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는 어떤 나라일까요?
고구려는 정치와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 동시에 정신이 자유롭고 문화가 매우 발달한 문화국가였다.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하였으므로 초기부터 문화가 발달했으며 5세기에 이르러 영토가 확대되면서 질적으로 더욱 성숙해졌고, 보다 다양성을 띄게 되었다. 고구려 땅은 지구상에서 가장 다양한 자연환경이 만나는 독특한 지역이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꽃피운 수렵삼림문화, 대흥안령 산맥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유목문화, 화북의 농경문화, 중국 양자강 유역의 남방문화, 그리고 한반도의 문화 등이 지중해적 성격을 띤 문화영토 속에서 독창적인 고구려 문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많은 종족들은 다양한 문화를 보존한 채 고구려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이를 수용하여 독특하고 수준 높은 고구려 문화를 완성시켰다.
고구려 사람들은 하늘을 진심으로 숭배하였으며, 자신들을 천손(天孫)이라고 부르면서 강한 자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때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신령스러운 건국신화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유포하였으며, 숱한 고분벽화나 광개토대왕릉비문 등에 그러한 정체성(identity)을 강하고 자신감 있게 선언하고 있다.
고구려 문화는 중국의 문화와 다른 점이 많고 문화의 주체가 되는 종족이 전혀 다르다. 또한 중국문화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므로 보다 체계적이고 이동성(mobility)이 약하다. 문화를 수혈 받는 지역이 서역의 일부와 남쪽이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서역 및 북방초원, 그리고 대삼림 지대의 문화를 수용했으므로 경제형태도 다양하고, 문화도 각양각색이며, 이동성이 강한 특성이 있다. 때문에 중국문화를 자극하고, 영향을 주었으며, 전체적으로는 동아시아문화에 활력과 개방성을 불어 넣어주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만주지역의 비중 있는 문화적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동아시아문화는 중국문화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전반적으로 정체성을 띄우게 되었다. 고구려는 독특한 지리 문화적 특성과 유목민족이 누리는 자유로운 정신성을 바탕으로,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었고, 보편성을 지닌 세계적인 인식을 가졌다. 그러한 반면에 자기 집단과 문화에 대한 자아의식이 강하여 종족정체성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정치군사적으로 제국이었음에도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고구려인들의 정체성과 포용력 있는 문화생태, 자유를 끝없이 희구하는 정신성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스러운 고분벽화나 웅대하고 성스러운 광개토대왕 비문 등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는 졸본 지방에서 B.C 37년 개국하여 A.D 668년까지 28명의 황제, 70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전역을 근거지로 하여 연해주 지역, 중국 하북성과 산동성, 북경 인근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했던 고대 제국이다.
고구려의 정치적 기반으로는 소노부, 계루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의 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에게는 고추가라는 특별 칭호를 주어 그 지위를 인정해 주었다. 이는 신라의 갈문왕, 백제의 길사와 같이 귀인이라는 뜻이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서·남·북·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가 통치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5부의 연맹체가 5부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각 부 밑에는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褥薩), 성(城)의 장을 처려근지 또는 도사(道使)라고 불렀다. 이 지방장관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겸직하였다. 특수행정구역으로 평양성·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 : 載寧)을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군사제도는 군사조직을 행정조직과 일치시켜 욕살·도사 들은 자기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국가에서 동원할 때는 군대 편성에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의 군관이 되어 지휘하게 하였다.
3세기경 고구려의 총 호수는 3만 호, 지배계급 수가 1만여 명, 멸망 전의 총 호수는 69만 7천이고, 성곽 수는 176에 달하였다. 지배층인 왕족과 관료는 정치·군사·교육 등을 담당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농민·노비 등은 하호(下戶)라고 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당시에는 고리대금업도 성행하여 평민을 노비로 몰락시키는 폐단이 생기자, 194년 고국천왕은 이를 막고자 을파소를 등용하고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민구제에 힘썼다. 부족국가시대의 제가회의는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법률은 엄하게 적용되어 반역자는 불로 태우고 목을 잘랐으며, 살인자와 전쟁에 패한 자는 목을 잘랐고,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렸으며,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조세제도는 곡식으로 매호에서 받는 조(租)와, 베(布)나 곡식으로 개인에게서 받는 인두세(人頭稅)가 있었다. 산업은 직조기술이 발달하였고, 일본에 전파된 물품과 기술을 보면 철공·종이·묵필·맷돌이며 모피류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남·북 중국 및 유목민족인 북방민족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중원에서는 3세기 이래로 후한이 멸망하고 221∼589까지 16국 시대,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30여개 이르는 군소국가가 명멸해 가는 동안 고구려는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당시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동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했다.
544년에 제24대 안원왕의 자식들이 왕위계승권을 두고 혼란이 일어나고, 북위의 멸망이후 성장한 돌궐이 서북변방 침입하기 시작한다. 고구려가 유목제국인 돌궐을 방어하는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에 압박을 가한다. 고구려는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뒤 이어 혼란한 중원을 수나라가 통일하였으며 돌궐마저 굴복시켜 버린다. 다극체제의 동아시아 정세는 고구려와 수의 양극체제로 재편된다. 수의 팽창정책에 고구려는 정보를 수집과 무기를 개발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급기야 고구려 영양왕(?陽王)은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진정책을 단행,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는 수륙군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수군이 수나라의 수군총관 주라후의 수군을 발해만에서 섬멸시켜 보급로를 차단하였으며, 고구려의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은 임유관 전투에서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켜 중원에서는 ‘고구려’와 ‘요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수나라 양제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는 우중문으로 하여금 30만 5천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수도인 평양성으로 향하게 하였다. 명장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위장패전전술을 이용 적을 유인하고 매복 작전에 이은 총공격으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불과하였다.
645년(보장왕 4) 당태종 이세민은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주(城主) 양만춘 장군의 결사항전과 군민의 총단결로 당군에게 치명타를 입힌다. 당태종 이세민 자신도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치욕적인 패전을 거듭 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연개소문의 총지휘로 당태종의 본군을 해상에서 지원하던 당의 수군이 발해만에서 격파되자 보급로가 끊겨 진퇴양난에 빠진 이세민은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한다. 하지만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추격군에 의해 요택에서 군사의 대부분을 잃고 수도인 장안으로 겨우 도망갈 수 있었다. 고구려는 북경인근에 10여개의 고려성을 쌓고 영토를 더욱 넓히게 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3차(647년·648년)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중원의 영웅이라 불리는 이세민종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구려를 더 이상 정벌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649년 사망한다.
이후 고구려가 신라와 공방전을 벌이는 중에 당나라는 정명진, 소정방, 설인귀, 방효태 등을 앞세워 끈질기게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모든 전투에서 대패하여 물러간다. 고구려는 계속된 전쟁을 거치며 생산력이 떨어지고 국토는 피폐한 상태에서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함에 따라 국운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남자들의 옷차림은 저고리와 바지가 모든 옷차림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저고리는 그 길이가 지금의 양복저고리만하고 앞이 완전히 터져 있고 곧은 깃에 어김식 섶을 하고 있다. 이런 섶은 왼쪽으로 여민 것과 오른 쪽으로 여민 것 등 두 가지가 있다. 왼쪽으로 여민 섶은 보다 앞선 양식이었고 오른쪽 섶이 그보다 나중에 유행한 것이다. 또한 저고리의 팔소매는 통이 좁은 것과 넓은 것, 선이 단조로운 것과 화려한 것 등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신분상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일반 백성들은 소매통이 좁고 단조로운 저고리를 입었으며 지배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소매통이 넓고 화려한 선을 단 저고리를 입었다.
바지의 생김새는 지금의 것과 비슷한데 통이 좁은 것과 넓은 것이 있다. 좁은 것은 '궁고'라고 불렀으며 일반 백성들이 입었던 것이고 넓은 것은'대구고'라고 불렀으며 귀족 이상의 신분계층이 입었던 것이다. 색깔에는 흰색, 검은색, 황토색, 자주색, 붉은색, 청색, 녹색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며 점무늬, 구름무늬, 기하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로 화려한 모양을 내었다. 겉옷에는 두루마기와 덧저고리가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또한 저고리와 겉옷을 입을 때에 반드시 허리에는 띠를 둘렀다. 띠는 옷이 몸에 잘 붙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천, 색실 또는 가죽으로 만든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천이나 가죽띠 위에 금, 은, 철 등 금속 장식물을 붙인 띠이다. 이런 금속장식 띠는 미천왕 무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의 띠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칼과 숫돌을 차고 다닌 풍습이다. 편리하게 차고 다니기 위해 칼과 숫돌에 구멍을 뚫었다. 옛 기록 [한원] 고구려조에 '허리에 은띠를 띠고 왼쪽에 숫돌을 차고 그리고 오른쪽에 오자도를 찼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남자들의 실용적인 패션이었다고 볼 수 있다.
머리장식 또는 모자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머리장식은 머리트는 모양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두 가지 형태의 머리트는 방식이 있다. 커다랗게 하나로 묶은 외상투가 있으며 쌍상투가 있다. 외상투는 안악 제 2호무덤에 나오는 문지기 장수와 집안현 제 4호 및 제 5호무덤 벽화의 신선, 그외 씨름꾼들이 하고 있던 머리모양이다. 쌍상투는 집안현 제 5호무덤 문지기 장수의 머리모양이다. 일반적인 머리모양은 외상투였다.
모자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머리 수건, 절풍, 책, 관, 패랭이 등이 있다. 책은 활동이 그리 많지 않은 문관들이 주로 쓴 것으로 무관도 의례용으로 쓰기도 했다. 또한 뒤가 뾰족하게 솟고 앞에서 보면 뒤가 한단 높게 되어 있으며 옆에서 보면 뒷부분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책이 있는데 이는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들과 무사들만이 썼다.
저고리와 바지 및 치마가 여자 옷차림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저고리와 바지는 남자와 비슷하며 활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신분차이에 따라 일반 여자들은 통이 좁고 소박한 옷을 입었으며 귀족 이상의 신분계층들은 통이 넓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귀족부인들이 입은 옷은 그 무늬가 화려한 고급비단으로 만든 것이다. 미천왕의 왕후는 진한 자주색 바탕에 붉은 물결무늬를 세로로 그리고 전면을 흰색의 복잡한 꼬불무늬와 물결무늬, 점무늬 등으로 배합하여 화려하게 꾸민 옷을 입었다. 왕후의 경우와 달리 부엌일을 하는 여인들은 자주색, 연회색, 청회색 등 단색의 소박한 옷을 입었다.
고구려때의 치마는 주로 여자들만이 입었으나 남자들 중에서도 승려는 치마를 입기도 했다. 고구려 여인들 치마의 특징은 주름을 잡고 단에 선을 댄 것이다. 여자의 겉옷에는 두루마기가 있는데 저고리 길이보다 더 길게 만들었다. 깃이 곧으며 소매끝과 깃 그리고 아래단에 선을 댔으며 허리에 띠를 맸다. 섶은 어김섶이고 초기에는 왼쪽으로 섶을 여미었으니 그보다 후기의 것은 오른쪽으로 여미었다. 소매의 너비도 일정치 않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소매의 통도 점차 넓어졌다. 두루마기는 그 색깔과 장식무늬가 매우 다양하다. 색깔에는 흰색, 검은색, 누런색, 연분홍색, 청회색 등이 있으며 또한 이것을 바탕색으로 하여 그린 무늬에는 점, 쐐기, 초롱무늬 등이 있다. 무늬들은 바탕색과 조화를 시켜 진홍색, 적갈색, 자주색, 검은색 등으로 표현했다. 이와 같이 겉옷은 무늬있는 아름다운 천으로 화려하게 만들어 입었다.
다른 옷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분이 낮은 여자는 단색의 것이거나 무늬장식이 없는 단조로운 것을 입었고 신분이 높은 여자는 화려한 것을 입었다. 그리고 신분이 높은 여자들의 옷과 보통 여자들의 옷은 천의 질이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한편 여자의 겉옷 가운데에는 통저고리와 통치마가 맞달린 형식의 것이 있다. 이 옷은 통옷이라 머리에부터 입게 된 것이다. 이런 통옷은 고구려를 이룬 종족 중 예족이 입었었다. 여자들은 저고리와 겉옷에 반드시 띠를 둘렀는데 남자의 경우와 꼭 같다. 여자들은 검은색, 흰색, 붉은색, 자주색, 연록색 등의 여러 가지 색깔의 띠를 맸다. 특수하게는 띠에 천으로 삼각형 또는 꽃잎모양의 장식물을 단 것도 있다.
여자들의 옷에는 한가지 더 앞치마가 있었다. 허리에 매는 띠가 매우 넓고 타원형으로 생겼다. 앞치마는 여자들이 부엌일을 할 때 둘렀다.
여자의 머리모양과 머리쓰개 또는 모자가 있는데 머리 튼 모양은 매우 다양하지만 머리를 트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올린머리이며 다른 하나는 내린 머리이다.
고구려의 주식은 곡식과 육식이 결합된 양태였다. 곡식으로는 쌀, 보리, 콩, 조와 밀 등이 있었으며 사슴과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 고기를 주로 섭취했다. 또한 고구려 초기에는 해안 쪽에 거주하는 피정복민들에게 공납으로 받은 해산물도 식생활에 이용했으며 이후 해산물의 직접 조달을 통한 활용도 이루어졌다. 농사를 지을만한 비옥한 영토가 그리 많지 않아 쌀은 매우 귀해 귀족들이 거의 독점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콩이나 조, 보리와 밀 등이 주요한 곡식이었다. 일반 백성들 대다수는 보리나 조, 콩 등의 잡곡밥과 간단한 반찬 정도로 식생활을 해결했다.
그러나 귀족들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은 쌀밥과 사냥을 통해 조달한 각종 고기와 젓갈 등이 주로 식생활에 이용되었다. 국력이 강해지면서 요동지방과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면서 쌀의 공급이 보다 나아진 때에도 여전히 일반 백성들은 주식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각종 양념이 발달되지 않아 반찬의 종류나 수준이 매우 낮은 것이었다. 마늘의 전래도 상당히 늦은 때였으며 고추는 조선시대에나 유입된 것이기 때문에 반찬은 대개 소금이나 발효시킨 것이 주를 이루었다. 반찬을 만드는 채소류는 아욱, 배추, 무우와 콩잎, 박, 오이 등이 있었다. 당시에 김치는 있었으나 지금과 같은 배추김치가 아니라 아욱을 주재료로 한 소금김치 수준이었으며 콩을 발효시킨 장이 많이 애용되었다.
고구려는 추운 지역이었기 때문에 겨울철 난방문제가 중요했다. 대부분의 한족들이 맨바닥에 침상을 설치하고 기기에서 기거하는 것이 보통인데 비해 , 고구려 사람들은 앞선 지혜를 활용하여 쪽구들을 사용했다.
쪽구들은 오늘날처럼 방 안 전체에 구들을 설치하고 난방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에만 구들을 설치하고, 방 안에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쪽구들 위에서 추위를 이기고 잠을 자며, 여름이나 평시에는 평상이나 의자에 앉아서 생활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방 안 전체에 온돌을 들이지 않고 일부만을 온돌로 한 것은 그들이 활기찬 활동을 하기 때문에 방 안에 들어올 때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전체 온돌이 불편했기 때문인 듯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쪽구들 외에 화덕을 따로 만들어 음식을 조리했다. 안악3호분의 부엌 그림에서는 화덕이 잘 드러나 있다. 고구려 화덕의 특징은 부뚜막처럼 길이가 길쭉하고, 고부랑 굴뚝이 화덕에 연결되어 있으며, 아궁이가 굴뚝에서 볼 때 측면으로 열려있다.
고구려의 이 같은 문화는 고구려인들이 불과 돌을 활용하여 추운 곳에서 잘 적응했으며, 정적인 문화가 아닌 활동성 있는 문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농경지가 부족하여 농업이 생업에서 압도적으로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요동정복과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가장 주요한 생업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지리적 특성상 목축과 사냥 등이 농업등 그외 생업과 함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수공업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수공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고구려인들의 기술력은 고구려의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공업의 분야는 주로 국가적인 건설과 무기, 마구 생산, 농기구 생산과 주택의 기와와 벽돌, 그리고 장식품 생산이었다. 수공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개 관청등 국가기관에 속해 있는 신분이었는데 귀족에 속해 있던 이들도 꽤 많았다.
철기생산의 발전에 따른 수공업 종사자들의 증대와 그들의 기술력이 상당한 발전을 거듭한 것은 무기와 마구 등 전투에 필요한 수공업 제품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지리적 여건상 말을 많이 기르는 목축업의 발달과 주변 나라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시절이었기에 수공업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증가가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 외 고구려인들이 종사했던 산업분야는 목축업과 상업, 그리고 연예분야이다. 광할한 만주벌판에서 말을 비롯한 주요 동물을 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금 등 생필품을 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구려의 '과하마'라 부리운 말은 강인하고 날쌔 고구려 군사력 중에서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던 기마로 활용되었다. 이 '과하마'는 중국에도 그 이름을 널리 널쳐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목축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지금의 연예인이나 조선시대의 광대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의 문화생활에 자신의 역량을 전문적으로 발휘하는 직업적 연예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관청이나 귀족 또는 절에 소속되어 있는 신분들이었다.
고구려, 고려시대의 교육기관.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의 제도를 본떠 국립학교로서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역사상 학교교육의 시초가 된다. 상류계급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귀족학교였으며 경학 ,문학, 무예 등을 가르쳤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의 한 분과로 인종 때 설치하였다. 대학이라고도 하며 정원은 300명으로,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과 3품관의 증손에 한하여 입학할 자격을 주었다. 박사(博士)·조교(助敎) 등 교관을 두어 《역경(易經)》,《시경(詩經)》,《서경(書經)》,《삼례(三禮)》,《삼전춘추(三傳春秋)》,《효경(孝經)》,《논어(論語)》등을 가르쳤으며 수업연한은 8년 반이었다.
고구려 때 평민층의 자제들을 위하여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 혼인하기 이전의 지방 평민층 자제들이 모여 경전을 외우고 사격술을 익히는 문무 겸수의 사설학숙이었다. 이 무렵의 고구려에는 상류계급의 자녀를 가르치는 태학)이 있었는데, 경당의 설치시기는 관학인 태학이 설립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 특히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인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고유의 결혼 풍습이 있었다. 혼인이 결정되면, 신부의 집에서는 자기 집 뒤에 조그만 집(서옥-사위의 집)을 짓는다. 사위될 사람이 저녁에 신부의 집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서 신부와 함께 자겠다고 간청한다. 간청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면 신부의 부모가 비로소 허락하고 서옥에서 자게 한다. 이 때 신랑은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이렇게 혼인을 한 후 아이를 낳아 아이가 크게 자란 후에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의 집안이 훨씬 우위에 놓인 결혼제도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결혼하자마자 장례 지낼 때 입을 옷을 장만한다고 했다. 또 장례는 아주 후하게 지내, 금과 은, 재물을 모두 쓰며, 돌을 쌓아서 무덤을 만들고 무덤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했다. 이것은 장군총으로 대표되는 적석총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으며, 우씨 왕후의 무덤과 고국천왕의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일곱 겹이나 쌓아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 고구려의 무덤에 많은 부장품이 있다고 외국인들이 알 정도여서 역대로 도굴꾼들이 기승을 부렸는데, 특히 모용선비족은 296년에 서천왕릉을 도굴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342년에는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과 무덤 속에 있는 역대의 보물을 거두어 가기도 했다.
고구려 후기에는 시신이 죽은 후 곧 무덤을 만들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고 3년을 지낸 다음에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낸다고 한다.
고구려의 장례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초상을 치를 때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나, 장사를 지낼 때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샤머니즘을 믿는 북방지역 사람들의 장례풍속이다.
고구려 문명의 척도 중 하나는 당대 최고의 성 축조술이다. 현재 중국 본토와 한반도 곳곳에 200여개의 고구려 성곽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성곽의 위치는 당시 고구려 세력권과 이웃나라들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축성기술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초기에 산봉식 산성이었지만 백제의 경우 산봉식 산성의 단점과 고로봉 산성의 장점을 결합, 이미 축조된 산봉식 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 산성을 적용시켜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고구려의 성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건축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 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柵城)으로 구성됐다. 평지성은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안학궁이 있다.
백암성은 둘레 약 2천300m로 요동성에서 동쪽으로 22.8km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학계에 따르면 지금의 태자하 북쪽 기슭에 있는 연주산성으로 추정된다. 북쪽 개모성, 서쪽 요동성, 남쪽 안시성이 지켜주는 2㎞에 걸친 성으로 외성과 내성을 갖췄다.
현재 북쪽과 동쪽 성만 남아 있으며, 북쪽 성벽의 높이는 5~6m이다.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547년(양원왕 3년) 신성과 함께 개축했다. 551년 돌궐이 성을 침공했으나 고구려군은 이에 맞서 1천여명의 적군을 물리쳤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성주 손대음의 항복으로 함락됐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요하 유역에 설치했던 방어성 중 전략적 비중이 가장 높았다. 특히 안시성은 신성과 건안성의 중간에 위치,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 등이 일시에 적의 수중에 함락된다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방의 여러 성들의 방어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의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는 지형이 험하고 정예병력이 배치된 안시성을 공격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구려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출병했으나, 안시성 8리(里) 되는 지점에서 당나라 군대에 패배했다. 그러나 고립된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이후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은 요동에서의 고구려 부흥 운동군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다 671년 7월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에게 함락되고 고구려부흥운동도 크게 약화됐다.
국내성은 고구려 2번째 수도다. 기원전 37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 전기의 명실상부한 왕궁이었다. 이 성은 현재 도시가 자리 잡고 있어 고구려시대 성안 시설물 포치를 자세히 알기 어렵다. 다만 성안의 서북쪽에서 고구려 시기 주춧돌이 나와 당시 큰 건물이 세워졌음을 말해준다. 붉은색 고구려 기와들이 많이 출토됐고 성안의 큰 길로는 성문들을 연결하는 동서남북의 두길이 있었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방추형 돌로써 네모나게 쌓았다. 둘레는 3천800m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5~6m.
환도산성은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가까운 산에 축조한 산성이다. 처음 산성의 이름은 위나암성이었으나 중국에선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 산성자산성으로 불렀다.
위나암성은 중국 지린성 지안현 서북쪽 2.5㎞ 지점의 해발 676m 환도산에 위치하며 현재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 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있다.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한조를 이뤄 조성됐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평지성이고, 위나암성은 전시때 사용하는 산성이었다.
고구려는 돌을 가공하거나 벽을 쌓는 형식에서 노하우를 지녔다. 먼저 돌로 만든 성벽의 경우 긴 육각형 모양의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다. 기초 부분은 견고함을 위해 5단에서 10단 정도 계단식으로 안으로 들여쌓는다. 이러한 물림 쌓기는 고구려성의 특징으로 조선시대 성곽에도 응용됐다.
국내성은 10~15㎝를 물려 쌓았다면 후대는 2~3㎝ 정도로 미미하다. 구조적이나 시각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며 높은 성벽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기초부분을 이렇게 들여쌓은 후 비로소 성벽을 쌓는데 수직이 아니라 마치 활 모양이나 옹기 모영처럼 곡선형으로 쌓는다.
이는 성벽의 무게를 분산시켜 성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성을 쌓는 돌도 성벽 면을 이루는 부분은 네모나고 뿌리 부분은 뾰족하게 만들어 사각추 모양을 이루게 했다.
<고구려 산성의 축조 방법>
고구려 산성은 중국과는 달리 매우 견고하게 쌓았기 때문에 현재도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기초 작업이다. 특히 고로봉식 산성은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도를 높였다. 지반이 약한 경우 토압이 3N/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보통지반의 토압인 10~20N/제곱미터가 되도록 보강공사를 했다. 지반이 아주 약한 경우 성벽이 통과할 구간의 하단부의 지반을 완전히 들어내고 직경 약 30센티미터, 길이 5~6미터의 통나무를 1~1.5미터 간격으로 놓았다. 그 위에 다시 이보다 더 굵은, 직경이 약 50센티미터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모양으로 약 4미터 간격으로 세로방향으로 놓았으며 그 위에 자갈과 모래, 흙을 넣고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므로 축조에 공은 많이 들어가지만 성벽은 매우 견고했다.
<높은 성벽 축조땐 굽도리로 계단식 기단부 축성>
성벽의 기초 부분은 큰 돌로 밑받침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 20~60센티미터. 높이 15~40센티미터 정도이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 하단 부는 굽도리 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되었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미터나 된다. 굽도리(원래 방 안 벽의 아랫도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성벽의 아랫도리. 북한에서는 축대라고 한다)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특수 공법을 도입했다.
① 기단은 큰 돌 : 맨 아래 기단은 큰 돌로 받쳤다. 땅을 파고 기초를 한 뒤 먼저 큰 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 만들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백암성의 경우 기초 돌은 윗부분에 쌓은 돌보다 3배 이상 크다.
② 굽도리부분 들여쌓기 : 굽도리 부분은 들여쌓았는데(퇴물려쌓기) 이는 튼튼한 굽도리를 위한 공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다. 특히 치성에서는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③ 굽도리 부분 내쌓기 : 들여쌓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서 쌓는 것에 반해 내쌓기는 성벽 밑에 굽도리를 마치 네모난 상자로 받쳐 놓은 것처럼 내쌓는 것을 말한다. 심양 근방에 있는 석대자산성의 치에서 이러한 축성법을 볼 수 있다.
④ 그랭이 공법 : 성벽을 쌓으면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는 돌을 바위가 생긴 대로 쪼아내어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이 그레질이다.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공법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정확하게 접합시키면 상하가 밀착되어 매우 안전한 것으로 고구려의 축성법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둘째는 완벽한 겉 쌓기와 속 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겉 쌓기란 돌로 성벽을 쌓을 때 바깥 면을 말하며 외면 쌓기(한 면만 겉 쌓기)와 양면 쌓기(양면 모두 겉 쌓기)를 한다. 겉 쌓기는 작고 잘 다음은 돌로 하므로 마치 메주를 쌓은 것처럼 가지런하고 빈틈이 없다. 특히 강냉이 알 같은 쐐기꼴 돌을 사용하는 것이 고구려 산성 축조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에 놓으며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정한다. 겉 쌓기의 기본공법은 벽돌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로 ‘6합쌓기’를 했다. 6합이란 벽돌을 쌓는데 같은 줄 양 옆에 2개를 놓고 윗줄과 아랫줄 2개는 반씩 물리게 쌓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건물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채용하는데 이와 갚은 6합 쌓기는 밖으로 튀어나오는 치성과 체성을 이을 때 서로 엇갈려 물리기 때문에 잘 연결된다. 여기서 치성은 성이 밖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또한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하여 성벽 안에 속 쌓기를 한 돌도 큰 힘을 받도록 했다. 이렇게 쌓은 성벽은 비록 일부 성벽 돌이 자연히 뽑아지거나 성 밑에서 돌을 뽑아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은 신라와 백제에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처음에 거의 산봉식 산성이었는데 백제의 경우 산봉식산성의 단점과 고로봉산성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미 축조된 산봉식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산성을 결합하여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고구려의 성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으로 되어 있다. 평지성의 경우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안학궁이 있다. 대표적인 평지성으로 하고성은 오녀산성이 험준한 절벽에 있으므로 그 보완적 의미가 있다. 고구려 산성은 200여 개가 된다.
현재 국내성이나 장안성 내성의 궁궐터는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며 다만 안학궁만이 발굴 조사되어 고구려 전성기 궁궐 건축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전 단계는 3가지 또는 5가지 발전 단계로 나누고 있다. 1)인물 풍속도, 2)인물 풍속과 사신도, 3)사신도 등 3가지 발전 단계로 분류하기도 하고 더 세분화하여 1)인물 풍속도 고분, 2)인물 풍속 및 사신도 고분, 3)장식 무늬 고분, 4)장식 무늬와 사신도 고분, 5)사신도 고분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전기에 해당되는, 4~5세기에는 인물 풍속을 그린 단실분, 감 또는 측실의 2실분이 만들어졌는데 동수묘(안악 3호분-북한에서는 이 묘를 미천왕릉 또는 고국원왕으로 부른다-, 357년), 요동성총, 평양 역전 고분, 대성리 1호, 약수리 고분, 덕흥리(408년)고분, 안악2호, 매산리 사신총, 장천 1호 등을 들 수 있다.
집안 장천 1호분 예불도(1970년 발견- 무덤의 주인인 부부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모습으로 경건하고 엄숙함이 종교화로서 최대 걸작이다.
인물 풍속도는 주인공의 집안 생활. 해. 달. 별. 장식 무늬 등을 위주로 그렸고 벽화내의 건물 구조로서는 기둥. 두공. 도리 등을 그려 목조 건물의 형식을 재현시키고 있다. 집안 생활에서는 가족. 측근. 시중드는 사람과 호위 등 남녀 인물이 묘사되어 있고, 내용은 행렬. 사냥. 씨름. 전쟁. 무악 등이다. 또한 성곽. 부엌. 마구간. 외양간 및 우물 등 각종 건물도 묘사하고 있으며 천장에 해. 달. 별 그리고 입구에는 문지기도 나타난다.
5~6세기 벽화 고분은 중기로 보는데, 인물 풍속 및 사신도의 단실분 또는 측실을 갖춘 2실분이 만들어졌다.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안악 1호, 고산리1호 등을 들 수 있다. 인물 풍속과 사신도 고분은 인물 풍속도와 함께 사신도가 있는 고분이다. 벽화 내용은 인물 풍속도의 벽화보다 복잡하다. 인물 풍속과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및 사신. 비천. 신선 등이 나타난다. 후기에 해당되는 6~7세기에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분이 축조되었는데 강서대묘, 중묘,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 1호, 4호, 통구 사신총, 오회 4, 5호분 등이다.
사신도 고분은 벽화가 사신도 위주로 고분 내의 4벽에 사신을 그리고 천장에는 황룡 또는 연꽃을 중심에 놓고 해. 달. 별. 기린. 신선. 비천. 구름. 인동무늬 등을 그렸다. 그 외에 장식 무늬. 인물 등을 그렸는데 문에는 문지기도 보인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인접 문화를 흡수하여 고구려 특유의 문화로 용해하면서 질적으로 다른 형식의 수법과 벽화 예술을 창조하였는데 그 예로서, 3각 고임 천장과 돌기둥을 세우는 양식이 일단 고구려화 되자 3각과 평행을 합치기도 하고, 4.5.8각 등을 배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단계를 거친 뒤에 강서 삼묘와 같은 뛰어난 고분 벽화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강서대묘>
강서 대묘의 구조 역시 뛰어나지만 벽화 수준은 세계 최고의 예술적인 솜씨를 자랑하는데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로 당시 고구려에서는 동. 서, 남. 북 사방을 지키는 사신을 믿는 종교가 성행하였습니다. 현무, 청룡, 주작, 백호가 그려져 있습니다.
사신은 상상의 동물이지만 현무도를 보고 있으면 살아 있는 동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강서 중묘>
강서 중묘는 장대형이며, 구조는 강서 대묘와 기본적으로 같은데 그것보다 후실의 높이가 좀 낮고 천장은 평행고임 형식입니다. 후실 네 벽에는 사신도를, 천장에는 인동덩굴 무늬와 구름무늬, 해와 달, 연꽃무늬를 그렸습니다.
현실 입구 양쪽 벽면에 서로 마주보도록 그려져 있습니다.
1400년이 지난 벽화이지만 금방 하늘을 날아오를 듯한 생동감과 강렬한 표현은 주작도의 예술적인 가치가 높습니다.
크게 벌린 입, 날카로운 이빨, 탄력 있는 날씬한 몸체, 위로 꿈틀거리면서 들어 올린 긴 꼬리, 네 다리 등이 역동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무용총>
무용총은 중국 집안현에 있는 고분으로 반지하의 장방형의 전실 형태로서 천정은 8각고임천정 방식입니다. 전실 좌. 우벽에는 나무 건물과 기마 인물이 보이며, 후실에는 부엌. 무악도 및 수렵도. 우교차. 나무. 주인의 실내생활이 있습니다.
무용총은 2실분 형태의 고구려 중기 벽화 고분으로 초기 벽화 고분의 인물 풍속도에서 서서히 사신도 고분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비록 작은 부분이지만 천정의 고임부에 사신도를 그렸지만 수렵총이나 고산리 제1호분부터는 인물 풍속도보다 사신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안악 3호분 묘실 단면도(전실 및 좌우측실 동서 단면도)
넓은 얼굴에 진한 눈썹, 가늘고 긴 눈매와 팔자수염을 가진 유일한 정면상입니다. 이 주인공이 왕이라면, 백라관을 쓴 생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악 3호분의 여자 주인공으로 좌우에 시녀들이 있으며, 운문을 놓은 화려한 의복에, 고계운환의 머리를 틀었습니다. 또한 주옥으로 만든 각색꽂이로 머리를 치장하고 있습니다.
아직 묘의 주인공을 단정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여자 주인공의 복장은 한대의 중국복식과는 다르며, 고구려 복식하고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식들은 요양 ‘삼도호 벽화분’과 유사한 점이 발견됩니다.
아직도 아궁이의 불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부엌 앞마당에는 군침을 흘리는 두 마리의 개가 보이고, 지붕 위에는 새가 앉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우리 시골의 모습을 보여주는 벽화입니다.
1. 고분벽화를 많이 남긴 고구려는 어떤 나라일까요?
2. 만주 일대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 대해 알아보고, 이 고분들의 도굴이 우리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요.
3. 도굴과 발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정리해 보세요.
도굴 -
발굴 -
4. 고구려 벽화를 보고 고구려인들의 삶을 추리해 보세요.
5. 훼손된 벽화처럼 훼손이 심한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연개소문과 관련된 갓쉰동 전 만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