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의 가장 큰 고함소리는 침묵입니다."
-이제하, 제9회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문
<왜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가>중에서
이제하, 「유자약전」
“구두가 걸어 다니는 것이 보여요?”
하고 그녀가 띄엄띄엄 꿈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모자가 흔들흔들 가고 있어요.”라든가 “소매가 올라갔다 내려왔어요.” 한다든가 “바지가 앞뒤로 왔다갔다 하누만. 참 우스워요.” 하고는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그녀의 꿈은 대개 의복류거나 인간의 몸에 부착된 액세서리들로 국한되어 있었다. 예들 들면 “핸드백이 뒷걸음질치네.” “반지가 떴어.” 하는 식이다.
어떤 때는 “트럭이 달리네, 집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하고, 아무 얘깃거리도 안 되는 범상한 사실을 몹시 힘들어하며 얘기할 때도 있다. 이런 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혹은 의식의 눈에는, 인간의 근육이거나 사지(四肢)거나 얼굴과 육체가 떨어져나가고 없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런 것을 보지 않으려 들고, 보이더라도 지워버리고 얘기를 않는다. 그녀는 이를테면 투명인간을 보듯이 사람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이 공상 모험소설에 몰두하듯이 지치지도 않고, 그녀는 며칠 동안 끈질기게 열의와 진지성을 가지고 이런 비슷비슷한 사실을 얘기했다. 금방 조금 전에 한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억만 개의 바지와 소매투성이와 단추와 모자들로만 구성된 어떤 숭고한 왕국(王國)을 새로 세울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육체와 정신의 곤핍(困乏)이 비로소 절감돼서 외경스런 어떤 공포와 충동적인 본능에서인지 반무의식적으로 끌고 들어간 안경점에서, 그녀의 피로의 농도가 증명되었다. 유자의 시력은 0.1이하로 내려가 있었다. 나의 거칠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발버둥을 치듯이 막무가내로 안경 쓰기를 거부했다.
“나도 그렇게 보이냐? 나도 바지와 구두밖에 안 남아 보여?”
한쪽 심장을 없애버린 듯한 허탈감을 은밀히 맛보면서 내가 이렇게 확인을 하려 들자, 그녀는 밤거리의 건물들과 불빛들을 두리번거리던 눈으로, “오빠는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 하고 지친 아이처럼 웃음을 보이고 있다. 무엇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일까?
◈ 작가_ 이제하 -소설가.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현대문학' '한국일보' 등을 통해 시와 소설로 등단함. 지은 책으로 『초식』『기차, 기선, 바다, 하늘』『용』『소녀 유자』『능라도에서 생긴 일』『진눈깨비 결혼』등이 있으며 CD '이제하 노래모음'이 있다.
◈ 낭독_ 문형주 - 배우. 연극 '맘모스 해동', '칼리큘라', '수인의 몸이야기' 등에 출연
오민석 - 배우. 연극 '만파식적', '봄은 한철이다', '바람직한 청소년' 등에 출연
◈ 출전_ ☜『밤의 수첩』(나남)
◈ 음악_ Backtraxx - mellow1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민경
◈ 프로듀서_ 양연식
이제하, 「유자약전」을 배달하며
주인공 남유자의 본명은 문자(文子). 유자에 대한 짧은 전기를 쓰고 있는 화자는 그녀가 죽기 일 년 전쯤 같은 화실을 썼던 화가입니다. 유자가 하는 말은 진부한 세계, 억압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저항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투영되었을 거란 짐작이 들지요. 소설 속엔 이런 질문도 나오는군요.
“망원경을 바로 대고 세상을 볼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치하고 비약하는 수밖에요. 이 난해하고 불가해한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 2014년도 기어이 저물어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문학집배원 조경란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 바람과 별이 쉬어가는 뜨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