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 제2권의 머리말은 박래부 기자가 썼다. 김훈이 쓴 제1권 머리말과 달리
한국일보에 문학기행을 연재할 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가미되어 있어 간략하게 소개한다. 먼저
사과의 말씀 한 마디. 지난 9월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 제1권 박경리의 『토지』 편을 김훈이
기행하여 썼다고 소개했는데, 김훈이 아니라 박래부였으므로 바로잡는다. 글 끄트머리에 박래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데 내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김훈이라고 쓴 것이다. 쏘리. 제2권
에 수록된 총 25인의 문인 중 13인만 골라 소개한다.
문학기행의 신문 연재를 마치고 책으로 출간한 뒤 김훈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전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장편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개』, 『남한산성』, 『공무도하』, 『내 젊은 날의 숲』, 『흑산』을 차례로 발표했는데, 출간하
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올라 작품 당 신문기자 연봉 수십 년 치의 인세를 안겨주었다. 나는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서 단숨에 읽은 터라 신작이 학수고대된다.
문학기행은 장명수 문화부장의 아이디어였다. 그녀가 문화부장으로 있을 때 나는 한국일보에 실린
그녀의 칼럼을 자주 읽었는데, 여장부라는 악명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여서 매
료된 기억이 있다. 김훈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취재하기 위해 작가와 함께 순천을 다녀온 뒤 사
보타지를 했다. 너무 힘들어 못해먹겠다며 장명수 부장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짐작컨데 원로 작가랍
시고 기자를 우습게 여기는 꼴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박래부 기자에게도 사보타지를 권했지만 그는 혼자서 문학기행을 계속했다. 야심차게 출발한 좋은
기획을 단 2회 연재로 접을 수는 없었다고 써놓았지만, 모르긴 해도 김훈 같은 똥배짱이 없어서 그리
했을 터. 그러나 한 달 동안 문학기행을 연재한 박래부 기자가 1년 기한으로 왜국 연수를 떠나자 김훈
은 두말없이 다시 발품을 팔기 시작하여 당초 선정했던 50명의 작가와 작품에 대한 문학기행을 모두
마쳤다.
장명수 ; 1942년생
김 훈 ; 1948년생
박래부 ; 1951년생
김훈이 신문사를 그만두고 소설가로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둔 후에도 세 사람은 지속적으로 어울렸
다. 세 사람 다 두주불사에 폭넓은 취재경험을 토대로 화제가 풍부하여 술자리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
을 것 같다. 기껏 모여 앉아 신변잡기나 나누는 뒷방노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럽기 짝이 없다. 이들이
2000년대의 어느 날 머리가 허옇게 센 모습으로 주석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서로를 쳐다보며 새삼 세
월의 무상함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문학기행에 등장했던 작가들 가운데 이미 17
명이 유명을 달리한 뒤였더라고.
세월이 흘러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이 절판된 어느 날이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김훈‧
박래부의 문학기행」을 출간했던 출판사 사장이 개정판을 내자고 제안해왔다. 김훈과 박래부는 흔쾌
히 동의하여 원고를 수정해서 보냈다. 개정판에는 그 동안 출판이 금지되어 있던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 김지하의 시화집 「절, 그 언저리」,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이 추가되었다. 홍
명희는 월북 작가로, 김지하와 박노해는 반정부인사로 찍혀 그 동안 출판이 금지되어 있었다. 내가
입수한 책도 개정판으로 2017년에 나온 것이다.
머리말에서 박래부가 가장 아쉬워한 점은 작품의 배경이 된 시골마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둘
현대화된 현상이다. 아스라한 비포장 신작로도 없어지고 정겹던 초가지붕은 새마을사업 이후 일제히
기와나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대체되어 있었다. 경제적이기는 하되 우리네처럼 나이든 사람들의 소중
한 추억을 앗아간 측면도 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풍광이어서 더욱 비애를 느꼈다’는 박래부의
견해에는 공감할 수 없다. 그런 식이라면 모든 사람은 상굿도 동굴이나 움막에 살고 있어야 한다. 인
간은 스스로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고 문명의 진화를 이끌어왔다. 주거환경의 변화쯤이야 그러려니
해야지 비애를 느낄 것까지야…
박래부는 이제는 사라져가는 집창촌과 창녀들의 얘기에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해일의 「아메리
카」와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가 그러한 얘기를 담고 있다. <성매매 방지 특별법>이 발효되
면서 서울에서도 여러 집창촌이 강제로 퇴출되었다. 우리나라 첫 여성 총경인 김강자 종암경찰서장
은 ‘성매매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미아리 텍사스촌 퇴출에 앞장서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했
다. 그러나 이러한 강제조치는 풍선효과만 초래하여 미아리 텍사스촌에서 퇴출된 창녀들이 주택가
골목까지 진출하여 이발소를 퇴폐행위의 소굴로 만들었다. 이후 키스방과 안마시술소가 생겨 유사
성행위가 전국을 휩쓸다가, 이제는 전국의 모든 술집과 노래방과 모텔이 집창촌 역할을 대신하고 있
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me too 운동에서도 보았듯이, 인간의 성욕은 법으로 잠재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탁월한 문인 가운데 이런저런 이유로 취재를 거부한 이들도 있어 문학기행을 기획하고 실행한 삼총
사를 서운하게 했다. 문인들이 거절한 이유는 대부분 1980년대의 서슬 퍼런 검열의 잣대를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박래부는 그들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 옹졸함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심산유곡과
섬마을을 취재하면서 느낀 우리 강토의 아름다움에 대한 벅찬 감동이 모든 부정적인 경험을 압도했
다. 세 기자를 신뢰하여 적극 문학기행에 동참한 작가들이 더 많았던 점도 큰 위로가 되었다. 문학성
짙은 두 기자의 글을 읽으며 함께 전국을 돌아보자.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사람이 사는 곳 기후환경이 삶의 질을 좌우 하는 큰 영향을 주듯 아열대성 날씨는 년중 내내 덥고 습도 있는 환경에서의 생활 입니다. 3 모작 이상을 하는 농사지만 효율적이지 못하여 결실 역시 그만큼 뿐 입니다. 숲이 있지만 고운 단풍을 볼수없고 얼음과 눈 역시도 없으니 각박하지도 않는 느슨한 삶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느끼기 위한 찾는이의 도심 탈출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현대생활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