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석정공 (石亭公) 휘 수학 (秀學, 1793-1877) 의 외가되는 “봉대” 진주강문 대사간공파 가계도를 한국에 계신 진주강문 대종회 한 어르신의 도움을 통해 고맙게도전달받았는데, 여기에 그 내용을 지금은 시간관계상 간략하게, 그러나 핵심적인 요소는 빠뜨리지 않고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벌써 수년동안 추적해왔고 항상 맘한구석이 썰렁하며 끈질긴 의문을 가져왔던 굉장히 궁금해하던 부분인데, 진주강문 외가의 가계도를 이리 반갑게 전해받고 외조부들의 휘자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는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핑 돌아 맺히고 가슴이 메어졌다. 그리고 몇년 앓던 이가 쑤욱~ 빠지는 듯한 시원하고통쾌한 희열감도 동시에 느꼈다.
21세기 최첨단 디지털시대, 범글로벌적으로 인터넷사용이 활성-표준화된, 거리상으론 멀지만 IT의 무서운 발달로 커뮤니케이션의 대상과 전달방법이 무척가까워졌고 훨 수월해진 미니쳐라이즈된 지구촌의 가족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들의 지식정보 나눔과 축적을 불과 몇십년전에 비교하더래도 상상도 못할속도와 편리함으로 촉진시켜주고 끌어 올리며 가속화시키고 있다. 현대문명/기술발달의 혜택을 우리는 그냥 앉아서 편하게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 몇할머님들의 가계도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알고 싶은 작은 꿈이 있는데, 그 희망사항 또한 멀지 않은 시간내에 필자에게 명확한 해답을 주리라 낙관한다.
이번이 필자가 한국에 있는 외가에 두 번째로 SOS 무전을 처서 연락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은 경우인데, 역시 외가란 좋은 곳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친절하고 포근하게 우리 외손을 항상 반겨 맞아주니. 자랑스런 외가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한 세상 굵게 살다 가신 모든 외조부님들의 높은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더욱 더 열심히, 또 성실하게 살아보리라 필자는 다짐도 해 본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전에 확인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 있다면, 혹자는 왜 이리 상세하게 또 불필요하게 외가의 족보를 파고 드느냐고 필자에게 의문을 던지실지도모른다. 나는 이렇게 변론을 한다; 우리 선조들을 잘 제대로 이해하려면 친가의 족보뿐만 아니라 외가의 족보 또한 아울러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라고. 앞서가신우리 조상들이 그리 사셨다. 우리의 역사가 그리 어우러져 만들어졌던 까닭이다. 어떤 경우에는 친가보다도 외가쪽의 영향을 지대하게 더 많이 받은 경우도많았었다. 외가도 외조부에서 외증조부까지만 올라간게 아니라, 현달한 경우엔 6대, 7대, 그 이상도 챙겼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외외가 진외가등, 외가란 외가는 모조리 싹 다 이해하고 외선조님들의 휘자와 공적을 달달 외우고 생활하였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었다. 특히 석정공같이 (거의) 유복자로 자라며외가의 보살핌을 갓난애기때부터 지대하게 받았던 경우엔 더 더욱 석정공의 외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석정공의 외가 “봉대강씨"를 우리가 한발짝 더 다가가서 잘 이해하면, <여사변무록 (麗史辨誣錄)>을 집필하셨고, 대은공등과 함께 <목은선생연보(牧隱先生年譜)> 재발간에 큰 몫을 담당하신 석정공의삶뿐 아니라 공을 둘러싼 주위 분들의 역사적 지위와 입장 또한 우리에게 친근하고 가까운 모습으로 성큼 더 가깝게 밀착되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이고, 혹 미스테리에 둘러싸인 어떤 비밀을 푸는 열쇠고리로 긴히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3대문과급제 3회, 복수 형제급제등에 빛나는 “3대명문가문”
다음은 1994년에 편찬된 <진주강씨대동보>에 실린 석정공 외가의 가계도이다; 상계는 생략하고 중시조인 고려중엽때의 인물 박사공파 파조 계용 (啓庸) 을 1세로잡고 석정공의 외조부 세충 (世忠) 까지 21세 내려온 가계도이다.
박사공파는 대한민국 진주강씨 종원들의 80프로를 차지하는 큰 종중인데, 조선조 500년동안 박사공파에서만 140명의 문과급제자가 쏟아져 나와 단연진주강문에서 훌륭했던 인물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주류를 형성하는 대파라고 한다. 특히 진주강문의 주류인 박사공파(-통계공파) 에서도 아래계도의 13세 온의 후손인 현 서울 관악구 신림동과 경북 상주시 양쪽을 발판으로 하여 탄생한 ‘봉대강씨'와, 경북 법전의 ‘버저이강씨’, 그리고 경남 의령의 청풍군수공 혜 (徯) 가문은진주강문의 “3대명문”이라 한다는데, 이 3대문중들이 인물박물관이며, 모든 진주강씨들의 명예와 자랑거리라고.
<강씨 계보: 박사공파-통계공파-대사간파-정정공파>
1 박사공 계용(啓庸) - 2 인문(引文) - 3 사첨(師瞻) - 4 ②창귀(昌貴) - 5 군보(君寶) - 6①시(蓍) - 7 ②회중(淮仲) - 8 ①안수(安壽) - 9 ①휘(徽) - 10 ①자평(子平) - 11 ①형(詗) - 12 ①영숙(永叔) - 13 ③온(溫) -14 ①정정공 사상(士尙) - 15 ①서(緖) - 16 홍덕(弘德) - 17 ②헌(王+獻) - 18 석무(碩茂) - 19 ①함(木+咸),②직(㮨),③탑(㯓),④재(木+辛)
19 ③탑(㯓) - 20 ①필대(必大) - 21 양자 世忠(생부 필기(必器)의 ②子).
13세 온, 14세 사상, 15세 서는 3대문과급제의 위업을 이뤘는데, 3대문과급제의 영예를 봉대문중에선 이 말고도 두 번 더, 도합 3번 만들어냈다 한다. 정치적 실권을 두 손에 꼭 잡은 노론가문이었으니 그랬겠지, 아님 어찌 이런일이 가능하였겠나 하며 내심 약간의 의구심도 들지만,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여튼나의 외가의 일이니 지금 자세한 속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의 입장에선 자랑스러운 면이 없잖아 더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13세 온은 사인 (舍人) 벼슬을 했고, 14세 정정공 (貞靖公) 진주부원군 사상 (1519-1581) 이 역사속의 비범하고 큰 인물이었으니, 여러 고위요직들을 두루 거친후에 우의정에 올라, 나중 영의정에추증되었다. 배위는 훈련원부정 (訓練院副正) 윤광운 (尹光雲) 의 따님 정경부인 파평윤씨였다. (참고: 14세 정정공 월포선생의 형제분들이 모두 현달하여 큰 인물들이었으나, 지금은 소개를 생략함.) 15세 난곡 (蘭谷) 서는 지제교 및 승지에 올랐다. 난곡선생이 또 굉장히 유명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는데, 그 분의 강직하고청렴했던 행적은 역사속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며 빛나고 있다 한다. 서울 특별시 관악구의 난곡동 (蘭谷洞) 은 선생를 기리기 위해서 지칭된 행정구이다. 배위는정량 (定量) 우치홍의 따님 숙부인 단양우씨였다. 난곡 선생의 아우 신 (紳) 은 형제문과급제의 위업을 달성한 후 관찰사, 부제학, 이조/병조판서, 숭정대부 우참찬을지내었고, 평난공신 진흥군 (晉興君) 에 봉작되었다. 그 아래 셋째 인 (絪) 은 임진왜란때 자헌대부 진창군에 봉해졌는데, 서애 류성룡 선생의 체철사 (體察使) 및종사관에 기용되었고, 첨지중추부사직을 지냈다. 서-신 말고도 봉대문중은 형제문과급제를 수차례 기록하였다. 16세 홍덕은 군수의 벼슬을 지냈다.
석정공의 외6대조되는 17세 석무는 봉사 (奉事) 를 지냈고, 외종고조되는 19-1세 함은 현감이였다. 석정공 외조 21세 세충의 생부는 19-4세 재의 자 필기 (必器) 였는데, 20세 필대 (必大) 에게 입적되었으며, 필대의 생부는 19-3세 탑이다. 강세충은 아들이 없어서 세현 (世俔) 의 아들 권흠 (權欽)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는데, 세현은 19-1세 현감 함의 손자로 생부는 필흥(必興) 이다.
그럼, 석정공의 학문적 스승이며 신암 (信庵) 휘 병하 (秉夏) 선생의 사돈이였던 긍암 (兢菴) 강세규 (姜世揆) 선생은 외조부 세충과 촌수가 어떻게 되었을까? 12세때에 갈리어서, 두 분 촌수는 18촌간이었고, 세충 (1730-?) 이 긍암선생 (1762-1833) 보다 무려 32살 연상이었으니, 세충은 긍암선생에겐 맘 편하면서도대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아저씨뻘 족형이었다.
3. 누락된 사위들의 기록
이번에 석정공의 외가 가계도를 추적하며 알게된 흥미로운 사실 또 하나는 강세충의 두 사위들의 기록이 원래 진주강씨 족보에서 누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맏사위인 동래인 정세환 (鄭世煥) 의 기록은 세충의 배위인 사천목씨 (석정공의 외외가) 족보에서 어떻게 그 기록을 찾아내어 나중 진주강씨대동보에이기하여 이제는 그 기록이 존재한다. 허나 놀랍게도 둘째사위인 나의 6대생조부 영필 (永苾,1766-1793), 즉 석정공의 생부 기록은 1994년판 진주강씨대동보에 아직도 누락되어 있는 상태이다. 필자가 아니었으면 강세충에게 딸이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이며, 막내사위였던 영필 할아버지의 존재마저 영영 (?) 역사의 애궂은 뒤안길에 묻힐뻔 했다.
필자에게 석정공의 외가 가계도를 알려주신 어르신이 필자때문에 그동안 오랜세월 잃어버렸던 소중한 사위 한 명을 이번기회에 찾게되어 너무 기쁘고 반갑다며, 대사간공파 “봉대” 문중에 그 사실/정보를 곧 알려 주신다고 하셨다. 왜 그랬을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사위의 기록이 누락되어 있었다니, 혹 강세충 할아버지신변이나 가정에 무슨 변괴라도 일어났던 것일까? 자세한 그때의 상황은 지금 알수 없고 어쩜 혹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듯 하기도 하나, 여튼 이렇게 강세충 사후20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나마 세충의 외7대(생)손인 필자에 의해 영필 할아버지의 휘자가 곧 진주강문족보에 등재되게 되어, 선대에 있었던 한산이문-진주강문과의 통혼사실을 기록에 한 건 더 올리게 되었으니, 이 또한 오묘한 하늘의 뜻이 아니었나 싶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첫댓글 도움을 많이 주신 강명구 어르신께 감사를 다시 드립니다. 꾸벅~ 제가 올린 글 내용에서 혹 틀린 사항이 있으면 곧 지적해 주셔서 오류를 바로 잡을수 있게 해 주세요~ ^^
정정공 월포 사상 선생의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
이 사진은 뭔가 잘못된 내용입니다
진주강씨 대사간공(詗)파의 난곡선영으로
본 사진은 정정공의 (生)손자 강홍립(姜弘立)의 묘소입니다
위 사진과 본 사진의 상석의 찍힘이 같은 방향이군요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
2017 시제(18위 제사)때
제가 찍은 묘소 전경사진과 비슷합니다 그려
사진의 방향이 약간 차이는 있어도
묘소 제절을 쌓은 층도 자세히 보시면
똑같다는 것을 아시리라
정정공의 묘소는 좀더 산정상 방향으로 위쪽인데...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 ㅎㅎ 그렇군요. 관악구청에 연락을 해 내용정정을 요구해야 할듯 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르신. ^^ 저희 한산이씨 안동후손들도 가끔 안동시에 연락을 해 선조들에 대해 잘못 기술된 오류를 잡아달라 청원서 내고 한답니다. 근데 공무원들이 저희 후손들만큼 그렇게 열성적이진 않다는 것이겠죠. ^^
영필 할아버지의 휘자가 진주강씨족보에 누락되어 있슴.
한산이씨 족보에 올라가 있는 강세충 외조. (참고: 석정공은 대종회의 항렬자를 따라 족보엔 "승"학이라고도 등재되어 있슴.)
석정공의 문집 <여사변무록> 과 공이 심혈을 기울여 재발간하는데 큰 공을 세운 <목은선생연보>. <목은선생연보> 판각작업은 한산이씨 900년 문중역사속에서도 문중차원에서 이룬 최고 3대의 큰 업적으로 기억되는 일이라고 많은 종원들이 말을 한다 함.
1985년에 한산이씨 대종회가 발행한 <목은선생연보> 발문에 실린 연보재발간 당시 규장각 직각이었던 휘 승오 (이조판서. 1837-?) 삼은공이 석정공의 공을 치하하는 대사.
국문번역문.
너무 열정적인 이주원님의 국제전화를 받고 감회가 새로웠는데
본 게시글을 읽는 현종님들도 많은 감동을 느끼실 것입니다.
오히려 외손이 본손을 압도하는 선조 탐구노력에 놀라며 송구스럽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전화통화 너무 즐겁고 좋았습니다.^^ 열정적인 면엔 제가 어르신을 도저히 못 따라 갑니다. 저보다도 훨씬 더 문중일에 열심이고 숭조정신이 투철하신 진주강문 외가분들이며 한산이문 친가분들이 많지요. 저는 그냥 제 관심가는 분야에만 치중하는듯하다 할까요?! ^^
이 글에 소개된 가계도의 강세충은 동명이인으로 밝혀졌습니다. 나중에 정확한 석정공의 외가계도를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