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란대사 약전
담란대사는 대동(大同) 안문(雁門, 현재 중국 산서성 대현) 출신으로, 북위 효문제(孝文帝) 승명 원년(承明元年, 476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은 오대산(五台山) 근처에 있었으며, 그곳의 신비한 기적을 흠모하여 15세가 채 되기 전에 발심하여 출가했다.
대사는 지혜가 깊고 탁월하여, 당시 세 나라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경전을 두루 통달하였고, 사람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특히 용수보살이 저술한 《중론》, 《백론》, 《십이문론》, 《대지도론》(이 네 가지 논은 모두 구마라습이 번역함)에 대한 학문적 조예가 매우 깊어, 후세 사람들은 그를 사론 학파의 대가라고 불렀다.
중년이 된 후 대집경을 주석하기 시작했으나, 중도에 병을 얻어 잠시 집필을 멈추고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시도하였다. 진릉(秦陵)에 이르러 하늘을 바라보니, 갑자기 하늘 문이 열리고 육욕천의 계위가 위아래로 겹쳐진 광경을 또렷이 목격하였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본 후, 순간 간에 그의 병이 나았다. 그래서 《대집경》의 주석을 다시 쓰려고 하다가 이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람의 목숨은 위태롭고 취약하여 아침저녁으로 언제 무상이 닥쳐올지 모르니, 먼저 불로장생술을 배워 몸을 강건하게 해야만, 오래 세상에 머물며 불법을 크게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금릉(현재의 난징)으로 가서 양무제(梁武帝)를 알현하고, 도홍경(陶弘景, 도은거라고도 불린다, 456-536년)을 찾아가 신선술을 구하였다. 도홍경은 예를 갖추고 정중히 맞이하고는 기꺼이 신선술을 기록한 서적 10권을 그에게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낙양(洛陽)에 이르러 북인도 출신의 삼장법사 보리유지(菩提流支)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 “불법 안에 이 신선술보다 뛰어난 장생불사의 법이 있습니까?” 보리유지는 땅에 침을 뱉으며 타일렀다. “이 세상에 진정한 장생불사의 법이 어디 있겠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잠깐 죽지 않을 뿐, 결국 다시 삼계에서 윤회하게 될 것이오. 진정한 장생불사는 오직 우리 불교에만 있소.” 보리유지는 즉시 정토 관련 경전을 내주며 말했다. “이것이 대선방(大仙方)이니, 이 가르침을 따르면 길이 해탈하여 영원히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오. 그리되면 더 이상 삼계에 태어나지 않고, 육도를 오르내리지 않으며, 성쇠와 소멸, 화복과 성패는 더 이상 찾아올 수 없소. 그 수명에는 반석겁(磐石劫)이 있고 항하사겁이 있소. 그러나 항하사겁조차도 그 수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 수명의 길이는 끝이 없이 무궁무진하오. 이것이야말로 우리 금선씨(부처님은 대각금선[大覺金仙]으로 일반적인 신선이 아니다)의 장생술이라오.” 이 말을 들은 그는 활연히 깊은 깨달음을 얻고, 선경(仙經) 불태우고, 사론(四論)의 강설마저 버리고는 오로지 정토에만 전념하였다. 그때 대사의 나이는 53세였다.
대사는 용수보살의 《이행품》과 천친보살의 《왕생론》의 사상을 계승하여 《왕생론주》를 저술함으로써, 스스로 실천하는 동시에 타인을 교화하여 그 가르침이 널리 퍼지도록 하였다.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천자 소왕(蕭王)은 항상 북쪽을 향해 예를 표하며 그를 “담란보살(曇鸞菩薩)”이라 불렀고, 위(魏)나라 황제는 그를 존중하여 “신란(神鸞)”이라 칭하며, 명령을 내려 그가 병주(並州) 대암사(大岩寺)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대사는 말년에 분주(汾州) 북산(北山) 석벽에 있는 현중사(玄中寺)로 거처를 옮겼으며, 때때로 개산(介山)의 북쪽 비탈에 가서 제자들을 모아 수행을 지도하였다. 지금 그곳은 “란공암(鸞公岩)”으로 불리고 있다.
대사가 언제 왕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 따르면, 그는 동위(東魏) 흥화(興和) 4년(542년)에 병으로 평요산사(平遙山寺)에서 67세로 입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재(迦才)의 《정토론(淨土論)》에서는 “사문 담란 법사(沙門曇鸞法師)……… 북위(魏末) 말기 고제(高齊) 초기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고제는 북제(北齊)를 의미한다. 또한 《서응산전(瑞應刪傳)》에서도 “제나라(齊朝) 시대의 담란 법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금석물어(今昔物語)》에서도 “제나라의 담란”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담란대사가 북제 시대까지 생존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유력한 증거는 북제 천보(天保) 5년(554년) 2월에 세워진 《경조태자상명(敬造太子像銘)》의 말미에 원주(願主)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곳에 10번째로 “비구승 담란(比丘僧曇鸞)”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즉, 담란이 원주 중 한 명으로, 천보 5년에 석가모니 태자의 상을 조성하는 일에 참여한 바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담란대사는 북제 천보 5년까지 살아 있었으며, 그때 나이는 78세였다. 그 이후로 몇 년 더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담란대사의 왕생할 때의 수승한 상황에 대해서는 《정토론(淨土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임종 직전, 용수보살이 나타나 대사에게 기한을 알리며 말하였다. “나는 용수이다. 나는 정토에 머물고 있는데, 그대와 뜻이 같아 이 소식을 전하러 왔다.” 담란대사가 물었다. “무엇을 가르치려 하십니까?” 이에 용수보살은 게송을 읊으며 “떨어진 잎은 다시 가지에 붙을 수 없고, 아직 수확되지 않은 곡식은 창고에서 구할 수 없네. 흰 망아지가 틈새를 지나가는 것처럼(세월과 인생이 빨리 지나간다는 의미), 잠시도 머무를 수 없도다. 지나간 것은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쫓을 수 없으며, 지금은 어디 있는가? 세월은 돌이키기 어렵다. ”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담란대사는 그 말의 뜻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알고는 곧 그날 밤, 사자를 보내어 주변 마을의 재가 제자들과 절에 있는 출가 제자들 약 300여 명에게 이 소식을 알려 대중이 한자리에 운집하였다. 담란대사는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은 후, 직접 향로를 들고 서쪽을 향해 앉아 대중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지옥의 고통은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방 정토를 흔쾌히 원하여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후 대중들과 함께 서쪽을 향해 한목소리로 고성염불하며 극락왕생하였다. 그때 승속 모두 깃발과 꽃이 뜰을 비추는 것을 보았고, 많은 사람이 기이한 향기를 맡고 하늘 음악 소리를 들었다.
보리유지 삼장이 담란대사에게 전해준 정토 경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당나라 도선(道宣) 율사는 그것이 《관경》이라고 하였고, 명나라 운서(雲棲) 대사는 《아미타경》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의 법림(法霖) 법사는 《무량수경》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대사에서 전승된 삼론 계보에서는 이를 《정토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설이 있어 확실하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대 삼장법사들이 모두 자신과 인연이 있는 경론을 번역하고, 이를 홍법의 근거로 삼아왔으며, 또한 담란대사가 저술한 저작이 《왕생론주》라는 점을 고찰해 보면, 보리유지 삼장이 담란대사에게 전해준 불교 경전은 아마도 정토삼부경이 아닌 천친보살의 《왕생론》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담란대사의 저술은 《대집경석(大集經釋)》(미완)을 시작으로, 의술과 도교에 관한 책들로까지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들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오직 정토 교리와 관련된 세 가지 저서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왕생론주(往生論註)》 2권
《찬아미타불게(讚阿彌陀佛偈)》 1권
《약론안락정토의(略論安樂淨土義)》 1권
이 중 세 번째 저서인 《약론안락정토의》가 과연 담란대사의 진짜 저술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기 때문에, 이후의 정토 대덕들은 거의 인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