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처럼 살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벌벌 떨고 있다.
그것은 엄살이다. 잘못된 율법관이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복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바보나 멍청이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을 할 때 좀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탈무드』에도 말로 생기는 피해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은 살인보다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남을 헐뜯는 말은 세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곧 남을 헐뜯는 말은 그 말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을 죽입니다.”
한 번 입에서 나간 말은 자기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모두 악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가 들렸다고 하면
그의 머리에 뿔이 두 개 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라틴 말에서 ‘마귀’라는 말은 ‘디아볼루스’(Diabolus)입니다.
이 말은 ‘중상 모략하는 자’, ‘비방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
‘두 마음을 품은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을 중상하고 비방하며, 두 마음을 품고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은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마귀라는 말이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면,
나는 과연 평소에 어떤 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형제에게 성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이 나면 폭언은 예사입니다.
‘바보, 멍청이’ 정도는 애교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말을 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이웃에게 성내는 것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살인이라는 큰 죄는 누구나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화내는 작은 잘못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 살인 같은 큰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얕보고 비웃는 사람이 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과 소원한 관계라면 가까이 지내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형제와 법정 소송을 벌였다면 될 수 있는 대로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화해는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모셔 오는 행동입니다.
작은 말 하나가 화해를 가져오기도 하고, 불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말에서 실수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과 사랑하는 가족에게
성을 내고 업신여기는 말은 고칠 수 있습니다. 노력하면 됩니다.
삶의 태도를 바꾼다면 자연스럽게 고쳐집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힘써야 할 과제입니다.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역겨운 냄새가 아닌
향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 나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 포기의 난을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