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일주일 째. ‘대학 문화’라는 것에도 점차 회의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여태껏 공부한 성과가 충분히 실현되고 있는가. 타인을 밟고, 또는 타인에게 밟히면서 올라온 지금 이곳이 나에게 과연 만족스러운가. 머릿속에 두서없이 휘달리는 생각의 마무리는 언제나 삶에 대한 의욕상실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날 역시 곧 시작 될 강의의 계획서를 책상에 올려놓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오후의 나른함이 왠지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여러분, 지금 행복합니까?”
교수님의 한마디에 문득 정신을 다잡은 나는 수업이 시작 된지 몇 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교수님의 질문은 나를 수업으로 몰입하게 만들었다. 지금 내 삶에 있어서 값진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에…
지난 20년 간 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게다가 그 행복은 너무나 일시적이어서 잠시 행복을 만끽하고자 하면 또다시 새로운 고통이 나를 옭아매었다. 하지만 반항은 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고해’라는 말처럼 나는 이런 내 삶이 곧 정석인 줄만 알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것, 숨이 턱까지 차 올라도 멈출 수 없는 것, 그것이 삶의 당연한 이치인 줄로만 알았다.
“무엇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까?”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 성적,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간 내 친구, 잘생기지 못한 내 외모…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회 구조가 나를 불행하게 했다, 부모님의 눈총이 나를 불행하게 했다, 점수가 나를 불행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가 20여년 동안 위엣 요소들에 의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와서 잘못된 판단이라 하면 내가 여태까지 겪은 불행은 모두 이유 없는 고통이었다는 말인가? 억울함이 치밀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사냥개에 쫓겨온 짐승과도 같이 살아왔습니다. 이 사냥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를 끝없이 달리게 한 그 존재. 내 숨통을 쥐고 흔들어 대는 존재. 나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존재. 그것의 실체가 드디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극도의 긴장, 나는 그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사냥개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존재는 바로 ‘나’란 존재였습니다.”
소름이 돋는 느낌과 함께 머리가 욱신거리는 통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의 나의 모습. 얼마나 많은 욕심 속에서 살아왔나. 그 어떤 것에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나였다.
앞만 보고 뛰던 내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렇게 나 자신으로 인해 확장되기만 강요받고, 그럴수록 고통만 더 늘어가던 내 자아가 갑자기 성장을 멈췄다. 이제 출발선으로 되돌아 갈 시간이다. 그러나 다시 출발하기엔 이르다. 나는 아직 그 사냥개로부터 나를 구제 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다. 교수님께서 순간 드러나는 모습을 언어화시키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즉 ‘알아채기’라는 해답을 잠깐 언급하셨지만 사냥개로부터 도망치는 데만 익숙해 진 내가 그 해답을 깨우칠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새로운 출발의 시점이 이번 학기의 말이 되었으면,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가 나에게도 좋은 인도자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관찰자는 관찰 대상이다.
다소 천천히
매일 아침. 사람들을 꾸역꾸역 실은 지하철 1호선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나다. 무미건조한 사람들의 표정, 답답한 지하철의 열기,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 나에게 지하철 1호선은 그리 기분 좋은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1호선에 정이 들게 만드는 한가지 요소가 있다.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한강, 비록 한강철교를 지날 때의 단 몇 초의 시간이지만 마치 발 밑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듯한 한강 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감성에 젖은 눈빛을 하게 된다.
“외로움과 고독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나는 내 스스로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배우고 난 이 후, 여태껏 내가 느낀 것은 끝도 없는 외로움이었고 나 자신을 세계와 소외시키면 소외시킬수록 그것의 잔인함이 나를 서서히 짓눌러옴을 알기에, 그러한 공포에서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고독’이었다. 현실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여행을 가도,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소설책 한 권을 읽어도 좀처럼 가시지 않던 그 느낌이 사랑을 하자 마침내 사그라들었다. ‘무엇인가가 채워져야 하는 상태’에 빠져있던 나는 그것을 내 연인으로 하여금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알아채기를 하는 요즘, 외로운 모습의 나를 문득 발견할 때면 나의 연인도 단지 아직도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외로움이란 놈의 껍데기만을 가려주고 있는 듯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이었다. 거울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자신의 존재가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있는 저 사람. 정말 ’나‘라는 사람 맞나?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혹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중은 아닐까?’
그 이후로 나는 혼자 거리를 거닐 때마다 이 질문을 나에게 하염없이 던지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렇지만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습관이 되어 버린 지 대략 10년 째. 나는 요즘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아채기에서 풀어나가고 있다.
‘내가 지금 또 그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내 모습이 알아채기 됨과 동시에, 알아채기를 하고 있는 내가 있음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10년 동안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생각에 쫓겨 살던 사람이므로, 생각을 생각으로밖에 풀 수 없었던 사람이므로, 또 다시 부끄럽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또 다시 반성을 거듭한다. 허나,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소 천천히 나를 알아 갈 것이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동기들과 선배님들에게 좋은 평을 얻기 위해 평소와는 달리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나를 알아챘고, 술자리에서 내 얘기를 듣고 크게 웃어주는 친구들을 보며 만족하고 있는 나를 알아챘고, 과외 아르바이트 도중 답답함에 물을 들이키는 나를 알아챘고, 타인의 별 감흥 없는 말을 듣고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말도 안 되는 결론까지 도달한 나를 알아챘고, 이런 알아채기를 하고 있는 나를 알아챘다.
지금의 알아채기는 너무나 일시적이고 미흡하지만, 앞으로 나에게 좀 더 자주 관심을 가질 것이다. 조급히 생각하지 말고, 다소 천천히.
내 사랑을 찾아서
오랜만에 TV를 켰다. 대부분의 채널에서 드라마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멋있고 예쁜 배우들, 그들의 입에서 한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사랑에 광분하는 대중들… 식상한 생각에 전원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고요해 지는 집안. 요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참 쉽게 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나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연인이 있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행복해지고 종종 삶의 이유를 그로부터 찾기도 한다. 서로가 힘이 들 때에도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 위로가 되었기에 나는 그가 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의심을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난 주 강의를 들으면서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한 뒤, 내가 그 동안 그 의심스런 생각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의심의 과정을 통해서 그에 대한 내 진심 어린 사랑이 훼손되면 어쩌나, 혹은 오해가 생겨 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랄까. 아니, 어쩌면 이런 명목상의 이유도 다 거짓일지 모른다. 나는 다만 그가 내 소유이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의심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그를 끼워 맞추게 되었을 때 혹시라도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그에게 내재되어 있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이 감정이 그가 느끼기에는 혹시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을는지, '사랑'이라는 그럴 듯한 껍데기에 포장되어있는 소유욕과 집착을 나는 이제껏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것은 아닌지… 이젠 더 이상 의심하기를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진정으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했다. 사랑 받기 위해 애를 썼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좌절했다. 그럼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도무지 혼란스러워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수필 문학수업은 언제나 나에게 힘겨움을 준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사실들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사랑이 아닌 것을 모두 빼내십시오.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사랑이겠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속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연인에게 내가 해 준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있는 나를 알아챘고 내가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아슬아슬한 거래를 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온 우주와 자연은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베푸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데, 왜 인간만이 사랑을 모르고 사는 걸까?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랑이란 ‘나’라는 존재가 없을 때 일어나는 행동이라고 했다. 즉, 250만년 동안 모든 행동 할 때 ‘나’라는 존재의 인식을 전제로 해온 인간의 숙명적인 관습이 고쳐져야만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랑에 대한 정의는 버리십시오.”
한 사람을 사랑하면 전체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지금의 그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다음 번엔 더 주고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진정한 사랑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감옥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앉혀놓으시고 진지하게 말을 꺼내셨다. 그 전날 나는 어김없이 야간 자율학습에 불참했다. 담임선생님의 어떠한 허락도 없이…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니?”
“선생님, 저는 강압적으로 시켜서 하는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리 수험생이지만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 공부에만 매진하기에는 학창시절이 너무 무의미해요.”
“대학가면 지금 못했던 것 다 할 수 있어. 수험생은 일단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최우선이야. 대학가면 네가 그리던 너무나 자유로운 생활이 오히려 너를 괴롭힐걸?”
글쎄… 내가 지금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이젠 봄기운이 피어오르는 낭만의 캠퍼스를 유유히 거닐면서 여유 로운 표정을 짓고있는 나를 알아채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고등학교 시절이 대학생활 보다 자유로움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타종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하루 일과였지만, 나만의 생각조차도 가질 수 없는 정답에 길들여진 생활이었지만, 나를 쫓는 사냥개는 오직 ‘좋은 대학’, 이 놈 뿐이었다. 이 놈에게서만 빠져 나올 수 있다면 나는 금방이라도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좀 더 넓은 감옥으로, 넓어서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느껴지는 감옥으로 옮겨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큰 사냥개 한 마리가 없어진 대신 사냥개는 몇 마리 더 늘어났다. 내가 스스로에게 해야만 한다고 압박을 하는 일들이 대학에 입학하자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제 예쁘게 꾸며진 자아라는 내 감옥 속에 사냥 개 들이 득실거린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나 자신이다. 이 복잡한 자아를 비우려고 해도 카테고리 화 되어서 내용이 조금 단순해질 뿐, 생각을 생각으로 풀어내려 할 뿐, 그 이상의 방법을 찾지 못한다.
나는 여태껏 명예를 인생에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타인과의 대결에서 승리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며 살아왔다. 따라서 남들보다 더 많은 목표의 압박을 느껴왔다고 생각한다. 중간고사를 대비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면서, 외대월드컵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반이나 남긴 나를 보면서,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안주 값을 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순간이나마 진정으로 자유로운 적이 있었는지 의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의심하는 순간에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여러분은 나무 한 그루를 자유롭게 볼 수 있습니까?”
점심을 먹은 후 나른하게 벤치에 앉아 있다가 문득 교수님말씀이 떠올라 옆에 있던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나무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해서는 안되고, 그저 나무 그 자체만을 받아들여야 한다. 10초간 그저 멍하니 쳐다봤지만, 이건 아닌 듯 싶었다. 방법이 틀렸다. 언제쯤 터득하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나의 연인도 그 자체가 아닌 내 속에 들어있는 그의 관념을 사랑한 것이 아닌 듯 싶다. 그래서 그가 내 관념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실망스럽고 내 속에 있는 그의 모습처럼 고쳐주길 원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나는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여태 내 관념, 즉 나를 사랑한 것이다. 자유로와 진다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육
‘기대’라는 것은 몹시나 무서운 존재다. 나는 그것을 스무 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경험했다. 수능시험이 채 100일도 남지 않은 날, 그 날 오후에는 모 대학 수시 모집 결과 발표가 있었다. 아침부터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오랫동안 한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더니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천국과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갔는지 셀 수조차 없다. 소위 명문대학이라 불리 우는 그 학교에 입학해서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때면, 나도 모르게 들떴고, 또 다시 실패할 모습을 생각하니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오후 두 시. 점심을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도 모르게 먹고 나는 교실 컴퓨터 앞에 섰다. 경건한 마음으로 수험번호를 하나씩 적어나가면서 나는 혹시 모를 충격에 대비해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자. 떨어져도 괜찮아, 아직 기회가 있어.’
하지만 머리 속에서 외치는 말과는 정반대로 조회버튼을 클릭 할 때의 내 기대는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마침내 매몰차게 보이는 한 문장.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쿵’ 하고 내려앉은 내 심장. 몇 초 동안 아무 생각 없이 글씨를 응시하고 있었다. 옆 교실에서 합격했다고 기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열 아홉의 나이에 처절하게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며칠 후, 충격에서 많이 헤어 나오고 이성을 되찾은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왜 나는 합격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고, 또 다시 고배를 마셨나.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 내신 성적은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뛰어나지도 못했고 면접은 형편없었다. 면접 대기실에서 옆에 앉아있던 다른 두 여학생의 학교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일류학교였으며 나는 지방에 있는 그저 그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합격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던 것일까. ‘혹시나’로 시작해서 ‘역시나’로 끝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늘어져 헤어 나오질 못했던 것일까…
그 시절 나는 그 때 사냥개에게 먹이를 주고 녀석을 키우는 사육사였다. 근거도 없이 나 자신에게 내 한계 이상의 것을 자꾸만 잡으라고 명령했다. 실하게 자란 사냥개는 쉴 새 없이 나를 물어뜯었고, 그럼에도 나는 녀석에게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더 풍부한 먹이감을 제공했다.
‘대상을 우리들은 어느 특정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그것은 광범한 연계위에서 그때그때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미 그것은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그 대상에 언제까지나 집착할 필요는 없다.’ 몸보다 정신이 지쳤을 때 나는 이 ‘색즉시공’을 읊곤 했다. 온 세상이 열 아홉의 나에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만 집착하게 해서 마치 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 버려 삶에 커다한 회의감을 느낄 때마다 저 위엣 말을 새겼다.
요즘 들어 삶의 회의를 느끼는 나를 알아채고 잠시나마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색즉시공을 읊을 수 있었던 그 때가 그립다. 그저 세속의 물욕에 빠져 쾌락만을 찾고 있는 나를 볼 때면, 그리고 하루에도 수 백 번씩 마음속으로 혹시나를 외치고 있는 나를 볼 때면, 그러나 결과는 항상 마찬가지인 나를 볼 때면 그저 슬프다. 슬프기만 하고 다시 쾌락에 집착하는 내가 더욱 슬프다.
시간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사이의 간격이다.
며칠 전 나는 초여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 몸의 솜털이 솟는 경험을 했다. 오랜만에―아니 어쩌면 처음일수도 있는 일이었다―오전수업을 마치고 곱게 집에 들어가는 나를 스스로가 대견스러워 하며 오늘은 엄마 집안 일 좀 도와드려야겠다.라는 기특한 생각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햇볕은 그날따라 얼마나 좋던지. 따끈따끈한 날씨에 기분마저 좋아져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리는 경쾌한 노래에 맞추고 있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두 배는 가벼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순간, 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마찰음이 내 미간을 좁혀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날아갈 듯 했던 내 기분은 상황을 파악한 순간 땅으로 푹 꺼지고 말았다.
비탈진 골목에서 자전거를 신나게 타던 꼬마아이는 주변을 살피지 않고 무조건 차도로 뛰어 들었을 것이다. 갑자기 출현한 어린아이의 모습에 운전자는 크게 놀라 급정거를 한 것이겠고. 어린아이의 놀라 창백해진 얼굴과 창문 밖으로 크게 화를 내는 운전자의 모습을 보고 나는 5초만에 상황을 정리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운전자가 조금만 더 속력을 냈다면―생각 만해도 끔찍한 장면이 연출됐을 것이다.
소리가 난 직후의 5초간 나는 그저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그 꼬마아이에게 더욱 맞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마치 세상이 멈춘 듯이 그렇게 5초 동안을 서있었다. 조금 전 까지 들리던 음악소리도, 조금 전 까지 하던 생각도 모두 STOP. 잠시동안 충격에 휩 쌓인 채 시간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위험에 빠지면 시간을 잃게 된다. 그리고 나와 같은 경우에는 쾌락을 느낄 때,―예를 들어 한가롭게 거실 쇼파에 앉아 아멜리노통브의 소설을 읽는 다거나 친한 친구와 사과소주를 시켜놓고 신나게 수다를 떨 때―역시 시간의 개념을 쉽게 잃는다.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항상 더욱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고자 언제나 먼저 조건을 걸어온다. 내일이면 너는 이만한 인간이 되어 있어야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냥개의 발톱은 나를 더욱 옥죄어 온다. 만약 기대치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생각해보면, 기대치 이상의 성과를 거둔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나는 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그리고 의미 없는 시간과의 게임을 또 다시 시작한다.
알아채기는 순간순간의 나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따라서 시간의 개념이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단지 쾌락을 위해 즐기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에게 위험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라는 존재에 대해 판단하지도 말고 알아채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 대한 실망도 없다.
그러나 현대인일수록 시간의 중요성에 목매고, 그것의 압박에 치여 살아간다. 어쩌면 세상이 점점 삭막해지고 인간의 이기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는 요즘의 상황은 이 시간이라는 놈에게 그저 끌려 다녀서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난 주 동안 내가 시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을 때가 단지 날씨 좋은 오전의 5초 동안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반성의 시간
대학을 입학 한 후 해가 있을 때 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나에게나 부모님에게나 하나의 큰 이벤트였다. 그런데 하루는 나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던 엄마가 조용히 말을 건네셨다. 대학 들어가서는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사실 나도 내가 변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스무 살. 술집에 들어가서도 마음놓고 신분증을 꺼내놓을 수 있는 이 나이의 나는 마치 이제 다 큰 것 같았다. 점점 나에게 있어서 부모님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마음이 맞는 대학 동기들과 신촌에서 술을 한잔 할 때에도 집에서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남자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고 일주일 동안 과외를 받는 학생에게 한 말이 내가 엄마와 나눈 대화보다 몇 곱절은 많은 듯 했다.
이러한 생활로 접어든지 대략 3개월. 그리고 알아채기를 시작한지 역시 대략 3개월. 쾌락에 빠져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 나… 그 동안 무엇을 했나. 매주에 걸쳐 수필을 한편 씩 써내려 갔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자니, 그제서야 어둠에 꼭꼭 쌓여 있어 한치 앞 말고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내 주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지금 부모님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3개월 동안 잔소리 없이 지켜만 보시던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그 수많은 알아채기를 했던 순간 중에서, 왜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의 장면은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내가 알아채기를 단지 ‘과제’ 혹은 ‘일’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알아채기를 했던 순간들을 되 돌이켜 보면,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을 수 있는 시간 ―예컨데 인천에서 서울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시간― 들이었다. 의식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알아채기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갑자기 명령을 받는다.
‘아차! 알아채기 해야지!’
그리고는 그 때부터 내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과연 이러한 알아채기가 깨달음에, 득도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쾌락의 순간에는 전혀 효험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알아채기 방법이 옳지 않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왜 이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는지.
그저 수시로 아무 의도된 바 없이 알아채기가 될 정도의 습관. 나는 그 습관이 그저 시간이 지나면 생기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알겠다. 이러한 의식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내 삶의 변화를 주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면, 단지 과제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영원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크리슈나무르티의 ‘Freedom from the known'을 보면서도 그저 내가 잘 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엄마의 한 마디로 인해 달라졌다.
이럴 때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했던 그토록 고귀한 사랑이라는 것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부모님이 아닐 까 싶다.
첫댓글 '시간은 관찰자와 관찰대상과의 간격이다.'라는 말이 깊이 와닿습니다.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이 상태가 아닌, '그 어떤 무엇으로 된다'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시간'이 개입하겠지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새로운 출발의 시점이 이번 학기의 말이 되었으면 합니다... 학기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강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