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그들은
세계관이 다르고
행위의 방향이 반대이며
관심의 초점이 다릅니다.
영성spirituality 혹은
영성가에
사람들은 막연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별난 사람들이고
소신이
분명한 이들로 여겨지지요.
닦음의 관점에서
영성은
'의식의 확장 현상' 이며
일반 사회적으론
'의식의 자각'과 관련한 현상을
지칭합니다.
영성은
특정 문화와 교단에 국한되지 않은
고양된 인간 의식을
다루는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지요.
이것은
영성에 관한
견해와 방법론이 다양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이런 내용에
사람들은 쉽게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구속력도 미미합니다.
자유로운 반면
그저
가십gossip거리로
개인의 구체적 삶에 파고들지 못하는 측면도 있지요.
그래서 영성은
특정 교단의 신심의 일환이나
수행으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반인들이
영성을 생소하고 어렵게 느끼는
특성은 분명 있는데
크게 3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지요.
첫째
영성은
지속적 성장의 과정입니다.
이 특성은
영성이 지닌 명확한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지요.
현인류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적 세계관은 종착점을
제시합니다.
그것에 의하면
인간은
언젠가 혹은 어느 지점에선가
완성되어야 하는 존재이지요.
천국이든 극락이든
깨달음이든 부처이든
완성의 차원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종교인이 아닌 영성가에겐
완성의 지점이 없지요.
성장 과정의 특정 지점에서
주체의 관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없으면
완성은
의미를 상실하지요.
그러나
인간현상은 여전히 존재하며
성장 과정은
계속됩니다.
도달할 목표 지점이 없고
목적의 방향성만
있지요.
목표에 매이지 않기에
자유로운 것입니다.
영성가의 특성이
지속적 성장인 이유는
그는
모든 희노애락의 사건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일반인은
즐거움 속에서 정신줄을 놓으며
고통에선
면피免避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들도
늘 강한 집중력을 가지고 있지요.
단지 그것이
즐거움 자체이거나
고통의 출구에 쏠려있다는
점이지요.
일반인은
희노애락 속에서 허우적대고
종교인은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에서
도피하여
무균 지역에서
결벽성을 유지하려 하지요.
반면 영성가는
희노애락을
끊임없는 성장 도구로 사용합니다.
세 부류는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르지요.
둘째
영성은
배경의식에 가까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일반인의 자기 중심성을 역류하며
쌓아가는 작업을
그만 두었지요.
삶은
끊임없는 사건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비를 맞지 않으려 우산 속에
숨어들지 않으며
그 비가
자신을 거쳐 흘러가도록
허용하지요.
비와의 접촉과 만남에서
그들은
비의 본성을 이해하고 학습합니다.
비를 알게 될 때
비로소
구름과 하늘과 바다의 차원에
닿습니다.
그들은
주체의 차원에 갇혀있지 않으며
하늘의 높이와
바다의 깊이에 이르지요.
이것이
배경의 차원입니다.
셋째
영성은
보편성에 초점을 둡니다.
일반인은
늘 특별함을 쫓지요.
자기 중심성에선
타자와 명확히 구분되는
탁월함과 우월함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비로소
만족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이 존재감과 만족은
곧 새로운 갈증에 시달리는 약점을
지녔습니다.
반면 영성가는
특이성과 일반성에 구분을 두지
않지요.
표면적 분류는 하지만
관심이
사건의 특성에 있지 않고
그것이 발현시킬 의미
곧
성장의 역할을 보기 때문입니다.
종합하면
영성가와 일반인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르고
영성가는
자기 중심성을 역류하고 있으며
또한 사건의 특이성이 아닌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영성가의 특성은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영성이 인간 의식의 보편성이라는
의미이지요.
우리 눈에는 평범해보이나
인간현상엔
전혀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현상엔
항상 다름이 존재하고
인간의 유희는
그 다름을 탐색하고 즐기는
것이지요.
장자莊子는
자신의 철학을 소요유逍遙遊로
정리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떠난 도피가 아니며
자유로움 속에서
세상을 유희하는 능력이지요.
감당할 능력이 안되는 이들은
혐오와 도피를
선택합니다.
'신포도일 것이다.
허상이다. 허망하다.' 하지요.
물론 모든 현상이
바람처럼
'보일 듯, 있는 듯, 만져질 듯' 하다
사라집니다.
방금 존재했는 지도
생각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을 긍정하라는 얘기가
그것에 집착하거나
현상이
절대적 실체를 지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현상의 속성을 모르기에
'실체다, 실체가 아니다, 허상이다'
이런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요.
영성가는
수련의 과정에서 최우선적으로
'현상의 성품'을 보는
곧
배경의식을 활성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관념에 휩쓸리지 않고
영성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영성가와 일반인의 실제적 차이가
있습니다.
푸른 어둠 감겨오는 감촉
수줍은 등불 미소 머금고
스치는 만남 아련하건만
숨마저 멎게 한 묻은 여운.
..260915小野
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일반인은 여운있는 찬란한 빛 따위를 관객으로서 보며 평가하고 좋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진정한 수행자는 대상세계에 젖어들어가 혼연일체가 될 것입니다. 나마스테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