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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묵상글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우리도 다른 제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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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도 다른 제자
오늘 복음의 말씀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열두 사도의 파견만 전하는데
루카 복음은 다른 일흔두 제자의 파견 내용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두 제자의 파견과 일흔두 제자의 파견을 비교해봤습니다.
루카 복음은 열두 제자 말고도 일흔두 제자의 파견이 필요한 이유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음을 얘기하며
추수의 주인께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고 그래서 일흔두 제자를 뽑으신 것은
단지 숫자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열두 사도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것이고
일흔두 제자는 이 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이니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곳, 곧 이방인들에게 가야 할 제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사가인 루카는
이방인 지역에도 복음의 선포가 시급하고 절실하며,
이곳 복음 선포를 위해 열두 사도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필요하고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제자들도 필요함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른 일흔두 제자에 루카 복음사가도, 우리도 포함되는 겁니다.
일흔두 제자의 파견 기사에는 다음의 내용도 추가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니까 이방인 지역으로 가는 것이니까
12사도의 파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지역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리, 곧 자기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72제자는 파견되는 겁니다.
행복과 평화를 전하는 자기들을 오히려 죽이려 드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에게 그래도 제자들은 평화를 빌어주라는 겁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주라는 이것이 12사도의 파견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자기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과 결코, 싸우지 말라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공격적인 선교를 하지 말고 평화로운 선교를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롭게 선교하고 평화를 전하는데도
누구나 좋아할 것 같은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런 상황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분노, 적대감이 포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어쩔 수가 없고,
무기업자들처럼 반평화적인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도 어쩔 수 없고,
적대적인 외부 환경을 조성하여
자기 세력을 내부적으로 규합하려는 사람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볼 것은 길을 가면서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12사도 파견 때의 말씀에다가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을 추가하시는 겁니다.
평화를 빌어주는 사람이 인사를 하는 것은 기본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하심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가거라.” 하시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고 하시는 것이니
이것은 아비의 장례도 치르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과
그 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추수 일꾼이 추수하러 길에는
사람들과 노닥거리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시급성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는 인정도 배제해야 한다는
그 절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이렇게 복음을 선포한 경험을 바탕 삼아 우리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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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021년 영국에서 ‘아서’라는 여섯 살 난 아이가 친부와 계모에게 아동학대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의 몸에는 수백 개의 멍이 있었고, 영양실조로 사망한 것입니다. 아이의 집에는 가정용 CCTV가 있었고, 여기에 아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배고픔에 잠을 이루지 못한 아이는 서럽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이렇게 외치는 동안 그 어떤 위로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아무도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다른 이의 위로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분이신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위로도 필요했습니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말은 분명히 필요했습니다. 이 듣고 싶은 말을 듣지 못할 때는 하느님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이 모두 비판하고 있을 때, 그래도 위로할 수 있는 ‘나’가 되어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도 없다며 절망에 빠지고 그 결과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을 향해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위로하기 위해 우리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이렇게 높이를 맞출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을 뽑아서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둘씩 보내십니다. 단순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것보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시선을 맞춰서 진정한 위로를 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루카 복음사가 역시 이렇게 세상에 위로를 주기 위해 온 힘을 전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함께하였고, 또 전교 활동을 하며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단순히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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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우리를 얽매는 ‘채움’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비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미하엘 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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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루카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 꾼’ 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늘에는 영광’이, ‘땅에는 평화’가 성취됩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구어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 준 그 평화를 형제들 안에 심고 가꾸고 일구며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준미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주님!
저희의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타인을 억눌러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이루는 평화가 되게 하소서!
분쟁과 갈등이 없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와 진리가 이루어진 참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평화를 위해 일하다가 배척을 받을지라도 제 자신을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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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학창 시절에 자취생활을 하였고,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 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곰국을 꺼내보면 국물에 기름이 엉겨있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금방 맑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점만 보입니다. 이때‘콩깍지 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활동도 적극적으로 합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하고 그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사랑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 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한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각각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신분에 따른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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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입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목적으로 대양을 건넜지만 결국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콜럼버스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데 베스푸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스푸치에게는 전기 작가가 없었던 반면 콜럼버스에게는 한 사람의 전기 작가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는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슐레가 프랑스인들에게 프로이센의 침입자들을 몰아낼 의지를 고취 시키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재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잔다르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2027년에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본당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 책자의 발행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저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사제인 저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감동입니다. 저는 늘 큰아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보다는 비난하고 단죄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성실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아들도 사랑하였지만, 돌아온 아들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뉘우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고, 눈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용서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믿음의 나무로, 사랑의 나무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 이야기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지친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고, 함께 머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을 전해주시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성가 엠마우스를 참 좋아합니다. 이 성가를 작곡하신 원선오 신부님도 존경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사목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이 어느 정도 발전을 하자 케냐로 가셨습니다. 케냐에서는 더욱 어려운 수단으로 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계실 때,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던 학생들은 신부님의 따뜻한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문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우산을 들고 아이에게 가셨습니다. 우산을 함께 쓰고 데려다주신 신부님을 아이는 기억하였고 신부님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제게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복음입니다. 저 또한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사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임을 알려 주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루카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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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를 가든 ‘평화’로 인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그곳에 그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평화가 머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화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받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저 평화를 빌어줄 것을 당부하십니다. 즉 평화가 머물거나 그렇지 않음은 제자들의 몫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를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하늘나라를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평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머무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 그리고 신앙생활을 통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의 평화는 이미 머물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전하는 제자들은 그 집에 머무릅니다. 평화가 있는 곳에 제자들도 함께합니다.
저는 이곳 성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평화를 빌어드립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제가 만난 모든 분의 가정에 함께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오셔서 기도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고자 하는 마음과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인사합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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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음식
지난 8월 중순은 아버지의 축일이자 생신이었습니다.
제가 성지를 비우기 힘들어서
가족들이 제가 있는 이곳 성지로 모였습니다.
가족들이 모이다 보니 여러 가지 맛난 것들도 모였습니다.
고기전, 잡채, 오이생채, 아이스크림, 그리고 곱창전골….
인천만의 음식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인천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물텀벙이…. 돼지 곱창…. 쫄면….
학창 시절 가족들과 함께 곱창전골을 즐겼던 기억이 새록새록 돌아왔습니다. 소박하다면 소박한 전골을 메인에 두고 생신상을 차렸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레트로 한 상으로 즐거웠던 저녁 식사였습니다.
가끔은 레트로한 음식이 생각납니다. 예전에 가족들과 나눴던 음식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음식이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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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우리의 신원
“관상의 제자, 선교의 사도”
“당신께 비옵는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비는 누구에게나,
주님은 가까이 계시나이다.”(시편145,17)
오늘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어느 예수회 사제의 이색적인 기사를 읽었습니다. 어제는 보름이요 유난히 크고 밝은 보름달(supermoon)이었고 다음과 같은 기사였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고 거의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밤하늘, 특히 달의 아름다움은 한결같은 아름다움이요, 우리에게 우리보다 더 큰 무엇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 인간은 너무 빛을 밝게 만들어 하느님의 빛에 눈멀게 되었다. 별을 바라보는 단순한 수행이 기도처럼 되어야 한다. 한번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할 수 있다면 매일 실천할수록 좋다.”
하루중 얼마나 하늘을, 하늘의 태양을, 하늘의 별들을,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는 지요? 땅에서의 활동에 앞서 하늘의 관상이, 선교에 앞서 주님과의 친교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이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마리아로, 밖으로는 활동의 마르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사랑, 똑같습니다. 안팎은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관계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과의 친교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자작애송시 '하늘과 산'입니다.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관계를 상징하는 하늘과 산의 시입니다. 오늘 주님은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합니다. 오늘은 루카 사도 축일이며 우리 요셉수도원의 김종훈 루카 수련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루카가 일흔 두 제자들 안에 포함되지 않았겠나 추측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라는 고백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의 의리있는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때가 되자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새삼 이들 제자들의 배경에는 늘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닫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우리 삶의 복음 선포의 현장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존재론적 복음 선포라 합니다. 말그대로 무소유라기 보다는 무소유의 정신으로 민폐를 최소화하면서 주님과의 관계로 무장하고 이리떼 세상 한복판에서 형제들의 환대에 의존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평화의 사도로서 주님의 평화를 나누는 삶의 선교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어 산다면 치유는 저절로 일어나고 복음 선포는 저절로 이뤄질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깊어지는 관계가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되게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선교활동에 전념한다 할지라도 이들의 돌아갈 중심은 주님뿐입니다. 이어지는 복음에서 이들 일흔두 제자들은 주님께 돌아가 그 활동 사항을 보고합니다. 언제든 돌아갈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제자들 역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임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선교활동도 선교에 앞서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관상적 친교 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의 죽음을 앞둔 수인 상태에서 저리도 평온할 수 있음은 어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처럼 주님과의 깊은 믿음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죽음에 초연한 바오로입니다. 바로 다음 고백이 사도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바오로 사도의 모든 선교활동의 원천이었음을 봅니다. 바로 우리의 정주서원이 의도하는바도 우리 삶의 중심인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데 있음을 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며. 충실히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늘 바쳐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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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보내지니>
“주님께서는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셨다.”(루카 10,1)
나
가는 곳
날 보내신
임께서 몸소
가시려는 곳이니
나 어찌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갈 수 있으리오
나
머무는 곳
날 보내신
임께서 몸소
머무시려는 곳이니
나 어찌
딴마음으로
어느 곳에나
머물 수 있으리오
나
만나는 이
날 보내신
임께서 몸소
만나시려는 이들이니
나 어찌
건성으로
아무나
만날 수 있으리오
나
하는 일
날 보내신
임께서 몸소
하시려는 일이니
나 어찌
허투루
아무 것이나
할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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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는 제자들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습니다. 왜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을까요? 짐승들을 방주에 들일 때도 각기 정해진 수에 따라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교회의 성사로 정결하게 하여 암수 짝을 지어 들여보냈지요(창세 7,2 참조) .... 짐승들은 서로 적대하며 상대를 잡아먹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서라면 이리들을 겁낼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의 먹이로가 아니라 은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착한 목자의 이런 예지는 이리가 양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 줍니다(요한 10,12-15 참조). 그분께서는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이사 65,25)라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이리 떼 가운데로 양들을 보내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을 가장 깊이 답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신적인 심층도 어둡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운 실로 숨어 계신 하느님이십니다”(이사 45,15). 하느님은 영혼의 터에 숨어 었다. 하느님의 터와 영혼의 터는 같은 터다. 이사야서의 이 부분이 말하는 하느님, 곧 숨어 있는 하느님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느님과는 정반대의 하느님이다. 구원하는 하느님은 숨어 있지만, 창조하는 하느님은 그렇지 않다................이와 같이 하느님을 찾는 길은 역설적이고 양면적인 것 같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하느님은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지 않을 때, 여러분은 하느님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찾으려면, 특히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찾으려면 겸손 곧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잠복해 있는 이름들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듯이 하느님에게도 투영하게 마련이다. ‘영혼이 하느님에게 붙이는 이름은 모두 영혼 자체의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61)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세례를 받은 그는 아프리카의 고향에서 이러한 종류의 삶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했다.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 이상적인 수덕 생활을 해 나가기 원한 그는 이 세상의 번잡함과 교회의 직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주교직이 아직 공석으로 있는 도시들을 피했다. 타가스테의 공동체는 함께 생활하는 형제들이 너무 많아져서 약 8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 히포(Hippo)에도 자신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형제들을 모으기 위해 이 도시로 나와 그는 이 도시의 주교 발레리우스(Valerius)의 강론을 들었다. 이 주교는 그리스 계통 사람이어서 이 지역 사람들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좌 주교를 하나 두도록 그에게 요청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암브로시오의 경우와 비슷하게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이 교구소속의 사제가되었다.
391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395년에 주교품물 받았다. 이때부터 히포는 430년에 그의 생이 마감되기까지 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그는 이 지역보다 더 광범위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생겼을 때와 공의회에 참여해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자신의 공동체를 결코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외적 활동 무대를 찾았는데, 이와 동시에 자신의 내적 활동 무대에도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교였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히포에 있는 성당의 본당 신분의 역할을 수행한 정도였다. 이 일을 수행하면서 그는 대단한 열정으로 신학적 작업을 계속했고, 마니케이즘, 도나티즘, 펠라지아니즘과 같은 이단들을 거슬러 싸워 나갔으며,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지켜 가기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전기 작가 포시디오(Possidius)는 전기에서 그를, 설교자와 전례 집행자 그리고 일반 사람들과 좋은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으로 서술하고 있다.(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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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0,9)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축하하면서, 오늘 복음은 연중 26주간 목요일 복음과 같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소’로 표상하는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4,11)라고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오로와 함께 2, 3차 전도 여행을 동반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분입니다. 루카는 바오로의 협조자(필레1,24)이자 의사(콜4,14)였습니다. 그리고 루카는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루카는 자신이 복음서를 집필한 동기를 복음서 서문에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사1,1~2) 복음사가 루카는 예수님의 직접 목격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목격자들의 증언과 수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복음을 쓴 것이며, 이를 통해 단지 테오필로스 한 개인만이 아니라 새롭게 입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공적 출현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승천’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의 특징은 기도에 가장 좋은 길잡이이며, 선교사들의 지침서이고, 많은 병자의 병의 치유를 기록한 의료참고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과 달리 제 개인적으로 루카 복음이 전해주는 첫 울림은 지난 세월 동안 수도원에서 살면서 매일 아침 ‘즈가리야 노래’로 시작하여, 저녁 ‘마리아의 노래’로 끝맺는 일상의 반복 안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하느님 자비의 역사하심’의 정선율定旋律입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의 구원 개입이 바로 이 노래의 조연이신 세례자 요한과 그 부모 그리고 주연이신 예수님과 성모님을 통해 아빠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반복해서 울려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첫 운율의 시작은 말구유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예수님께서(2,1~20) 30년 동안 나자렛에서 은둔과 순종의 삶을 사셨고(2,41~52), 때가 되어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무엇을 실현하시길 원하시는지를 기도 가운데서 확인(4,1~14)하신 다음,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공생활 출사표(4,16~30)를 던지심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전해줍니다. 이렇듯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기와 공생활 이전의 삶을 전해줌으로써 우리에게 인간 예수를 만나게 해 줍니다. 공생활의 주된 활동은 바로 나자렛 회당에서 언급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의사였던 자신의 특징을 살려 루카는 상처받은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질병으로 〔4,38의 열병을 앓은 베드로 장모; 5,12의 나병환자; 5,17의 중풍병자; 6,6 오그라든 사람; 7,3의 백인대장의 종; 8,40 야이로의 딸과 하혈병을 앓는 여자; 12,10 등 굽은 여자; 14,1 수종병; 17,11 나병환자 열 사람; 19,35 눈먼 이〕, 고통받고 살았던 이들의 치유를 통해서 그들의 육신적 고통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면서 그들과 연대하시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들(4,31; 9,30; 11,14:)을 더러운 영의 지배와 억압해서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루카 복음의 예수님은 바로 상처받은 치유자이십니다.
또한 가난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나 특히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심으로 그들의 슬피 우는 얼굴을 닦아 주시고, 그들 곁에 머무르시며, 그들과 기꺼이 함께 즐겨 먹고 마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먹보, 놀보라고 놀리면서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15,2)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아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 보이신 분으로 루카 사가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하고 가르치시고 자비를 실천하신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다양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5,27 세리 레위 집에서 식사하심; 7,36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심; 14,12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 19,1 자캐오〕 이렇게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이 친구이며 죄인들의 벗으로 한 마디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아울러 “늘 하시던 대로”(22,39) 하루를 마치신 다음 언제나 아빠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루카는 다른 어떤 복음보다 상세하게 소개하심으로 우리 역시 예수님의 기도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주는 기도의 교과서와 같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2)라는 제자의 요구에 당신 기도의 삶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고 아빠 하느님께 기도하도록 본을 보여 주신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4,1.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심; 4,42 외딴 곳으로; 9,28 기도 중 변모하심; 11,1~13 주님의 기도, 끊임없이 기도하라; 22,39 겟세마니에서 기도; 23,46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정의와 율법의 근본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로 인해 거부와 배척과 박해를 받으신 모든 예언자의 참된 표본이신 분이십니다. 루카는 특히 세례자 요한(3,1~20;7,18~30;9,7~9)에 관한 자료를 전해주며 예수님의 전형이자 예표로 요한을 제시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런 예수님의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독려하십니다. 〔5,33 단식논쟁; 6,1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음; 6,6 안식일에 병자 치유; 11, 37~54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중; 14,1 수종병 환자를 안식일에 고침〕
루카 복음의 백미는 인생의 먼 길,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자기 마음의 자리로 돌아감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서 새로운 길을 걷도록 용기와 희망을 불러 주는 인생의 길잡이라고 느낍니다. 특히 루카 복음 15,11~32절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저 자신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가장 아름답고 거룩함을 불러일으키는 이정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지난 안식년 동안 가장 가고 싶었던 곳 바로 러시아 생피터스부르그의 에르미타주 궁전의 ‘돌아온 탕자의 그림’ 앞에 한순간이나마 머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고 살면서 반복해서 다가오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10, 29~37절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아직 끝내지 못한 인생 수업의 마지막 숙제인 듯싶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명쾌한 해답이지만, 우리에게 조금은 벅찬 해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과 삶의 방향은 단 한 곳, 이웃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아빠 하느님을 바라보라고 인도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맞아 다시금 루카 복음의 주요 메시지를 제 혼자 회상하면서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친밀하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복음사가들 덕분임을 강하게 느끼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 보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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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평화를 전하는 진정한 사도가 되어야만 /
박윤식 [big-llight] 241017 20:50 ㅣNo.176857
오늘은 안티오키아 태생인 이방인계 성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이다. 그는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해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였단다. 그는 예수님 어린 시절을 마리아와 함께 묘사해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이’로 불린다. 또한 직업이 의사답게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이들의 친구처럼, 치유의 기적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 둘씩 보내시며 이르셨다.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다. 가서 일꾼 청한다고 전하여라. 나는 양들을 이리 떼로 보내듯이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나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는 인사하지 마라.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라고 말해라.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들이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라고 일러라.”‘
사실 복음을 전하려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인간적으로 예수님은 참으로 걱정을 많이 하셨을 게다. 더욱이 그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빈손 그 자체이다. 그 길은 단순히 떠다니는 그런 여행길이 아니다. 그들은 믿음 외는 다른 어떤 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채 가는 거다. 예수님은 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하셨을까? 사람은 부족할수록 더욱 애절해진다. 선교사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게다. 그래야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고 그분 은총에 기대게 되니까. 진정한 가난은 ’자유로움‘에 있다. 곧 재물에 매이지 않는 마음이다. 스승께서 원하신 바로 그 마음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모두 주님의 제자로 선교사라는 점을 깨닫자. 파견되는 곳에는 큰 위험과 유혹과 난관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다. 과연 우리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여 용감하게 전하고는 있는지? 작은 희생과 자선, 이웃을 향한 따뜻한 미소의 손길까지도 신앙인의 향기를 내는지 돌아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전하는 가난한 마음이면 충분하다. 파견될 이는 자신의 옷을 온전히 벗어놓고 그리스도의 옷을 똑바로 입는 것이다.
물도 설고 말도 서툰 이국땅에서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묵묵히 수행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머나먼 오지에서 오직 예수님 이름만 가지고 전혀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산다.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예수님의 참 평화를 전할 수 있다. 평화를 바라지 않는 이는 비록 없다면서,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분위기를 전쟁 직전까지 내몬다.
이는 참 평화가 아닌 평화를 가장한 광적인 미친 짓이다. 평화는 주님께서 주셔야 그게 참 평화이다. 그분만이 참 평화이다. 그러기에 주님께 속한 이만이 평화를 전하는 참 일꾼이다. 주님께 속했다면서 평화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이다. 평화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고 이를 믿음으로 이끌며 그것으로 인해서 ’하느님 구원‘을 보장받게 될게다.
오늘날 우리 모두도 그 옛날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라 할 수가 있을 게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렇지만 루카 복음사가의 가장 큰 관심은 이방인 선교였다. 선교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은 긴박하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인 우리를 파견하신다. 따라서 수확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도록 청하면서, 파견 받은 이로서 사명감을 갖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어야한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예수님의 일, 그분께서 약속하신 그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진정한 사도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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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카는, 예수님께서 직접 파견하셨던 제자들이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루카 10,2)고 청하여 그 주인이 보낸 일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루카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저술함으로써 큰 일꾼의 몫을 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루카는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서, 자신이 한 일과 그 목적을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이들이 전하여 준 것을 엮어서, 신앙에 입문한 테오필로스가 배운 것들을 확인할 수 있게 하여 줍니다(1,1-4 참조).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성령께서 오시고 사도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 과정을 다시 테오필로스에게 알려 줍니다.
책을 쓰는 것은 사람을 직접 만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달라서, 이 책들은 테오필로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이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접하였습니다.
이천 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예수님 시대 직후에 기록된 이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루카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이것이 복음사가들의 특별한 공로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감사하여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시대에, 그리고 교회가 생겨나던 시대에 그러한 증언을 남겨 줌으로써 루카는 지금도 살아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1세기의 증인을 만난 것처럼 소중하게 복음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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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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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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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과 자비의 루카 복음서!
저도 젊은 수도자 시절 해외 선교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학부를 졸업하고, 사목 실습을 시작할 때, 장상들에게 제발 좀 선교지에서 실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장상들 눈에는 제가 선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답은 언제나 묵묵부답, 너무 답답해서 부르짖으면 겨우 오는 답장은 먼저 한국에서나 잘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를 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늘 그런 열망이 남아있기에, 선교지로 훌훌 떠나는 후배 형제들을 보면 얼마나 부럽고 대견스러운지 모릅니다.
한번은 오지 중의 오지, 도착하려면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언제나 수하물이 제대로 인수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나라로 선교를 떠났던 한 형제가 휴가차 귀국했었습니다.
공항 입국장을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불과 일 년 반전의 그 당당하다 못해 풍성했던 풍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짝 마르고 노쇠한 중늙은이가 한명 꾸부정하게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일 년 반 만에 체중이 30킬로나 빠졌답니다.
그러면서 장난삼아 돈 한푼 안 들이고 자연 다이어트에 성공했으니 꽤 돈 번거라며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과도비만으로 고생하시는 분들 선교지로 초대하겠답니다.
너무 갑작스레 왜소해지고 노쇠해져 적응이 잘 안 되는 형제를 바라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그래 해외선교사들이야말로 이 시대 순교자들이로구나!’
그와 함께 여기저기 같이 다니면서 전해 들은 더위와의 싸움은 정말이지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항상 더우니 잠자는 것이 그렇게 힘들더랍니다.
그나마 쪽잠이라도 자기 위해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둘러야 된답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잔뜩 뜨거워진 매트리스에 미리 물을 한 사발 부어놓는답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열기가 사라져 머리를 눕힐만하다네요.
자다가 몇 번이고 일어나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해야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답니다.
철저하게도 문명 세계와 단절된 곳, 흙바닥에 양철 지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곳,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다시 떠나는 형제의 환한 얼굴이 참으로 고맙고 대견스러웠습니다.
초대 교회 선교사였던 바오로 사도와 루카 복음 사가의 삶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티모테오 2서에 그들이 복음 선포 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굳게 믿었던 동료들로부터의 배신과 따돌림으로 인한 상처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 와중에 주님,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끝까지 등을 돌리지 않고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구리 세공장이 알렉산드로스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2 티모 4,10~17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예수 그리스도 육화 사건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각적 효과를 활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여러 상황들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함을 통해 독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51년경에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제2차 전도여행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 57년까지 필리피 교회 공동체에 머물면서 사목활동을 수행했고, 바오로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때에도 수행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가 투옥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큰 의지요 힘이 되어 드렸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 번째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 추정됩니다.
그는 사도행전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 생활상과 복음전파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루카 복음은 사랑과 자비의 복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따뜻한 시선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인간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죄 많은 여인 이야기, 돌아온 탕자의 비유, 우도 직천당 사건 등입니다.
고통받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했던 루카 복음사가의 복음서는 2천 년 세월이 지나온 오늘 우리에게도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녔던 고통 받는 한 인간을 향한 한없는 측은지심과 따뜻한 동료애가 오늘 이 시대 다시 한번 메아리쳐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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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고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하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리라고 하신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고 하신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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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교의 방법?: 매력적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라!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어떤 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쓰고 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등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이 사도단 안에 머무르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의 열정이 떨어지자 선교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SNS나 인터넷을 통해 편하게 성사를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코로나 시대에 TV로 인사하여 성당에 와서는 자판기 같은 것으로
성체를 영하게 하자는 식의 의견도 제시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앙인이 성당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세례를 받고 성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사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둘씩 파견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파견된 것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파견하신 분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사는 선교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온전히 형성되었을 때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허성 야고보 신부님은 한 때 가정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 신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혼하려는 부부가 성당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물으니 이혼하려고 법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이라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성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잠깐 앉아 있었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무엇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 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마구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시며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시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2시간 뒤 사제관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2시간 동안 있다 보니 서로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 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사를 영하는 목적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의 목적은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비로소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의 재정립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하면 냉담자가 아니라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힘을 주는 데 있는데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잠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만 하면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사의 참례 여부로 냉담자를 가려내는 것은 공동체 친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알아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형성된 공동체가 선교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1973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의
77.5%라는 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잭 니컬슨과 대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가 상영된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터사이클은 말론 브란도의 ‘위험한 질주’(1953)에서처럼 ‘반항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도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구성된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는 수십 대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이 폭력조직과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엔젤스 단원들은 한때 유명 가수들의 공연 안전요원을 맡기도 했는데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렴하고 가볍고 고성능인 오토바이들이 미국을 침략했습니다.
바로 일본의 야마하, 혼다, 스즈키 오토바이들이었습니다.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면 갱스터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선호했습니다.
이때 혼다의 로고는 이랬습니다.
“혼다를 탄 가장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세요.”(You meet the nicest people on Honda)
이렇게 80년대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반 이상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탔고 할리 데이비드슨은 25%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할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983년 할리 마케팅팀은 ‘우리가 직접 새로운 오토바이 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할리의 본질적인 무게감은 유지하면서 범죄집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는 ‘호그’(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4년 동안 7만 3,000명의 멤버들이 등록했고, 오늘날 그 숫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합니다.
할리데이비슨 회사에서는 그저 그들의 모임과 경주 등의 이벤트를 제공하며 자랑스러움을
주는 일을 하면 모든 홍보는 그들 자체가 수행하고 고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방탄소년단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일일이 다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친분을 가질 수도 없지만, 그저 방탄소년단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자랑스러움을 넣어주는 일만 하면 됩니다.
호그의 웹사이트 제작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새로 할리를 구입한 오너와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할리데이비슨을 하나의 크고 행복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곳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H.O.G에 가입하십시오.”
우리 선교의 마인드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보세요. 얼마나 좋은데요?”라는 다소 황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를 영해 보세요. 안 그러면 구원 못 받아요.”라는 식의 마인드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실 젖보다는 엄마의 따듯한 품을 더 찾습니다.
소속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당 가족 공동체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공동체어 머무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방법은 이것입니다.
모든 성당 가족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속하여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여 우리 공동체가 자랑스럽게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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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1) ‘루카’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그 직업은 그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글 쓰는 재능’은 주님께서 특별히 주신 탈렌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탈렌트는 흔히 생각하는 재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입니다.
루카가 쓴 복음서와 사도행전 덕분에 많은 이들이 큰 은혜를 받았으니, 루카는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하여 많은 결실을 얻은 ‘충실한 종’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16.19-21)”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 할 수도 있고, ‘글’이나 ‘그림’이나 ‘음악’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인다운 삶’으로
복음과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해서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되고, 그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는 일이 됩니다.
<루카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선교활동에 동참한 것을, 오늘날의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을 버린 것은, 어부 출신 사도들이 어부라는 직업을 버린 것보다, 또 세리 출신 사도인 마태오 사도가 세리라는 직업을 버린 것보다 더 큰 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 시대 의사들의 사회적 위치가 오늘날과는 좀 다르겠지만, 어떻든 루카는 열두 사도 못지않게
‘버림’과 ‘따름’을 실천한 신앙인입니다.>
2) 자기가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과 원하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로 일치하는 사람은,
그리고 그 일들이 모두 하느님 뜻에 합당하고
선한 일이라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과 원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모두 다르다면, 일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는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그 중에 하나라도 악한 일이 있다면, 또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일이 바로 그 악한 일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기도 하고, 멸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선택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정말로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가?
해야 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닌가?
‘그 일을 잘하는가? 못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평소에 좋아해서 즐겨 하는 일들이
‘나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일이 악한 일이라면 무조건 중단하고 끊어버려야 하지만, 악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방해만 되는 일이라면, 과감히 중단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사실 그 일 자체는 악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신앙생활을 방해한다면, 방해한다는 것 자체가
‘선의 반대쪽’이기 때문에 그것은 ‘악’입니다.>
3) “나는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탈렌트를 조금도 안 주셨다.” 라고 불평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불평하면서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불평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 9,21)”
<이 말에서 ‘귀하다. 천하다.’ 라는 말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귀한 자녀’ 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의 경우를 보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가 단순히 가난한 병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사실 어떤 상황이라도 ‘기도’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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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1-9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저는 미역국이나 육개장 같은 국물류를 참 좋아합니다. 따끈하고 든든한 것이 굳이 다른 반찬이 없어도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어서 간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따끈할 때는 참 맛있어 보이던 국물이 너무나 맛 없어 보이고 역할 때가 있습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국물을 보게 될 때이지요. 차갑게 식은 국에 기름이 엉겨있는 것을 보면, ‘이 음식이 이렇게나 기름진 거였나?’하는 생각이 들어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차갑게 식으면 단점이 보이는 것, 그것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땐 상대방의 장점만 보이지요. 외모도 예쁘고, 하는 말이나 행동도 다 예쁘고, 어떤 실수를 하든 어떤 잘못을 하든 다 사랑스럽습니다. 흔히들 ‘콩깍지’가 씌였다고 하는 상태이지요. 그러나 사랑의 불꽃이 사그러들고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면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실망도 하게 되고, 그만큼 잔소리도 많아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인 신앙도 그렇습니다. 세례 받은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새 신자였을 때는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감사함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에,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게 되었다는 설레임에 미사도 자주 참례하고, 기도도 빠뜨리지 않고 하려고 하며, 성경도 많이 읽고, 교회 내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열정이 사그러들고 나면 ‘하느님의 자리’를 다른 것들이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명예가, 권력이 치고 들어와 하느님을 밀쳐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갖고 싶은 것들을 먼저 챙기느라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것이 영 마음 찜찜하고 신경 쓰이지만, 그래도 내 것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원래 그런거라고, 늘 처음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렇게 조금씩 식어가다 나중엔 ‘정’으로 ‘의리’로 사는거라고 자신의 모습을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차갑게 식어버린 사랑을 다시 불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다시 일으킨 사랑의 불꽃을 오래도록 타오르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의 소중함은 그 사람이 없는 ‘빈 자리’를 체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물건의 필요성 역시 그 물건이 없는 ‘부재’를 겪고 나서야 확실히 깨닫게 되지요. 즉 그 사람이 없는 상황, 그 물건이 없는 상황에 부딪혀 봄으로써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물건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경우는 방법이 좀 다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비워내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재물에 의지했던 마음, 알게 모르게 사람에게 기댔던 마음들을 비워내야 비로소 내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고, 재물에도 사람에도 기대지 말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가 보이고, 또 그래야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만 바라보고 우직하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사가가 마음 속에 그런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보면 각 복음사가의 문체와 특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있는데, 루카 복음사가의 상징물은 ‘소’입니다. 농부가 이끄는대로 한 곳만 바라보고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소처럼, 루카 복음사가가 ‘하느님 나라’만 바라보고 주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우직하게 따라가며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가 세속적인 조건이나 인간적인 능력에 기대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께 온전히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의 모범을 따라 다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비워내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의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사그러들지 않고 활활 타올라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비추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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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오늘 복음에수 참다운 일꾼이 되기 위한 조건을 붙인다면 재물에서 자유로운 자,
평화를 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는
물적이 아니라 영적이어야 하고 양들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목자이어야 하겠지요.
목동이 양들과 밤이슬을 맞으며 들짐승들에게서 양들을 보호하며 희생적이면서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3-5)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듯 살아가는 데에 돈주머니는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가 ‘모든 것이 돈만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돈이 아니라
‘쓸데 없는 돈주머니를 차지말라.’는 뜻이시지요.
다시 말해 돈 주머니에만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같은 집에 머루르라.’라는
말씀은 ‘이집 저집으로 옳기지 말라.’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과도 연결되는 것이지요.
봉사자라도 자기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제공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돈이 없으면 살지를 못하는 한계를 주님께서는 배려하시는 것입니다.
의식주에 필요한 것은 도움을 받되 쓸 데 없이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 ‘과분한 대접’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말라시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평화가 아니라
파견하시는 주님의 평화를 나누어 줄 때 비로소 제자들은 복음선포의 조건을
채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다운 봉사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쉬웠다면 주님께서
왜 일일이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 ‘신발’까지도 심지어는 아무에게도 ‘인사’까지
열거하시며 당부의 말씀을 하시겠어요?
살다보면 포기 했다고 하는 것을 솔솔 다시 챙기는 것이 약한 인간의 모습,
봉사자의 모습이 될 수 있거든요.
‘일꾼이 적다.’라는 말씀은 숫자가 아니라 정말 쓸 데 있는 봉사자가 많지 않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어떤 봉사자는 성품도 있고 덕도 있는데, 능력이 모자라는 반면, 어떤 봉사자는 능력은 있는데
성질머리부터 덕이 모자라는 사람이 인 것이지요.
‘덕도 있고 거기에 맞는 능력도 있는 봉사자.’ 거기다가 복음의 정신, 교회의 정신이 배여 있는
봉사자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니 아무래도 적은 숫자의 봉사자 때문에 파견자는 고민하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나갈 수밖에요.
‘이리 떼 가운데 양들을 보내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신뢰하시고 사랑하시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세상이 어렵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주니의 사랑이 있는데
사실 제자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두려운 것은 제자들이 자신이 복음선포의 소명을 잊고 세상과 동질화가 되는 가능성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이 담긴 복음선포의 소명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이 소명은 사실이 소중하고 세상 어디에서도 임무를 수행할 의무를 담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짐을 가볍게 해주시고 그때그때 마다 힘과 기쁨을 주시기에 봉사자들은
늘 자신 있게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기도하며 주님의 복음 선포의 소명을 기쁘게 이행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요란한 외침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족에게, 이웃에게 말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햇볕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곡식을 영글게 하고 사과를 익게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바로 이웃에게 힘과 기쁨을 영글게 하고 더 좋은 것으로 익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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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동과 말로 항구히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복음
에우세비우스와 예로니모에 따르면, 루카는 시리아의 교육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 출신으로서 그리스인 의사였습니다(콜로 4,14). 그는 바오로에게서 믿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51년경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전교여행에 수행하였고, 57년까지 필리피에 머물며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하였습니다.
루카는 사도 바오로의 제3차 전교여행 때에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루카는 사도 바오로의 제자로서 스승의 거의 모든 복음선포 여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루카는 데마스가 현세를 사랑하여 바오로에게서 떠나가고, 알렉산드로스가 바오로에게 해를 입히고, 첫 변론 때에 모두가 바오로를 저버렸음에도 유일하게 스승 곁을 지켰지요(2티모 4,11).
또한 그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로 호송될 때에 함께 하였고, 수감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 있었으며, 다시 투옥되었을 때에도 함께 있었습니다. 67년 바오로가 순교하자 그는 그리스로 건너가서 “아카이아”에서 전교합니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모든 교회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2코린 8,18)
루카는 오직 복음선포에 전념하는 사도 바오로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그 고통을 함께 겪어냈습니다. 그는 복음을 기록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기쁨과 사랑을 전하는 고난의 길을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걸었지요. 이렇게 복음선포는 선과 사랑을 위해 고난을 함께 겪어냄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성 루카 복음사가의 삶을 통해 우리는 행동의 복음선포가 말로 하는 선포에 앞서며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차별 없이 모두에게 향하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 가난한 자를 우선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행적을 생생하게 전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모든 이에게 행동과 말로 기쁜소식을 전파할 소명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처럼 열정과 항구한 정신으로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있겠지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낭만적인 일도 아니며 자신을 선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이가 정의롭고 자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행복한 순례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항구함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루카 복음사가처럼 말에 앞서 행동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공허한 말과 세상의 허황된 소리로 가득 채워지는 오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행동이 더욱 절실할 때입니다. 특히 루카 복음에 따라 우리도 가난한 자로서 가난한 자를 우선 선택하며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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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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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희망을 피우는 삶
<2024.10.18> 아침을 여는 묵상 (애 1:12~22절)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희망을 피우는 삶❞
❚ 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를 굽게 하는 모든 자들에게 정당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 어떤 상황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까?
➲ 절망적인 상황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12~17절).
예레미야는 민족이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음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눈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13절),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을 묶고 얽어... 내 힘을 피곤하게...’(14절),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15절)라고 표현함으로써 현재 유다가 겪는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징계는 그 누구라도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안에서 벗어난 죄악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외롭도다... 위로할 자가 없도다...’(16,17절). 그래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보이는 징계는 견딜 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당하는 징계와 환난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마저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예루살렘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합니다. 나의 범죄 함의 결과이든지 아니면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 위한 고난이든지 고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레미야는 민족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징계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죄악의 결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삶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영역에 침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려고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뜻 안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이미 내 손에 쥐어진 은혜의 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진리의 길인지를 환하게 비추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르지 못하는 미려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거짓된 신앙생활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이 가져다주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죄악 중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18~19절).
예루살렘에 임한 처참한 진노 앞에 탄식하며 슬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동시에 민족들로 하여금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8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민족들에게 부당한 징벌을 내리신 분이 아니시기에 현재 겪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예레미야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19절). 이는 그들을 구원할 자로 믿고 의지했던 애굽 나라를 가리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기절하였도다..’(19절).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닐만한 처지에 있지 않던 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다가 끝내는 기절할 정도로 그들은 굶주렸습니다.
환난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우리 자신의 잘못된 삶을 인정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세상적 방법은 우리를 결코 선한 길로 이끌어 가지 못합니다. 진정성 있는 회개의 삶이야말로 회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거역하던 죄악에서 떠나 희망의 꽃을 인생 가운데 피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현재 직면해 있는 고난의 삶이 의인으로서 당하는 고난인지, 아니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인지 겸손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편안한 삶을 산다고 해서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힘쓰며 우리 자신을 말씀 위에 온전히 세워 나아감으로 죄악 중의 현실을 딛고 일어서 희망을 피우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고통받는 현실을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20~22절).
‘여호와여 보시옵소서...’(20절) 유다의 백성들은 힘 있는 주변의 국가들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공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구원을 절규하듯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20절).. 현재 유다가 겪는 이 모든 상황들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민족들이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 군인들에게 처절하게 짓밟힌 지금의 이 사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시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서 즐거워하던 이방의 원수들을 ‘선포하시는 날’에 심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공의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의견은 표명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일 계속해서 보도가 되고, 주변에서 발생하는 작금의 현실의 문제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자신이 그러한 죄악에 빠져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아울러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탄식하며 기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강림을 기대하며 환난 중에도 믿음으로 즐거워했던 하박국을 기억하며, 불평 불만하지 말고 도리어 회개하며 주님의 날을 두려움과 떨림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고통받는 현실을 딛고 일어서서 희망을 피우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죄의 멍에를 내려놓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안위하실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늘의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모든 불의와 악에 대해 공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어떤 환경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애 1:12~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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