 둘 것을 간하자, 공은 하늘을 가리키며 “나의 명령은 저기에 있다. 어찌 너희들만 홀로 대적하게 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주금을 무릅쓰고 큰 일에 부지런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오랫동안 국력이 쇠약하고 군사(軍事)를 기피한 뒤 끝에 천하의 막강한 왜적을 만나 공은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서해를 차단하여 적이 육지와 바다로 병진(幷進)할 수 없게 함으로써 중흥(中興)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 입신(立身)의 절의와 국난에 죽는 충성과 전략을 세우고 용병하는 묘와 일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지혜는 이미 시험하여 알 수 있는 일로서, 비록 옛날의 명장에서도 한 대(代)에 한둘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배위(配位)는 상주 방씨(尙州 方氏)로서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회(薈)는 현감, 차남 예(䓲)는 정랑(正郞)이며, 3남 면(勉)은 어머니를 따라서 아산에 있다가 적을 만나서 싸우다가 죽었다. 측실에서 두 아들 훈(薰)과 신(藎)이 있는데 모두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묘는 아산 선영에 있다 조카 완(莞)은 공이 전사했을 때 나이 20세었는데, 1599년(선조32년)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인조 2) 충청도 병마절도사로서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다가 1627년 병자호란에 청군이 의주를 함락하자 스스로 분사(焚死)했다.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는데, 묵헌공(黙軒公)은 곧 그의 형님이다.〕 《참고서적》 1.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중앙일보 중앙 M&B 1999.3.10 2. 德水李氏世界列傳 (1686 丙寅年刊, 跋) 李植․李端夏 편저 319년전 자료 3. 姓氏의 고향, 中央日報社 1989 4. 한국고서종합목록, 국회도서관 1968 윤병태(충남대 교수) 편저 5. 仁川李氏世譜 2004년 刊 6. 한국號대사전,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7.1.30(총 1324면 15万) 박희영.김남석 공편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 刊 8. 許愼,說文解字, (中國刊) 9. 단국大 동양학연구소 편, 漢韓大辭典1~8권 (16권中) 10. 한국땅이름사전, 한글학회편, 어문각 1991년 11. 한국지명총괄, 한글학회 12. 辭海(上·中·下) 東華書局 2005 13. 中國古今地名辭典, 경인 文化史(영인) 14. 한국의 인간상(人間像), 신구문화사 1967 15. 한국인명대사전, 신구문화사 1995 16.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上·中·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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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수이씨의 선대는 확실치 않군요! 경주,전주, 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