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것>을 노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노래는 항용 슬픔이나 우울, 체념 같은 상투적 정서에 매몰되기 쉬운 반면 이 상투성으로부터의 탈출과 그 극복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해낸 시를 가리켜 우리는 <좋은 시>라고 말한다.
우울을 우울로 표현하고 슬픔을 슬픔으로, 체념을 체념으로
쏟아놓는 시는 <배설통>이지 시랄 수 없다.
(독자여, 좋은 시/아닌 시 사이의 구분은 무효라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얼치기 미학에 현혹되지 말라. 그 미학 아닌 미학의 관심은 당신을 백치로 만들자는 것이다. 삶의 모든 문맥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에서도 <질>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다.)
시의 질을 따지는 장치는 여러 가지이다. 시적 진술의 평면성 극복 여부, 간접화의 정도와 효과, 이미지 배치법, 비유/상징 운용의 기술 수준, 어사 선택의 연마도, 긴장/갈등의 상승적 해소와 종합 - 이런 것은 그 장치의 일부이다.
이 점검장치들을 들이대어 시를 읽는 이유는 한 편의 시가 독자의 시간 소비를 요구할 만한 값어치를 지니는가, 읽은 다음의 독자로 하여금 읽기 전의 자기와는 <달라진> 심미적 상승을 경험하게 하는가, 수면 위로 솟구쳐올랐을 때의 물고기 눈알 같은 진리의 한 순간이 포착되고 이것이 독자의 내면에 울림을 일으키는가 않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이다. 그 울림과 상승이 있을 때 우리는 시의 읽기로부터 <즐거움>을 경험한다...."
도정일의 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민음사, 199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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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시가 있습니다.
나의 상상력을 털끝만큼도 자극하지 못하는 시...
언어의 내용만 신경썼지 그 작용은 등한히 하는 시...
또는 그 반대의 시...
시인 자신의 이름만 믿고 게으르게 쓴 시...
그런 시들의 장점은,
아, 나도 시를 쓸 수 있겠다, 하는 용기를 주는 것,
그것뿐입니다.
다시 도정일의 표현을 쓰면,
"세상에 할 일이 허구 많은데 왜 하필 시를 써야 하는지 알 수 없게 하는 시들, 언어와 감성의 타락을 절감케 하는 시들, <닌텐도>판 전자오락 게임만도 못한 손장난으로 독자를 구역질 나게 하는 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