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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척기(兪拓基) 신판서댁(申判書宅) 손서(孫壻)가 된 이야기
■ 한죽당 신임(寒竹堂 申銋)의 지인지감(知人之鑑)
신임(申銋)의 호는 한주당(寒竹堂)이요, 자는 화중(華仲)인데, 숙종조(肅宗朝)때 판서(判書)로 있던 사람이다.
그는 일직부터 진인지감(知人之鑑)이 놀랍기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뼈아픈 슬픔이 있었으니, 그것은 설하에 외아들 하나를 두었다가 불행하게도 아들이 중병(重病)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니 판서 내외는 하늘을 우러러 팔자의 기박함을 슬퍼하여 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아들이 경주라는 유복녀(遺腹女) 하나를 남기고 떠났으니 늙은 두 내외는 이 어린 손녀에게 마음을 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란 흐르는 물과 같아 판서의 손녀 경주의 나이는 어느덧 열 여섯 살이 되었다. 규중(閨中)에서 편모(片母) 슬하에서 자라났지만 본시 타고난 외양이 몹시 고운데다 마음씨까지 착하고 드믈게 숙성하여 나이가 근 스무살이나 되어 보였다. 또한 침선(針鮮)이 능숙할뿐더러 글공부도 왠만한 사나이보다 나아 무엇하나 빠질것이 없었다.
경주가 이와같이 적년(適年)에 이르게 되니 판서 내외와 과부 며느리 김씨는 하루바삐 경주와 알맞은 배필을 골라서 금실좋게 지내는 재미를 보려고 서두르게 되었다.
하루는 김씨부인이 시아버지되는 신판서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경주의 낭재(郎材)는 아버님께서 친히 관상하신 뒤에 고르소서,』하고 간청하였다.
김씨부인이 이같이 신판서에게 간청한 것은 시아버지가 지인지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덮어놓고 사위감을 날더러 보고 고르라 하니 어떤 사람을 골라야 하겠느냐. 사람도 천층 만층이니 자세하게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신판서는 며느리에게 물었다.
『 아버님께서 물으시니 말씀 올립니다, 첫쩨 수(壽)가 팔십(八十)에 이르도록 해로(偕老)할 사람으로 벼슬은 대관(大官)에 이르려야 하겠삽고, 둘째로는 집안이 유족하고 유자생녀(有子生女)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하고 김씨부인이 대답했다.
신판서는 며느리의 대답을 듣고 나더니 껄껄 웃으면서,
『이 세상에 그렇게 모든 것을 겸비한 사람이 크고 입에 맞는 떡으로 어디 있겠는냐? 지금 네가 말한 대로 그런 사람만 구하려 한다면 한 평생을 두고 고른대도 될 것같지 않구나.』
하며 며느리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다음부터 신판서가 밖에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김씨 부인은 의례이
『아버님, 오늘은 혹시 가합(可合)한 낭재를 만나 보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신판서는,
『네 맘대로 그렇게 여려가지를 구비한 인물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장래 영달(榮達)할 인물은 많이 보았으니 어디 고를 수가 있더냐?』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상례(常例)로 삼았다.
하루는 신판서가 볼일이 있어서 장동(壯洞) 길거리를 지나기 되었는데, 길거리에 수십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정신 없이 뛰놀고 있었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키큰 도령 하나가 섞였는데 나이는 열 너덧살밖에 더 안되어 보였고 봉두난발(蓬頭亂髮)로 굵은 대를 가랑이 틈에 낀 채 뭇 아이들과 뛰어놀며 다니고있다.
신판서가 하인을 시켜 교자(轎子)를 머물게 하고 도령의 용모를 이리저리 뜯어보니, 비록 몸에 걸친 옷이 남루하고 얼굴이 험상궂게 생기기는 했을망정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고 골격(骨格)이 비범하였다.
신판서 얼굴에는 흔연히 웃음이 떠오르며,
『예, 저기 아이들 중에 그중 키크고 댓가지로 가랑이에 끼고 뛰노는 도령을 이리로 불러 오너라.』
하고 하인에게 일렀다. 하인 하나가 주인영감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큼성큼 뛰어 가더니
『얘 이놈아 우리 댁 대감께서 너를 불러 오라신다.냉큼 저 교자 앞으로 가자.』하고 그 아이의 겨드랑이을 한 손으로 추켜들어 앞으로 끌어당겼다.
『대감이 뉘시길래 일없이 날 오란단 말씀이요? 남 장난하는데 훼방 말고 이것이나 놓으시오.』하며 도령은 부리부리한 눈을 부라리며 하인이 붙잡는 팔을 뿌리친다.
『이놈아 신판서 대감 행차신데 어느 앞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입닥쳐라.』하고 하인은 맞호령을 한다.
교자 안에서 도령의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판서는 다시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하여,
『저 도령을 순리로 대려 오려면 안올 모양이니 네가 가서 협박해 붙들어 오너라.』하고 다시 분부를 내려었다. 하인이,
『예이.』 소리를 길게 빼면서 도령 앞으로 뒤어가서 두 사람이 도령을 끌어다 신판서 앞에 세워 놓으니,
『어느 관원(官員)이신지는 모르나 아무 죄 없는 나를 왜 잡아가려 하시오?』하고 사지를 버둥거리며 소리쳐 운다.
신판서는 그 행동이 몹시 억세인 것을 보고 빙그래 웃으면서,
『여봐라, 내가 너를 잡아 가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을 말이 있어서 대려온 것이니 안심하고 울음을 그쳐라.』 하고 부드럽게 말하니 그제야 도령은 울음을 그치고 신판서를 처다본다.
『여봐라, 네 집 문벌(文閥)이 어떠한지 알고자 하는데 대답 못하겠느냐?』
『소동의 집 문벌은 말씀 못할 것이 아니오나 대감께서는 어쩨서 물으십니까?』하고 도령은 신판서에게 되묻는다.
『글세 그것은 나중에 알려니와 우선 내가 묻는 말이나 대답을 하여라.』
『소동이 지금은 꼬락서니가 엉망이오나 본시는 양반의 후예 올습니다.』
『네 나이는 몇이며 성이 무엇이냐?』
『소동의 나이는 올해 열 다석이옵고 , 성은 유(兪)가입니다.』
『지금 네가 사는 집은 어딘고?』
『소동의 집은 월동(越洞)에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이같이 소상히 물으십니까?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까닥을 말씀하지 않으시려거든 빨리 놓아 보내 주십시ㅇ오.』하고 유도령은 신판서 앞에 넙죽이 절을 한다. 신판서는 유도령의 말대로 죽시 놓아 보내도록 하인에게 분부했다.
신판서는 그길로 월동으로 향하여 하인을 시켜 유도령의 집을 찾게 하니, 그리 힘들이지 않고 찾게 되었다.
유도령의 집은 다쓸어저 가는 수간 초옥으로 다 썩어빠진 지붕 위에 풀들이 길길이 나 있었는 걸을 보면 그 집안 살림살이가 몹시 간구한 것을 알만 하엿다.
신판서 하인을 시켜주인을 찾게 한 뒤에야 이 집에는 바깥 주인은 일찍기 기세(棄世)하고
유도령의 어머니되는 홀과수 부인뿐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안으로부터 나와서 말을 전하는 그 집 몸종의 말에 의함이었다.
신판서가 그 몸종에게 전갈하기를 ,
『나는 제동(齊洞) 사는 판서 신인인데 내 슬하에 손녀 하나가 잇어서 나이가 이미 열 여섯이라 집안에서는 각처로 구혼을 하는 중이나 오늘 내가 이 댁 도령을 길에서 만나 보니 가히 내 손녀의 배필이 됨즉하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정혼(定婚)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니 댁 마님께 내 말대로 여쭈어라.』하였다.
그리고 즉시 회정해 오는데 신판서는 종로에서하인배를 향해,
『너희가 집에 돌아가더라도 오늘 일을 입밖에 행여 내지 말렸다. 만일 내 말을 어기는 놈은 당장 주고 남지 않을 것이니 명심하라.』고 엄중히 단속했다.
■ 봉두난발 (蓬頭亂髮) 도령을 손자사위로
월동 유도령 집에서는 유도령의 어머니가 천만뜻밖의 몸종이 전갈하는 말을 듣고,
『애, 그게 될 말이냐? 신판서 댁으로 말하면 부귀와 영화가 무상할뿐더러 서울 장안에서는 누구하나 모르는 이가 없는 고귀한 재상가(宰相家)이신데 어디 손자 사윗감이 없어서 간구하기 짝이 없고 더구나 보두난발로 장난만 치려 다니는 도련님을 보고 가합한 생각이 나셨을 리가 잇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굼속에서 헤메는 것만 같구나.』하고 몸종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네 말도 옳기는 하다만 어쨌든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하회나 기다려 보자구나.』하고 부인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이날 신판서는 유도령 집에 들렷다가친구의 집 몇군대를 다녀서 해가 저문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도 또한 며느리 되는 김씨부인이 시아버지를 반가이 영접하면서,
『아버님, 오늘은 가합한 낭재를 혹시 만나 보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신판서는 빙그래 웃으면서,
『그동안 신랑감을 만나려고 무수히 애를 쓰던 차에 오늘에야 합당한 도령 하나를 만나 보았다.』하며 며느리의 눈치를 본다. 김씨 부인은 몹시 기뻐하면서,
『아버님. 고맙습니다.그 수재(手才)가 뉘 집 자제이오며 그 수재의 집이 어디오니까? 궁금하오니 알려 주십시오.』 하고 앞으로 닥아앉는다.
『그 집이나 그 도령이 누구의 아들인지 내가 미리 말하지 않더라도 쉬히 알게 될 것이니 과히 궁금히 여기지 말고 기다려라.』하고 더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지 몇칠 뒤에 영채(迎采)날을 당하니, 그제야 신판서는 며느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다 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자 김씨부인은 궁금한 생각을 걷잡을 수가 없어서 가장 영리하고 사리에 밝은 노비(老婢) 하나를 조용히 불러,
『월동 사시는 유수잿댁을 찾아가서 그 집안 살림 번백이 어떠한지, 또 그 댁 수재의 외화풍채가 어떠한지 자세하게 알아보고 오게.』하고 부탁했다.
부인의 명을 받고 아침 일찍이 나갔던 노비가 낮이나 돼서야 돌아오더니,
『아씨, 어쩌면 대감 마님께서 그런 집에다 정혼을 하셧습니까? 집이라고는 다 쓸어져가는 오막살이 초가 두어칸에 지붕은 몇십년이나 못 이었는지 풀이 질질이 나고 부뚜막에는 퍼런 이끼까지 끼지 않았겠어요. 그나 그뿐입니까, 솓뚜껑에는 허옇게 거미줄이 서리어 있고 신랑의 얼굴을 보고는 감짝 놀랏습니다. 두 눈은 왕방울 같이 크고 머리터럭은 산산이 허트러져서 쑥대와 같사와 어느 한가지 취할 점이 없더이다.』하고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 대감께서는 어째서 그런 집에다 정혼을 하셨을까?〉
노비의 보고를 듣자 김씨부인은 시아버지의 처사를 몹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노비는 또한번 번덕스럽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아씨 이거 보세요. 우리 댁 소저께서 그 댁에 들어가시는 날이면 그날로 절구방아질을 면치 못하실 것이요. 더구나 춥고 주리시는 광경을 당하실 것이오니 금지옥엽(金枝玉葉)과 같이 고귀하신 집안에서 생장하신 소저께서 어찌 그 같은 고생살이를 감당할 수 있겟어요? 소녀는 소저 뵙기가 딱하고 민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가난뱅이 집으로 가시게 되었는지 생각만 해도 원통하고 눈물이 납니다.』하고 한 술 더떠서 말하는 통에 김씨부인은 낙담실망하여 기절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날은 이미 수채(受采)를 하는 날이라 이제는 어떻게 하는 수가 없었다。
김씨부인은 목구멍 넘어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아 삼키고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신랑 맞이할 준비를 풀이 하나도 없이해 나갈 뿐이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유복녀로 고이 낳아서 온갖 정을 딸 하나에게만 폭 쏟아놓고 지내 오던 김씨부인은 일껏 시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정혼해 놓은 사위가 인물이나 가세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것도 어머니된 정리에 당연하다 할것이다。
이럭저럭 그날 하루도 가버리고 그 이튼날 아침, 신랑이 안으로 들어서자 안마당 정당(正堂) 위에서 신랑 신부가 전안성레(奠雁成禮)를 지내게 되었다。그때 김씨부인이 신랑의 얼굴을 보니 노비의 말과 같이 용모가 참으로 볼썽 사나웠다。못생긴 남편을 맞이하게 된 가없은 딸을 생각하니가슴이 메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혼례식이 긑난 뒤에야 김씨부인은 조용히 시아버님을 뵈옵고,
『아버님께서 세상에 제일 뛰어난 수재를 얻으신 줄로만 알았삽더니 오늘 소녀가 신랑을 맞대해 본즉 무의무탁(無依無托)한 가난뱅이 일뿐더러 그 생김새가 험상궂어 남이 보기에도
무서운 사람을 고르셨으니 천급보다 더 귀애하옵시던 어린것의 한평생을 그르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와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고 몹시 언잖아 했다.。신판서는 며느리의 그와 같은 말을 듣더니 약간 노여워하는 기색이 더돌면서,
『너는 이제와서 나를 원망하는 투로 말하니 어쩌라는 말이냐。나는 오직 네가 소원하는 신랑감을 구해 주었을 뿐이다。신랑애가 지금은 비록 그 집안이 몹시 간구하고 보잘 것이 없는 처지지만 뒷날에는 반드시 복록(福祿)이 무궁하고 수부귀(壽富貴) 다남자(多男子)할 오복을 갖추어 가진 훌륭한 얼굴(相)이니 잔말 말고 두고 보아라。내 말에 일호반점도 없을것이다.』했다。김시부인은 그와 같은 말을 듣자 무어라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소녀가 당돌히 말씀드린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윗어른께서 어련히 아시고 조처하셨겠습니까。공연히 못마땅한 생각을 품었사온즉 죄송만만이 옵니다.』하고 물러났다。
혼인한지 사흘째 되는 날에 신랑은 처가인 신판서댁으로 왔다。신판서는 손자 사위를 반가이 맞아들이어 내실(內室)에다 따로 방을 정해 주고 신랑 신부가 함께 거처하도록 마련을 해 주었다。
■ 지수재(知守齋)의 위인(爲人)
신랑신부가 한달가량이나 금실이 좋게 지냇는데, 신부는 부잣집에서 금지옥엽으로 길리운 몸이라 섬섬약질인데가 , 허구한 날을 힘 세찬 신랑에게 부대껴 지내게 되었으니 차츰 얼굴에 노랑꽃이 피게 되고 병명조차 알 수 없는 병색이 돌았다.。
신판서는 단번에 눈치를 채고,
〈헛불사 ! 저것들을 그냥 한 방에 내버려 두었다가는 결국 큰 일을 저지르겠는 걸!〉하고 근심이 들어 유생을 사랑방으로 불러내었다。
『너는 혈기미정(血氣未定)한 소년의 몸으로 연일 안에서 자는 것은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니 오늘 저녁부터는 바깥 사랑으로 나와서 나와 함께 자는 것이 좋겟다.』
『네, 그리 하겠습니다.』 하고 유생은 할 수 없이 대답은 했지만 속심으론 불만이었다.
그날 밤, 바깥 사랑에서 신판서가 자기 자리 옆에다 따로 유생의 자리를 깔게 하고 대리고 자게 되었는데 밤이 어슥한 뒤에야 신판서는 곤히 잠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자고 싶은 생각에 유생은 신판서가 잠이 들도록 잠을 자지 않고 누웠다가 신판서가 잠이 든 눈치를 채자 일부러 잠고대를 하는 체하고 한 손으로 신판서의 가슴을 후려쳤다。마악 첫잠이 들었던 신판서는 가슴을 때리는 통에 감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유생의 소행인지라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너 이게 왠 버릇 없는 짓이냐?』하고 호령을 하였다。
『일부러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소생이 어려서부터 잠꼬대하는 버릇이 있사와 여지껏 못고치옵고 버릇없는 짓을 감히 하였사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하고 유생은 거짓 사죄를 했다.。
『바로 그렇다면 모르거니와, 이제는 네가 집을 홀로 있던 때와 달라 이미 어른이 되었으니 못된 버릇은 곧 고치어라.』하고 신판서는 처음 일이라 용서했다.。
조금 후에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번에도 유생은 잠든 체하고 잠꼬대하듯이 발길로 신판서의 허리를 내질렀다.。
신판서는 허리를 발길에 채이고 일어나더니,
『허어 , 이놈 또 이런 버릇이야!』하고 책망을 했으나 잠꼬대로 그러는 것이라 어쩌는 수가 없는지라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얼마만에 유생이 또다시 손으로 후리치고 발길로 걷어차는 바람에 신판서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허어, 거 나쁜 버릇이로군 ! 너 같은 놈하고 하룻밤을 다 자지 않았어도 이러하거늘 몇일 계속해서 잤다가는 내 몸에 뼈다귀 하나 성하게 남지 않겠다。네 이놈 냉큼 안으로 들어가 자거라.』하고 신판서는 견디다 못해 유생을 안으로 들이 쫓았다.
이것은 유생이 신부 곁에서 한시도 떠나기가 싫어서 거짓 게책을 구민 것인데 신판서는 나쁜 버릇으로 속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내 계교에 안넘어갈 쟁비가 있겟느냐… 〉하고 유생은 의기양양하여 이불 보퉁이를 어깨에 멘 채 내실로 들어갔다。
신판서는 유생이 장래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손자사위를 삼은 터이라 유생 내외를 사랑하기를 자기의 친아들딸보다 더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신판서가 외번(外蕃)을 안무(按撫)할 직임을 맡고, 장차 내행(內行)을 이끌고 부임하게 되었는데 유생으로 하여금 한시라도 곁을 떠나게 하는 것이 몹시 섭섭하여 유생 내외까지 배래(陪來)토록 분부를 내렸다。.
그때 김씨부인은 자기 딸의 체질이 섬약한 것이 매우 걱정되어 이번 기회에 유생과 딸을 얼마 동안 떨어져 있게 할 생각으로 그 뜻을 시아버지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안될 말이다。신혼재미가 채 무르녹기도 전에 젊은 것들을 먼 곳에 따로 떼어 놓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하고 신판서가 첫째 허락치 않았고 , 둘째로는 새색씨가 유생을 쫓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결국 유생 내외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신공이 임지에 도착한 지 두어달 후에 상감께 진상(進上)할 먹을 고르게 되었는데,공이 유생을 불러서,
『너 먹이 소용되냐 ? 소용되거던 네 마음대로 골라 가져라.』하고 먹 수백통을 가리켰다.。
『 먹입니까,? 소용되고 말곱 쇼。 주시기만 하신다면 골라 갖겠습니다.』하더니 대절묵(大折墨)으로 백동을 골라서 옆에다 따로 떼어 놓는다。이것을 본 비장(비장)이 기겁을 하여,
『저렇게 많은 먹을 떼시면 궐봉(闕封)의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큰 걱정이 올시다.』하고 주위를 주는 눈치었다,。신공은 비장을 바라보면서,
『다시 만들어 드리면 되지 않는가。당장에 나아가 수백동 더 만들어 들이도록 배비를 하게.』하고 명령하였다。비장이 물러나간뒤 신공은 유생의 등을 두드리면서,
『네가 먹을 골라 놓는 것을 보니 나중에 가히 대성 할 인물이다.』하고 기뻐했다.。
유생은 먹 백통을 가지고 책방(冊房)으로 내려오자 마자 하예배(下隸輩)들에게 그 먹을 일일이 나누어 주고 단 한개도 남기지 않았다.。
■들어 맞은 관상(觀相)
신공의 손자 사위되는 유생이란 바로 유상국(兪相國) 척기(拓基)였다.。척기의 본관은 기계(杞溪) 유(兪)씨로 자(字)는 전보(展甫)요. 호는 지수제(知守齋)로 시호(諡號)는 문익(文翼)이다.。
척기가 숙종 갑오(甲午) 문과로 등제(登第)하여 한림(翰林), 부제학(副提學), 이랑주사(吏郞籌司),를 역임하고 경종(景宗) 임인(壬寅)에 화(禍)를 입어 섬으로 귀양을 갔다가 영종(英宗) 초에 귀양이 풀려 돌아오는 길로 호조판서(戶曹判書)로부터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니 그 때 척기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
그 때까지 유상국의 장모되는 김씨부인이 살아 있어서 사위의 이와 같은 영달을 보고 그제서야 시아버지인 신공의 지인지감이 놀라웠던 것을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 후에 유상국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치사(致仕)하고 기사(耆社)에 들어 일흔 일곱에 세상을 떠낫는데, 슬하에는 아들 사 형제가 있어서 해마다 부유해졌으니 모든 것이 신공의 말한 바와 일호반점의 틀림도 없었다。
※ 한죽당(寒竹堂) 신임(申銋)
본관은 평산(平山) 신(申)씨로 자는 화중(華仲)이요, 호는 한죽당(寒竹堂)으로 고려태사 장절공 25세손이다.。
효종(孝宗) 정유(丁酉)에 진사(進士)하고 숙종(肅宗) 병인(丙寅)에 별시문과(別試文科)하여 예(禮),병(兵),호(戶),공(工),이(吏) 오조참의(五曹參議)를 지내고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하고 세령(歲齡) 80에 이르러 승자헌지중추부사(陞資憲知中樞府事)에다, 입(入) 기로사(耆老社)하고 좌참찬(左參贊), 공조판서(工曹判書) 하다。
경종(景宗) 2년에 김일경(金一鏡)의 모변(謀變)으로 화(禍)를 입고, 제주(濟州)로 귀양 가서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영조(英祖)즉위로 귀양살이가 풀려 돌아오는 도중 해남객관(海南客館)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니 영조가 크게 슬퍼하고 특증(特贈) 영의정(領議政)하고 충경(忠景)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근거자료(根據資料): 평산신씨(平山申氏) 동양세가년표(東洋世家年表)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