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성 가운데 잔 다르크 다음으로 유명한 마리 스크워도프스카(1867~1934)는 러시아 점령하
의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의 교사였고 어머니 역시 여학교 교사였
기 때문에 마리는 교육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러시아는 왜놈들처럼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語와 러
시아 역사만 가르쳤는데, 마리가 다니던 학교 교사 가운데 문경초등학교 박정희 교사처럼 러시아 관
리들 몰래 폴란드語와 폴란드 역사를 가르친 분이 계셨다. 덕분에 마리는 조국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
이 남달랐다. 1876년에는 언니 조시아가, 1878년에는 어머니가 병사하는 바람에 마리는 심한 우울증
에 빠져 평생 시달려야 했다.
1891년 스물다섯 살 때 마리는 몇 년 동안 아르바이트로 모든 돈으로 대학교육이 가능한 프랑스 파리
로 갔다. 먼저 파리로 온 언니 브로니아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있었다. 마리는 곧바로 소르
본대학에 입학했다. 소르본대학은 외국 여성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마리는 수학과 물
리학을 전공과목으로 택해 불철주야 학업에 매달렸다. 지독한 노력의 결과로 마리는 1893년 물리학
사 자격을, 1894년에는 수학사 자격을 취득했다.
1894년 마리는 유명한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마리보다 8세 연상인 피에르는 화학 결정에
대한 연구와 압전기 발견으로 프랑스 과학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물리
학과 수학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에르는 마리에게 평생 과학적 동지가
되자며 청혼했다. 두 사람은 1895년 7월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부터 마리는 마담 퀴리 또는 퀴
리 부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인품과 실력을 존중하며 상대방에게 매우 헌신적이
었다
마리는 1895년 프랑스 과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의 선(線)에 관한 연구를 논문 주
제로 삼기로 채택했다. 우라늄 선은 잠시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다가 연구가 중단된 상태였다. 마리는
남편의 도움으로 광물이 공기에 전기를 통하게 하는 효율 측정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로 마리는 우
라늄을 비롯한 여러 가지 광물들을 측정하면서 데이터를 정리해나갔다. 마리는 과학아카데미에 연구
결과를 보고하면서 방사능은 몇몇 원소의 원자핵이 지닌 성질이라는 점과, 방사능 자체가 알려지지
않은 원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연했다.
이 무렵 남편은 자신의 연구를 접어두고 마리의 방사선 연구에 합류했다. 부부는 마리가 피치블렌드
에서 발견한 새로운 원소를 규명하기 위해 피치블렌드를 가루로 만든 뒤, 방사능이 강한 쪽에서 새
원소를 찾아내기로 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방사능 수치를 재본 결과 우라늄의 300배가 넘는 방사
능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그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부부는 피치블
렌드에 두 가지 방사성 원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부는 두 원소를 분리하여 하나는 마
리의 조국 이름을 따서 폴로늄, 다른 하나는 라듐이라고 명명했다. 연구를 지속한 결과 라듐에서는
우라늄의 9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898년 마리는 이러한 사실을 논문
으로 써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제출했고, 아카데미는 마리에게 3800프랑의 연구비를 지급했다.
마리는 그 돈으로 새 원소를 정제해서 원자량과 주기율표 위치를 알아내기로 했다. 1902년 마리는 피
치블렌드 1톤에서 라듐 0.1그램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라듐의 질량수는 226으로 추정되었다. 1903
년 마리는 이 연구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퀴리 부부는 방사성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그러나 부부는 늘 지쳐 있었고 자주 자리에 누워 지냈다. 방사능에 너무 많이 노출되
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훨씬 뒤에 가서야 밝혀졌다. 부부는 모든 학자들에게 연구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라듐 추출기술을 공개했다.
1904년 피에르는 소르본대학의 물리학과 학과장으로, 마리는 실험실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마리는
세브르 사범대학에서 여학생들을 상대로 물리학을 가르칠 강좌도 배정받았다. 마리는 교육과정을 효
율적으로 개편하고 실험수업을 추가했다. 1906년 4월 19일, 피에르는 산책 도중 빗길에 미끄러져 넘
어지면서 달려오던 마차 바퀴에 목이 끼어 현장에서 즉사했다. 마리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절친
한 동료를 잃은 슬픔에 한동안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 마리는 한 달 만에 다시 연구실로 나가 하
던 연구를 계속했다. 마리는 대학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편이 하던 강의를 대신 맡았다. 소르본대
학 역사상 첫 여성 교수였다.
1911년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는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하여 마리에게 노벨화학상
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과학자가 물리학과 화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는 초유의 경사였지만
프랑스 언론은 잠잠했다. 여성에 대한 악의적인 편견 때문이었다. 대신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를 대거
게재하여 마리의 인격을 모독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 기사를 보고 스웨덴아카데미의 한 회
원이 마리를 공격했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스톡홀름으로 가서 상을 받았다.
방사선 피폭에 스트레스까지 겹친 마리는 심한 신우신염을 앓았다. 마리는 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
한 뒤 다시 실험실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리는 군 병원을
찾아다니며 엑스선 촬영장비를 설치하고 사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마리는 딸의 도움을 받아 부
상병들의 엑스선 사진을 찍어서 몸에 박힌 파편을 제거해주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리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군 병원 200곳에 엑스선 촬영장비를 설치하고 20대의 이동식 촬영실을 만들어 진
료에 활용하도록 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마리는 답지하는 후원금으로 라듐연구소를 세우고 과학자들과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
작했다. 1921년 미국 정부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마리는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은 당시 가격으로 10만 달러에 이르는 라듐 1그램을 마리에게 선사했
다. 귀국한 마리는 든든한 후원금품으로 방사성 원소의 붕괴과정을 정확하게 밝히는 연구에 집중했
다. 연구가 여러 대학으로 확대되고 연구 기회가 많아지자 많은 연구자들이 병에 걸리거나 죽어갔다.
이로 인해 방사선의 유해성에 관한 증거들도 속속 발견되었다. 마리는 방사선 피폭량을 줄이는 방법
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34년 마리 퀴리는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세, 심혈을 기울여 방사선 연구에 헌신한 위대한 일생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아침.저녁 날씨가 금새 추워진 초입의 겨울, 낙엽으로 마지막 풍미를 덮으며 나목으로 변신한 긴 겨우내 채비, 자연이 고맙고 순리가 지혜롭습니다. 싸늘한 날씨 탓으로 움추린 활동, 낮엔 괜찮아 집니다. 많이 걸으시고 즐거운 하루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