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과 우리
일요일 아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집에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도리어 내가 괜찮은지 물었다. 이태원 갔냐고. 그때야 2022년 10월 29일 밤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고를 알게 되었다. 나도 아는 곳이었다.
내가 어릴 때 이태원은 아무 때나 가는 곳이 아니었다.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가는 것부터 어려웠다. 무섭기도 했다. 내 또래들은 1990년대에 이태원 옷가게에서 옷을 팔던 ‘형들’에게 반강제로 옷을 산 적이 있다. 그러다 한국이 점점 외국 문물에 익숙해지고,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고, 노래 ‘이태원 프리덤’이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등이 나오며 이태원은 점점 대중적인 곳이 되었다. 평생 서울에서 산 입장에서는 지난 주말 이태원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 자체가 이태원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동네가 되었다는 방증이다.
어른이 된 뒤 이태원은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내가 일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및 트렌드 업계는 이태원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사람이 많다. 이태원의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업무 미팅을 본다. 이태원의 각종 시설에서 행사가 열린다. 이태원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지인도 여럿 있다. 직전 직장도 이태원에서 한남동 내려가는 길에 있었다. 사고 현장 근처에는 주중에 영업하는 식당도 많다. 그 골목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 산책을 하곤 했다.
이태원의 특징으로 다양성을 꼽는다. 그 동네의 직장을 다녀 보니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태원역에서 그랜드하얏트호텔 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집들이 남산을 끼고 한강을 내려다본다. 길 건너 한강 쪽으로 가는 보광동 권역에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짜리 집들이 있고, 이쪽에 사는 친구 말을 빌리면 “(길이 좁아서) 이사를 갈 때 지게를 진다”. 부동산 시세뿐 아니라 동네의 성격도 다양했다. 주택과 상업시설과 사무실이 한 동네에 다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이태원엔 다 있었다. 사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이 다 같이 한 동네에서 어울렸다. 외국인이나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 소수자들이 그 사이 곳곳에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다양성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힘을 얻고 위로를 받는다. 나도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날 나도 그 근처에 있었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 일 같지 않은 마음으로 근처에 있었을 법한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DJ를 하는 친구, 젊은이들이 보는 매체에서 일하는 에디터 친구, 이태원 근처에 사는 친구. 다행히 다들 무사했고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다 나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도 거기 있었을 수 있다고.
앞으로도 나와 우리 업계 사람들은 이태원에 있을 것이다. 화요일 오전이나 목요일 오후처럼 일상적인 시간에 이태원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일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것과 비슷한 사회생활을 하는 한 앞으로도 그 현장 근처를 지날 것이다. 그때마다 지난 주말이 생각날 것이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분들의 명복을 빈다.
박찬용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