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말리엘의 말로 사도들이 풀리다
행 5:33-42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 5:33-42 / 이 말을 들은 의회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사도들을 죽이기로 하였다. 34) 그때 바리새파에 속해 있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율법교사로서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발언하는 동안 사도들을 의사당 밖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35) 이윽고 그가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사람들을 처벌하려는 계획은 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36) 얼마전 드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기를 위대한 인물로 선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녔지요.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37) 그 후 호구 조사를 하던 해에도 갈릴리 사람 유다라는 자가 나타나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자기 제자로 만들었지만 그가 죽어 버리자 그를 따르던 자들도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38) 그러므로 나는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을 제안합니다. 만일 그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그들 마음대로 꾸며낸 것이라면 곧 뒤집혀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어떻게 여러분이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는 오히려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셈이 됩니다.' 40) 의회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을 한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당하는 특권을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의회를 나왔다. 42) 그리고 성전이나 가정 모임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다.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결의하지만 가말리엘의 조언으로 사도들이 풀려납니다.
공회의 반응(33)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자 공회원들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크게 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프리오’의 문자적 의미는 ‘(마음을) 톱으로 자르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분명히 공회원들의 마음을 마치 톱으로 자르듯 조각내었습니다. 이쯤 되면 회개할 듯도 하지만 공회원들은 “감히 우리 앞에서 회개를 운운하다니, 우리가 누구인데”라고 하며 자존심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사도들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가말리엘의 조언(34-39) 결론적으로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도들은 풀려납니다. 이렇게 된 데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존심 강한 공회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가말리엘은 율법학파의 창시자인 힐렐의 손자이자 후계자로서 랍비보다 더 높은 ‘라반’(우리 선생님)이란 명성을 얻고 백성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원들에게 근래에 있었던 역사적인 두 사건을 예로 들면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드다라는 인물이 반란을 주도했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 둘째는 갈릴리의 유다라는 인물이 백성을 잠시 미혹하다가 모두 흩어져버린 사건입니다. 가말리엘의 조언은 이렇습니다. 만일 어떠한 사상이나 운동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저절로 소멸할 것이며,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면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작금의 예수 운동에 대해서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회는 가말리엘의 조언대로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풀어줍니다. 가말리엘의 조언은 일리가 있지만 크게 부족한 점이 보입니다. 예수 복음운동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넘쳐나는데도 그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기쁨의 사역(40-42) 당시의 채찍질은 살점을 떼어낼 정도로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 일찍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의 채찍질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능욕 받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기뻐합니다. 이러한 기쁨에 사도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어디서든 어느 때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기쁘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용: 예수 이름을 위해 수치나 고난을 받은 경우를 기억해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이었는지요?
인간이 가진 권세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권세는 그것을 인간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권세 맡은 자들은 그 권세에 따라 말해야 할 때가 있으며, 그 권세에 따라 결정해야 할 때가 있으며, 그 권세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세워 두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신 권세에 맞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 순간의 위협에 압도당해 사람들의 뜻을 들어줍니다. 그 순간 그에게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지 못합니다. 우린 가말리엘을 묵상해야 합니다.
< 설 교 >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면
양인순 목사
사람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존경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중에도 존경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력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존경받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사 중에도 존경받는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습니다. 똑같은 목사인데도 존경받는 목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목사도 있습니다. 성도 가운데도 존경받는 신앙인이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존경받고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기왕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라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 자식으로부터 존경받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존경받는 일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존경받는 목회자, 중직, 제직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존경 받는 신앙인과 존경받지 못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먼저 존경받지 못하는 신앙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두 번째로 사도들을 불법 구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옥문을 여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사도들은 도망치지 않고, 주의 명령대로 성전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황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다시 긴급 체포조를 결성하여 사도들을 잡아옵니다. 그리고 왜 예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는데 불법을 행하고 있느냐고 심문합니다.
이에 사도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십자가에 매달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속히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성령님도 동일하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식하다고 여겼던 사도들 앞에서 두 번씩이나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바로 오늘 본문 33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행5:33)
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크게 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사도들을 죽여서 없애버리려고 했을까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그들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도들을 죽일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 멤버들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입니다. 그 중에 다수파는 사두개인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얼마든지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왜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요?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집중해서 전했습니다. 둘째는 성전의 관할권자로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두개인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을 예수를 죽인 당사자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죄없으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다고 전파했습니다. 넷째로, 그들이 일차로 공회 명령으로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전히 예수를 전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존경받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전통과 교리에 매여 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주변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은 존경받지 못합니다. 항상 옛날 이야기나 하면서 발목을 잡는 사람은 존경받지 못합니다. 자기 이기심에 노예로 사는 사람은 어디가나 눈총을 받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에 해당합니다.
분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절제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들어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은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분노로 표출합니다. 지나가다가 자기를 쳐다봤다고 칼로 찌릅니다. 길을 가다가 집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다고 그 집에 들어가 사람을 죽입니다. 바로 본능적인 감정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사회병리적인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에 대해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분노는 상대방에게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심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
마음의 분노가 구체적인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쌓아두면 언젠가는 분노로 표출됩니다. 그것은 결국 마귀가 틈을 타는 통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누군가에 대해서 미움의 감정이 있습니까?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 자기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그 곳에 마귀가 틈을 타면 분노의 감정이 커집니다. 어느 순간에 마귀가 스위치를 누르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는 마귀가 틈타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마귀의 올무에 빠집니다.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서로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깨집니다.
육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살면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삶을 망치지 말라고 경고해주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15년 동안 목회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에 목사님과 뜻이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교인들이 비난을 하고, 나쁜 루머를 퍼뜨려도 꾹 참았습니다. 속이 상해도 기도로 인내하면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제직회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공개적으로 목사님을 다시 비난을 합니다. 여기서도 참으셔야 하는데 목사님이 그만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대학시절 유도 2단이었습니다. 양복 윗옷을 벗어던지고 집사님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앞에서 업어치기로 내던졌습니다. 순식간에 제직회장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15년 동안 잘 참았는데 한번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정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항상 후회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상사나 동료에게 꾸중 들었다고 사표 던지면 더 큰 일이 닥칩니다. 바로 실직자가 되고, 앞길이 답답해집니다.
감정을 따라 충동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감정을 따라 움직이면 존경받지 못합니다. 신앙인은 육체의 감정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 분노함으로 마귀의 밥이 됩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 가운데 존경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다같이 34절 말씀을 읽습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행5:34)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법과대학 교수입니다. 그는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랑스럽게 자신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임을 고백합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붙잡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는 예수 편에 섭니다. 사도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합니다. 평상시에 사람들로부터 말과 행실에 문제가 있던 자가 그랬다면 벌써 면직되거나 감옥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백성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당시 온건파였던 힐렐의 후예입니다. 그는 당시에 최고의 랍비로 불려지는 ‘라반’의 칭호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라반 가말리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대한 존경도, 순수성과 금욕도 가버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말리엘은 동료들로부터 모든 백성들로부터 율법의 백미로 불려질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자입니다.
합리적 사고란 종합적, 논리적,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주관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주관이 있기에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입장을 강조하면 복잡해집니다. 내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말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면 이기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주장과 고집을 부립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기고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려면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문제 자체에 매이지 말고, 더 큰 틀에서 접근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동료들이 사도들이 잘못했다고 여기는 가운데 반대 의견을 제시합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고집이 되면 안됩니다. 종합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한 결과여야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의 결과여야 합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대안을 만들어 냅니다. 무조건 Yes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로는 창조적인 No!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더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No!를 할 때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바로 가말리엘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No!하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위기에 처한 사도들을 구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항상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하거나 감정에 이끌리면 공동체에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창조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위기를 뚫고 나가는 힘을 부여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둘째로, 매사에 조심성이 있는 자입니다.
35절에 보면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조심하라”는 것은 원문성경이나 영어성경에 보면 두 가지를 조심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consider carefully what you intend to do to these men.’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너 자신을 조심하라”입니다. 성경에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바울도 “너 자신을 삼가라(Beware of yourself).” 말합니다. 가말리엘도 “너 자신부터 조심하라(Take heed to yourselves).” 합니다. 사람은 남의 티를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도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남의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나도 그럴 수 있지’ 인정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은 오히려 더 많은 잘못을 하면서도 남의 작은 실수와 허물을 지적합니다. 손을 들어 검지가 ‘너 잘못 했어’라고 가리키면 엄지가 바로 자신을 가리키며 ‘너는 더 잘못 했어’라고 충고합니다.
설교를 듣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듣고 난 후에 이런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제 남편이 들어야 되는데 오지 않았어요. 오늘 설교는 수다쟁이 김 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 아닙니다. 설교는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남을 보기 전에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남의 허물이 보이면 ‘나는 더 큰 잘못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을 통해 나를 보게 하는구나.’ 깨닫고 그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네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나쁜 동기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습니다. 동기는 마음속에 있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의 동기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동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말하면 반드시 상처를 줍니다. 나쁜 생각과 동기로 하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우리는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선한 동기로,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의 결과가 선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가말리엘은 자신에 대해서 조심하는 자입니다. 항상 악한 무리 속에서도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데 동기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는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설명을 합니다. 36절에 드다 라는 사람이 일어나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해서 400명이 따랐지만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드다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요단강 가에 불러 놓고 강이 갈라지게 하고 무리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결국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46)가 보낸 기마병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갈릴리 유다 역시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주후 6년 유대는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시리아 지역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와서 과세를 하기 위해 호적 등록을 시켰습니다. 이 때에 유다가 일어나 하나님 백성은 오직 여호와께 재물을 바칠 것이지 이방 통치자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유다는 곧 처형되었습니다.
두 인물을 통해서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는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망한다’입니다.
결국 가말리엘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다같이 38-39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5:38-39)
사도들이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온 소행이라면 무너질 것이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이면 자신들의 소행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임으로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높여주십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자는 결코 존경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는 겸손한 자는 존경을 받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은 비록 채찍을 맞고,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히려 믿기 어려운 태도를 보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도들은 매를 맞았는데도 좋아합니다. 오히려 나같은 부족한 자가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은 당시에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안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모습은 없는지요? 드다와 유다처럼 스스로 교만하여 넘어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율법교사 가말리엘처럼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며 자신을 잘 살피고 있는지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진리를 따르고 있는지요? 주님은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고 존경받는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같이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 516장>
♫ 1.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의 참된 길
이 길 따라서 살기를 온 세계에 전하세 만백성이 나갈길
2. 주예수 따르라 승리의주 세계 만민이 나아갈
길과 진리요 참 생명 네 창검을 부수고 다 따르라 화평 왕
3. 놀라운 이 소식 알리어라 세계 만민을 구하려
내주 예수를 보내신 참 사랑의 하나님 만 백성이 따를 길
4. 고난 길 헤치고 찾아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 길
모두 나와서 믿으면 온 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후렴) 어둔 밤 지나고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
예수는 그리스도
박지은 목사
지난 주일에는 뭐 성탄절하고 이렇게 있어서 몇 번 메시지가 나갔습니다 만은 주일 메시지에 제가 중점적으로 생명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우리 하나님과 나 사이는 무슨 관계라 그랬습니까? 생명관계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사실에 대해서 별로 의심이 없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별로 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확실히 믿습니다. 누리는 만큼, 이것을 믿는 만큼 실제적인 힘과 능력이 증거 되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는 것 다른 종교와 달리 구별하기 위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생명의 종교다 그랬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계시의 종교라! 그렇게 말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의 종교라 그렇게 강조하고 싶고요. 그래서 기독교의 신앙 생활은 믿기 쉽다! 어렵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기 쉽다 어렵다 이것을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면 그대로 우리는 믿는다! 안 믿는다! 상관없어요. 너무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고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믿기 위해서 억지로 애쓰고 노력한다면 종교에 빠지고 그것은 안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난날에 우리 생명에 문제라는 것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한번 짚어봤고 그 생명이 내게 이루어지는 역사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된다. 이것이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하나님께서 다 주었어요. 이름으로 그 이름으로만 아니고 그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로 믿도록 지식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뭡니까?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인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이 성경전체에 기록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 복음서에는 특별히 소개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 대해서 깊이 생명과 연결해서 설명한 것이 주로 요한복음 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첫 장부터 생명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에는 깊은 그 어떤 진리를 소개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요한 복음서에 보면 상당히 여러 가지 재미있는 토론들도 많이 나옵니다. 토론들이 주로 뭐냐 하면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생명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이시다! 이 설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안 믿으려 그러고 이걸 믿는 이것을 증거 하는 사람들을 죽이려 그러는 겁니다. 그게 이제 뭔가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그런 말씀이죠. 그래서 그런 것에 그런 어떤 사건들이 급하게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요한복음 8장에 보면요. 구체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와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보고 사람이 아니냐!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기도 하고 귀신들린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무 중요한 말씀을 많이 해 놓았어요. 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진리가 누가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런 내용들로 쭉 나와있고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많은 말씀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은 8장 4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 47절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그랬습니다. "(요 8: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이 예수를 향해서 사람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들린 사람이다 사람이라고 그런 어떤 나쁜 평가를 하죠. 그때에 49절 말씀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그랬습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죠.
그 다음에 이럴 때에 유대인들이 또 52절에 보면 "(요 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요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냐하면 예수를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냐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 왔지만 누구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결국은 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설명할 때에 유대인들이 도대체 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지난주에도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한번 보십시다. 요한복음 기록을 맺으면서 그 목적을 분명히 말씀했죠. 20장 31절에 뭐라고 말씀을 했느냐? 다같이 시작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그래서 예수께서 이 사실들을 쭉 열거를 하면서 기록한 요한이 뭐라 그랬냐하면요.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되는 목적과 이유가 뭐냐? 왜 워낙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 믿으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안 믿으니까! 여기서 목적을 그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누구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러면서 그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중요한 요한복음서에 핵심입니다. 그러면 쉽게 봅시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습니다. 믿는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많은 경우 여러분 확실하게 분석을 해 보면요. 그리스도를 잘 안 믿어요. 잘 안 믿습니다. 예수를 믿어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믿고 하나님을 잘 믿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많은 경우 사회복음이라던가 이런 어떤 것을 예수님을 하나의 이간 모형으로 해 가지고 본 받자! 이렇게 해 가지고 뭐 예수님처럼 열심히 뭔가 헌신하고 착한 일 하고 그 다음에 가난한자 찾고 뭐 이런 사람들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 배경 속에는 여러분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도 모르게 그 사람들 배경 속에는 뭐냐하면 예수님을 인간 모델로 본다는 사실을 알아야됩니다. 인간 모델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간 모델로 보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자! 그래서 여러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살자! 그러면 그 말 자체가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수가 없는데... 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과 저의 구원주요.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흉내도 못 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살자! 그런 배경에는 자신도 모르게 뭐냐하면, 예수를 인간 모델로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그 경향이 그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1967년도 우리 신앙 문제 때문에 NA 하고 KAL하고 나누어지고 그때 뭐 싸움하고 뭐 제가 알기로는 어느 교회에서는 똥바가지 들고 똥을 퍼붓고 이랬어요 막!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 싸움에 대해서 나쁘다! 좋다!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 싸움의 배경이 뭐냐하면,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 만들려는 그런 운동이 미국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이것을 한국에다가 적용시키려 하가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때 중요한 내용이 뭐냐하면, 동정녀라는 말을 없애자 그랬습니다. 동정녀! 예수도 하나의 인간이다! 말하자면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 짙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말을 부인하고 그래야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믿으니까 그런 것들을 부인하고 그래서 동정녀라는 말을 빼자. 그러면서...
원래 원문에는 젊은 여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 맞습니다. 원래 원문에는 그것이 젊은 그대로, 원문 그대로는 젊은 여자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정녀라고 그랬던 것은 그때의 통념상 이 단어가 처녀에게 해당했던 단어다! 우리는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데 그것이 원문 자체로 봐서는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뭐냐하면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자! 그게 그때에 일어났던 하나의 운동입니다. 그래가지고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 그런 어떤 운동들이 여러분과 제가 속해있는 교단 때문에 온 싸움이요. 또 이것은 전에 우리교단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지켜야 된다는 정도가 아니고 믿어야 될 문제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예요.
그래서 그냥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것을 믿는 것까지도 또 좋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못 믿었을 때에 여러분이 창세기 3장에 전부다 걸려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이게 지금 문제예요. 창세기 3장의 문제를 누가 합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을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게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예수님,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인간 예수 참 위대한 일 했다! 큰일했다. 그것은 세상이 다 압니다. 여러분! 여러분 그 증거로 올해가 몇 년도입니까? 2000년도 바로 오늘 마지막 끝이죠. 2000년도라는 기준이 누구입니까? 예수입니다. 예수! 그러니까 신 불신간에 예수 인정 다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그래서 좋을 일 했다. 그리고 어떤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줬다. 제일 큰 영향을 줬다. 그게 프랑스에서 그때 과학자들과 여러 분야에서 모인 100여명이 선출해낸 인물이 예수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들도 믿어요. 그렇지만 오늘날 불신자들이 그 예수를 무엇으로 안 믿습니까? 그리스도로 안 믿습니다. 그리스도로!
그런데 여러분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깊이 따지고 보면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까지는 그 분을 그리스도로 못 믿고 있습니다. 안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실이 거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흐르는 갈등 내지는 이 현장들이기 때문에 성경전체는 이 설명을 주로 다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이 사실을 주로 말하면서 오늘 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바로 전도 내용이 이런 내용이에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가르치는 것 그리고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도, 말해주는 것 그래서 이것을 말씀운동이다! 그러고 이걸 가지고 우리는 전도라 그럽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 천당은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라야 천당 갑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느냐? 바로 이해가 안 되니까 종교로 빠지고 신비주의로 빠지고 그렇게 돼요. 다시 말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는 믿음이 뿌리를 안 내린 상태에서 기도 많이 하면 신비주의로 빠집니다. 신비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는 믿음으로 뿌리가 안 내리고 성경에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을 열심히 알고 그 다음에 열심히 교회 와서 봉사하면 어디로 빠집니까? 종교로 빠지게 되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다 있거든요.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 믿어요. 그래서 보통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 안 합니까! 분명히 구별합니다. 예수는 믿지만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 많다니 까요! 개개인이 정말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여기에 모든 답이 나온다 그랬습니다. 창세기 3장이 바로 여기에 답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조금 이렇게 보면요. 요한1서 2장 22절에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다"그랬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 그래도 전부 거짓말쟁이예요. 교회 나와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메시아이시다 이 사실을 부정하면 거짓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왕으로 오시고 제사장으로 오시고 선지자로 오시고 여러분 왕으로 사단의 왕국을 꺾으시고 제사장으로 오셔서 모든 죄와 허물을 해결하시고 저주에서부터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 떠나서 인간 세상에 빠졌던 우리를 하나님 만나게 만드셨다. 이 직분을 바로 그리스도라 말합니다. 이것을 믿느냐? 믿을 때에 뭐가 옵니까? 창세기 3장 15절이 성취가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게 될 때는 교회 열 번 다니고 백 번 다녀도 어디에 빠집니까? 종교에 빠지고 사단의 통로가 돼요. 그러니까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없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리더라 구요.
오늘 여러분 가슴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우리 교회 다니면서 거짓말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이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이것도 그리스도 되심을 안 믿는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 그랬습니다. 이 전부 종교에 빠지고 이게 이상한데 빠지는 겁니다. 요한 일서 5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니까 하나님께로서 났다 그랬습니다. 나았다. 지난주에 제가 이 말씀을 상세히 드렸죠. 나았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5장 42절도 이 사실을 강조했거든요. 사도행전 18장 5절도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그랬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것을 못하도록 죽이고 심지어는 이 공문까지 가지고 와서 감옥에 가두고 안 그랬습니까! 그래서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해답을 주고 난 후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어요. 예수는 알아요. 그런데 인간 예수로 그리스도를 안 믿으니까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해 주었다 그랬습니다. 이게 성경 전체의 내용이에요. 그 다음에 사도행전 18장 28절에도 뭐라 그랬냐 하면요.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그랬습니다. 쭉 내용이 전체 다가 이런 배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체가 뭐냐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하는데 많은 장들을 할애했더라 구요.
그래서 이것을 다는 말씀을 못 하지만 제가 몇 군데 몇 구절 찾아보면요. 마태복음 1장 16절에도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그러니까 예수는 이름인데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를 낳으니라" 그렇게 첫 번부터 기록을 하죠. 마태복음 16장 20절에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왜? 못 깨닫는 자들에게 안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되는 일은 어떤 자격을 가져야! 어떤 자격을 가지고 거쳐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왜? 직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잠깐 이 말을 다시 말씀하면 내가 집에서는 그리고 일반인으로서는 박지 온입니다. 집에서는 나를 목사님 그러고 안 그래요. '아빠!' 그리고 그렇죠. 그리고 우리 집사람 나한테 뭐 다른 사람 앞에서 부를 때는 목사님 이렇게 부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부를 때는 '여보!' 그러고 고함을 지릅니다. 나는 느닷없이 '여보!' 그래도 '예!' 그리고 내려갑니다. 왜 개인적으로는 박 지 온입니다. 그런데 이 강단에 설 때는, 여러분이 저를 부를 때는 뭐라고 부릅니까! 목사라 부릅니다. 그러니 이 강단에 서기까지는 반드시 소정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시험도 쳐야됩니다. 아들은 시험 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직분을 맡길 때는 시험을 칩니다. 아버지의 회사에 있지만 그 아들을 어떤 직분을 맡기고 어떤 직책을 맡길 때는 소정의 과정을, 자격이 주어져야 맡깁니다. 바로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지만 그 예수님을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한 직분인 메시아 직분을 주시기 위해서는 소정의 과정을 거쳐야 돼요. 그 소정의 과정이 뭡니까? 십자가라 그랬습니다. 십자가! 그래서 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문제였고 그리고 마지막 그 십자가를 지실 때에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엘리 엘리 나마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비참한 그런 어떤 그 고백이 안 나옵니까! 그러면서 마지막에 운명하기 직전에 뭐라 그랬습니까? "다 이루었다!" 직책을 완성했습니다. 바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신 그분이 그때부터 여러분과 제게 뭐가 됩니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다 이루었다 그럴 때에 삼 직을 가지고 삼 직을 완성하셨다 그 이야기입니다. 왕으로 사단의 왕! 특별히 사단의 왕! 그럴 때에 사단은 흑암의 왕이요. 저주의 왕이요. 죽음의 왕입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라 그랬습니다. 사단은 주로...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현재 어디에 주로 떠느냐? 히브리서에 말씀한 것처럼 죽음 앞에서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흑암 권세예요. 사단 권세예요. 그러니까 사단의 왕국 죽음의 왕! 바로 사단을 완전히 깨어 버렸습니다. 해결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로 통해서 죄와 저주가 왔습니다. 그래서 저주와 죄를 통해서 여러분과 여러분 후손들이 엄청난 운명과 괴로움과 고통 속에 빠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 빠져 있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서부터 구원받고 거기서부터 건져질 수 있는 길이 누구입니까? 바로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그 죄에서부터 저주에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그 사실이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 세상에 빠져서 세상 좋아하고 세상 욕심에 빠져서 사단 왕국에 속해서 세상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던 그런 저희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게 되는 순간 이때에 바로 선지자의 직책입니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 선지자의 직책을 한 몸에 가지시고 이것을 최후로 하나님 앞에 이것을 인정받는 그리스도로 그 직책을 인정받는 순간이 언제냐? 최후로 그리스도 되시는 순간이 언제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그 시간입니다. 이 사실이 이루어지고 이 사실이 내가 믿어져야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디에? 내 안에 들어옵니다. 이때에 나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는 하나님의 뭐가 됩니까?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부터 당장 말씀이 결론부터 말 안 합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뭘 주었습니까?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 권세를 거기에 부여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못하게 하고 이 일을 못 믿게 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못 믿게 하고 예수가 그리스도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사단의 역사요. 그것이 쭉 유대인들에게 나오는 배경들입니다. 이 성경에 나오는 배경이에요. 만약에 예수가 그리스도 되신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안됩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라도 그것은 뭡니까? 사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7절 말씀 보면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했을 때에 너무 좋아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러면서 칭찬했죠. 그러면서 세 가지 축복을 했죠. "이것을 알게 한 것은 네 자신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그러면서 반석에 있고 그 다음에 기도응답 주시고 전부다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예수께서 뭐냐? 그리스도 되시는 마지막 단계를 마지막 수준을 이제 그 일을 치러야 되는데 그 일이 뭐냐 하면요. 십자가 지시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메시아 되시는 일에 가장 중요한 메시아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 중요한 일을 해야됩니다. 이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것을 설명할 때에 여러분 성경에 보면요. 그것을 설명하기 전까지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것을 설명하기 전입니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16장 21절부터 "이 때로부터" 그랬습니다. "이 때로부터" 이제 저들이 알았으니까! 설명을 해 줍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그러는 것은 오래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가르쳐주고 싶었지만은 아직은 때가 안 되니까 비로소 설명하게 됩니다.
여러분 알아듣는 것이 아무 때나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어야 알아들어요. 아마 여기 오신 분들도 처음 예수 믿자마자 알아듣고 메시아 알아듣고 그게 아닙니다. 때가 되어야 알아듣습니다. 받아합시다. "때가 되어야 알아듣는다." 긍정하십시오. 혹시 아직까지 잘 못 알아듣거든 낙심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알아듣습니다.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런데 금방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을 해 놓고 베드로가 어떤 짓을 하느냐? 이것은 짓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되는 가장 중요한 이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통과해야 될 그런 과정을 베드로가 뭐냐? 막았습니다. 예수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22절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가만히 가로되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쳐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이 주께 해당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당장 그 자리에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 이전에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방해되는 것도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못 믿게 하는 것도 사단의 역사입니다. 왜 이것을 믿어버리면 사단이 깨지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보루가 예수도 믿고 하나님의 아들도 믿고 있지만 뭘 못 믿게 하느냐? 그리스도 되심을 못 믿게 해요. 그리스도 되심을... 여기에 우리도 모르게 속고 있더라 구요. 많은 경우... 여러분 개개인이 이 문제가 해결되면요. 자연적으로 창세기 3장 15절 문제 해결됩니다. 창세기 3장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뭘 상하게 해요?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다음 뱀의 후손은 여자의 뭘 상하게 해요? 발꿈치를 상한다! 그건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대강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라는 별명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이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태복음서에 구체적으로 지난주에 말씀했죠.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를 낳게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누구에게? 마리아에게 잉태하게 하시고 성경이 뭐라 그랬냐하면요. 받아합시다. "마리아에게서" 누가 났어요? 예수가 났다! 그랬습니다. 이래서 별칭 여자의 후손이라! 별명을 붙였습니다. 여러분 여자의 후손을 다른 게 아닙니다. 왜? 여자가 유대의 관념에서 절대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생명은 누구로부터? 남자로부터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없어요.
그래서 족보를 기록할 때에 마태복음서에 여자들에 대해서는 안 나와요. 아예! 전부 그냥, 남자 이름만 누가 낳았다. 누가 낳았다. 전부 남자 이름이 있지 여자는 안 나왔어요.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가 난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름을 붙여야 되니까! 그것이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낳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우리가 지금 여자의 후손이다! 그렇게 별명을 붙였습니다. 성령으로 바로 이것을 하나님 앞에... 그런데 예수가 낳는데 예수가 낳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삼 직을 가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뭐가 되어야 돼요. 그리스도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게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5절에도 보면 이런 문제로 마태복음 16장 20절에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그랬고 이 설명을... 왜 모르니까! 그 다음에 마태복음 24장에는 말세에 현상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세에 현상에는 잘못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이 그리스도가 분명히 뭔가 말세에 약속은 했는데 잘못 아는 것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뭐냐? "말세에 미혹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들이 24장 5절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그랬습니다. 누가복음 2장 11절에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시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여러분과 제게 그리스도가 되어야 되는데 이 그리스도가 되는 사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 전부 사단의 역사거든요. 이것을 지금 바로 이해를 하셔야되죠.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47절에 똑 마찬가지로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복음 9장 22절에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이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거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하는 사람은 무조건 출교하기로... 출교라는 것은 옛날에 출교 그러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에 보장을 못 받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쨌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출교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예요.
그 다음에 요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그 다음 요한복음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 사도행전 2장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뭐가 되었어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랬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예수 그리스도!' 그랬는데 예수가 그리스도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럴 때 참 거부감이 나오더라 구요. 어떻게 예수님이 날 때부터 그리스도신데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성경에 깊이 들어가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구요. 예수는 날 때부터 예수이지만 그리스도 되시는 것은 시간이 지나서입니다. 어디에서?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은 쉬워요. 믿는 것은 쉬운데 뭐냐? 그에게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확신은 시간이 필요하더라 구요. 금방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를 보내시면서 여기 분명히 말씀한 것이거든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행 2:36)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주님께서 이 땅을 위해서 어디에?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리스도 되는 일에 완성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아야되죠. 사도행전 3장 20절에 보면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누구로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씀을 했죠.
그 다음에 오늘 사도행전 9장 22절에 보면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무슨 말이냐 하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을 때에 누가 임했습니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실을 말할 때는 뭐냐? 고넬료의 가정에서 행했던 베드로의 전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했더니만 그 그리스도를 깨닫고 아는 순간에 누가 임해버렸습니까? 성령이 임해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부하리요." '하나님이 하시는데'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임함도 제가 지난주에 우리 그 크리스마스 때 설명을 했습니다만 예수를 정확하게 정말 그리스도로 내가 영접하는 순간에 따라서 뭐가 임합니까? 성령이 그 자리에서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어있죠. 이 사실이 바로 중요한 사실이죠.
그 다음에 사도행전 26장 23절도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곧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고난 받아야 이것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제가 많은 성경 구절을 말씀드린 것은 이것을 조금만 유의하시면서 성경 읽어보면요, 제가 다 빼먹어 버렸어요.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딱 알기 쉽게 몇 구절만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찾아보니까요. 신약에는 쫙 나오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너무 많아요. 다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너무 안 믿고 살았다 이겁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왜 안 믿었느냐? 안 믿게 된 배경이 사단의 배경들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으로 누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이 그리스도 되신 것을 믿는 순간에 누가? 창세기 3장에 사단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사단의 문제가 오늘날 해결된 옛날에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해결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찾아봅시다. 이건 우리가 찾아볼 필요가 있다 싶어요. 요한계시록 12장 9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아멘. 여기에 옛 뱀, 용이라 그러는데 용이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사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뱀도 역시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록에 사단을 용으로 표현을 하는데 그 용이 어떤 존재냐? 옛 뱀! 옛날에 뱀으로 뱀을 통해서 들어왔던 사단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옛 뱀은 언제입니까? 창세기 3장입니다. 창세기 3장에 누구 꼬시던 뱀입니까? 아담 하와를 꼬시던 옛 뱀입니다. 바로 그게 뭡니까? 바로 그 옛 뱀이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몰라 가지고 뱀을 사단인줄 알고 뱀을 마귀로 알고 옛날에 어릴 때도 우리가 얼마나 '저 마귀 잡아라!' 그러고 그래가지고 뱀을 잡고 그랬습니다. 저도 뱀 잘 잡아요. 뱀은 대가리 찍어 버리면 죽습니다. 그래가지고 옛날 시골에는 물뱀, 도랑에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가지고 당장 잡아 가지고 그 자리에서 껍질 벗겨 가지고 구워 먹어버리고... 그런데 그 여러분 뱀 고기가 그렇게 맛이 있더라 구요. 아주 고소한 것이 맛이 있어요. 보통 여러분 웃지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그 군인들 특수 훈련받을 때는 뱀 잡아먹는 것도 훈련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요. 그 뱀을 사단이라 생각을 하거든요. 뱀을 통해서 상징입니다. 통해서 누가 들어왔습니까? 뱀을 통해서 사단이 역사 한 것이죠. 여러분들이 지금 이 통로를 잘 알아야 됩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옛 뱀에 걸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잘못하면 왜? 그리스도 부정하게 되면 옛 뱀! 사단에 걸리게 됩니다. 일단 이리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예수를 그리스도의 생명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확인되는 만큼 창세기 3장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해결된다. 우리가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모든 기도의 문제들이 응답되는 역사가 나오죠. 그래서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여자의 후손으로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완전히 사단의 머리가 박살나 버립니다. 완전히 깨버립니다. 그러니 죽는다 이겁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 저는 그 그렇게도 볼 수 있어요. 뒤꿈치를 상한다! 그럴 때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을 꺾을 때에 어떤 면에서 이것을 발악을 하면서 우리에게 작은 손해는 끼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겁낼 것 없어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난 과거를 이렇게 돌이켜 보면요.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 그런 이상들이 있어요. 그 인상들이 뭐냐하면,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좀 어려웠습니다. 그 배경이 뭐냐 하면요. 사단이 그 발악을 하니까 좀 어려웠죠.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그리스도를 확인하는 만큼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형통하게 되어졌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었을 때에 잘 되는 것 같으나 한꺼번에 허망해 지더라 구요. 한꺼번에 망하게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내게 그리스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다 믿는 것은 어려움이 없어요. 믿어지게 되는데 그런데 삶이 좀 어렵다 그것은 사단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발악하는 것도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확인되는 만큼 뭡니까? 구체적으로 승리하는 역사가 나옵니다. 왜?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모든 원수의 능력을" 뭐할? "제어할 권세를 주셨나니 결단코 너희를 해할 자가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자꾸 손해를 보게 되고 자꾸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저녁에 조금 말씀을 하겠습니다 만은 오늘 저녁에 조금 제가 이 구체적으로 언약을 잡게되는 그때부터 답이 다 있더라 구요. 성경에 보니까! 그때부터 전부 다 풀려요. 육체적인 문제 물질문제 다 풀리더라 구요. 이게 안 되는 만큼 어려워 져요. 성경 전체에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이 전부 사단의 역사 속에 나도 모르게 우리 자신들이 사단의 통로가 돼요. 옛 뱀이 되어 있더라 구요. 옛 뱀이! 옛 뱀이 그러니까 흉직스럽잖아요. 옆에 사람 뱀으로 생각해 보세요. 같이 앉아 있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모르니까! 다 당하는 겁니다. 오늘 정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이 모든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사단의 유혹 때문에 불 신앙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이 자꾸 부정이 되고 그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이게 불신입니다. 여기서 모든 통로가 열리고 그것이 바로 옛 뱀이 되는 사단의 통로가 되는 엄청난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이것을 확인하고 믿는 만큼 2001년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큰 축복과 역사가 계속해서 승리로 역사 될 것을 확실히 믿고 이 일에 여러분과 제가 함께 섰음을 감사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이 축복이 계속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쉬지말고 복음을 전하자
김 조 목사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사상적, 종교적인 투쟁사요 가난, 질병, 환경과 싸우며 살고 더욱이 사탄과 영적 전쟁을 해야 하는 성도의 삶에 언제나 승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초대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이루며 사도들이 능력있게 복음을 증거함에 많은 환란도 핍박도 받게 됩니다. 감옥에도 갖히고 매도 맞고 재란을 받으면서도 그런것에 굴하지 아니하고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하셨으니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승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그러한 승리가 있기 원하며 “쉬지 말고 복음을 전하자”라고 제목하고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비결 즉 승리의 비결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저 합니다.
1. 확신 갖고 자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33-39절)
국가 최고 기관인 공회에서 판정한 것도 무시하고 예수 부활의 증인임을 전하게 되니 산헤드린 공회에 크게 두 파가 있는데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사두개인들이 크게 분노하여 없이 하고자 흥분하고 있을 때에 부활을 믿는 바리세파의 공회원 중 가말리엘 교법사가 말했습니다. “가말리엘은 교법사요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유전을 체계화한 힐렐의 손자이며 율법학자로써 율법의 고문으로 한때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으로 일했고 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인 미쉬나(Mishnah)에도 그의 글이 많이 실려 있으며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했다.(22:3) 이러한 인물이 사도들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다. 사도들이 일에 너무 흥분하지 말라 최근에 정치반역을 꾀하였던 드다, 유다도 일어났다가 다 망하고 흩어져 버렸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된 아무리도 사람에게 난 사상이나 행실이면 얼마 안가서 망해버릴 것이요 만약 하나님께로서 났다면 무너뜨릴 수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는 것이니 그냥 버려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옳게 여겨 채찍질하고 석방했던 것이다. 가말리엘의 변론이 매우 합리적이다. 사두개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게 되었으니 칭찬 받을만했지만 내용면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분명한 것 없이 중용적 태도로 우유부단했습니다. 교법사이기에 새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해 명확한 답을 해야 하는데 드다 , 유다 같이 정치적 선동을 일삼던 자와 같이 비유하여 소란한 백성을 조용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것과 당시 지배자인 로마의 허락 받아 집회를 하는데 종교문제도 시끄럽게 되면 유대교인들이 자기가 손해를 볼 것 같으니 사두개인도 잠재우고 자기(유대교)도 보존하려 했으니 분명한 교리가 아니라 기득권 보호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결과적으로 복음을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확신 갖고 자신 있게 권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 아니요 하나님께로 났으니 구원은 오직 예수입니다.(요14:6, 행4:12) 현실과 타협이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를 예수 외에는 구원 있다고 하다가 신학교 교수 면직 파면되었고 성당에 부처상이 있었다니 인간적인 착상으로 종교 갈등해소 하려는 것은 좋게 보이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요 구원은 오직 예수라 그는 우리의 질고와 슬픔 당해 주신 분(사53:4)이요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확신 갖고 자신 있게 전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2. 고난 당해도 기쁨으로 전해야 합니다. (40-41절)
가말리엘 말을 합당하게 여기고 사십에 감한 채찍질을 하고 석방시켰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것을 명예로 알고 기쁘게 했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는 용서하지 아니하는 무서운 채찍입니다.(신25:3) 그런데도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의 매질은 장차 받을 영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받는 고난이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롬8:18) 성도들이여 하나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상주실터이니 이를 생각하면 사도들처럼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하며 기쁨으로 전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기 때문”(벧전1:7) 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는 아니합니다. 많은 수모와 멸시 천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축하 받을 일임을 알고 기쁘게 전도합시다. 1930년대에 “예수천당”을 외치던 최권능 목사님은 매를 맞을수록 하늘에 상 받음을 알고 매 맞을 때마다 감사했으니 석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고난당해도 상급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전도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언제나 어디서라도 전해야 합니다. (42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는 매일 또는 하루 종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딤후4:2) 하셨습니다. 또한 “성전에 있든지”라고 하신 것 보면 성전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라 전하기도 좋지만 반대자에게 다시 체포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요 “집에 있든지” 라는 말은 생활의 터전이 집이기에 사람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것이 식구들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라도 전도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으니 십자가는 고통이요 죽음입니다. 그만큼 하고 나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보여주는 것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요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복음전하는 것이 성도가 꼭해야 할 사명일찐데 쉬지말고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가말리엘 교법사처럼 현실적 문제 해결 위해 확신 없이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타협인 태도가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되며 오직 예수임을 분명히 확신 있게 증거해야 하며 고난과 환란을 당해도 하늘나라 상받을 것 기억하고 언제나 감사하며 기쁨으로 전해야 할 것이요 사도들이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전도했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로 나의 삶의 전체가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있기를 원하며 이렇게 쉬지 않고 전함으로 큰 복을 받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교법사 가말리엘
손상률 목사
사람에게 있는 자질 가운데 나면서부터 간직하게 되는 선천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후천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전자는 부모나 조상을 잘 만나서 얻게 되는 경우이지만 후자는 좋은 선생님이나 좋은 선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경우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장 모범된 선생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9에 보면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는 유대인의 스승이요 교법사인 가말리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당대에 명망높은 선생으로서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해 성경이 말하는 교사들 가운데 가말리엘의 행적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Ⅰ. 존경받는 선생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은 남을 가르칠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며 도덕성이나 품행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 교법사(敎法師)의 신분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중 율법에 정통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율법사라고 하며(마23:35), 또는 서기관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전자는 율법을 잘 알고 이를 해석하는 자이며 후자는 그 중에도 문서를 관장하고 가르치는 학자를 뜻합니다(마2:4). 교법사라는 말은 누가복음 5:17에도 나오는데 이 역시 율법의 선생을 의미합니다. 본문말씀 34절에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신약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랍비들 중에서도 선택된 7인의 "라반"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명한 라반인 힐렐(Hillel)이 그의 조부로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건한 율법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역시 학자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2) 경륜이 높은 선생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불이 붙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자 예루살렘은 크게 소동이 일었습니다.
매우 당황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일을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사도행전 5:21에 보면 "…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서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제사장과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은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권위있는 인물들을 망라한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 사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궁리하였습니다.
33절에는 "저희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가말리엘이 나서서 회중을 장악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지난날에 있었던 드다의 사건과 갈릴리 유다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그 두가지 사례는 모두 백성을 선동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으나 그 동기도 불순했고 결과도 좋지 않았습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도 곧 사그라들고 만다는 것을 일러 주었습니다.
(3) 이치에 맞는 가르침
사도들의 처리를 놓고 공론에 붙인 산헤드린 회의는 크게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도행전 4:16-17에 보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하자"고 결의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하며(행4:19-20) 더욱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을 잡아 매를 때리며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행5:4-41).
이와같은 사람들을 폭력으로 제압하려하고 무자비하게 죽여버리자고 할 때 가말리엘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여 그들의 행동을 제지 시켰습니다.
진정한 선생은 어떤 경우에도 감정이나 기분에 치우치지 않고 또한 대중의 인기를 몰아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도리를 일러주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25:11-12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신앙있는 선생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신앙과 지식, 또는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갈등을 빚을 때가 있습니다.
가령 바벨론 나라에서 방백을 지낸 다니엘이나 그의 친구들은 거친 이교의 문화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수난을 겪었습니다(단1:8).
예수님 당시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공회의 의원으로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집단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는 주님을 사모하였고(요3:2) 가장 요긴한 순간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였습니다(요20:39).
가말리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하고 사도들을 박해하며 죽이게 한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주님을 위하여 요긴하게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본문 38-39절에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대 사회를 장악하였습니다(요9:22). 그러나 같은 공회 의원이면서도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자기 목적을 이루겠다고 날뛰는 경우 "가시채로 뒷박질하는 고생"이라고 하였습니다(행26:14).
(2)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였습니다.
36-37절에 가말리엘이 예를 든 두가지 사건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의 경영으로서 모두다 무의미하게 끝난 사건입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의 글에 의하면 드다가 일어나 선지자라고 자처하면서 자기가 명령만하면 요단강도 갈라진다고 선동하였습니다.
그 당시 백성들 중에 드다를 제2 여호수아로 알고 수백명씩 따라 다녔으나 로마 총독 파두스(Fadus)가 보낸 기마병에 의해서 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다도 백성을 선동하며 로마에 납세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결국 비참하게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은 사례를 가지고 설명하는 가말리엘은 결국 인간의 무능을 지적하는 것이며 산헤드린 공회가 저희들의 단합된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7:5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본문 38-39에서 가말리엘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일은 가만 두어도 저절로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옛날 신앙가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두고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고 하였습니다(삼하16:10).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롬11:33-36).
Ⅲ. 하나님 나라에 이바지한 선생입니다.
선생된 자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5:19).
(1) 주의 종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의 최고 지성들이 모인 산헤드린 회의에서 정신적으로 그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의 주장을 펴면서 사도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사도들의 목숨을 구해 내면서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의 지혜나 재물이나 권세나 무엇이든지 그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나를 생존케 하신 것이 이때를 위함이라고 생각하면서 헌신할 수 있어야 됩니다(에4:14, 수14:10).
(2)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덕망있는 랍비로서 많은 후학들을 키우며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신약역사에 불후의 인물인 사도 바울같은 사람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2:3에 보면 바울이 천부장 루시아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해22:3).
구약시대 엘리야는 곳곳에 선지학교를 세우고 엘리사와 같은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왕하2:1-11). 예수님께서도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지상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였습니다(마10:2-4). 바울의 업적 중에는 전도를 하여 교회를 세운 일과 성경을 기록한 일이며, 그 중에도 디모데, 누가, 디도, 빌레몬과 같이 기라성같은 재목들을 배출해 낸 것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주일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서 신실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꾸준히 키워냅니다.
다니엘 12:3에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존경받는 사람
김상복 목사
사람들 중에는 존경받는 사람과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 중에도 부모의 존경을 받는 아이와 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 부모와 그렇지 못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예수 믿게 해주셨으니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이웃들 간에 꼭 존경받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본문에 보면 먼저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왜 존경을 받지 못합니까? 육을 따라 본능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5:33). 여기서 유대지도자들은 본능과 습관과 감정대로 살았으므로 적절하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육을 따라서, 느끼는 대로, 1차적 분노에 의해 행동하였습니다. 분노는 인간의 기본적 감정이라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자연히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분노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화내거나, 폭언하거나, 구타하거나, 비방하거나, 복수하거나, 죽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노에 대해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5:22). 분노는 사람을 죽일 수 있기에, 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을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십니다. 분노는 또한 사람의 명예를 짓밟고 관계를 깨뜨리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에, 예수님은 분노를 조심하고 감정에 따라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를 15년 동안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인간사회기 때문에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교인들이 한두 명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동안 속상한 일도 잘 참아오셨는데, 어느 토요일에 열린 제직회에서, 항상 그랬던 사람이 또 공개적으로 목사님을 공격해 왔습니다. 여러분, 정 못 참겠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아야 합니다! 그 때 못 참으면 큰일 납니다. 그분은 그날만은 참지 못하고 왈칵하는 감정에 따라 행동해버렸습니다. 대학시절 유도 2단이었던 그분이 벌떡 일어나 웃통을 확 벗어던지더니 그 집사님의 멱살을 잡은 것입니다. 제직회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분의 15년 목회는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제직들이 다 보는 가운데 그 난리를 폈으니 어떻게 그 다음 날 예배를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교회의 지도자 다섯 명이 한 밤중에 저를 찾아와 주일예배를 인도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여러분, 1차적 분노와 감정과 육을 따라 행동하면 존경을 잃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사임하고 택시기사가 되었다가 후에 슈퍼마켓 직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의 말에 기분 나쁘다고 사표 던지고 나오면 그 때부터 실직자가 되는 거예요. 감정적이고 본능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살면 존경받지 못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1차적 반응이 아니라 2차적 반응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육을 따라 행동했지만 예수 믿고 나서 성령을 따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매우 안타깝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19-23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고초와 재난을 생각하니 고통이 너무 커 낙심을 했습니다. 1차적, 육적 반응입니다. 하지만 마음 깊이 묵상해보니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여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2차적, 영적 반응입니다. 육적 반응으로 낙심하여 끝나지 않고, 영적 반응으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니 찬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 늘 함께 계시니 두렴 없네. 그 사랑 변찮고 날 지키시며 어제나 오늘이 한결같네. 오 신실하신 주,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 일용할 모든 것 내려주시니 오 신실하신 주 나의 구주.” 1차적 반응에서 2차적 반응으로, 육적 반응에서 영적 반응으로 돌아설 때 이와 같은 위대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1차적, 육적, 감정적, 습관적 반응에서 해방받기를 바랍니다. 분노대로 그냥 움직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어요. 살인한 사람은 다 후회합니다. 최근에 제가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 한 젊은이가 자기 부모를 죽였다가 감옥에 가서 후회하고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삶을 망치지 말라고 경고해주십니다.
유대의 지도자들 중에는 존경받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교법사 가말리엘인데 사도바울의 스승이었습니다(34절). 교법사는 지금의 법과대학 교수인데, 그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로 유명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요? 가말리엘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가말리엘은 합리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합리적 사고란 종합적, 논리적,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조심하지 않으면 주관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누군가 무엇을 보고 저에게 얘기를 해줄 때가 있는데, 자세히 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본 것은 그 시간에만 본 것인데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때는 “제가 보니까...,” “제 생각에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라고 주관적임을 인정해야합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전부고 진실이다” 하지 말고 내가 본 대로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객관적이라는 것이요, 객관적이라는 것은 모든 형편을 다 알아보고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보는 것입니다. 사실을 다각도로 확인하고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합리적이라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존경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가말리엘은 공과 사를 구별했습니다.
그는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5:34). 자기들끼리 의논할 일이 있다며 사도들을 나가 있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 5명 정도가 교회에 다니고 2-3명이 다니지 않을 때, 교인들이 다수이므로 교회 이야기가 나오면 목사님이나 교회의 흉을 보게 되기 쉽습니다. 성도들끼리 모였을 때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마치 집안 식구들이 집안 얘기를 하는 것처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목사, 장로, 집사에 대해서 흉보면, “나도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는 분별력 없는 그런 일을 평생 보았는데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있는데 가족끼리 서로 흉보는 이야기를 하면 누워서 침을 뱉는 격입니다. 손님이 보면 대번 “콩가루 집안이구나!” 할 것입니다. 공과 사를 구별해야지요. 가말리엘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알았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셋째로, 가말리엘은 매사에 조심성이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이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35절). 여기에서 “조심하라”는 것은 원문성경이나 영어성경에 보면 두 가지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너 자신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사도바울도 “너 자신을 삼가라(Beware of yourself)” 했고, 가말리엘도 “너 자신부터 조심하라(Take heed to yourselves)” 합니다. 인생은 자기 자신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실수가 보이더라도, 좋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그를 공격할 게 아니라 “아, 나도 저런 짓을 한 적이 있는데, 내게도 저런 경향이 있는데...” 하며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예배를 마치고 나가 인사하는데, 어떤 부인이 남편과 함께 오시더니 “오늘 설교는 제 남편이 들어야 되는, 제 남편에게 딱 맞는 내용인데 마침 제 남편이 처음 나왔어요” 합니다. 여러분, 설교는 남편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입니다. 그 남편에게 참 미안하고 무안했어요. 지금 그 분이 여기 앉아계시다면 “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생각하시겠죠? 정 말해주려면 다음 주일날 나에게 살짝 와서 얘기해주면 되는데, 남편 앞에서 그러면 되나요? 공과 사를 구분해 줘야죠. “먼저 너부터 조심하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네 행동의 의도와 동기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쁜 동기로 말하거나 결정하거나 행동하거나 일할 수 있습니다. 동기는 마음속에 있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 동기를 아십니다. 그 정도는 돼야 하나님이지, 여러분의 속마음도 모르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동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기본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자기 자신과 동기를 조심할 때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가말리엘은 역사에서 영적인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가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는데 스스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400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다... 그 후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다”(36-37절). 여러분, 칭찬은 남이 해줘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면 사람들이 꼴사나워서 못 봐요. 말은 안 해도 속으론 고개를 흔들지요. 여러분, 칭찬은 남들이 하게 하십시오. 칭찬해주면 고맙다고 하세요. 다른 사람이 칭찬해야지 스스로 자랑하며 “내가 잘났다. 내가 유대의 지도자다. 날 따르라” 하면 됩니까? 귀가 얇은 사람들 수백 명이 따라다녔지만 그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죽으니까 기껏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다 망했죠. 갈릴리 유다라는 사람도 똑같았어요. 혼자 날뛰어서 사람들이 잠시 따르기는 했지만 그 사람도 죽으니 따르던 사람들이 다 흩어져 버렸어요. 가말리엘은 이런 역사에서 교만한 자는 망한다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가말리엘은 하나님의 섭리를 살폈습니다.
여러분,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삶 위에 크신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안보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찾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찾는 가말리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에게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39절). ‘이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보복이나 처벌하지 말고 그냥 둬라.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리도 그저 주관적으로 감정적으로 분노해서 섭섭해서 외로워서 속상해서 일차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모든 어려운 일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크신 손길을 보는 눈과 지혜와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어떤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쓸데없이 날뛰다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너무 빨리 육을 따라 움직이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봐가면서 살아간다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가말리엘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사람은 억지나 강제로 일하거나 시키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 섭리적이며, 논리정연하고 냉철하여 모든 일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며 말하니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40절). ‘옳게 여기다’는 것은 가말리엘에게 설득되었다는 말입니다. 일차적인 감정에 따라 살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조심하면서 인생에서 계속 배운 지혜를 활용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살피며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아멘이에요!” 이렇게 살면 존경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핍박을 받아도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사도들은 매를 맞았는데도 좋아했습니다. 매 맞고도 좋아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 아닌가요? 예수 믿는 사람은 본능적, 육적, 일차적으로 살지 않고, 이차적, 영적으로 사니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와 도움을 받고 살면 나쁜 일 속에서도 좋은 일을 발견하여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나가서 더 열심히,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도대회를 열고, 전도대상자 명단을 두고 기도하며 노방전도도 합니다. 그 가운데 설령 핍박을 받아도 주님을 위한 핍박에는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통을 받는다 해도 진리를 따라 꾸준히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우리가 다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해주셨으니, 이제 우리가 인간적인 일차적 반응으로 살지 않고 성령에 의해 지혜롭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가정과 교회에서, 이웃과 직장과 사회에서,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받고 살 때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랍비 가말리엘
김영규 목사
적대자들의 분노
사도들을 공회 앞에 세우고 심문을 하던 중에 사두개인들이 가장 분개했습니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3) 얼마나 분노했는지 사도들을 다 죽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죽였는데 그 제자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공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다수파에 속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죽일 결심을 했다면 얼마든지 사형선고를 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이렇게 분개한 것은 특히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사두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중점적으로 전했습니다. 둘째는 성전의 관할권자로 자처하는 사두개인들을 무시하고 성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집회를 하고. 병자들을 고쳐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두개인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을 예수를 죽인 당사자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무죄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죽였다고 전파했습니다. 넷째로, 그들이 일차로 공회 명령으로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전히 예수를 전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공회의 명령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무튼지 사두개인들의 생각대로 한다면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 뻔했습니다. “없이 하자”는 말은 “ajnairevw”(아나이레오)인데, 제거하다, 혹은 죽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인다면 추종자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최초, 최대의 위기 상황입니다.
랍비 가말리엘의 제안
바로 이럴 때에 공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바꿔놓은 사람이 랍비 가말리엘입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일군을 돕는 사람을 준비해 두십니다. 비록 그가 바리새인이고, 율법주의자이지만 사도들에게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왜 사도들에게 호의적인 발언을 했는지? 그의 출신, 그의 사상을 통해서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랍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칭호를 보면 “율법 교사”입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34) 율법교사라는 말은 “nomodidavskalo"”(노모디다스칼로스)입니다. 노모스란 말은 율법이란 뜻이고 디다스칼로스란 말은 선생이란 뜻입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율법교사입니다. 유대 역사에서 보면 가말리엘은 힐렐 파의 7인의 라반 중에 한 명입니다. 보통 “랍비”라는 말은 “나의 선생”(my teacher)이란 뜻입니다. “라반”이란 말은 “우리의 선생”(our teacher)입니다. 라반이란 칭호는 랍비 중에서도 크게 존경받는 인물에게 붙여지는 칭호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랍오니여”라는 말을 했습니다.(요20:16) 이 말이 바로 라반입니다. 가말리엘의 부친은 라반 시므온이고, 조부는 라반 힐렐입니다. 힐렐은 샴마이와 함께 바리새파의 2대 학파를 이루는 인물입니다. 샴마이는 보다 엄격한 보수파였고, 힐렐은 온건파에 속합니다. 가말리엘은 바울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본문에 보면 가말리엘은 백성에게 존경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율법의 영광도 떠났다고 슬퍼했을 정도입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34) 공회의 의장은 사두개파인 대제사장이었지만 가말리엘의 발언에 모두 수긍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공회의 판결도 그렇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공회의 다수파입니다. 그들의 결의로 사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반대하는 결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경우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바리새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공회가 가말리엘의 발언을 이의 없이 받아들인 이유입니다.
본문은 가말리엘이 바리새인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34) “바리새”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페루쉼”, 아람어 “페리솨야”에서 왔습니다. 그 뜻은 “분리된 자”(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흔히 의식법에 소홀한 속된 사람들과 구별 짓는다는 뜻으로 이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하스모니안과 구별된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스모니안은 시리아의 안디오쿠스 4세(175-163BC)에 대항하여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제사장족들을 가리킵니다. 한 때 바리새인들은 하스모니안들에게 협력했습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 시기(76-67BC)에, 바리새인들에게 상당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잠깐 하스모니안과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결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스모니안들이 정치 세력화 하고 세속적인 지배자가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주후 1세기 경, 바리새파는 형제애로 뭉쳐진 5-6천 명의 강력한 조직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공식적인 해석자였던 대부분의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헤롯 통치 후반기, 특히 주후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 유대 사회에서 유일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고, 특히 힐렐파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습니다. 힐렐은 바로 가말리엘의 조부입니다.
그러면 왜 가말리엘이 바리새파라는 점을 밝히고 있을까요? 바리새파가 사도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리새인은 부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형식주의에 매인 자들, 외식주의자들,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자들, 예수님께 욕을 먹은 사람들, 뭐 이런 식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바리새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3) 그들이 행하는 경건의 노력, 혹은 그들의 율법적인 가르침 자체는 매우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편견은 바리새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 적대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시대에 보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보다는 교회에게 훨씬 호의적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개종했던 공회원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공회 앞에서 나는 부활을 믿는다고 했을 때에 바리새파는 수긍했고 사두개파는 적개심을 표시했습니다. 최초의 교인들 가운데 상당 수는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교리적으로는 견원지간이었습니다. 바래새파가 사두개파보다 사도들에게 덜 적대적이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말년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살기등등한 공회의 분위기를 일순간 바꿔 놓았습니다. 심문 받던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판결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35) “조심하라!”(prosevcw), 주의하라,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행동을 조심하라! 가말리엘은 이전의 두 가지 사례들을 참작하라고 합니다.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사건입니다. 드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을 요단강 가에 불러 놓고 강이 갈라지게 하고 무리를 건너게 해주겠다고 허풍을 떨다가 로마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AD44-46)가 보낸 기마병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이 사건인지 다른 사건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갈릴리 유다 역시 요세푸스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유다는 가말라 유다라고도 하고, 갈릴리 유다라고도 했습니다. 가말라는 골란 지역의 한 지명입니다. 주후 6년 유대는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가고, 시리아 지역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와서 과세를 하기 위해 호적 등록을 시켰습니다. 이 때에 유다가 일어나 하나님 백성은 오직 여호와께 재물을 바칠 것이지 이방 통치자에게 바칠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유다는 곧 처형되었지만, 그를 이어 열심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미미했습니다.
가말리엘의 결론을 보세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38-39)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설 것이고,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지리라! 이것은 힐렐파에 속한 바리새인들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다. 모든 사람의 의무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하늘의 이름으로 모인 무리마다 결국은 세워질 것이고, 하늘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모인 무리마다 결국은 무너질 것이다.”(2세기 랍비 요한의 말) 가말리엘은 바리새파 사상에 충실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 하늘이 냈으면 흥할 것이고, 인간이 냈으면 망할 것이다! “And so in the present case, I say to you, stay away from these men and let them alone, for if this plan or action should be of men, it will be overthrown;”(NASB)
가말리엘의 온건주의
바리새파 중에는 샴마이파가 있고 힐렐 파가 있었습니다. 대중들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샴마이파가 아니고 힐렐 파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극단적인 것은 해롭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7:16-18)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는 말은 의롭게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무 의인이라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니 무엇에든지 극단적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보면 극단주의가 자주 등장하고, 지지를 받는 듯이 보입니다. 정치적인 극단주의를 보세요. 공산주의자들은 반세기 동안 지구상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수 천 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스탈린의 학살, 폴포트의 학살, 김일성의 학살,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수법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상과 이념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중합니까?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 결국 지상낙원이 되었습니까? 지상 낙원은커녕 지상 최대의 지옥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북한을 보세요. 자유가 없는 지옥이요, 먹을 것 없어 굶주리는 지옥입니다. 그래도 김정일이 좋다는 사람들이 남한 땅에 수두룩하니 한심한 일입니다.
종교적 극단주의도 그렇습니다.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은 합력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한 일이 죽일 일입니까? 미국의 인민사원 사건, 한국의 오대양 사건, 시한부 종말론 파들을 보세요.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시키고 자기들도 망했습니다.
극단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어떤 생각도 전적으로 옳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당시에는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만, 결코 최선은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또 다른 사상이 나오겠지요. 둘째로, 극단주의는 상대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거리에서 시위하는 주동자들을 보세요. 그들의 요구는 대통령이 그만두라는 겁니다. 헌법에 보장된 임기 5년의 대통령을 그만두라고 하면 그들은 법 위에 있습니까? 그들이 항상 사용하는 방법이 뭡니까? 쇠 파이프, 죽창, 돌, 새총, 화염병, 경찰 버스 뒤집기, 이것이 민주 사회에서 할 일입니까? 지금 혁명하자는 겁니까? 극단주의자들은 항상 상대를 없어지라고 합니다. 우리만 살면 된다. 너희는 사라져 주면 좋겠다! 셋째로, 극단주의가 지속된 예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구상에서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추종자들을 죽음으로 내몰던 사이비 교주들 대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매사에 온건주의자가 되세요. 인간 사회에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장 옳다는 생각,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퇴장시키려는 행동, 이런 과격한 행동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과격파는 항상 다른 사람을 적으로 만듭니다. 정치적 과격파, 종교적 과격파, 과격파가 되지 마시고 온건파가 되세요.
기독교가 진리라면?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복음의 진리입니다. 가말리엘은 아주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하나님이 내신 진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이 제아무리 막는다 해도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세요. 진리는 결코 억압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0-42)
사도들은 석방되었지만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채찍은 가죽 끈으로 만든 것으로, 끝에는 쇠붙이가 달려 있어서 한 번 맞으면 살점이 떨어져나갑니다. 그런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때로는 태장을 맞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40 대에 한 대 감하는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완전히 짐승 취급을 당한 겁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 나왔다.”(공동번역)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욕당할 만큼 가치 있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의회에서 나왔다.”(현대인의성경) 아무나 박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박해 당할 자격이 있는 자가 박해를 당합니다. 사도직은 박해를 당하는 특권을 받은 직책입니다. 내가 감히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받는 특권을 받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자랑합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박해는 아무나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택하신 특별한 사람들만이 당합니다. 오늘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억울한 일 당하셨습니까? 특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집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석방되었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전파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한 우리는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복음을 전파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진리는 가만 놔둬도 점점 흥합니다. 비진리는 흥하려고 애를 써도 망합니다. 역사를 보세요. 과거 기독교 2000 년 역사가 어떠했는지? 유대인들의 박해, 로마 황제들의 박해, 공산당의 박해 속에서 교회는 견디어 왔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박해 중에 부흥했습니다. 박해를 이기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세요! 박해자가 있으면 옹호자도 있습니다! 복음은 승리합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생명의 말씀
최승윤 목사
오늘 설교제목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5:20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생명의 말씀”이란 말씀 자체가 생명이란 뜻도 되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란 뜻도 됩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생명의 말씀이 주는 생명은 우리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명은 아닙니다. 그 생명과는 다른 생명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을 먹이신 적이 있습니다. 그 기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기만 하면 떡도 먹고, 고기도 먹고, 물도 주시고, 포도주도 주시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니 말입니다. 농사 지을 필요도 없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잠 못 자면서 고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경험했던 한 가지 사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다음,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의 생활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일종의 징계요 심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다면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목이 마르다’ 고 하면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했습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광야 생활이지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과 늘 함께 하셨고, 보호해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 생활 가운데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요,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셨지만 그들이 광야에서 영원토록 산 것이 아닙니다.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제 1세대는 모두 죽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거의 대부분 예수님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굶주린 욕망을 채워주는 대신 심령의 굶주림과 갈증을 채워주고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인 예수님 자신을 그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하늘에 온 생명의 떡이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빵과 떡으로 사람들의 근본적인 영혼의 굶주림,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지고 상한 영혼의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을 부어도 깨진 항아리에는 물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제 얼굴 모습에 신경이 쓰입니다. 잘 생겼냐? 못 생겼냐? 의 문제가 아니라 내 얼굴을 통해서 보여지는 제 자신의 내면세계, 영혼의 상태입니다. 내면의 모습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나타난 모습은 참으로 춥고, 짓눌려 있고, 영혼의 기쁨과 평안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얼굴을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얼굴을 잘 생기고 예쁘게 생겼는데 그 얼굴 표정에서 거만함과 고집과 욕심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오랜 만에 만나보면 얼굴 모습이 많이 변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얼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요? 저와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하신지요? 아무리 치장하고 위장을 한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우리의 속 사람이 모두 드러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훈련이 되어 있어서 남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을 감출 수 있다고 하여도 본인 스스로는 만족이 없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힘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때도 있습니다.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채우려고 이렇게 저렇게 노력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아우성치는 영혼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면 온 몸에 힘이 쫙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조언도, 좋은 이야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간이 길어져서 이제는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냥 체념하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생명과 활기를 주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요한복음 초두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살았으나 죽은 것이요, 어두움 가운데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참 생명이요, 참 빛이신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인생도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가 멸망의 길인지 알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방황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굶주림과 갈증은 밥을 먹으면 되고, 물을 마시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은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떡과 물로는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어느 정도 연장시킬 수는 있어도 우리를 영원토록 살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단지 영원토록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만족과 풍성함과 생명력을 느끼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살아날 것이요, 그 생명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주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삶 자체가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는 길, 우리 속 사람이 힘을 얻는 길,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은 오직 생명의 말씀이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열매와 증거가 우리 안에 나타나고 있는지요? 생명의 양식, 생명의 말씀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영혼에 배부름이 있습니다. 만족함이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정상적으로 먹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건강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고, 힘이 있고, 성장과 성숙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줍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나 혼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신처럼 생명 있는 자처럼 살도록 도와주는 일에 힘을 냅니다. 속 사람이 건강한 사람, 생명력 있는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볼 수 있는 열매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41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제자들이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하다가 능욕과 멸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도들이 그런 자신들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능욕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기쁜 일입니까?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평안하게, 기쁘게, 고생하지 않고, 즐길 것을 즐기면서 예수를 믿고 싶어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예수를 믿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는 싶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고, 우리가 사는 동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뻐한 것은 고난과 능욕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뻐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과 멸시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자신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 그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고 멸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택하여 세우셨다,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들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그런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도 받고, 능욕도 받고, 멸시도 받게 해서 그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얻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게 하셨다. 그 사실을 사도들이 알았기에 기뻐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사도 바울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고,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4:9절-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처럼 만드신 사실을 억울해 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비방을 당한 것을 억울해 했을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디모데 후서 1:11절-12절을 읽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당한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과 마음 고생한 것을 결단코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을 것임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경험할 수 없었던 아픔을 경험하고 많이 하고 삽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마음 고생하고, 자존심 상하고,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없는데,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교회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일로 마음 아프고, 고생하며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편하게 예수 믿고 싶고, 예수를 믿어도 마음 고생하지 않고 즐겁고 기쁘게 예수 믿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일을 조금만 하려고 해도 금방 이런 저런 일로 마음 고생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고, 세우시고, 깨닫게 하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셨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인정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에 기뻐하십시오. 베드로가 한 번 설교 했을 때 삼 천 명이 회개한 적도 있었지만 잡혀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채찍에 맞기도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기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하는 모든 수고와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이런 시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확장되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 얻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 위에 편만하게 세워져 갔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이 땅에 살면서 겪는 모든 수고와 고생과 당하는 모든 어려움들을 주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의 수고와 노력이 결단코 헛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닌 여러분들이기에 그런 어렵고 힘든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땅에 것, 일시적인 것, 잠시 잠깐 이면 없어질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 놀라운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인정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편 56:8절).
시편 90편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 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아픔과 수고와 고생은 결단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이 땅에서, 또는 저 세상에서 반드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품고 생명의 말씀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