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연주되는 "우미 유카바"(바다에 가면)
난생 처음 본 80년 전의 캉캉시키(觀艦式)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된지 2년 차 되던 초가을이었든 것 같다.
내가 살던 쿄토(京都)로부터 소개(疎開)되어 이사 간 곳이 일본 북동부 쪽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라는 작은 도시였다.
동해(東海)에 불쑥 튀어 난듯한 노토반도(能登半島) 안쪽에 자리한 해군양성소가 있는 항구도시로 방패 같은 천연의 산으로 둘러 싸
인 호수 같은 바다를 품은 내해(內海)를 가지고 있어 선박을 보호하는데 천혜의 좋은 항구였다.
2차대전 참전한지 2년차 되던 1942년가을,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수 백척의 군함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이름보차 생소한 일본
제국 해군의 캉캉시키가 열린다는 소문으로 도시 전체가 뒤숭숭했다.
학교를 나오다가 해군양성소 옆 방파제에 올라 수 많은 군함을 구경하는 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흰 셀라복 입은 수병들의 수기
신호와 뻔쩍 뻔적하는 불빛신호도 신기하고 군함위에 도열한 수병들의 경례하는 모습이 멋젔다.
간간히 몰려 오는 세찬 파도에 발을 헛딛고 바다에 휩쓸려 빠져 버렸다. 수영은 커녕 바닷물에 발 담군적도 없는 주제에 바닷 속에 휩
쓸린 것이다. 깊은 바닷 속에 얼마나 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정신은 말짱했는지 두 팔로 마냥 허우적대며 바다에 떠 올랐다.
누군가가 나를 끌어 올린다. 근처를 순찰하던 해군수병이 나를 건져 올려구제 해 준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싫건 야단 맞고 그 후로 방
파제에 나가지 못했다.
며칠 후 동네 카이란방(廻覽榜)에 괴이한 회람이 떴다. 집 앞 아스팔트길을 쓸고 물걸레로 딲으라는 공지이다. 황공스럽게도 천황폐하가
오실찌 모르니 철저히 닦으라는 공지였다. 관의 지시에 철저히 잘 따르는 일본의 주민들은 군 소리 없이 무릅 꿇고 앉아 촘촘히 닦았다.
호기심 많은 나는 학교에서 돌아 오자 마자 나나오역(七尾驛)에 나갔다. 주변은 철통 같은 경비태세로 틈새가 없었지만 키 작은 8살짜리
꼬마가 끼어 들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온다던 텐노헤이카(天皇陛下) 대신에 그 이름도 거륵한 황태자 전하가 왔다.
나보다 2 살 더많다는 10살 먹은 황태자 아키히토(明仁)가 아비인 히로히토(소화:昭和)를 대신하여 나나오시(七尾市)로 온 것은 바로 일
본해군의 캉캉시키(觀艦式)에 군통수권자로써의 권위를 확인하고 참관을 위하여 온 것이었다.
내해의 방파제 쪽에 닻을 내린 거대한 순양함(巡洋艦)위에 황태자 를 위시한 거물 제독들이 줄지어 섰고 함상 군악대의 군함행진곡이
연주되고 있다. 사열대 100m 앞에는 군소 함정들이 서행하며 존엄하신 텐노헤이카를 받들어 모시는 충성의 캉캉시키가 거행되고 있다.
각 함정마다 함수(艦首)에는 천황의 상징인 국화 문양이 붙어있고 일본 제국 해군의 상징인 욱일기(旭日旗)가 펄럭인다.
열병식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관함식(캉캉시키)은 자국의 세를 과시하고 자국군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거행되는 행사임은 말할 것도 없다.
전해의 진주마 공격에서 궤멸되다시피한 미국 해군에 대한 일본제국 해군의 위세를 과시하는 행사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지금도 변함없이 일제의 잔재 속 캉캉시키(관함식)에 어김없이 연주되는 만엽집(萬葉集)의 "바다에 가면"의 섬찟한 가사~
"바다에 가면 바다 속에 잠긴 시체요
산에는 잡초에 쌓여 죽은 시체가 될 망정
천황 곁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죽어 돌아 가 후회하지 않으리"
일본 제국 해군의 캉캉시키(觀艦式)에 넘치는 제국주의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의 결의에 대한민국의 해군함정에 승선한 수병과 제독이
일본 수상과 방위성 제독이 탄 욱일기 휘날리는 함정을 바라보고 충성을 웨치는 모습에 등골 오싹한 추위를 느끼며 세월의 무상함을 한
한다.
- 글 / 쏠 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