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89
6월15일[연중 제10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93uEUFRcEs
[인천교구 김영인 사도요한(선학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 맹세!>
맹세 비슷한 용어가 있습니다. 공약입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어떤 사업이나 일에 대해 백성들 앞에 실행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들은 ‘혹시나?’ 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역시나!’하고 실망합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촛대, 금속판, 금화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간에 오고 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돌아보니 지키지도 못할 실없는 약속들을 참 많이 남발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습관처럼 빈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조만간 전화 한번 할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맹세합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주님,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선심 공약, 빈말, 거짓 맹세, 탓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도 말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가 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말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기도할 때도 깊은 침묵 기도보다는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던가 봅니다.
뿐만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강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심지어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머리를 두고까지 맹세하곤 했나 봅니다. 허언(虛言)을 남발하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정확한 한 가지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을 할때는 복잡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잔머리를 굴리지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솔직해지라고 하십니다. 덧붙이지도 빼지도 말고 마음속에 있는 언어, 그대로를 표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느낌, 사랑의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내용이라든지,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 상할 것이라면, 얼마나 또 망설여지는지요?
정직하고 진솔한 언어 사용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상을 향한 기도와 정중한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그를 아예 무시한다거나, 깔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조언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상대방을 향한 솔직한 언어 사용이지만, 상대방의 성장과 선익을 간절히 위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어려운 직언(直言), 고언(苦言), 충언(忠言)도 가능하게 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오 5,33-37)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요즘 애인이 변심했다고 하여 애인을 찾아가 보복을 해서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애인의 집을 차로 들이박는 것은 그나마 애교에 불과합니다. 정말 엽기적인 사건들도 많이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여 치과의사가 변심한 옛 남자친구가 치통을 호소하자 치아 32개를 몽땅 뽑아 보복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믿어야하는데 그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나다보면 헤어질 수도 있을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요?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척이 잠깐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가지고 있는 현찰, 그러나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을 차용증도 없이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억 단위를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을 잘 믿고 베푸는 사람인데 자신에게 왜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났는지 답답해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굳게 믿었는데 배신이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느님처럼 완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믿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완전합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까?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잘못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완전하지 못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은 완전할 것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맹세를 한다는 의미는 그 맹세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맹세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완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꺾으십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자신이 맹세를 지킬 수 없는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은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맹세도 하는 것입니다. 아예 말에서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우리 힘이나 말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자꾸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앞으로는 미사도 빠지지 않고, 성경도 매일 읽고,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는 바리사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저는 당신 도움 없이는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어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겸손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여주기만을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눈에는 성모님께서 많은 일을 한 이들보다 더 좋아 보이시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우리 부족함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어야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서품을 받으면 성사적으로 사제는 미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교구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야 합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교구장님으로부터 ‘전국공용 교구사제 특별권한’을 받았습니다. 교회법 규정에 따라 교구장이 아닌 사제는 신자사목에 있어 교구장으로부터 위임 또는 허락을 받아야만 유효하고 합법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항들이 있는데 교구사제 특별권한이란 교구장이 특정 사항에 관한 자기의 직권 중 일부를 자기 소속사제들에게 관례적으로 위임하거나 허락할 수도 있는 권한입니다. 한국과 같은 1일 생활권에서는 비록 소속 교구가 다를지라도 해당 교구의 교구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지 않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2005년 캐나다 토론토에 연수 갔을 때입니다. 저는 토론토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Faculty)을 받았습니다.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에 저는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뉴욕 브루클린 교구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텍사스 댈러스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신청하지 않았지만 서울 대교구와 댈러스 교구의 협의에 따라서 댈러스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난 4월 26일에 저는 포트워스 교구에 속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저는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먼저 포트워스 교구로부터 혼인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 할 수 있는 것은 사제 본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운전면허증도 비슷합니다. 저는 뉴욕의 운전면허증이 있지만 댈러스로 주소를 옮기면서 텍사스 운전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텍사스 주는 주소를 옮기면 반드시 운전면허증을 바꾸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이 잘못하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잘못하면 발을 잘라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은 행위로 인해서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위 이전에 생각과 마음만으로도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된다고 하십니다. 율법을 어기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대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기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기를 기원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33-37: 맹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이며, 맹세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절)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진실한 사람으로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보이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맹세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하십니다. 맹세 자체를 금지하시면서 거짓 맹세를 못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함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면, 맹세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진리에 대해서 하느님을 걸고 맹세할 만큼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한 말에 오류가 있다면, 내가 한 맹세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지 기억한다면, 내일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맹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26,34-35)라고 맹세합니다. 이 무책임한 맹세는 거짓 맹세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맹세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반대로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맹세 대신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1) 이 말씀은,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와 제8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와 관련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두고’, 또는 ‘하느님을 걸고’ 맹세하는 일은, 하느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죄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또 그 맹세가 거짓 맹세라면 십계명 제8계명을 위반하는 죄가 됩니다. 여기서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맹세할 때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하려고 사용한 표현들인데, 그런 것들을 두고 맹세한 것은 사실은 하느님을 걸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니까 신성 모독이 아니라고 억지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주장 때문인지,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맹세를 아예 하지 않으면, 맹세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2) 신약성경 히브리서를 보면 ‘맹세’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히브 6,13-14)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히브 6,17)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말씀은 창세기 22장 17절입니다. 창세기에서 그 부분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창세 22,16) <하느님께서는 왜 굳이 ‘맹세’의 형식을 사용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맹세’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배려일 것입니다.>
그처럼 하느님도 ‘맹세’를 사용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맹세’ 자체가 악한 일이기 때문인 것은 아닌 것이고, 악한 의도로 맹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보면, ‘맹세’의 형식을 사용한 경우가 보입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2코린 1,18)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합니다. ...... ."(2코린 1,23)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한다.’ 라는 말과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한다.’ 라는 말을 겉으로만 보면, “아예 맹세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오로 사도가 정면으로 거스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은 “내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 같은 세상 사람들의 맹세와는 다른 것이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3)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라는 말씀은,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는 ‘선’을 뜻하고, ‘아니요.’는 ‘선’이 아닌 것, 즉 ‘악’을 뜻합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선’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고, ‘악’을 ‘악’이 아닌 것처럼 꾸미는 인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선’을 ‘선’이라 하고, ‘악’을 ‘악’이라 하는 것은 진실을 진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선한 일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악한 일을 하면서도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선한 일이다.”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바오로 사도를 죽이고 싶어 했던 자들이, 자기들은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을 두고 맹세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마흔 명이 넘는 사람이 바오로를 치려고 매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없애 버리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습니다."(사도 23,21)
그들이 하느님을 두고 한 맹세를 지켰다면 굶어죽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진심으로 바오로 사도를 죽이고 싶어서 그런 맹세를 했을 텐데, 즉 거짓 맹세를 한 것은 아닐 텐데,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하는 일도, 그것 때문에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일도, 맹세를 지키지 않은 일도 모두 악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면, 신성 모독죄가 추가됩니다.>
=====================
[서울대교구 김지영 사무엘 신부님]
어디선가 읽은 글이다. ‘나는 늘 호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닙니다. 어디에 있던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니까요. 이 작은 십자가는 마술도 아니고, 기막힌 행운을 가져다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해악에서 저를 보호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와 구세주의 관계를 이해시키는 것뿐입니다.
호주머니에서 동전이나 열쇠를 꺼낼 때 내 손에 잡히는 이 십자가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치르신 대가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 작은 십자가는 날마다 내가 받은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안에서 그분을 더 잘 섬기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또 매일 나의 스승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과 그분의 돌보심에 의탁하는 사람들과 내가 나누는 평화와 위로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돌봐주시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상기시켜 주기에 십자가를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닙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느끼고 생활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과 욕심이 내 생활을 지배한다면 ‘예’ 해야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이란 늘 호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니며 선택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맡겨 바르고 복음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매순간 순간의 응답 안에서 늘 마음 안에 겸손이 배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도자나 성직자들은 서원식 또는 서품식 때에 서약을 합니다. 또한 평신도들도 세례 때에 서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에 사용된 ‘맹세하다’의 그리스 말 ‘옴뉘오’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맹세를 할 때에도 이 낱말을 사용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를 합니다.(루카 1,73; 히브 3,11; 6,13 참조)
예외적으로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맹세를 하는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헤로데로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마르 6,23 참조) 다른 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대사제의 저택에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맹세를 합니다.(마르 14,71 참조)
이렇게 볼 때 맹세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늘, 땅,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를 하기에 사람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이는 하느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저 우리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에는 “예.”라고 응답하고,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에는 “아니요.”라고 순명하는 것뿐입니다.
=====================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자, 엘리사는 자신의 일생을 스승에게 맡기고 길을 따라 나섭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만난 뒤 하느님으로부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께 오롯한 사랑을 바친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제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두고, 그리고 어떤 대상을 두고 맹세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릇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이나 계획을 미리 계산하고 하는 맹세는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는 진실한 맹세 외에 다른 모든 약속은 헛된 것입니다.
허상을 두고 하는 맹세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약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례 받을 때 하느님 앞에 믿음을 고백하며 서약합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들도 자신을 봉헌하며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빛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덕은 겸손의 덕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가식을 담기 때문에 그릇된 맹세를 하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진실에 대해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습니다.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5,37)
삶에서 최소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꿀 마음을 먹어야 하고,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인간은 습관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로 ‘아니요’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무언가 부정하고 거부한 듯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지만, 사실 이 말은 부정이나 거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제 형의 손찌검처럼, 양성 초기엔 함께 사는 형제의 휘둘림으로 인해 저는 예전처럼 살아서는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내적 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Alain은 「권력욕」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표현하기를, 아니요는 어떤 그 무엇이나 누군가와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강력한 단어이며, 아니요는 불일치를 표시하는 말로, 실제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권력 형태나 외부 압력 앞에서 아니요는 직면하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제시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표현한, ‘생각하는 것은 네라고 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마음에 새기며 살려고 다짐합니다. 알랭은 그래서 “잠든 자는 ‘네’라고 말하고, 깨어 있는 자는 ‘아니요’라며 고개를 내젓는다.”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부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예전에는 제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수도원 입회 후 어떤 사람 때문에 그리고 그가 저에게 한 폭력 때문에 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해 왔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왔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맥락, 즉 참과 거짓 혹은 옳음과 그름의 관점에서 ‘예와 아니오’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겠지만, 아무튼 저는 이런 연유에서 어떤 문제 앞에서 ‘예’라는 말보다 ‘아니요’란 말을 더 자주 빈번하게 표현하며 살아온 편입니다. 무척 자기방어 기제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저를 표현할 때 저는 똥개라고 말합니다. 왜 똥개는 자주 큰 소리로 짖어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스스로가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면 진돗개는 아무 때나 짖지 않습니다. 저는 겉으로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마음이 여리고 약한 사람입니다. 강한 척할 뿐이지.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처럼 그렇게 저를 방어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이젠 더 이상 저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기에 요즘은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회색 인간이 된다는 표현이 있더군요.
젊은 날에는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라고 생각했죠. 나이 들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고 말입니다. 실제로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신 분이 바로 돌아가신 박도세 유스티노 신부님이십니다. 그런 신부님의 표현이 예전에 제 성격이나 성향에 맞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젠 받아들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처럼 '아니요'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서 침묵하며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흑백이 전부가 아니듯이, 흑백만이 진실이 아니더군요. 과거엔 남보다 피곤한 삶을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5,37) 하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달리 아니오, 라고 말해 놓고서 예, 라고 변경하는 경우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진리나 정의 앞에서 우리 모두 ‘예’와 ‘아니오.’가 분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욱 잘못한 권위자 앞에서는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아니요.’라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진정으로 나이 든 사람의 자세와 삶이라 봅니다. 예, 라고 해야 할 때 예, 라고 응답할 수 있고, 아니오, 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 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진리를 아는 사람이고 이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제 삶 앞에 어떤 상황이라도 예할 것을 예하거나, 아니요할 것을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시119,36.29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과 1학년 때, 라틴어를 배웁니다. 솔직히 너무 어려웠고, 사어(어느 나라에서도 쓰지 않는 죽은 언어)를 왜 배워야 하는가 했습니다. 더군다나 매주 쪽지 시험을 보니 라틴어에 대한 압박은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를 가르쳐 주시는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라틴어를 1년 동안 배운다고 해도 유창하게 말할 수 없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은 너희가 사전을 펴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이다. 공부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부는 배우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어떤 강의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혀 얻을 수 없었어도, 배우는 법만 익힐 수 있으면 훌륭한 강의가 됩니다. 주님의 교육 방법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또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어떻게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배우는 법을, 즉 세상에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과 달리 우리는 늘 새로운 것만을 외쳤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기 힘든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고, 자기가 잘못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없애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특별한 것만을, 이제까지 체험하지 못한 것을 달라고 하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일상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을 둔 제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라는 율법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또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우리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뛰어넘어,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상 안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맡기는 것을 무조건 달라는 식의 잘못된 모습이 아닌, 또한 주님께 헛된 맹세를 하면서 조건만을 계속 외치는 위선적인 모습도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 마라>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14,36).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모범 이십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늘 기도 하기보다는 아쉬운 일이 생기면 간절히 매달립니다. 늘 주님을 대면하고 찬미하며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면 놀라서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기도합니다. 이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약속을 마구 해댑니다. 청을 들어주시기만 하면 당신께서 원하시는 무엇이든 꼭 하겠다고 흥정하고 맹세합니다. 때로는 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협박도 합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려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그 맹세를 잊고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을 잊기도 하고 어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섣불리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든 군소리를 덧붙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해서 이러저러한 핑계를 얼마나 많이 댑니까? 나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헛된 약속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권위 아닌 권위를 내세우며 자기 위신과 체면을 살리느라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할 때도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잇속 때문에 하느님을 얼마나 이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히브 6,17-18)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기도 모르는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그러므로 악에는 언제나 ‘아니요’, 선에는 언제나 ‘예’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습니다. ……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합시다. 우리는 불행히도 말로는 부풀어 있고 행동에는 텅 비어 있습니다.”(파도바의 안또니오) 행동으로 따르지 못할 과장된 약속이나 맹세를 거두고 그저 삶으로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헛된 약속을 하지 않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마태오 5,33-37 (정직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나는
이렇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이런 나
나는
하겠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하는 나
나는
되겠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되는 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직하여라>
“참 좋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시편 16,8)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루하루 쌓여온 습관들이 내일을 결정하는 운명이 된다. 굳어진 습관은 갑옷이 될 수도, 벽이 될 수도 있다.”<다산>
“본성(本性)은 서로 가까우나 습성(習性)에 따라 멀어진다.”<논어>
새삼 늘 강조해온 좋은 덕목을 사랑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함이 얼마나 중요하며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하는데 좋은 습관이나 버릇은 평생 반듯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런 면에서 좋고 필요한 덕목들인 기도와 노동, 성독이 균형잡힌 수도원 일과표의 반복된 생활이 좋은 삶의 습관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의 제4 대당명제는 “정직하여라”입니다. 200주년 성서는 “맹세하지 마라”입니다. 맹세하지 말고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몰라 무지해서, 교만과 허영으로 맹세하지, 자기 삶의 실상을 잘 들여다 보는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결코 맹세하지 않습니다. 맹세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고 내 맹세가 확고부동하게 옳은지 확신할 수 없는데 어찌 맹세할 수 있겠는지요! 그래서 정직하라, 진실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정직하면 떠오르는 예화가 있습니다. 여러 번 예로 들었습니다만 예로 들 때마다 새롭습니다. 저를 가장 좋아했던 바로 고인이 된 윗형의 삼형제 아들들, 조카들이 있는데 셋 모두의 삶이 반듯하여 자랑스런 마음입니다. 첫째 조카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국어 선생님이 가훈을 알아 적어 오라 했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셋을 써주셨습니다. ‘1.정직, 2.효도, 3.우애’였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버지 말씀이 더욱 생각이 납니다.”
이 가훈을 듣고 어찌 덕목의 첫째로 정직을 선택했는지 저는 형의 착상이 참 신선함에 감탄했습니다. 사회생활에 정직하고 진실한 삶이 상호신뢰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실로 지대합니다. 그래서 50살 전후의 삼형제 조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정직하고 효도하며 우애좋은 형제들로, 또 사회생활도 잘하며 살아갑니다.
한 예를 더 들면 세 조카들은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몇날 자리를 비울때는 셋이 나란히 ‘잘 다녀 오시라’고 큰절을 했고 다녀온 후에도 ‘잘 다녀오셨냐’ 인사하며 셋이 나란히 큰 절을 했습니다. 제가 방문할 때도 아이들을 불러 저에게 절을 시켰고 아이들은 고분고분히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아이들처럼 키워도 되나 속으로 웃으며 반신반의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음을 지금서야 깨닫습니다. 그대로 윗 형님인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이지요. 그래서 삼형제 조카들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밑거름처럼 어렸을 때 형성된 좋은 덕목의 영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을 발함을 봅니다. 마리아 성모님께 효도로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능가할자 없을 것입니다. 로마를 떠나 사목방문차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반드시 성모경당에 들려 성모님께 인사드리는 교황님의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은 늘 강한 인상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주 단호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혀지는 지극히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저절로 개탄하는 마음이 됩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무지에서 벗어나 주님을 닮아 진실하고 정직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진리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단호합니다. 삶은 지극히 단순담백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런 이를 일컬어 진국이라 합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실을 사실대로 참되이 말하면 충분한데 맹세 따위 군말을 붙이는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문득 교황님의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본의 아니게 과장된 말이나 뒷담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악마가 끼어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일치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 5,12)
맹세는 물론이고 구구하게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요 저절로 침묵이 뒤따를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진실과 겸손한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연인으로 불리기를 바랐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얼마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진리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도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며 순수하고 지혜로운 두 인물을 만납니다. 평생동안 주님이 주신 제 사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한 엘리야, 이제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정하니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엘리야를 따라나서기 전 단호하게 말끔히 뒷정리를 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참으로 진실하고 거룩해 보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시중을 들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합니다. 파부침선(破釜沈船)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납니다. 글자 그대로 ‘가마솥을 부수어 못쓰게 하고 배를 침몰시켜 탈 수 없게 한다’는 의미로 밥을 지을 가마솥도 없고, 살아도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선택지는 오로지 싸우다 죽거나,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 이기는 것 밖에 없습니다.
파부침선의 자세로, 또 뒤로 달아날 다리를 불살라 버림으로 퇴로를 차단하고 배수진을 친, 옥쇄(玉碎)까지 각오한 결연한 참된 순교적 삶의 자세로 흔쾌히 스승 엘리야를 따라 나선 제자 엘리사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진실하고 겸손한 참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 119;36.29)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구약을 살 것인가? 신약을 살 것인가?>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번 주 내내 주님 말씀 곧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은 구약의 말씀은 이런데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여전히 구약을 살 것인가? 아니면 신약을 살 것인가? 선택을 요구받는 것인 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대인처럼 구약을 살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신약을 살 것입니까?
당연히 그리스도인답게 신약을 살아야겠지요. 문제는 신약을 살려면 구약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는 미워하되 이웃은 사랑하라는 구약의 법이 있는데 주님은 이웃 사랑에서 더 나아가 원수 사랑까지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신약을 살려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직 신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원수 사랑은 말이 쉽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원수 사랑의 완전한 실천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에서 애초부터 배제하지 말고 더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은 안주하지 않는 우리의 향상(向上) 의지를 촉구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완전에의 도전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우리가 가짐은 물론, 아들답게 살겠다는 우리의 도전 정신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옛사람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 아들답게 늘 새롭게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ㄱ)
<그리스도인의 삶!>
오늘 복음(마태 5,33-37)은 '정직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라는 율법 규정을 언급하시면서,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ㄴ)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그리고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오늘 복음 말씀이 이런 의미의 말씀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치의 저울이 아닌 '하느님의 저울', 세상의 눈금이 아닌 '하느님의 눈금'으로, 옳고 그름을 제대로 식별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저울이요 하느님의 눈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한번 나의 모습을 곰곰이 성찰해 봅시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고 성공을 위해, 양심을 거스르거나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예.'라고 대답해야 할 때, '예.' 하지 못하고,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할 때, '아니요.' 하지 못한 나의 비겁함은 없었는지?'
나의 비겁함을 자비로우신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양심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갑시다!
"주 하느님, 거짓의 길을 제게서 멀리하시고, 당신 가르침으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시편119,29)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qVTdi8XpfGo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 34)
우리의 맹세를
꿰뚫어 보시는
따뜻한 성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자신을
속이는 것도
우리자신입니다.
수 많은
맹세보다
더 값진 것은
단 하나의
올바른
우리들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맹세로
하느님의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일이
우리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뱉은
맹세를 우리가
차버리는
어리석은
우리입니다.
얼마나
깨지기 쉬운
맹세입니까.
연약한
우리들의
맹세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우선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앞에
작아지는
우리들입니다.
헛된 맹세를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 이상
평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차가운
입술과 혀로
맹세를 만드는
삶이 아니라
침묵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다시
뜨거워지는
성심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실한 사랑은
과장된
헛된 맹세가
아니라 오히려
수수한 삶으로
드러나는
단순한 삶이며
소박한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채워지는 기쁜
희망의 날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