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회 사부대중께서는
아시겠습니까?
卽下契合頓悟證 (즉하계합돈오증)
便得如山萬事休 (편득여산만사휴)
鷄龍山上一輪月 (계룡산상일륜월)
木馬嘶時雨後新 (목마시시우후신)
목전에서 바로 계합하여 몰록 깨달음을 증득하면,
곧 산처럼 무거운 모든 일을 쉼이라.
계룡산 위에는 한 바퀴
둥근 달이 밝게 떠 있고,
목마가 울 때 비 온 뒤
처럼새롭도다.
산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가 내려놓으면 시원하고 가볍지 않습니까? 그것을 쉰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공양주를 할 때, 조실스님께서 주장자를 세 번 치시고 “이게 무슨 법문을 하느냐?” 하신 말씀에 막혀서, 밥을 하나 일을 하나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게 무슨 법을 하나” 하는 그것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하다가 집도 없어지고 부엌도 없어지고일체 모든 것이 없는 가운데, 부엌에 타는 불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솥에서 밥 끓는 소리가 나고, 부엌 아궁이의 불이 제 고무신에 붙어 따끔하고 뜨거운 것을 느꼈을 때, 산보다도 더 높고 큰 무거운 짐을 척 내려놓은 것처럼 아주 시원한 느낌이 났습니다.
그 맛은 우주 만유 어디에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단순히 시원한 느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하!” 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그냥 살아간다면, 무거운 짐을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일생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끙끙거리며 땀을 흘리고 힘들게 살아가게 됩니다.
제가 경험했던 그것이 바로 목전사(目事)입니다.
여러분도 일상생활 속에서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밥하고, 농사짓고, 사업하고,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목전사) 속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있는데 왜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길을가도 그렇고, 바깥의 산천을 보아도 그렇고, 물을 보아도 그렇고, 반드시 거기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산을 보아도 그냥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보았을 때 깨달음이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분은 흘러가는 물에서 목욕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돌아와 대중에게 “물에 대한 공덕과 소식을 아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산에 가면 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있어야합니다.
산은 일체의 모든 만 가지 일이 닥쳐와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만고에 움직이지 않는 소식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걸림 없이 흘러가는 물을 보고 걸림 없는 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은 생사윤회의 고통과 만 가지 인연 속에서도 조금도 움직인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사의 고통도 본래 없는 것입니다. 일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물은 하나이지만 그 물은 모든 곳으로 흘러가 천태만상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무한하게 장엄하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 무엇을 더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비로소 ‘如山萬事休(여산만사휴)’입니다. 산처럼 높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니, 그것이 만 가지 일을 쉬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서 영원히 매이지 않는 우주 만유를 덮고도 남는 무한한 광명의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금일 대중은 이러한 소식을 알아들었습니까?
만약 아직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늑담 유조(泐潭惟照) 선사가 법상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本自不生,今亦無滅,是死不得底樣子
본래부터 생겨난 바 없고, 지금 또한 멸할 바 없으니,이것이 바로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모습이다.
當處出生,隨處滅盡,是活生受底規模。
있는 자리(當處)에서 드러나고, 처하는 곳마다(隨處) 사라지니,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작용의 모습이다.
大丈夫漢,直須處生死流,臥荊棘林,俯仰屈伸,隨機施設。
모름지기 대장부라면 마땅히 생사의 흐름 가운데 처하고, 가시밭길에 누워서, 고개를 숙이고 들며 몸을 굽히고 펴듯 기연(機緣)에따라 방편을 베풀어야 한다.
能如是也,無量方便莊嚴三昧,大解脫門,蕩然頓開。其或未然,無量煩惱,一切塵勞,嶽立面前,塞卻古路。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한량없는 방편과 장엄삼매와 큰 해탈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한량없는번뇌와 일체의 진로(塵勞)가 산악처럼 눈앞에 우뚝 서서 옛길을 막아 버릴 것이다.
어느 스님이 늑담 유조(泐潭惟照)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僧問: 真如界內 本無迷悟之因 方便門中 願示無生之曲
師曰: 六六三十六 清風動脩竹
進云: 洪音一剖驚天地 有無情類盡霑恩
師曰: 一曲兩曲無人會
雨過夜塘秋水深
“진여의 세계 안에는 본래 미혹과 깨달음의 원인이 없사오나, 방편의 문 가운데서 원컨대 무생(無生)의 노래를 보여
주십시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맑은 바람이 긴 대나무를 흔드는구나.”
다시 그 스님이 말하기를,
“큰 소리가 한 번 터져 나와 천지를 놀라게 하니, 유정과 무정의 모든 만물이 그 은혜를 입었습니다.”
유조 선사가 이르되,
“한 곡조, 두 곡조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비 지나간 밤 연못에는 가을 물만 깊어 가는구나.”
오늘이 초하루이니 참회 법문을 읽어봅시다.
『 오늘 이 도량의 동업 대중이여.
서로 지극한 마음으로 오체투지하고 부모 친척을 위하여 회향하고, 스승과 동학을 위하여 회향하고, 시주와 단월과 선지식과 악지식을 위하여 회향하고, 국왕과 대신과 모든 관리와 백성을 위하여 회향하고, 천룡팔부와 호법선신을 위하여 회향하고, 법계의 일체 중생을 위하여 회향합시다. 』
회향이라는 것은 복을 나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선지식은 법에 어긋남이 없이 모범적으로 모든 것을 잘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악지식은 좋지 못한 행동, 곧 역행(逆行)을 통해 오히려 반대의 선을 깨닫게 해 주는 분입니다. 악을 통해 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불심을 알려면 중생심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심을 드러내 보여 줄 때, 그 반대편에 있는 불심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는 분이 바로 악지식입니다. 역행보살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이나 악지식이나, 단월이나 시주나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회향한다는 마음이야말로 가장큰 마음입니다.
제(齊)나라의 손경덕(孫敬德)이라는 분은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여 모시고,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예배하며 공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화를 입어 강도의 거짓 진술로 누명을 쓰게 되었고, 마침내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손경덕은 눈물을 흘리며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간절히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사문(沙門)이 나타나 《구고관음경(救苦觀音經)》, 곧 《고왕경(高王經)》을 가르쳐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을 천 번 독송하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리라.”
손경덕은 꿈에서 깨어난 뒤부터 지극한 정성으로 이 경을 독송하였습니다.
마침내 형장으로 끌려가기직전까지 천 번의 독송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형장에서 형관이 칼을 들어 손경덕의 목을 내리쳤으나, 칼은 세 동강이 나고손경덕의 목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았습니다.
형관은 다시 칼을 바꾸어 두 차례 더 집행하였지만, 그때마다 칼만 부러질 뿐 손경덕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 기이한 일을 보고받은 정승 고환이 황제께
아뢰었고, 마침내 손경덕은 사면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손경덕이 관세음보살상 앞에 예배드리다가 살펴보니, 집에 모셔 두었던 관세음보살상의목에 칼자국이 세 군데나 나 있었습니다.
훗날 고환이 제왕이 된 뒤 이 경을 널리 유포하도록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이 경을 《고왕경(高王經)》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
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함께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기도 드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나라가 재앙이 없는 복지국가가 되고, 온 세상이 모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회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五蘊山頭乘駿驥 (오온산두승준기)
一鞭策起疾如飛 (일편책기질여비)
臨行莫問棲真處 (임행막문서진처)
南北東西隨處歸 (남북동서수처기)
오온의 산봉우리에 올라 준마를 타니,
채찍 한 번 휘두르매 날아가듯 내달리는구나.
길을 나서거든 참됨이 머무는 곳을 묻지 말라.
동서남북 가는 곳마다
모두 돌아갈 본향인 것을.
(2026. 7. 14. 6월
초하루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