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왕의 10형제중 장자가 거등(居登)왕이 되고 이자(二子)에게 모성(母姓)을 사성(賜姓)했다.
이는 자기 성이 이어지기를 원하는 왕후의 간청 때문이었다고 가락국기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가락국이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병합되자 가락왕실의 후예들과 그 유민들은 신라의
사민(徙民)정책에 의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갔다.
허씨 왕족 중에 김해에 계속 머물러 살게 된 후손을 김해허씨, 하양(河陽)에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허씨, 공암(孔巖=양천:陽川)에 터를 잡은 자손을 양천허씨, 태인(泰仁)에 이주한 후예들은 태인허씨,
함창에 세거한 이들은 함창(咸昌)을 각각 관향으로 삼아 허씨는 5개의 본으로 분류하고 이씨 성을 사성받아
인천(소성, 인주, 경원)에 세거하게된 인천이씨가 모두 가락계 김수로왕의 후손이다.
허씨에서 갈라져나간 인천(仁川)이씨는 고려사(高麗史) 이자연전(李子淵傳)에 보면 신라35대 경덕왕때
허기(許奇)가 신라의 대관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당나라 황제 현종이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중인 자신을 끝까지 호종한 것을 가상히 여겨 이(李)씨 성을 사성하었다.
그 자손들이 소성(邵城)현에 이주 하였으니 소성은 곧 인천이다.
그 후손 이허겸이 소성백(邵城伯)에 봉해지고 인천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 했었다.
그 세력이 형성되기까지는 가락계인 그의 선대가 신라 하대에 몰락되어가자 인천으로 이주하여
서해안을 중심으로 당(唐)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던것 같다.
이허겸(李許謙)의 선대가 당나라 황제로부터 이씨를 사성 받은 후 그 자손들이 인천에 이주했다는 것은
호족(豪族)으로서의 이씨가 당(唐)과 관계있는 해상세력 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서해 호종으로 왕건 태조를 도운 이허겸은 그의 외손녀 3명이 현종(顯宗:고려 8대왕)의 비(妃)가
되면서부터 상당한 세력 기반을 가지고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허겸의 아들이나 손자대에는 이미
상당한 지위의 무장(武將)들이 보인다.
고려때 여진족을 무찌른 저 유명한 윤관은 이허겸의 손자인 성간의 사위이고 성간의 아버지가 대장군
눌(訥)이다.
부인이 경순왕의 후예인 경주김씨였던점으로 그의 사회적 지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천이씨는 이미 이허겸의 대에 일정한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신분적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허겸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들 한(翰), 눌(訥) 그리고 한(翰)의 아들인 자연(子淵), 자상(子祥)이
고려사회에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게 됐다.
이자연은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동생 자상과 함께 그의 가문이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미 이때부터
가족의 이름을 지음에 항렬(行列)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가문(家門)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또 왕실과의 혼인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文宗)의 왕비로 들여보냈다.
그래서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이 모두 그의 외손이고 자연(子淵)의 손녀대에 이르러서도 3명이
왕비가 되었다.
이자연의 장손 자효(資孝)와 자덕(資德)계, 언림(彦林)계, 공수(公壽)계 등이 계속 현달 하였다.
특히 이장용은 지금의 수상인 문하시중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원(元)으로부터의 시련을 잘 극복하였고,
대내적으로 무신정권의 책동을 적절히 조정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수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인(文人)으로도 이름이 높아 문사들과 교류도 깊었으며 특히 이승휴(李承休)와 문교(文交)가
있어 그를 문한(文翰)열전에 입전 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