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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조선의 태평성대 성종 연간.
승문원 지사(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기관이며 지사는 종3품입니다) 박윤창朴允昌의 딸 박어을우동朴於乙宇同(일명 어우동於宇同)이 성종 11년(1480) 10월 18일에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그해 7월 의금부에서 올린 상소에서 비롯됩니다. 의금부에서는 태강수泰江守(守는종4품 종친을 이르는 말) 이동李仝의 아내 어을우동이 방산수方山守 이난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간통하였으니 벌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태강수 이동은 효령대군(세종의 작은형)의 다섯째 아들의 서자고, 방산수 이난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의 넷째 서자이며, 수산수 이기는 정종대왕의 현손이었습니다. 종친 가문의 불륜!
의금부는 장 1백 대에 고신(신분증) 박탈을 요청했지만 성종은 곤장만은 돈으로 면제케하고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우동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세종 대에 어우동 찜쪄먹을 유부녀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감동甘同!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퍽!)
네...
아무튼 불륜 행각은 웬만하면 사형(!)이었는데 감동은 워낙 고위층들과 줄줄이 동침한 관계로 사형을 면제받았던 것입니다. 방산수는 잡혀가서 그 일을 생각하고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관련자들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주워넘깁니다. 그 중에는,
병조판서 어유소와 직제학 노공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관으로 명궁으로 이름난 부호군 김세적金世勣도 포함.
병판 어유소는 어우동의 이웃집에 피접을 왔다가 어우동과 눈이 맞아 사당에서 동침했고, 정표로 옥가락지를 주었다고 주장했죠.
사헌부에서는 득달같이 이들도 옥에 처넣고 조사를 하자고 하는데 성종이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미 죄가 드러난 듯한 김칭金偁·김휘金暉·정숙지鄭叔墀도 풀어줍니다.
김휘의 경우는 사직동에서 만나 근처 인가를 빌려 동침했다고 방산수 이난은 주장했습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사헌부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자 결국 방산수 이난을 더 깊은 곳으로 유배보내자고 말하게 되는데, 성종은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체면치레하고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는 것이었죠.
방산수 이난이 지목한 사람들이 빠져도 어우동에게 씌울 죄목은 많았습니다. 관계한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것이죠.
어우동은 집에 일하러 온 은장이[銀匠]에게 꼬리를 치다가 - 여종으로 꾸미고 다가가 수작을 부렸어요 - 남편에게 소박을 당합니다. 실록에는 꼬리만 친 것으로 나오지만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성혼은 [용재총화]에서 이 은장이와 이미 동침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우동이 쫓겨난 때는 성종 7년(1476) 병신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왕조실록에는 여기에 다른 이유가 붙어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종부시(종친들 문제를 다루는 부서)에서 이런 상소를 합니다.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이 여기女妓 연경비燕輕飛를 매우 사랑하여 그 아내 박씨朴氏를 버렸습니다. 대저 종친으로서 첩妾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버려서 이별하는데, 한편 그 단서가 열리면 폐단의 근원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동仝의 죄는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소서.
그러니까 바람을 핀 것은 남편이 먼저라는 거죠. 성종은 재결합을 명했는데, 이렇게 집으로 돌아온 어우동은 결국 맞바람을 핀 것이 아닐까요?
소박을 당해서 집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이혼을 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 어우동의 이후 행동은 돌싱의 행위가 아니라 유부녀가 바람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어우동은 집으로 쫓겨가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때 여종이 그런 주인아가씨를 위해 남자를 물어옵니다!
사헌부 아전의 우두머리 오종년吳從年이라는 친구를 꼬셔왔습니다. 인물이 전남편보다 훨 나아서 어우동은 대략 만족... 이로부터 어우동의 본격적인 남자 사냥(?)이 시작됩니다. 어우동은 이름도 바꿔서 자신을 현비玄非라고 부르죠. 연산군일기에는 어우동의 이름이 구마丘麻라고도 나오는데, 구마가 본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사실 없습니다.
아무튼 어우동, 일명 현비는 평소 눈여겨 두었던 방산수 이난을 노려서 그 집 앞에 야시시하게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가 기회를 포착해서 같이 잡니다. 그리고 팔뚝에 자기 이름을 새겨놓게 만들죠. 어우동에 깊이 빠진 방산수 이난에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놀러왔는데 어우동은 다른 남자 잡으러 나가서 집 안이 텅 비어 있었죠. 방산수 이난은 어우동의 붉은 적삼에 이렇게 시를 적어놓았습니다.
물시계는 또옥또옥 밤기운 맑은데 / 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높은 달빛이 분명하도다 / 白雲高捲月分明
한가로운 방은 조용한데 향기가 남아 있어 / 間房寂謐餘香在
이런 듯 꿈속의 정을 그리겠구나 / 可寫如今夢裏情
애절합니다. 애인 없는 방에서 애인의 향기라도 맡으려 애쓰는...
그러고보니 어우동이 남긴 시도 한 편 전하고 있습니다.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 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 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 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 靑山若不曾緘黙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 千古興亡問可知
이 시는 조선 중기 이황의 제자 권응인權應仁이 지은 [송계만록]에 실려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이 시를 지은이가 어우동이라는 말이 있다고 적혀 있죠...^^;;
각설하고, 어우동은 한 남자에 만족하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단오날에 그네를 뛰는데 색기가 좔좔 흐르니, 지나가던 종친 수산수 이기가 여종을 불러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도 이렇게 시작합니다요!)
"내금위의 첩입니다."
수산수 이기는 그럼 같이 자도 되겠구나 생각하고 급한 김에 인근에 있는 집에 들어가 거사를 벌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집에 종 사는 일로 온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을 보고 한 눈에 반해서 냅다 동침!
여종이 수산수의 질문에 내금위 첩이라고 한 이유는 아마도 옆집에 사는 사람이 내금위에 근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내금위 소속의 구전具詮은 어우동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월담해서 동침!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의 사위 이승언李承彦은 어우동이 지나가는 것만 보고도 혹해서 여종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지방에서 새로 올라온 기생이냐?"
뚜쟁이 여종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죠, 냉큼 그렇다고 하자 이승언이 졸졸 어우동 뒤를 쫓아갑니다. 침방에 들어 비파도 타며 즐겁게 놀았다죠. 춘양군은 효령대군의 손자고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이니... 아이구, 이 족보 계산이...
이승언은 이 일로 관로가 막혀버립니다. 김종직의 제자로 뛰어난 인재 소리를 듣던 인물이었으나 과거는 금지당했죠. 다만 재능이 워낙 출중해서(비파 타며 논 걸로도 알 수 있듯이 음률에도 밝고 궁술도 뛰어났습니다) 주변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습니다. 이승언의 아들이 홍명희의 [임꺽정전]의 서두를 장식하는 백정 사위 이장곤李長坤입니다.
또 홍찬洪璨이라는 선비는 과거 급제를 하여 유가(과거 급제를 자랑하는 퍼레이드)를 하던 중에 어우동에게 필이 꽂힙니다. 다만 이 때는 아직 어우동이 태강수의 집에 있었던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그 후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게 됩니다. 어우동도 이 청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슥 훑으니 얼이 나간 홍찬은 뒤쫓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병과 7위로 급제한 청년 하나 인생을 망치는군요.
이렇게 양반들 하고만 잤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서리 감의향甘義享과도 자고 - 이 서리는 등에 다가 어우동의 이름을 새깁니다 - 옆집에 있던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세종대왕의 5번째 서자)네 종 지거비知巨非와도 잡니다.
지거비와는 자고 싶어 잔 게 아니라 하도 통정을 하러 들락거리다가 한밤중에 나가는 걸 붙잡은 지거비가 협박을 하는 통에 입막음으로 같이 잔 겁니다.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큰 옥사獄事가 장차 일어날 것이오."
이게 지거비가 한 협박이었죠. 그런데 밀성군의 힘이 워낙 커서 지거비는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속贖을 바치고 - 그러니까 요새 식으로 이야기하면 벌금형으로 끝난 겁니다. 양반들도 죄 귀양을 가는 판에 벌금형의 약식 기소를 받은 지거비... 물론 이렇게 끝난 것은 아니고 그 후에 다시 상소가 올라가서 결국 먼 동네의 종으로 보내집니다....만 그것도 결국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쳇!)
방산수와 수산수는 3년간 유배를 당하거든요.
앞서 어우동의 여종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어우동의 여종은 열심히 미소년을 잡아다 바치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꽃 피고 달 밝은 밤이면 그렇게 둘이서 쏘다니며 여종이,
"아무개는 어리고, 아무개는 코가 크니 주인님께 바칠만 합니다." 이러면, 어우동은,
"아무개는 내가 하고, 아무개는 네가 하려무나"라고 화답했습니다. 참 돈독한 주종 관계입니다.
이러고 다니니 결국은 풍기문란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가 개입하게 된 것이고 대노한 성종은 법 상 사형은 힘들다는 의견을 물리치고 사형을 선언해버립니다. 사건이 7월에 시작되어 10월에 사형에 처해지니 속전속결인 셈입니다.
실록에는 몇 사람만 나오지만 성혼은 이 일로 국문을 당하고 폄직되거나 귀양 간 사람이 수십 명이고 그나마 다 밝혀진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어우동이 죽은 지 4년 후에 이사준李師準이라는 사람이 정9품으로 승진하려는 찰나 어우동과 관련이 있으니 승진시키면 안 된다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죠. (종9품이 최말단, 정9품은 그 바로 위니 이런 미관말직에도 어우동의 그늘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 여종이 달려와 어우동이 있는 수레까지 뛰어올라서 어우동의 허리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주인께서는 넋을 잃지 마소서. 이번 일이 없었더라도 어찌 다시 이 일보다 더 큰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결국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긴 해도 당장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 위로랍시고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참...
어우동이 하도 막장이어서 당시 사람들은 이게 유전(이라는 말도 없었지만)이 아닌가 의심한 모양입니다. 그 어머니 정귀덕鄭貴德도 한 인물에 한 성깔 한 것 같습니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쉴드를 쳤다고 합니다.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자, 이제 이 포스팅의 주인공이 등장했습니다!
정씨도 색기가 넘쳤던지 자기집 종과 같이 잤다는 혐의가 있더군요. 심지어 아버지 박윤창朴允昌은 어우동에게 "넌 내 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답니다. 정씨는 박윤창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박윤창은 애꾸였다고 하는데, 정귀덕은 성질 사나워 박윤창을 종처럼 부렸다고 합니다. 새로 집을 짓다가 창문 자리를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애꾸눈 놈아, 애꾸눈 놈아, 네가 일을 아는가?"
라면서 새로 얹은 기왓장을 박살을 내기 시작해서 집을 몽땅 때려부술 정도였습니다.
"네가 이미 나의 뜻을 거슬렀으니, 이런 집은 지어서 무엇하랴!"
기세 등등입니다. 남편도 이렇게 다뤘으니 종들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걸핏하면 패서 죽는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 와중에 덩치 크고 잘생긴 종은 데려다 잘해주니, 당연히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소문을 낸 여종과 그 아들까지 정귀덕이 패서 죽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로 잡혀가게 됩니다.
남편 박윤창은 아내가 바람을 펴지 않았으니 풀어달라고 사정을 하는 통에 팔불출 소리를 듣게 되죠. 옥관獄官은 "규중의 일은 은밀한 것인데 네가 어찌 보장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지만 박윤창이 애처롭게 사정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합니다. 이 때가 세조 3년(1457)이니 이 무렵 어우동이 태어났으면 어우동 사건 당시 어우동의 나이는 20대 후반이겠습니다.
아참, 정귀덕은 가뭄이 들어서 풀려납니다. 옛날에는 천재지변이 생기면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잡혀 있어서 생길 수 있다고 해서 가벼운 죄인들은 풀어주었거든요.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성종 19년(1488)에 어우동의 어머니 정귀덕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당연히 수사팀이 짜이죠.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사또가 사건을 총지휘하게 됩니다. 살인사건은... 음, 조선 시대 살인 사건 처리법은 나중에 따로 포스팅하죠. 가뜩이나 이야기도 긴 데...
살인사건이 나면 사죄삼복법死罪三覆法 중앙조정까지 보고가 됩니다. 그리고 중앙조정에서 최후의 조사를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제도가 정상적으로 돌아간 것은 정조 때나 되지만...
아무튼 이래서 어우동 모친 살인사건의 경우도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종친과 인연이 있는 집안이라 그런 건지, 도승지 송영宋瑛이 직접 심문에 나섰습니다.
정씨 살인으로 일가족이 모두 수감되었던 모양이고, 이웃 세 집 사람들도 수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살인사건이 난 이웃집을 삼절린三切隣이라 불러 연대 책임을 지우거든요.
정씨 살인사건의 범인은 아들이었습니다!
정씨의 아들, 그러니까 어우동의 오라비는 박성근朴成根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모친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려서 정씨가 바람을 피우는 현장을 박성근이 목격하고 동네에 소문을 냈던 탓입니다. 정씨는 그 후에 밤이 되면 박성근을 궤짝에 가둬버렸고 옷과 음식도 노비들과 같은 것으로 주었습니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큰 다음에도 토지와 노비를 적게 분배해주니 박성근은 크게 원망해서 드디어 모친 살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일단 친척 집의 힘깨나 쓰는 종놈 둘을 끌어들였습니다. 내은산, 내은동이라는 녀석들이죠. 여기에 계집종 약덕若德이라는 것도 가담합니다. 어느 집 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만일 약덕이 어우동을 모시던 계집종이었으면 대박인데...(그렇게 되면 소설 한 편이...)
그 다음에 정씨가 집을 떠났을 때 해치우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정씨는 종종 친척 조카네 집으로 마실을 갔는데, 이걸 이용하기로 한 거죠. 조카 정소鄭韶의 집에 갔을 때 쳐들어갔습니다. 정소 집의 종 왕석往石도 한 패로 끌어들였고요.
강도를 당해서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금방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어우동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우동이 죽은 다음에 외할머니인 정씨가 길렀습니다. 번좌番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몇 살쯤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에 십대가 아니었을까 싶긴 합니다.
박성근은 모친을 죽이고 재산을 챙겼는데, 당시 큰 재산 중 하나가 노비입니다. 이 노비들의 소유 증명을 하는 노비문기奴婢文記를 얼른 챙겨서 아내한테 주었는데, 조사가 들어오자 이걸 자기가 챙겼다고 하면 바로 범인으로 몰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번좌를 불러 입을 맞춥니다.
"할머니가 죽은 다음에 내가 너한테 준 거라고 말해야 한다."
번좌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했지만 도승지 송영의 조사 때 용기를 내어 사실대로 고합니다. 송영은 물증을 잡기 위해 장물을 찾아내게 하는데, 이 물증은 쉽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번좌가 다시 한 번 도움을 줍니다.
박성근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이 어린애가 노리개로 삼고 있는 것이 눈에 익은 것이라 빼앗아보니 바로 할머니의 성이 새겨진 도장으로 서류에 찍던 놈이었습니다. 소중한 도장인 만큼 홑적삼 안에 달아둔 것인데 강도들이 훔쳐간 줄 알고 있었지요. 그러니 번좌는 이게 어디서 난 것이냐고 외사촌동생을 다그쳤습니다.
동생은 "우리 아빠가 준 거야"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박성근이 냉큼 달려와 도장을 빼앗고는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빈소 처마 아래에서 주운 거란다."
송영이 그 도장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번좌는 박성근이 경차관敬差官(조사관)이 온다는 말에 불태워버렸다고 답변합니다. 결국 물증은 남지 않은 셈입니다.
하지만 이 말들을 가지고 박성근을 압박하자 박성근은 자백을 합니다. 성종은 이 사건은 일반 강도 살인사건이 아니므로 장물을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죠. 어머니 정씨는 가뭄이 들어서 풀려났지만 아들 박성근은 가뭄의 원인이 이 패륜범죄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되죠. 일종의 극과 극인 셈입니다.
박성근은 정씨의 조카 정소도 자신과 공모했다고 말했고 정소는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은 매가 동원되었고 정소는 매를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
하지만 이런 일에 신경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게 충격...
여기에 엄한 불똥이 튄 사람이 하나 있으니, 바로 박성근의 와이프 되겠습니다.
도승지 송영이 심문하는 동안(곤장도 치고 주리도 틀었다는 이야기죠) 박성근의 아내는 옆에 서서,
"빨리 뒈져버려!"라고 욕을 하거나,
"넌 항상 날 버리려고 했지만 내가 양반집 딸이라 감히 못 그랬을 뿐이야."라고 말해서 사건에서부터 빠져나가려는 얕은 수를 썼습니다. 하지만 노비문기를 처음에 아내에게 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건 다 쑈일 수밖에 없죠.
송영은 이에 따라 박성근의 아내도 심문해야 한다고 말했고 윤허를 받습니다. 성종은 고개를 흔들며 한마디 했죠.
"그 놈의 집안은 사람의 집안이 아니로구나."
정씨 살인사건에 공모한 박성근, 내은산, 내은동, 약덕은 모두 능지처사형을 받았습니다. 왕석과 박성근의 아내는 무슨 벌을 받았는지 모르겠군요. 박성근의 아내는, 차라리 죽여주소서, 하고 엎드려 있었으면 정상참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우동 사후 에피소드 두 개를 소개합니다.
덕성군德城君 이민李敏(태종 둘째 서자의 아들)의 미망인 구씨具氏가 조카 이인언李仁彦과 사통하다가 의금부에서 고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인언은 허벅지에 종기가 있었는데 구씨가 그것을 치료해준다고 해놓고는 사타구니를 더듬는 통에 사단이 벌어진 겁니다. 구씨는 유밀과를 먹이고는 이인언을 침방으로 끌고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내가 차라리 어우동이 되어 죽더라도 정욕을 참을 수 없다."
수원에 한 기생이 수청 들기를 거부해서 볼기를 맞았답니다. 기생이 투덜대며 말했습니다.
"원, 참. 어우동은 음란하다고 해서 죄를 받았는데, 난 음란하지 않다고 해서 죄를 받았으니 도대체 조정의 법이 어찌 이렇게 왔다갔다 한담!"
첫댓글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도 놓쳤네요 ,, 머리가 나빠스리 ,,,
한번더 읽으시면 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