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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팔고찰순례단 원문보기 글쓴이: 청원
송림사는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91-6번지 架山(팔공산 줄기)남쪽기슭에 있으며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본사 동화사 말사입니다. 사성(寺城)은 동서로 길게 이어진 골짜기의 북편 대지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로 남쪽에는 개울이 있습니다. 창건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544년(진흥왕5년) 중국 진(晉)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대사가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절을 창건하고 탑도 그 때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 1022년(고려선종 9년) 대각국사 의천 대사에 의해 중창 된 송림사는 (고종 22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복원되어 보감국사 (1251년 1322년)가 주석한 후 병을 얻어 입적 하였습니다. 국사가 주석한 것으로 보아서 당시 송림사가 대단히 비중 있는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병들의 방화로 또 한 번 소실되어, 재차 빈터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뒤 1686년 숙종 12년 기성 대사 (송림사 북쪽 100미터 지점 대성식당 옆에 기성(箕城)대사 비각과 보개가 아름다운 비석이 있음)가 필생의 노력으로 중건 하였는데 이때 숙종이 내린 “대웅전大雄殿” 편액 을 하사할 정도면 기성대사(동화사 등의 주요 사찰 주지역임)(송림사 바로 위의 동내 이름이 기성대사 이름을 차용한 기성동입니다)가 어느 정도의 스님인지 짐작 할 만할 것입니다. 이어서 1858년 (철종 9년) 영구(永 木+區)대사에 의한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 초. 중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송림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점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사세가 미약했음을 추정케 합니다. 또한 조선 말기 “사찰전서”에는 소재지 외에는 자료가 없습니다. 아마 1950년대 이전의 생존해 있는 사찰근처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전탑이 전부였으며 대웅전 앞에 소가 매여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퇴락할 때로 퇴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970년 황수영 박사가 개인 소장 (현재는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알수 없음) 하고 있는 청동 향로 (높이 24.1센치미터)의 명문을 조사한 결과 [至正二年銘 松林寺香]이 소개되어 있어 고려시대에 봉안했음을 추정 할수 있습니다.(향로의 연대와 시주 자 발원 자를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개되어 있는 명문을 알고 싶은 분은 대구카톨릭대학원 최원정 선생의 석사 논문이나 황수영 전집 제4권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지정2년; 충혜왕 복위 3년,1342년 임) 그리고 경내에 있는 [팔공산 송림사 유적 비]에 보면 1959년 전탑 해체복원 발굴 당시 부처님 진신사리 4과가 청유리병에 봉안 되어있었고, 이와 함께 연화문 상감순금 부처님 진신사리감 (龕) ,청자 부처님진신사리감, 옥지금엽보리수, 침향 9개, 은귀거리 17개, 나무 구슬 1개, 청옥, 백옥, 수정, 유리(琉璃), 등 옥구슬 26개,(발원문은 있었지만 햇빛을 보는 순간 탄산(炭散)되어 알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함)가 나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유물은 현재 대구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음)출토 유물 중에 목불과 석가모니 진신사리 4과는 탑에 다시 봉안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송림사 경내에 있는 송림사 유적비는 최근 1980년에 조성되었기는 했으나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 또한 유려한 명문입니다 <출처:송림사 홈피>
일주문
범종각 <주련>
오층전탑(五層塼塔) 보물 제189호 / 통일신라시대 영조물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상륜부까지 완전한 희귀한 문화재임. 1959년 해체수리를 거친바 현재보다 훨씬 좁은 폭 4.5m정도의 기단 석축이 발견되었고 합실안에는 조선시대 작품인 본불, 파손석불, 동불이 각각 2구 있었다고 하며 이층 옥개에는 금동방형 사리기를 비롯하여 유리배, 수목형 금구, 옥류 등 찬란한 유물이 발견되었고 상륜부 전탑 내에는 화려한 고려청자합자, 시대를 달리하는 유물이 각층에서 발견 되어 적어도 고려시대에 상륜부가 해체된 것으로 판명 되었다. 발견된 유물은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전탑의 규모는 훨씬 작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여러 차레 해체복원 과정에서 외형이 많이 변모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고 16.13m, 기단 폭 7.3m의 전 및 화강석으로 조성된 탑이다
1959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일련의 舍利莊嚴具이다. 이 유물은 제 2층 塔身에 거북모양의 石函을 안치하고 그 속에 들어 있었다. 2층 탑신에서는 거북 모양의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탑 모양을 한 금동 사리기가 나왔다. 이 녹색의 투명 유리병(②)은 금동사리기 중앙에 놓여있던 컵모양의 유리잔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높이 6.3㎝, 배지름 3.1㎝로 약간 황갈색이 도는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배가 부르고 목이 긴 형태를 하고 있다. 짙은 녹색의 보석형태를 한 마개가 달려있다. 사리기 중앙에 유리잔(④)이 놓여 있었다. 높이 7㎝, 아가리 지름 8.7㎝로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밑에 받침이 있고 위가 넓은 컵모양을 하고 있다. 표면에는 지름 1.3㎝ 내·외의 고리 모양의 장식이 12개 붙어있고, 안쪽 중앙에는 옥을, 그 주위에는 진주를 붙여 장식하였다. <출처:송림사 홈피> 대웅전(大雄殿) / 숙종이 글씨를 쓴 커다란 편액이 있는 대웅전은 1686년에 세워졌으며, 1755년과 1830년, 1850년의 중수 사실을 적은 상량문과 중수기를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전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 단청이 되어있다. 장대석 기단을 위에 화강석 정평주촉을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웠다. 목조 건축에서 칸과 칸, 곧 기둥과 기둥 사이의 너비는 대체로 비슷하나, 송림사 대웅전 앞뒤면 은 이런 일반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중앙의 어간(御間)은 넓고, 어간에 이어지는 좌우 협간 은 이보다 좁다. 가장 구석이 되는 양쪽 툇간은 아주 좁아져서 그 비율이 대략 3:2:1 정도이다. 이에 따라 문짝도 어간에 넷, 협간에 셋, 그리고 툇간에 하나씩을 달았는데 그 용도에 각각의 차이를 두고있다. 어칸의 문짝 넷 가운데 출입에 이용되는 것은 어칸의 쌍여닫이문 뿐이고, 나머지 두 짝은 채광 의 구실만을 하는 붙박이 문이다. 좌우 협칸은 가운데 문짝이 안여닫이, 양 옆의 문짝은 고정 되어 광창으로만 쓰인다. 툇간의 외짝문 역시 여닫을 수는 없고 채광창으로만 쓰임새가 한정 되어 있다. 어칸의 가운데 두 짝은 빗살문, 양 옆의 두 짝은 소슬꽃살문이며, 협칸은 가운데 안여닫이가 소슬빗살문, 나머지 두 짝이 빗살문이다. 반면 툇칸의 외짝문은 정자실문으로 변화를 주었다. 어간에 둘, 협간에 각각 하나씩 남아 있는 신방목은 원래 벽 중간에 세운 문설주, 곧 벽선을 받쳤던 것으로 지금은 벽선이 없어진 채 양 볼에 새겨진 태극무늬와 연꽃무늬를 달고 하인방 에 꽂혀 있다. 내부에는 불단 후불벽을 이루는 고주가 건물의 중앙선에 세워져 있어 불단 앞의 공간이 협소 하며 상대적으로 불단 뒷면은 여유가 있다. 이는 아마도 불단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돌면서 예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구조로 보인다. 낮은 수미단에 삼존불을 모시고, 그 뒤로 후불탱화 3폭과 우측벽에 목각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두가 달린 소종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출처:koreatemple.net> <대웅전 주련>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보물 제1605호 / 송림사 대웅전 수미단 위에 봉안된 이 삼존상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된 석가삼존형식으로 본존불 (277cm)의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거대한 목조불상이다. 이 삼존상은 규모가 큰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비례가 적당하고 안정적이며, 당당한 형태미 를 보여주고 있다. 본존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무릎 위로 올려 구부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본존과 거의 흡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좌·우협 시보살상은 양손의 수인의 위치만 달리하여 두 손으로 긴 연꽃줄기를 잡고 있는데, 연꽃줄기는 보관과 함께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림사 삼존상은 양식적으로 건장하고 당당한 형태미, 엄숙한 얼굴표정에 입가를 눌러 만들어 낸 생경한 미소, 간략하고 단순화하지만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옷주름 등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양대전란 이후 17세기 전·중엽경의 재건불사 과정에서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 적으로 상통한다. 이 삼존상은 조선후기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대작(大作)으로서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하 여 정확한 조성연대와 발원자, 조각승을 알 수 있다. 특히 17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조각승 무염 (無染)계에 속하는 수화원 도우(道祐 또는 道雨)를 비롯하여 18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 한 대형작품이다. 따라서 이 삼존상은 17세기 전반과 후반을 잇는 기념비적 작품이자 조각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목조석가여래삼존상-본존 석가모니불
목조석가여래삼존상-좌협시 문수보살
목조석가여래삼존상-우협시 보현보살
산령각(山靈閣) <주련>
삼성각(三聖閣) <주련>
명부전(冥府殿) <주련>
삼천불전 <주련>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松林寺 石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606호 / 삼천불전에 봉안된 이 삼존상은 아미타여래와 관음·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형식이다. 이 삼존상은 ‘불석(Zeolite, 沸石)’이라고 불리는 돌로 제작되었다. 불석은 경주지역에서 채석 되는 연질의 석재로서 목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조각승들도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는 재료 였다고 생각된다. 상들의 표현은 재질에서 기인한 탓인지 얼굴이나 신체의 표현에서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삼존상에서 특기할 만한 표현은 수인의 형태로 삼존 모두 두 손을 다 같이 손바닥을 밑으로 하고 두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러한 수인은 조선후기 불석제 불상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특히 이상은 이러한 수인을 취한 불석제 불상 중에서 선구적인 예에 속하는 것으로 조각사적 의의가 있다. 한편 아미타여래상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을 통해 1655년(효종 6) 무염(無染)유파의 조각승 도우(道祐, 또는 道雨)가 현재까지 밝혀진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수화원이 되어 조성한 작품 으로 17세기 불교조각사 및 조각유파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우리 고찰순례단중 관음사 삼장반에서 공파스님으로 부터 정토삼부경을 배우는 회원들의 장엄염불 소리가 삼천불전을 가득 채웠다.
제20차 고찰순례는 동화사, 파계사에 이어 송림사 순례로 일정을 마치고, 불기2553(2009)년 영축총림 통도사 화엄산림대법회시 12번째(2009.12.4) 수진스님 (해인정사 주지) 현수품-1(오전법문), 현수품-1(오후법문) 법문 DVD를 시청하며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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