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평 제255호 (2011년 8월 19일)
간 나오토 총리 사퇴
최영호 (영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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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당대표 사임을 공식 발표하고 29일 오늘 치러지는 경선에서 선출될 새로운 당대표에게 총리직을 넘기기로 했다. 그는 구태정치의 타파를 외치며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전 간사장의 반대세력을 결집하여 집권했지만, 리더십 부재와 지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의 위기관리능력 부족 등으로 당내외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아왔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이래 단명(短命) 내각이 이어지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간 나오토 내각도 그 점철을 밟게 되었다. 다만 고이즈미 이후의 자민당 내각이 모두 12개월에 그친 점이나 민주당 정권의 초기 주자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8개월 만에 사퇴한 것에 비하면 간 총리가 재임한 15개월은 상대적으로 긴 기간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총리직 사임을 표명하는 자리에서 간 나오토는 적자국채 발행을 위한 공채 특례법안과 재생에너지 법안이 이날 참의원에서 가결되면서 퇴진조건이 성립되었다고 말하고 지난 6월에 공언한 사퇴 약속을 이제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어려운 조건 가운데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 냈다고 하면서 내각 운영에서 스스로 어느 정도 ‘달성감’을 느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사회 전반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점과, 파행적으로 국회가 운영된다고 하는 제약 가운데 원활하게 국정을 운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했다.
간 나오토는 1946년 10월 야마구치현(山口縣) 우베시(宇部市)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고교 시절에 도쿄로 이사한 후 도쿄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그의 최종학력은 도쿄공업대학 이학부 응용물리학과 졸업으로 되어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특허사무실에 취직하여 근무하다가 변리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독립하여 특허사무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진보적인 시민운동을 통해 정치권에 입문하여 1976년 도쿄도 지역구 중의원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한 것을 비롯하여 중의원 참의원 선거에서 낙선을 몇 차례 거친 후 1980년 ‘사회민주연합’ 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신당사키가케’와 민주당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자민당 연립내각의 후생성 장관을 비롯하여 재무성과 내각부의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정치가로서 재빠른 변신을 보여 온 그에 대해서는 항상 주변국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유지하는 발칸반도 국가에 빗대어 ‘발칸 정치가’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재작년 민주당 정권 수립 이후 당내 제2인자로 활동하다가 작년 6월 하토야마 총리의 사임에 따라 제94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그는 합법적인 특허 업무를 할 수 있는 실무 경험을 가진 정치가로서 당내 세력이나 일본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민주당 내부에서 오자와의 당 운영에 불만을 가진 의원들을 규합하고 ‘탈 오자와’ 노선을 선명하게 내세움으로써 여론조사에서 60% 정도의 높은 내각 지지율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총리 취임 한 달째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그의 소비세 증세 발언 등이 문제가 되어 참패를 맛보았다. 그 결과 참의원에서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파행적인 국회 운영이 계속되고 당내 구심력도 갈수록 약화되어 갔다. 여기에다가 센카쿠(尖閣) 열도 중국어선 충돌 사건에 대한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비판에 휩싸이면서 내각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올해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는 그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대재난을 계기로 국회 파행을 해소하고 수습과 복구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자민당에 대해 ‘대연립’을 타진했지만 결국 불발로 끝났다. 올해 4월에 실시된 통일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이 패배하자 당내에서 그를 총리직에서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져 그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6월에 들어서는 야당에 의한 내각불신임 결의안이 중의원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결과적으로 내각불신임안은 부결되었지만 그 대가로 그는 총리직 사임을 공언하기에 이르렀다.
총리로서 그는 대외정책에서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 왔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의원 가운데 비교적 한국과 친근한 직책을 담당해 왔다. ‘일한의원연맹’ 소속 의원이기도 하며 민주당 일한의원 교류위원회 고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조(日朝) 국교정상화 추진의원연맹의 고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유 때문인지 그가 한일간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보인 태도에서는 상대국에 대한 배려와 유연함이 돋보였다. 작년 8월에 발표한 한국병합 100주년 총리 담화와 그것에 기초하여 한국과 맺은 도서협정은 양국의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했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름다운 언사에 비해 실행력이 부족하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일관했다고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총리 재임 시 독도 문제와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한 입장에서 보수 우파 세력의 움직임을 억제하지 못한 점이나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부여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못한 점은 이웃국가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북한에 대해서도 ‘납치’문제와 핵문제의 해결, 국교정상화, 경제 지원을 하나의 패키지로 추진하겠다고 하는 정책을 내세웠지만 정작 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적 움직임은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이와 함께 간 나오토는 유난히 재일한국인 관련 스캔들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그의 유화정책이 불필요하게 일본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1980년대 ‘사회민주연합’ 소속 의원이었을 때 선배 의원의 요청에 따라 재일한국인 정치범 석방 요망서에 서명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정치범 가운데 일본인 ‘납치’ 현행범인 신광수(辛光洙)‘를 비롯하여 북한 간첩 용의자 10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이와 함께 2000년대에 재일한국인으로부터 정치헌금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올해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일에 야당으로부터 추궁을 당했고 그도 헌금 수수 사실을 시인했다. 그 후 재일한국인 남성에게 정치헌금을 되돌려주면서 몰래 전화를 걸어 서로 만난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의 정치적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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