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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묵상글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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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창조론자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진화가 이루어졌을지라도 그것은 창조 이후의 일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이라고,
사랑 없이 무정하게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는 겁니다.
이 믿음은 우연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믿음이기도 하고,
다 하느님 사랑의 계획에 따라 생겨난 거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만물이 그러하니 인간도 예외일 리 없고,
인간은 그리고 나는 더더욱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아래에서,
그것도 천지창조 훨씬 전에 세워진 하느님의 사랑 계획 아래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라는 믿음이 저의 믿음이고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과 저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믿는 믿음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느님께는 버림받고 육신의 아비와 어미에게서 태어나
한세상 살다가 떠나는 것으로 삶을 마칠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우주의 고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믿지 않음으로써 버림받은 것이 되는 셈이고,
믿음을 버림으로써 버림받은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고아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 계획은 우리가 생겨나기까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태어나고 난 다음에는 당신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온 정성과 희생으로 양육하듯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비와 어미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우주의 고아가 되지 않도록 영원히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참사랑입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입니다.
새끼를 내질러놓고 마는 것은 욕망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시작부터 끝까지 곧 영원히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역시 믿음입니다.
이 세상 구원과 영원한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생명을 살고 행복을 사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겁니다.
계모라고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을 때 그에게서 떠나고
반대로 친엄마이고 나를 사랑한다고 믿을 때 엄마의 사랑에 머물듯
우리도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느님을
믿을 때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며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까지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를 시작하며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런 하느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믿게 해 준 바오로 사도에게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내일과 모레,
저희 <여기 사회적 선교 협동조합>이 주관하는 바자회가 열립니다.
이 바자회 수익금으로 한 부모 이주민 자녀들과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합니다.
비가 예고되어 걱정이 되지만
기도와 사랑으로 많이 참여해주시고 격려해주시길
바라며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10시 미사로 바자회는 시작되고 6시에 정리할 것입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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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주말에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평일에는 반드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운동’입니다. 사실 운동을 하기 전에는 시간이 없다고, 너무 피곤하다 등의 이유를 붙이곤 했습니다. 이런 이유를 붙였을 때는 운동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매일 하다 보니 시간이 없다는 것도, 피곤하다는 것도, 또 힘들다는 것도 별 의미 없는 핑계였음을 깨닫습니다. 운동을 통해 건강해지기에 피곤함도 사라지고, 체력이 붙어서인지 운동할 때 힘들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마음의 여력이 없어서 등의 이유가 똑같습니다. 이런 이유를 보면 신앙 생활하지 못함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당에서만 또 무릎꿇고 오랜 시간 하느님을 떠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삶 안에서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께 함께하는 마음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매 순간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됩니다. 못하는 이유는 늘 돋보이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쁜 일상 안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춘다면, 못한다고 했던 이유가 얼마나 의미 없는 핑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바쁜 것도, 피곤함도 사라지고 마음의 진정한 여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신앙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향한 불행 선언입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장 큰 죄를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그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경과 율법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지만, 정작 위선과 교만으로 실천하지 않기에 자신도 하느님 곁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우리 안에 담긴 위선과 교만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선과 교만이 가득할수록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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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어느 곳을 향해서 배를 저어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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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십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저의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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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트집을 잡는 사람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을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고,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수용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교훈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비와 사랑을 놓쳤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 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예수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불행하리라는 경고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행복의 길이 시작됩니다.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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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생(人生)은 무엇일까요? 고인이 되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강의 중에 ‘하숙생’을 불렀습니다. 하숙생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의 가사에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짐을 많이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그네는 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헤어짐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의견이 다르다고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곧 떠나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의탁할 쉼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구로 가는 기차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있어요.’ 인생은 계란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란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둥글게 둥글게’라는 동요가 있듯이 인생은 둥글게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욱하는 성질 때문에 큰일을 망치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참고, 조금만 기다리고, 조금만 양보하면 오해는 이해로 바뀌고, 원망은 용서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계란은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유인도, 노예도,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모두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의 돌로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계란은 노른자가 있습니다. 인생에 노른자는 성공, 명예, 권력이 아닙니다. 인생의 노른자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는 것도,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 남도 따르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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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고 있자니 참으로 위태롭습니다. 주님께서 옳은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말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 시대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너무 건드리고 계신다 느껴집니다. 제가 느끼는 위태로움은 주님 걱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돌려서 말해야 할 때가 있고 직설적으로 말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저 또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려서 말해야 할 때는 듣는 사람이 자기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여유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돌려서 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바꿀 여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설적인 말을 할 때는 이와 반대의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거나 자신에게 취해 있어서 도무지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누구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직설적인 표현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그때그때 다른 방법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상태를 보고 그에 맞는 대화와 표현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이는 꼭 의사가 환자마다 처방을 달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느슨한 마음에는 긴장을 주고 긴장으로 굳어진 마음에는 편함과 부드러움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습에 따라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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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릉 쾅쾅
검은 구름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우르릉 우르릉
검은 하늘이 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내 장대비가 내립니다.
갑자기,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발생하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구름이 모이고 시동을 걸고 그제야 비가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검은 마음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슬프고, 우울하고, 괴롭고, 외로운 마음들….
어느 정도 모인 검은 마음은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미움, 분노, 눈물, 무기력 등으로….
그리고 마침내 장대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을 수는 없지만
마음에 내리는 비는 내리기 전에 바꿀 수 있습니다.
관심과 배려와 따스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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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가 이쁘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쁘다”
가을빛 완연해지기 시작한 10월 중순입니다. 예전 ‘늦가을(晩秋)’에 쓴 시가 생각났고 미소가 떠오르며 순간 행복했습니다. ‘모두가 이쁘다’란 시입니다.
“가을엔
이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모두가 이쁘다
작은 풀잎, 나뭇잎들...
사랑으로 타오르는 단풍되니
모두가 이쁘다
너도 이쁘고 나도 이쁘다”<2000.11.10.>
아마도 하느님 눈에는 다 그러할 것입니다. 색깔, 크기, 향기, 모양등 제각각의 고유의 이쁜 꽃처럼 사람도 그러할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눈에 성인은 더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됩니다. 성 뽈리카르포와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로 사도교부에 속하며,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 ‘하느님을 모시고 다니는 자’라는 뜻의 ‘테오포로스’로 불리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보편교회의 의미인 가톨릭교회란 용어를 사용한 교부이기도 합니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로마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고 이곳에서 주교로 일하다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순교하기까지의 여정을 보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쇠사슬에 매인채 병사들의 감시하에 배를 타고 해로로 또 육로로 곳곳을 걸어 기나긴 여정 끝에 로마에 도착하여 맹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이런 와중에 일곱 개의 주옥같은 서신들이고 마지막은 성 폴리카르보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참으로 순교가 너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이런 서간을 썼다는 자체가 주교의 놀라운 믿음의 깊이를, 내적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간에 나오는 감동적인 성인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시작이요, 사랑은 완성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서간>
“이제 출산의 고통이 저에게 다가와 있습니다...제가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고, 또 제가 죽음의 상태에 있기를 원하지도 마십시오.”<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문득 캘커타의 성녀 데레사와 성 아오스팅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계시다.”
(Where there is love, there is God)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
(Love and do what you like)
오늘부터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 서간이 계속됩니다. 오늘 에페소서 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에 대한 찬가가 감동적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서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합니다.
우리는 매주간 월요일 저녁성무일도때 이 찬미가를 노래합니다. 이 찬미에서는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입니다.
1.우리는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2.우리는 사랑 안에서 그분앞에 설 수 있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3.우리는 그분의 자녀들로서 양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4.우리는 영광스러운 은총의 찬양이 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5.예수님께 불림 받음으로, 우리는 그분의 피로 구속 받았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불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의 사랑이 바오로 사도는 물론 이냐시오 주교의 순교를 가능하게 했음을 봅니다. 사랑의 순교입니다. 새삼 순교야 말로 주님 사랑의 극치이자 사랑이신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의 무지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은 계속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로 상징되는 악순환의 부정적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공경하면서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역설적 현실을 고발합니다. 그러니 과거를 똑바로 기억하게 하는 역사교육,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깨어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되는 악순환의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지금까지 흘린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세가 참으로 결연합니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는 못된 심뽀를 지닌 율법 교사들 역시 불행선언의 대상이 됩니다. 이후에도 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립니다. 회개는 커녕 참으로 완강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이, 무지의 악이, 무지의 죄가 얼마나 깊고 큰지 ‘주님의 전사들’인 신자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의 역사입니다. 참으로 남북한은 물론 세상의 모든 광적(狂的) 호전(好戰)세력들은 자숙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한반도의 역사인데, 이제 남북이 좀 간신히 살만하게 되었는데 무지한 이들로 인해 참으로 어리석게도 일촉즉발의 전쟁상태라 우려합니다. 전쟁이 아니어도 힘든 세상에 해결해야할 난제들 투성이인데, 정말 더 이상 피흘리는 악순환의 역사는 없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기도합니다.
참으로 세상의 빛이자 소금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역할이 큽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어, '그리스도의 지혜'가 되어, ‘그리스도의 평화’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추(晩秋)의 계절, 날마다 저마다 사랑의 이쁜 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하나되어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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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사람아 어디 있는가>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0,47)
선이 스민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악이 스민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그대 사람아
어디 있는가
사랑이 흐른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미움이 흐른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그대 사람아
어디 있는가
축복이 깃든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저주가 깃든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그대 사람아
어디 있는가
살림이 넘친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죽임이 넘친다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그대 사람아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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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열쇠는 율법 자체를, 그분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됨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율법은 그림자요 예형이지만,그래도 그 예형들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리켜 주고 그 그림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모세 율법에 따라 어린양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들은 양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천사들을 피했습니다. 보통 양의 피로는 죽음을 물리칠 수 없지요. 이 어린양은 그리스도의 예형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을 살리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고 당신을 믿는 자들을 그 피로 구원하십니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그림자로 드러내신 당선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예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5-46)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또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고도 하셨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모세가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예언자들이 한 모든 말 또한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우리에게 밝혀 준 것입니다. 그분의 구원을 미리 선포한 것이지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신성의 가장 높은 곳은 겸손의 심연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겸손을 가리켜 자기를 깎아내리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정의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라면 “업신여김받는 것을 업신여길 것이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에게로 내려오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 안으로 들어간다. 겸손의 목적은 하느님을 끌어내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안으로 모셔 들이는 데 있다. “위에 있던 것이 안에 있게 되었다.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 있게 하려면, 여러분이 혼자의 힘으로 여러분 안에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곳인 이 안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 안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영혼의 터는 어둡다”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자신의 참모습 곧 캄캄하고 어두운 심층을 회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둠을 더듬어 답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겸손이다.(260)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고통당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성모님은 히야친타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으셨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마지막 발현때 당신 권고를 따르고 당신 자애하심에 의탁하는 자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고 히야친타로 말하자면 그 사랑과 인내의 덕에 당연히 들어 주시고도 남을 만한 자격이 있기에 말이다.
히야천타가 고통스런 병석에 못박히게 된 때부터 예수님과 마리아께 대한 사랑은 오로지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마음과 희생 정신은 날로 더해 갔고 굳혀져서 마치 임종이 다가온 것을 알고 보다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화관을 얻으려고 전력을 다 기울이는 듯했다. 겁장이고 변덕스럽던 그녀는 이제 순교자들이 드러낸 그리스도교적 용기와 굳셈을 훌륭하게 습득한 것이다.
병석에 눕게 되자 그녀는 학교에 다닐 때보다 훨씬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자주자주 “아아, 예수님. 나는 주님을사랑합니다.” 라는 화살 기도를 되풀이할 수가 있었다.
루치아가 등 • 하교의 전후에 병문안을 오면 둘은 함께 이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수님께 자주자주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주 좋아. 예수님께 그렇게 말씀드릴 때면 내 가슴에 불이 불는 것같이 느껴져. 그렇지만 그 불꽃은 나를 태우지는 않아."
아, 이 소녀는 이 불꽃이 모든 사람들 마음에 옮아가 타기를 얼마나 원하였을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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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11,51)
논어 「태백편泰伯編」에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선비는 견식이 넓고, 의지가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선비의 소임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니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할 것이니 그보다 더 먼 것이 또 있겠는가?』 여기서 ‘任重道遠임중도원’은 맡겨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는 뜻으로 증자의 이 말은 공자의 가르침이며 유가의 가르침의 핵심인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을 학문하는 선비의 평생 소임으로 삼아야 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이 자신들에게 위임된 율법의 핵심인 하느님의 ‘헤세드hesed: 불변의 사랑, 호의, 인자 자비 등, 창47:29; 신7:9; 미 7:20’를 실현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맡겨진 막중한 소임을 충실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여라!, 고 선언합니다. 그 소임에 충실하지 않은 일의 책임을 물어서 “너희는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11,51)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단적인 불성실한 무책임의 실례가 바로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11,52)라는 말씀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율법 교사들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죄가 참으로 작지 않고 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그들은 단지 “예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무덤을 만들었을 뿐”(11,48)만 아니라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지식의 열쇠를 감춰버리고, 자신들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도 막아 버린 우매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문을 열어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렸으니 말입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듣기 싫고 부담스럽다고 예언자들을 배척하고 죽였던 것처럼, 그런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의 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는 열쇠를 의미하지만, 이는 천국 문을 여실 그리스도라는 열쇠를 말하는 것입니다. 묵시록에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3,7)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지식의 열쇠’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주님만이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들은 예언서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숨기고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치워 버리고(=숨기고) 자신들은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고 믿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들어가려는 문을 닫아버렸기에 곧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막았기에 예수님께서 이토록 질책을 율법 교사들에게 쏟아 내신 것입니다. 이는 당대의 식자들과 기득권 세력들만이 자행했던 무지와 어리석음의 죄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 무지와 그로 인한 어리석은 역사의 아픔과 상처를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어느 때든지 가장 우매하고 어리석고 유치한 부류가 바로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종교인들과 정치가들이며 이들의 오만과 자만의 결과물과 그 무거운 짐은 언제나 힘없고 무죄한 소시민, 대다수 국민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무게를 저 또한 느낍니다. 저 역시도 과거의 불편한 유산에 대한 책임 의식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은 일차적으로 반민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고, 특히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통해 친일 잔재 세력 청산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보상은 받았지만, 배상을 포기’했었습니다. 그러나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대법원의 판결로 이를 번복하고 배상 책임이 일본의 기업에 있다고 판결하였죠. 그런데 『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가 간 약속을 위배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국가를 우방으로 대우할 수 없다.』는 아베의 망언과 이런 논거에 근거해서 경제 보복을 단행함으로써 수면 아래 침잠되어있던 한일 과거사 문제가 촉발되었습니다. 한일 과거사는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람직한 한일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과거 기성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를 확실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과거 경제 부흥과 성장에 급급해서 ‘일본의 강제 징용에 대한 배상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외면하고 방치해 온 과거 정치 지도자의 침묵의 죄가 큼을 명심해서 ‘과거사 정리와 매듭’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겠지만’ 이 나라의 의식 있는 모든 국민의 성원과 열망에 힘입어 지혜롭게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행동해 나가길 바랍니다. “주님, 과거가 현재에 넘겨진 문제 앞에 우리 모두 침묵하지 않고 무관심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고, 문제의식과 책임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를 흔들어 깨워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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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만 /
박윤식 [big-llight] 2024-10-16 ㅣNo.176832
오늘 10월 17일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이다. 성인은 현재 튀르키예의 안타키아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던 그곳서 활동하다가, 107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가는 곳마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리스도와 교회의 구조와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하여 슬기롭고 심오하게 서술하였고, 지금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일컬어 처음으로 '가톨릭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나는 모든 교회에 쓴 편지에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은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말고,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이것이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되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해 주십시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따르면, 그는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세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도 성 베드로의 뒤를 이어 주교로 임명되었다. 약 40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를 위해 헌신하던 주교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된다는 사실은 전 교회의 큰 슬픔이었다.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중에 그는 모두 일곱 개의 편지를 썼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문헌학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내용면에서 가치가 높은 역사적 문헌들이다.
바오로 사도도 에페소 감옥에서 그가 세운 최초의 교회인 필리피 신자에게, 마치 이냐시오 주교의 뜻과 일치하는 ‘목표를 향한 달음질’을 언급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를 본받는 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이미 자주 말하였는바, 많은 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럽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신앙인의 자세에 언급한 바가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이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이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로마로 압송된 이냐시오 성인은 107년 경 12월 20일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맹수형을 받고 사자의 밥이 되어 장렬하게 순교했다. 그 후 신자들이 남은 유해 일부를 정성껏 모신 후에 안티오키아에 옮겨 안장했고, 7세기에 다시 로마로 옮긴 후에 성 클레멘스 대성당에 모셨다. 1969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정신에 따른 전례 개혁 이후, 가톨릭교회는 그가 죄수의 몸으로 압송되어 로마에 도착한 10월 17일을 주교 순교자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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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침 오늘 복음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겪을 박해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어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의 편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오늘의 영성체송인 “나는 그리스도의 밀알이다. 짐승들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깨끗한 빵이 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순교하러 로마로 가는 길에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저기에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며,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는 죽음을 새로운 탄생으로 생각하여, 순교를 출산의 고통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그는 순교가 성찬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습니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자신이 맹수의 먹이가 될 때 그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밀알로서 맹수의 이빨에 갈려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깨끗한 빵”은 제물로 바쳐지는 빵을 가리킵니다.
그는 순교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고, 그리스도의 빵이 되어 하느님께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망은 성체성사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체성사로써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과 일치되었기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도 동참하고 그 자신도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와 하나 되어, 우리도 깨끗한 밀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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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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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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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내 삶의 뿌리를 살펴봅시다!
혹시 지금까지 이 세상 살아오시면서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공개석상에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인 있는가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야! 빨리 그 가면을 벗어라!” 라든지 “인생을 그따위로 살지 마라!” 라는 식의 충격적인 말.
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가슴이 부들부들 떨릴 것입니다.
복수심에 이를 갈 것입니다.
어떻게라도 반격하고 되갚아 주기 위해 골몰할 것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쌍날칼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눈에 제일 먼저 포착된 볼썽 사나운 광경이 있었으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짓 목자들, 오직 자기 배, 자기 주머니 채우는데 혈안이 된 지도자들의
타락과 횡포였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함께 가던 유다 문화 안에서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고스란히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으로 슬픔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종교의 권위를 등에 업은 지도자들의 횡포 앞에, 착취와 희생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죄가 있었으니, 자신들뿐만 아니라 아무 잘못 없는 백성들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죄입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 예수님께서는 큰 껄끄러움과 부담을 무릅쓰고 거짓 지도자들의 회심을 촉구하는 강력한 펀치를 날리고 계신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에게도 강력한 펀치가 날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신속한 회심을 촉구하는 주님 편의 신호라고 보면 거의 정답입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강력한 한방이 날아올 때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 삶의 뿌리를 한번 돌아볼 일입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해볼 일입니다.
결국 그 강력한 한방은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마음, 어서 빨리 당신께로 돌아서라는
자비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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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유다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정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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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들의 조상이라 말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당신도 예언자이기에 그들이 당신도 똑같이 죽일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조상으로 삼지 말고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조상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조상이면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러면 조상이 한 그대로 살다가 조상이 저지른 모든 죄까지 벌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이 그들에게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을까요? 조상까지 나무라는 예수님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손임을 고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말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면 곧 하느님 백성일까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면 한국 사람일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진정한 한국인이 되려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세금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만 가지면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면 그는 더는 진정한 한국 사람이 되는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나의 목표가 주민등록증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인 ‘힘의 길’이란 유튜버가 있습니다.
그가 유전자 검사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결과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였고 시베리안 피도 섞인 56.06%의 동아시아인, 그리고 동유럽과 핀란드인 피가 섞인 35.6%가 유럽인, 4.84%의 아메리카 원주민 피가 섞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왜 놀랐을까요? 자신은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시베리아인 피’가 섞여 있어서 보드카를 좋아하고 눈이 좋은 것 같다고. 이렇게 우리는 조상을 알면 그 조상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조상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한국말’밖에 못합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처럼 자신도 미국인이라 생각했다면 분명 영어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이란 생각이 강하기에 한국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미국인이지만 본인이 한국인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이미 완성된 것으로 규정해 놓고 그것으로 만족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힘의 길’ 씨 앞에 아버지가 계속 계셨다면 영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영어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사생활이라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이미 유튜브에서 밝힌 사연이라 말씀드리겠습니다.
힘의 길 씨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서 결혼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아기를 데리고 한국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머니처럼 한국말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발전은 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를 배우는 것에만 한정된 이야기이지
이분이 인성적으로나 세상의 측면에서 발전이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 대상보다 내가 너무 못나서 벌레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하기에 하느님 자녀가 되라는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이 앞에는 항상 자신을 아직 많이 부족하게 여기게 만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자신처럼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대상이 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습니다.
JTBC의 ‘말하는 대로’에 샤이니의 ‘키’(Key)가 나와 팬들과 소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26세였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나답게 사는 법’이었고 제목은 “닭이 닭답게 못 사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습니다.
키의 이름은 김기범입니다.
그는 왜 자신을 닭이라 여겼을까요?
처음엔 샤이니 모든 멤버들이 ‘백조’란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백조로 태어나서 금수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는 몇 번의 오디션에 떨어지고 간신히 붙은 경우입니다.
그리고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5위였습니다.
멤버가 다섯 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아는 사람은 부모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음을 압니다.
처음부터 백조였다는 말은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오히려 가수 키는 다른 멤버들은 ‘백조’이고 나의 출신은 ‘닭’이니 닭답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자기답게 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분명히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을 믿어야만 이렇게 겸손해집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을 통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신 앞에서 자신은 닭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샤이니 멤버 중 점점 인지도가 향상하는 가수는 키라고 합니다.
요즘 개인 앨범도 내고 많은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발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닭’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분명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하느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닭이니까 백조보다 더 열심히 살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자는 결심입니다.
그는 주근깨도 찢어진 눈썹도 가리지 않고 방송에 출연합니다. 자신은 닭이니까.
그래서 어려운 연예계에서 무탈하며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려면 내가 될 수 있는 최대치의 대상을 내 앞에 두십시오.
마치 아기가 부모를 앞에 두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대상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이 완성되면 거기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멈추지 않고 발전하려면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셔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베드로처럼 물 위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목적지는 세례받는 것, 혹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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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47-52).”
1)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겉으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장식하면서 그 예언자들을 존경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지금’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고 있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들과 다를 것이 없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라는 말은 ‘지혜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뜻이고, 사실상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이 받은 박해와 예언자들의 죽음을 예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받은 박해와 예언자들의 죽음을 다 알고 계신다는 뜻이고,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살인자들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을 인용한 말씀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언자들을 죽인 살인자들을 하느님께서 처벌하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라는 말씀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박해하고 죽인 일은, 그들을 파견하신 하느님께 반역한 큰 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2) 박해받고 죽으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려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인데,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예언자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자들은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왜 하느님께서는 곧바로 처벌하지 않으실까?” 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2베드 3,9).
3)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옛날의 일’만은 아니고,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입니다.
옛날에 죽은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성지를 조성하고, 현양 사업을 하는 것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양 사업으로만 그치고 오늘날의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위선자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정말로 예언자들과 순교자들을 현양하려면,
‘말씀’을 잘 새겨듣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삶이 따르지 않으면 성지 조성 사업이나 현양 사업들은 모두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대중 매체의 발달 덕분에,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경로로 하느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 싫어하고, 복을 받는 방법에 대한 강의만 좋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박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직접 박해하지는 않더라도,
그 ‘말씀’ 자체를 박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받게 될 박해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인 자들이, 또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는 일이 오늘날에도 흔히 있습니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회개시켜서 바로잡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밖에서 볼 때에는 신앙인들끼리 서로 “내가 옳다.”고 다투는 모습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진짜로 옳은 쪽이 어느 쪽인지,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
첫 번째 기준은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요한 13,34-35).
사랑 없이 미움과 증오심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틀림없이 잘못된 신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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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47-54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 중에 “병 주고 약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떤 사람이 병들게 만든 사람이 그 병을 고치라고 약을 지어준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나서 마치 본인이 선심을 쓰는 것처럼 도와주는 체 하는 교활한 모습을 비판하는 말이지요. 이처럼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흥부전’입니다. 놀부는 동생인 흥부가 다리를 다친 제비를 정성껏 치료해 준 보답으로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리를 다친 제비가 나타나지 않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직접 제비를 잡아 다리를 부러뜨리지요. 그리고는 자기가 부러뜨린 다리를 치료해 준 후, 자신에게도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박씨’를 물어다주기를 기대하며 그 제비를 날려보냅니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행동을 한 대가로 ‘복’이 아닌 ‘벌’을 받게 됩니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록 잘못된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병’을 주었지만, 그 대가로 ‘약’을 주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행위에 대한 결과의 값이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0’이 된거 아니냐고. 그러나 잘못은 보상으로 ‘퉁’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약을 준다고 해도 병든 사람이 겪는 고통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으며 그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배상을 해준다고 해서 ‘가해자’가 한 옳지 못한 행동이 정당화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피해보상’을 했는가 안했는가의 여부와는 별도로 ‘가해자’는 본인의 행동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해야 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굳게 결심하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즉 참된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배상’을 넘어서는 정성어린 ‘보속’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는 것이 바로 그들의 ‘병 주고 약 주는’ 모습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제대로 보속하기 위해서는 그런 잘못을 저질렀음을 진심으로 마음 아파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지어주는 것으로 자기 조상들이 지은 잘못을 ‘퉁’치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우를 다 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다고 ‘선’을 그으려고 했습니다. 진심어린 ‘통회’도, 정성어린 ‘보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했고, 그랬기에 조상들보다 더 큰 잘못, 즉 하느님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대죄를 짓게 된 것이지요.
나의 잘못으로 누군가에게 ‘병’을 주었다면 단순히 ‘약’을 주는 것만으로 내가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고,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 합니다. ‘이 정도 했으면 된거 아니냐’는 성급하고 섣부른 말로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끈기를 가지고 그가 받은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슷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생깁니다. 그래야만 다친 사람도 나도 ‘아픈 만큼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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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시면서 그들의 조상들처럼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 역사 안에서 조상들이 저지른 무고한 이들을 죽인 잘못, 예를 들어 카인이
동생 아벨의 죽인 잘못(창세 4,8-10)과 성전의 번제의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즈카리야를
죽인 유다 임금 요아스의 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야다의 사제의 아들 즈카리야는 하느님의 영에 사로 잡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긴 왕과 백성의 죄에
대해서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즈카리야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돌로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그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2역대 24,22)하고 외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해석을 잘못해서 백성들을 장님으로 만드는 율법학자들을 향해
비난을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식대로 제한적이며 율법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느님의 참된 뜻을 막아 버려
사람들이 구원의 성경으로 가는 길을 막아 버렸던 것입니다.
바라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참된 구원의 길을 막고, 조상들이 무고한 이를 죽이고
또 백성을 장님으로 만들 듯이, 주님의 복음 선포를 막을 뿐 아니라 장차 주님의
생명까지 뺐으리라는 예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상에 살괴 있다면 무고한 이들을 희생 시킬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또 실천해야 할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정의를 저버리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뜬소문이나 근거 없는 말로서 이웃을 해치는 것도 생명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공동체에 살면서 때로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가 하면
다 옳고 남이 하면 다 그르친다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소문을
퍼트리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다 자기와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것입니니다.
여기에는 자기희생이나 공동체 사랑은 뒷전이고 자기 얼굴이 먼저이지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앞에서 무고한 이를 죽이는 책임을 물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시지요.
내가 함부로 이웃을 판단하는 것, 내 짧은 경험이나 느낌만을 가지고 다른 이게
자기가 내린 것이 정확한 판단인양 말을 내 뱉는 순간부터 그 말은 여기 저기
떠돌며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 중에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은 그 만큼 힘이 있지만 또 부정적으로는 생명을 꺽거나 또한 무고하게
죽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신을 향해 앙심을 품는 것도
바라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는 ‘쓴 잔’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십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용기와 구원을 향한 사랑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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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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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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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7.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슬픔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꾸는 삶
<2024.10.17> 아침을 여는 묵상 (애 1:1~11절)
❝슬픔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꾸는 삶❞
❚ 죄 가운데 거하게 될 때, 이전에 주님과 함께 누렸던 모든 기쁨과 영광을 빼앗기게 됩니다.
✔ 희망으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 진정한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1~4절).
‘슬프다 이 성이여...’ 비극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감탄사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표현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 성의 상태는 ‘적막함, 과부 같이 되었고,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1절). 과거의 영화로웠던 모습이 사라진 것에 대해 시인은 애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4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순례자들로 붐볐던 도로가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 없기에 길들이 슬퍼합니다. 성문 역시 황폐하게 되어서 적막만 흐르고 있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없으니 제사장들은 할 일이 없고, 처녀들도 할 일이 없고, 근심만이 남아 있습니다(4절b). 더더욱 시인으로 하여금 슬픔의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자들, 친구들..’(2절)은 남유다가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었던 주변의 이방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을 당할 당시 그렇게 믿었던 애굽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에돔은 오히려 유다의 성읍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히 의뢰할 대상이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절대자가 되시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위로자가 되심을 다시 한 번 깊이 마음에 새겨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삶은 적막함과 공허함 그리고 슬픔의 노래 밖에는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들에게서 그들이 이전에 누리던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빼앗아 가십니다. 습관적으로 짓는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은혜와 평강을 부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죄는 지금 당장 쾌락과 번영을 줄 것처럼 보여도 실상 죄는 참된 기쁨과 평안을 빼앗아 갈 뿐임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슬픔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꾸는 삶이기를 소원합니다.
➲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회복해야 합니다(5~8절).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도 아니요, 주변 강대국들의 등장으로 인한 결과도 아닌 유다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토록 한 원수들은 오히려 형통해 갑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상태로 전락해 갑니다.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혀가고,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습니다. 지도자들은 적들에게 힘 한 번 못쓴 채 달아나고 말았습니다(5~6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만큼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회개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손을 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리 자신들을 판단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에서 화려했던 지난날을 생각(7절)해 본 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 많은 영적 수치스러움을 당하기 전에 빨리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를 버리고 능력의 공급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비방거리가 되고 비웃음을 받게 되며, 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마 5:13). 그렇기에 죄를 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잃어버린 거룩을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상태에까지 가지 않도록,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통해 슬픔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 절망의 현실에서 자비의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9~11절).
이스라엘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부정과 불경건한 죄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러운 것이 옷깃에 묻어 있어도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9절a). 이는 큰 죄악에 빠져 있음에도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자신들을 위로해 줄 사람조차 없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놀랍도록 낮아짐’을 당하였습니다. 아울러 제사장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성소에 바벨론 군대들이 들어온 그 자체만으로도 큰 범죄가 되는데, 성소 안에 있는 기물들을 약탈해 가고, 파괴하였으니 이는 이스라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10절). 백성들의 생활은 양식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가진 모든 보물들을 팔아야 했습니다(11절). 예레미야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을 바라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민족을 돌보아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생명력을 빼앗가 가십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이 모든 보물을 대적들에게 빼앗겼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에서 결코 떠나시지 않도록 그래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 그리고 환난 중에 거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생명을 지탱하기조차 힘든 상황에까지 이르렀을 때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리의 슬픔의 노래가 희망의 노래로 바뀌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들을 보면서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탄식하며 기도하므로 이 땅의 모든 교회가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순간적이고 썩어 버린 세상의 쾌락 때문에, 영원토록 이어질 희락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여 절망의 현실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사모하여 슬픔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꾸어 나아갈 수 있기를(애 1: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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