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62년 1월 12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박호정 朴虎庭)의 고향은 평안북도 위안군입니다. 해방이 된 이듬해 단신으로 남하한 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됐습니다. 어머니(심애숙 沈愛淑)는 강원도 횡성군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두 분은 1녀 4남을 두셨고, 저는 막내입니다.
매사 서둘지 말라던 아버지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는 계곡 낚시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철이 좀 들면서 아버지의 낚시는 취미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이 초등학생이 되면 계곡으로 데리고 가서는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 역시 열 살이 되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단둘이 낚시를 갔습니다.
두릅나무 속을 파내어 찌를 만드는 법, 물벌레를 잡아 미끼로 쓰는 법, 낚시 바늘 매는 법, 찌 다는 법이며, 낚시를 하기 위해 준비해야 되는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범을 보이며 차근차근 일러 주셨습니다.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게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 줄 수 있는 건 아버지들의 처지에 따라 다릅니다. 물려 줄 가문이나 재산이 없던 아버지는 낚시 채비하는 법을 알려 주셨던 겁니다. 아버지 앞에서 큰 물고기 한 마리를 턱 하니 잡아 올리고 싶었던 내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승흡아 천천히 해라. 매사 서둘지만 않으면 된다”이었습니다.
고향이 그리워 북녘 하늘을 늘 바라보던 아버지. 가난한 책상물림의 아버지를 둔 아들들이 살아가면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여기셨던 아버지. 기다림의 천적은 성급함이라는 것을 아들들에게 넌지시 일러주셨던 것 같습니다.
순진한 산골 소년이었던 제가 1978년 춘천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는 주먹 쓸 일이 많아져 버렸습니다. 강원도의 명문인 ‘춘고’는 시내에서 중학교를 나온 학생 출신들이 절반, 나머지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몰려 온 시골 출신들이었습니다.
시내 출신 학생들은 시골 출신들을 ‘촌놈들’이라 곧잘 놀려댔는데, ‘촌놈’인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시골 출신 중에서는 덩치가 가장 컸습니다. 주먹이 효과를 발휘하자 으쓱해진 저는 자천타천으로 시골 출신 학생들의 보호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 덕분에 공교롭게도 춘천 시내 출신인 송민석과 친구가 됐습니다. 송민석이 남을 위해 주먹을 날릴 줄 아는 ‘사나이’ 이 박승흡을 알아 본 것 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송민석은 춘천 효자동 성당에 다녔는데, 하느님 말씀보다는 유신을 반대하는 춘고 출신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더 믿었습니다. 강원도 운동권 1세대라 할 수 있는 정성헌(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이동섭(가톨릭농민운동), 최열(환경운동연합), 김창남(서울대 메아리) 등은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효자동 성당에 춘고 후배들을 모아서는 책을 읽혔습니다. 그 후배들은 후배들을 앉혀 놓고 유신에 대해 비분강개하고, 이렇게 이어진 선이 고등학교 2학년인 송민석과 연결이 됐던 겁니다.
송민석과 함께 성당에 다니던 동기들은 유신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학내로 들고 와서는 뿌려 댔습니다. 송민석은 주동자로서 퇴학을 당해 태백에 있는 학교로 가야 했고, 유인물 배포에 참여했던 친구들은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며 곤란을 겪었습니다.
저 역시 송민석과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았습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께 맹세하건대, 남자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게 쑥스러워 성당 문턱도 넘지 않았습니다. ‘아무려나, 까짓 거 맞아 주자. 친구가 맞는데 나도 맞아줘야지.’
가톨릭 수사가 되고 싶었던 수험생
저는 가뜩이나 입시로 스트레스를 주던 학교생활에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1학년 때만 하더라도 강원도 수재들만 다닌다는 춘고에서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 서울대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선생님들이 말씀 하셨는데, 대학 갈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당연히 성적도 떨어졌습니다.
고3때 80년 광주가 일어났습니다. 입신양명은 하등 중요하지 않게 돼 버렸는데, 투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가톨릭 수사가 되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실제 고3 때 성북동에 있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찾아 홀로 서울행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 의식화 세례를 받은 덕분에 학교에 쫓겨난 친구에 대한 의리를 수사가 되어 지키려 했던 것일까?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죽은 시민군에게 평생의 기도를 약속하고 싶었던 것일까? 폭력의 세상을 등지고 싶었던 것일까? 저 스스로도 왜 수사가 되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서울대 사범대에 응시를 했다가 낙방을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형님들 곁에 눌러 붙었습니다. 대학생이 된 춘천고 친구들인 안봉진, 진호성, 이병선 등과 어울리고 혼자 있을 때면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생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던 둘째형(충흡)의 ‘빨간’ 책을 읽었습니다. ‘불만 가득한 한량’ 노릇을 하면서도 여전히 수사로서의 삶에 미련이 남아 다시금 성북동으로 찾아 갔는데 수사 한 분이 2박3일 동안 만류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노동자 중심의 정치조직 건설’ 노선을 선택
어쨌든 사회의 일원이 돼야 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를 해서 1983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이미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저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상적 선택이었습니다.
80년 이후 움츠려 있던 학생운동권은 83년 유화조치로 활기를 띠었고, 여러 써클이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노선은 ‘노동자 중심의 정치조직 건설’로 이선근(서울대 상대 74학번)과 송영인(서울대 사범대 74학번)이 학림 사건 이후 세운 ‘민중민주주의노동자투쟁동맹’이었습니다.
이호웅(서울대 법대 77학번), 김진철(서울대 사범대 78학번) 등에게 강도 높은 학습을 받은 뒤, 학생운동을 하다 노동운동으로 옮겨가는 조직원들의 ‘이전’ 학습과 정치교육 담당자로 투입이 됐습니다. ‘아지 및 프로팀장’, 중앙위원 등을 맡는 등 조직 내 ‘핵심인자’로 승승장구했습니다.
당시 많은 열혈청년들처럼 ‘사회주의자’가 된 저는 강도 높은 보안과 집중을 요하는 조직생활을 하면서도 보급투쟁에 열을 올려 선배들을 등치고, 형님과 누나에게 털어내고, 가끔은 등록금도 꿀꺽해 동료들 불러내 밥 사기를 좋아했습니다.
1987년 6월 19일 명동성당 단식농성 해산 현장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해산 반대파’였지만 다수는 해산을 선택했습니다. 명동 성당을 빠져나오며 울었습니다. 나중에 광주의 영령들을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짧은 감옥 생활을 마치고 저는 다시 조직에 합류했지만, 핵심 구성원들은 활동 방식과 노선을 놓고 대립했습니다. 당시로서는 갈등의 본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짧았던 국어교사 생활과 와해된 ‘조직’
전교조 활동 당시 박승흡 후보(맨 왼쪽)
마침 1989년 3월 서울 신목고등학교로 발령이 났습니다. 전교조가 출범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어 교사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전교조를 만들려고 했던 것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합니다. 국어 선생님으로서의 생활은 7개월만에 끝이 났습니다. 저는 수배의 몸이 되었고, 곧 구속이 됐습니다.
아내는 저를 끝까지 믿어 주었습니다.
저는 1990년 학교 후배였던 이현주(1966년생)와 결혼을 했는데 ‘착한’마누라는 “당신은 운동 계속 해야 되니까 나는 전교조 가입하지 않고 자리 지킬게.”라고 해 주었습니다. 아내를 떠받들고 살아도 부족할 텐데 저는 용돈까지 뜯어냈습니다. 그 용돈으로 운동은 하지 않고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 조직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아무리 안기부의 수사로 조직원들이 줄줄이 끌려갔지만 이것이 조직이 와해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부족했을까’를 고민했지만 조직 재건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조직원들의 일부는 한국노동당으로 흡수되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혼자가 된 저는 학원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변명 같지만 혼자가 되면 약해집니다. 교육 정상화 하자고 외치다 해직돼 사교육 시장에 진출하다니, 모순입니다. 잊기 위해 강의에 더 집중했습니다. 하루 10시간씩 강의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강의를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경쟁의 세계에서 ‘낙오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열강’ 덕분에 ‘스타강사’가 됐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8년 가을까지였습니다.
한국비정규노동운동센터로 ‘운동’에 복귀
다시 ‘운동’을 한다는 것은 떠날 때 동지들에게 한 약속이었고, 스스로 다짐했던 바였다.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를 괴롭혔던 것은, 어려울 때 떠났던 제가 ‘돌아갈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혼자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지만 돌아가고픈 마음이 강렬했습니다.
1998년 가을부터 과거 함께 했던 동지들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의논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0년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설립했습니다. 먼저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워킹 보이스’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연구와 정책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상근인력을 두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상담하는 일도 꾸준히 진행시켰습니다.
당시만 해도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는 단체는 거의 없었습니다. 또 민주노총만 하더라도 분출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받아 안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부딪힐 때는 곤란해 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만든 것이나, 정책역량을 육성하려고 한 것이 비정규 노동운동을 하는데 있어 적절한 사업 방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정규 노동운동이 불모지였던 덕분(?)에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 노동운동의 소중한 요람이 됐다고는 자부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센터의 ‘착한’ 소장과 ‘물주’ 이사장을 넘어 그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으로 결집된 ‘운동’은 과거와 달리 합법적이고 공개적이지만, ‘끼어들기’는 오히려 더 어려웠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끼워주기’는 고사하고 ‘돈으로 운동을 사는 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비정규노동센터의 운영비를 번 만 5년의 시간에 대해 늘 해명해야 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목숨 걸고 운동한 것보다 ‘스타강사’라는, 어쩌면 ‘분홍글씨’가 운동을 계속해 온 이들의 눈에는 더 크게 보였을 겁니다.
진보언론하다 돈 떨어져
2003년 매일노동뉴스를 운영하고 있던 노회찬 씨가 인수를 제안했습니다. 센터는 후배들이 열심히 뛰고 있었고, 비정규 노동운동도 ‘찬밥’이 아니라 ‘정의’가 됐습니다. 8개월간의 고민 끝에 인수를 결심했습니다. 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반대했습니다.
특히 나중에 매일노동뉴스의 편집국장이 된 후배가 가장 ‘격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도대체 ‘진보언론’이라는 게 실체가 있는 것이냐, 매일노동뉴스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 알량한 ‘진보언론’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냐라는 게 반대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진입장벽’이 높은 노동운동 상황과 정서에서 신문을 만든다는 것은 기업으로서 언론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게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매일노동뉴스 수련회
매일노동뉴스를 인수한 저는 기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제 날짜에 월급을 지급하는 ‘사장’이 될 것을 약속했고, 독자 확대를 위해 뛰었습니다. 부수가 오르기는 했지만 운영비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진보언론’은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였습니다.
이왕 커진 판. 저는 시민사회까지 겨냥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나온 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어판. 그러나 이것도 종당에는 2년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대체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마침내 돈도 떨어졌습니다.
이즈음 저는 강원도 계곡으로 낚시를 자주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낚시 채비하는 법을 알려주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막내야, 천천히 해라”고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 제가 뭐 서둘기나 했습니까?’
저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설립할 때 과거의 운동방식이 아닌,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정책 개발이나 인터넷 매체 활용 등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평균 이상은 되지만 돌파구가 되지는 못했으니…. 민중은 우리의 ‘거친’ 방식 때문에 우리 편이 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민중의 이익을 위해 머리 박고 싸우는 우리를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두고 ‘값비싼 수업료’라고 해야 될까요.
드디어 당의 부름을 받다.
드디어 당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당내에서 ‘좌파’로 불린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였습니다. 새로운 ‘얼굴’이 필요했던 것일까. 여하튼 저는 ‘선택’을 받았습니다. 실은 이보다 먼저 ‘심상정 비대위’에서도 ‘콜’이 왔습니다. 거절했습니다.
도대체 당에 ‘종북’ 딱지 붙여놓고 혁명은커녕 무슨 집권을 한단 말인가. 아무튼 ‘어려울 때 친구’ 아닙니까. 당이 저를 불러주어 진심으로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내가 아직은 이 세상에서 쓸모가 있나 보다….’ 혁신비대위원에 당 대변인이라는 감투까지 얻어 썼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 한 가운데 들어가서 직접 보니, 바깥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좌우 갈등’이나 ‘패권’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성이 죽어 있고, 패기가 없어진 겁니다.
모두들 자신의 청춘을 바쳐 일군 민주노동당인데 왜 이런 일이…. 저는 다시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로 했습니다.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일은 다음 사람이 하면 됩니다. 국회 출입기자들을 배꼽 잡게 만드는 ‘엽기 파마머리, 박승흡’이 이번에는 당을 한번 눈물 나게 배꼽 잡게 해보기로 했습니다.
혁신비대위가 사명을 다한 뒤 치러진 민주노동당 제3기 당직선거에 저는 출마했습니다. 출마 결정 전후로 당 안팎에서는 경선이 아니라 ‘드림팀’을 구성하자는 의견을 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드림팀 안에는 ‘황송하게도’ 저의 이름도 한 켠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드림팀’ 구성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명단을 ‘드림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명단을 짠 사람들일 뿐이고, 당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그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누가 먹을 것을 준다고 날름 먹어버리면 나중에 체할 수도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떨어지더라도 할 말은 하고 떨어지자, 이제부터 시작 아닌가.
떨어지면 지난 5개월보다 더 열심히 뛰면 된다’ 사실, 당직 선거에서 ‘안전 모드’를 추구했던 것이야말로 당을 위기로 몰았던 주범이 아닙니까.
항미연북전투정당의 최고위원 겸 대변인
당 대변인 시절 브리핑 한컷
3기 당직선거에 출마한 저의 슬로건은 ‘항미(抗美)연북(聯北)호민(護民)전투(戰鬪)’ 정당!이었습니다. ‘자민통’이 어떻다, ‘좌파’가 어떻다는 저의 관심 밖입니다. ‘자민통’ 동지들이 ‘자주평화통일’의 구호가 부끄럽지 않게 실천한다면, ‘좌파’ 동지들이 ‘사회주의’의 구호가 부끄럽지 않게 실천한다면, 도대체 이 둘이 서로 사이가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게 저는 고마울 뿐입니다. 당 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에, 격려전화에 전화통이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누구는 ‘호응이 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걱정해주기도 했습니다.
광화문네거리,종로,시청앞광장..... 촛불을 들고 시민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다행이 당원 여러분의 분에 넘치는 지지로 당선(1,588표)이 됐습니다. 최고위원회에서는 저에게 ‘자랑스런 당의 입’이 다시 되라는 임무 또한 맡겨 주셨습니다. 지난해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전선을 치고 ‘MB 악법저지’ 투쟁을 할 때 솔직히 저는 신이 났습니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을 대신해 국회에서 아우성을 치고 몸으로 싸우는 전투정당 이것이야말로 저의 공약이었습니다. 몸 사리지 않고 한나라당과 붙었습니다. 속 시원하다고 느낀 분들이 많으셨는지 이즈음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올랐습니다.
서민지갑 털어가는 그들을 두고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사퇴의 변
이제 약간은 어려운 얘기를 꺼내야 할 차례입니다. 올 4월 치러진 울산 재선거에서 민주노도당의 김창현 후보가 아니라 진보정당의 조승수후보로 단일화가 되자 최고위원직과 대변인에서 사퇴를 했습니다. 뒷북 때리는 단일화 반대가 아니라 당이 소중히 간직했던 원칙과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한 자를 진보 진영의 단일화 후보가 됐기 때문에 당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했기 때문입니다.
당원 여러분들이 앉혀 준 자리에서 제 임의로 박차고 나왔습니다. 저의 문제의식에 대해 동감하고 지지해 주시는 당원들도 계셨고, 결과적으로는 승복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고 비판을 하신 당원들도 계셨습니다.
사퇴를 결심하기 전 ‘최고위원 시켜 준 것이 어디인데 그것을 벌써 잊었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았습니다. 당원 여러분이 저를 지도부의 일원으로 뽑아 주신 것은 감성과 패기를 잃어버린 당에 활력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여기고 사퇴를 감행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더라도 양산지역위원회 당원 여러분들께서 이해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사퇴를 하면서 ‘하방’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하방이 어떠해야 하는지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나름으로는 집회가 있는 곳은 쫓아 다녔습니다. 올 여름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당의 농성단에 합류했습니다.
회사 편에 선 사람들이 몰려와 당의 천막을 부수려고 할 때 지켰습니다. 또 전 대변인으로서 언론사 기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당의 활동에 대해서 알리기도 했습니다.
양산시민들과 함께
다시 당이 저를 불렀습니다. 양산으로 가서 당원동지들을 비롯한 시민 여러분들과 함께 한나라당 박희태 후보와 맞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저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설레고 기쁩니다. 양산시 지역위원회 당원 여러분들과 제가 함께 만들어 낼 양산대첩을 생각하면 제 심장은 어느 때 보다 높이 뛰고 있습니다.
끝으로 제 가족에 대해서도 소개를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1990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형님네에서 살고 계십니다, 제 아내 이현주는 기간제 교사로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과학 과목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은 올 해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를 옮겼는데 어느 학교인지 조차 제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아내는 이렇게 한심한 남편을 아직은 사랑으로 감싸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만 셋을 두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컷
큰 아이(동하)는 고3입니다. 제가 이 녀석 때문에 경찰서에 많이 불려 다녔습니다. 에비를 닮아서 십대시절을 질풍노도처럼 보냈습니다. 요즘은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데 공부와 담을 쌓은 시간이 오래 돼 잘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시름 덜었습니다. 둘째 동윤이는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친구들과 ‘랩’하는 그룹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들어 줄 정도인지 아닌지는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막내 동현이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막내는 아빠 일에 관심이 많아 인터넷에 뉴스가 뜨면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박승흡의 살아온 이야기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출처: 박VS박! 진정한 양산박! 민중의 박승흡!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첫댓글 박대박, 양산박을 아시나요
꼭 당선 되기를 바랍니다.
길어서 일가 말었유. 또 멀리 사시는 분이라, 위장 전입 하지 않는 한 도움도 안 되구유. 그래서 읽다가 말었유. 암튼 대충 훌륭한 분이겄지유?
반드시 당선되시길 빌겠습니다....
반드시 승리하시어 민주진영의 최전선이자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