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한 영상은 지난해 11월에 개최한 수원화성행궁의 빛축제 미디어 아트쇼의 영상입니다
화려한 빛의 향연을 끝까지 감상하세요.
흘러간 민족가요 '황성옛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최초의 한국 가요이며, 처음 부른 가수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 작곡으로 이애리수(李愛利秀) 가수가 불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담은 가사와 구슬픈 곡조로 나라 잃은 슬픔을 하소연하는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아온 것을 우리국민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초창기 대중가요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1921년)와
김우진과 윤심덕의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년)가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곡이나 유럽곡을 고쳐서 만든 것으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는 '황성옛터'가 최초였습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이 최초로 작사와 작곡을 한 곡으로,
1928년 한 순회악극단의 공연으로 개성에 머무는 도중에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인 개성 만월대를 둘러 본 후
역사의 무상함에 젖은 연주가 전수린이 떠오른 악상을 바이올린 선율에 옮기자 동행했던 극단 무대감독인 왕평이
그멜로디에 감동하여 일제강점기에 억눌린 민족 감성을 노랫말에 담아 이애리수가 부른곡입니다.
출반 당시의 곡명은 '황성옛터'가 아닌 '황폐한 성의 발자취'란 의미의 '황성의 적'이었다고 합니다.
1930년 당시 종로 3가에 있던 단성사에서 이애리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 매회 수많은 관객들이 열광하며
따라 불렀으며 가수가 감정에 못이겨 잠시 노래가 중단됐다가
청중들의 열띤 박수를 받으면 노래가 계속되기도 하였답니다.
뜻밖에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던 민족의 마음을 적셔주며 1932년 4월 빅타레코드로 출반되어
조선의 세레나데로 불리며 당시 5만장이 넘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전설의 곡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던지 일본경찰이 놀라 단성사에 진입해 공연을 중단시키고
작곡가, 작사자, 가수등 관련자들을 모두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이후 조선총독부는 민족의 감정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황성옛터'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 각 지방에서 순회 공연하는 악단 마다 막간에는 이 노래를 단골로 올리게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계속 전해져 민족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이후에도 남인수의 '황성옛터'로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황성옛터
왕평 사 전수린 곡 이애리수 노래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닫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1절의 가사에는 월색(달빛)이 가득찬 만월대(황성)가 등장합니다.
만월은 보름달을 의미하죠. 여기서 작사가는 월색을 집어넣어 자신이
만월대를 방문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고려가 망해서 궁궐이 폐허가 되었듯이 조선도 망해서 민인들이 나그네가 된 현실을 강조합니다.
나그네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주인에서 손님으로 전락한 조선인의 처지를 은유한 것입니다.
2절에서 주인공은 폐허가 되어버린 궁궐터에 향기로운 풀들(방초)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고려의 영화가 허무한 것처럼 자신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허무한 꿈을 꾸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3절은 주인공이 궁궐에서 나와 정처 없는 유랑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작사가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나그네와 같다고 비유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애리수의 본명은 이음전(1911~2009)은 개성 출신으로 '애리수'란 예명은 '앨리스'에서 따온 별칭입니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2세의 어린 나이로 극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총명하고 연기력이 뛰어나 배우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창 관심을 끌던 20세때 신파 연극 중간에 가수로 전격 등용되어 나라잃은 슬픔에 떠는 듯
애잔하게 '황성옛터'를 불렀는데 의외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민족애창곡으로 퍼져나갔고, 매 공연마다 청중이 열광하는 국민가수로 등극하게됩니다.
그러나 22세에 연희전문 대학생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지만,
배씨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동반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은퇴를 조건으로 결혼이 승낙되었습니다.
은퇴후에는 철저히 자신을 숨기며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다가
2009년 9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가 부른 '황성옛터'는 여러 후배 가수들이 즐겨 부르며 현재도 많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곡입니다.
작사자 왕평 이응호(1908~1941)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영천고보 졸업 후
서울에 배재중과 조선배우학교를 다녔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 대중문화계에 중심인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황성옛터', '조선팔경', 항구의 일야', '조선행진곡'등 수많은 작사, 작곡을 남겼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는 포리도르 레코드사의 초대 문예부장으로 작사가, 극작가, 연극 배우 등을 겸하면서
활동중 평북 강계에서 악극단 연기중 쓰러져 3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고향 영천에는 '황성옛터 노래비'가 장엄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작곡가 전수린(1907~1984))의 본명은 전수남입니다.
악극단 취성좌(聚星座)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그의 고향인 개성의 백천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갔다가
비에 갇혀 있던 쓸쓸한 여인숙에서 애수 어린 '황성의 적(황성옛터)'을 작곡해 일약 민족가요의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습작으로 동요를 작곡하기도 한 전수린은 명문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장봉손에게서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호수돈 여학교의 교장인 니콜스(Nicols) 여사(루추 부인이라는 설도 있음)에게서
정식으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사사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송도고보를 졸업한 후 완고한 부모님을 설득해서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하는데,
1925년에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한 전수린은 열아홉 살 때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을 작곡한 한국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 선생이 주도하는 연악회(硏樂會)에 들어가 음악을 익히면서 동요 작곡가로 활동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대중가요가 없던 시절에 당시의 순회극단인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과 취성좌에
악사로 있으면서 독자적인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단발머리 소녀 박단마를 하루아침에 인기가수로 만든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는 1937년에 작곡하여 1938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황성옛터'의 작곡으로 일약 민족가요의 작곡가가 된 전수린은,
이애리수를 인기가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풋내기 열일곱 살의 소녀 가수 박단마를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의 단 한 곡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했으며,
또한 16세의 소녀 가수 황금심에게 '알뜰한 당신'을 부르게 해서
단 한 곡의 데뷔곡으로 황금의 신인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그의 특기는 신인가수의 데뷔곡을 히트시키는 히트 제조기였습니다.
또한 그는 화려한 무대에 서서 인기를 독점해버린 가수들의 그늘에 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도 있으나, 한때는 명지휘자로서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첫댓글 윤광준 선생님 멋진 연주 올려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