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41-44)
As Jesus drew near
Jerusalem, he saw the city and wept over it, saying, “If this day you only
knew what makes for peace? but now it is hidden from your
eyes.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가 들려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본다. 어린양이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그들은 그분을 찬양하며 새 노래를 부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신다. 그 도성이 당신께서 보여 주신 평화의 길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멸망할 예루살렘의 운명을 알고 우십니다. 이 장면은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모습(19,28-40)과는
극도의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명확히 예언하시는 담화는 21장에 나옵니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공관 복음인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도 볼 수 있고,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은 루카 복음만이 전합니다. 이로써 이 도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연민을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은 이미 13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어버이 같은 사랑으로 구하려 하셨는지를 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비극적 운명이 그들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평화’라는 뜻의 ‘살렘’이라는
낱말을 담고 있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비극적 역설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 도시의 현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 가지 세계 종교의 성지를 품고 있는 거룩한 곳이면서도 오늘날 지독한 반목과 폭력, 배타성의 상징이 되고 있는 역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캐나다 출신의
만화가 기 들릴은 2011년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는 아내를 따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체험한 평범한
일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실상,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절한 고통을 만화의 형식에 담아 『굿모닝 예루살렘』이라는 훌륭한 책을
냈습니다. 그는 아내가 아파서 예루살렘의 한 대학 병원을 찾은 일화를 전합니다. 그 병원의 유다인 회당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샤갈의 걸작
유리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 그림이 ‘담이 없는 예루살렘’인 것을 본 저자는 감동하며 “아마도 샤갈은 이 성스러운 도시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에 함께하며, 이 도시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지금 위치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 후에 10초 동안 눈을 떠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서 여러분 시야에 들어왔던 것들의 목록을 종이에 적어 보시길 바랍니다. 어때요? 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다시 10초 동안 봤던
곳으로 다시 돌아서서 여러분이 직접 적은 목록과 실제 물건들을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10초 동안 보고 적은 목록과 실제 물건들이
일치합니까?
저 역시 이를
그대로 해 보았고, 사람들에게도 시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을 봤을 때, 실제 물건과 직접 적은 목록이 일치하지
않더군요. 분명히 직접 봤지만, ‘보지 못한 사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직접 보았다고 해서
정확하게 봤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정확하게 보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의 기억력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 많은 물건들을 보기는 했지만, 그 물건들을 다 외우기란 우리의 기억력과 관찰력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부족함 그 덩어리입니다. 많은 것을 보고 있지만, 정확하게 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본 것 그 자체만으로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그로 인해
다툼을 일으키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앞일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더 인간의 부족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단순히 먼 훗날 있을 성전파괴의 장면을 떠올리고 우시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성전이 성전의 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전이 정화되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는데, 이 성전이 오히려 예수님을 제거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세상이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해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죄와 악에 물들어 점점 타락하는 곳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로인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슬픔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모두 보시는 예수님의 슬픔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그 인간들의 타락으로 인해 점점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슬픔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이 뜻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생활을
해야 할 텐데, 순간의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슬픔이 혹시
내 자신을 바라보고 하시는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교만과 이기심을 떨쳐버리고 대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이제 슬픔보다는 기쁨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작고
미미한 방식으로 베푼 관대함이 누군가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 놓을 수 있다(마가릿 조).
인생이란(‘좋은생각’
중에서)
한 젊은이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왔다. 젊은이는 연이은 시련과 아픔에 몹시 지친 상태였다. 집에 오면 소파 위에 쓰러져 잠들곤 했는데 이대로 영원히
눈감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어느 날 꿈속에
‘어둠의 사자’가 나타났다. 그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쳤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쉬지 않고 달렸다. 그래도 어둠의 사자는 바로 앞에 있었다.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내달렸다. 숲 속에 몸을 숨겼지만 어둠의 사자는 언제나 눈앞에 서 있었다. 결국 젊은이는 체념하고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어둠의
사자인 줄 알았던 그의 목에는 이런 팻말이 걸려 있었다.
“인생”
‘인생’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는 그가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도망치고 숨어도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하려고만 하는 당신에게 내가 어떻게 귀한 선물을 주겠습니까? 나는 껴안고 어울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어깨동무해야 내가 당신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잠에서 깬 젊은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인생이란 도망치고 거부할 것이 아닌 껴안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임을....
나의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나의 인생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평화의
샘
-이수철신부-
주님은
평화의 샘입니다.
주님은
매일 평화의 샘인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성지를
방문할 때마다,
또
여기 뉴튼수도원을 오랜만에 찾았을 때 느껴지는 것도 주님의 평화였습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와 위로를 찾아 성지나 수도원을 순례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름 그대로 평화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니 말입니다.
다음
복음 말씀은 예루살렘은 물론 마치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깨우는 우레같은 말씀입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이어
예루살렘의 파괴를 말씀하시며 또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깨어
있으면 바로 오늘 지금이 하느님이 우리를 찾아 오신 때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의
그리스도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이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감춰져 있는 도시 예루살렘을,
또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회개를
통해 눈이 열릴 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신 곳임을 깨닫습니다.
평화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방문하여 우선 선사하신 것이 당신의 평화였듯이,
주님은
오늘도 미사에 참석한 회개한 우리들에게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주님의
평화에 응답하여 바치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네“
오늘
화답송 후렴이 그대로 실현된 우리 교회 공동체, 새로운 예루살렘입니다.
이제
주님도 이 새로운 예루살렘을 보시며 웃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의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그대로 새노래입니다.
하여
우리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신
어린양
주위에서 새노래를
부르는 이들과 함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를 통해 매일 끊임없이 새노래를 부릅니다.
새삼
성서와 전례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1독서 묵시록 후반부에 나오는 찬미가는 우리가 매주간 화요일 저녁 성무일도때 마다 바칩니다.
"당신은
두루마리를 받으실 자격이 있사옵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나이다.
당신은
죽음을 당하셨고 당신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한 왕국을 이루어 우리 하느님을 섬기는 제관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는
땅에서 다스리리이다.“(요한묵5,9-10)
묵상할수록
은혜 충만한 찬미가입니다.
이
찬미에 바탕한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 새 예루살렘 공동체인 교회요
여기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바로
이 찬미공동체가 평화의 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울으셨지만
새
예루살렘인 우리 찬미 공동체를 보시며는 웃으실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어린양이신 주님을 모시고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새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시편13,6).
아멘.
-조재형신부-
며칠
전,
성당 주일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가 전화를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에 등록을 해서
다닌다고 합니다.
지난여름
동창모임에서 ‘복음화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친구는 큰마음을
먹고 매주 월요일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친구는 복음화
학교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큰 언니가 복음화
학교를 오래 전에 졸업하였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몸이 아팠을
때,
복음화 학교
사람들이 기도를 해 주었고,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는 제가 복음화
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사제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복음화 학교는
5단계의 과정이
있으며,
1년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복음화 학교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홈페이지 ‘새천년 복음화
사도직 협회’를 찾아가시면 알
수 있습니다.
매월 첫째 주일에는
명동 가톨릭 회관에서 기도 모임과 미사가 있습니다.
매월 셋째
목요일에도 가톨릭 회관에서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가 있습니다.
1년에
5번 후원회원과
학생들을 위한 피정이 새남터 성당에서 있습니다.
올해 마지막 피정은
12월
20일에
있습니다.
저는 주로 미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운영은
봉사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례력으로 올해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고,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올 한해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나는 나의
이웃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을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나는 신앙인으로서
나의 영혼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느님께서 제게 또
다른 선물을 주셨습니다.
중서울 지역
‘ME'
대표 신부를 맡겨
주셨습니다.
한 달에 한번
명동에서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결혼하신 부부들이
’대화의
소중함,
서로 다름을
인정함,
가정생활의 참된
가치’를 재발견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단체입니다.
이분들이 제게 손을
내미셨으니,
저 또한 이분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려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길가에 버려질 것이다.’
어떤 연예인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 많은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였습니다.
또 어떤 연예인인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 많은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습니다.
한 연예인은 나중에
아름다운 선행이 드러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연예인은 수사기관에 의해서 사실이 밝혀져서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습니다.
신문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10명중
2명만 교회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많은 교회를 보면서도 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주님만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사람만이 하느님께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깊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 중에
10명 중
8명은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건물의
교회,
엄숙한
전례,
아름답고 화려한
행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교회는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눈물을
닦아드리자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면서도 당신을 그렇게 만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기 전에 이미 내가
매순간 심판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질만능주의, 권력남용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약자들과의 대화의 단절,
세월호 참사, 밀양 송전탑, 제주 강정마을, 4대강 사업 등 곳곳을 바라보시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참된 평화를
갈망하며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건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려면
-이기정신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에서 잃었으면 고칠 필요 없다는 게 맞나요? 소 잃고도 외양간은 제대로 고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맞지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처럼 언제든 조심 또 조심해야 되지요.
대형 참사들이 바로
이런 조심 또 조심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세월호가 인천을 떠날 때 하늘에서 보시며 이미 우셨을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려면 최소한, 우선 믿고 가르침 잘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평화의
사람
-인영균신부-
예수님은
오늘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눈물을 흘리십니다.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보이십니다. 예루살렘 도성에서 벌어질 일들을 내다보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이름 그대로 ‘평화의 터전’이었지만 실제로 기원 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철저히 파괴됩니다. 요즘도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 싸움과 죽음의 암울한 소식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습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고 갈등이 없으며 평온하면 그러한 상태가 평화로운 것이지 압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외부에서 오는, 단순히 무기를 들지 않았다는 인간적 차원의 평화를 넘어서는 더 근본적인 어떤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거짓 평화를
주지마라”(규칙 4,25) 했습니다. 평화는 우리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참 평화인지 거짓 평화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마음 안에 평화로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참 평화이신 주님이
오시는 때를 깨닫게 될 때 평화는 온 세상으로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내면에 오시는 주님을 진정 받아들이면 내 안에 도살리고 있는 고집과 이기심과
탐욕의 폭력성이라는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참 평화의 사람입니까?
< 기도의
내용 >
-전삼용신부-
제가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혼자서 힘겹게
사막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너무 탈진하여 더
이상 발을 옮길 힘도 없는데 이번엔 모래 언덕이 나타났습니다.
그만 지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저의 팔을 부축하여 일으켜 주고 저를 어깨로 지탱하며 함께 걸어주었습니다.
다름 아닌 성당에서
함께 봉사하던 여자 청년이었습니다.
깨어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 자매에게 큰
관심이 없었는데도 왜 꿈에 나타났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꿈이었지만 그 자매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매를
마음속으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바로 군대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깊은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억은
제게 기도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깨닫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받으면
고마워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은
사랑으로 변하고 나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듯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드리고 나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솟구치지 않으면 조금은 기도의 방향이 어긋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계속되는 하느님의 환시를 봅니다.
하느님께서 어좌에
앉으셔서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올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하늘과 땅에 어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펴서 구원받을 사람의 이름을 호명할 권한을 지닌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서럽게 웁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살해된
어린양이 앞으로 나옵니다.
피를 흘리고 있지만
당당하게 그 두루마리를 받습니다.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리는데 저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을 들고 있습니다.
그 금 대접에 든
향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라고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과
함께 하늘의 모든 존재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참
성도들의 기도가 어때야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 성도들이란 다름
아닌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셔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그
자체로 우리의 작음과 그분의 크신 은혜를 묵상하여 감사와 사랑이 더욱 커지게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것을
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다운 기도는 우리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비참한 우리들을 당신 죽음으로 구원을 얻게 해주신 그분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미를
드리게 되면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전례,
미사와 같은 모든
시간은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찬미가 우러나게
하는 시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했는데도
평화,
기쁨,
감사,
사랑,
찬미의 정이
솟아나지 않으면 무언가 잘못된 내용으로 그 시간을 채운 것입니다.
본래
‘감사하다(thank)’한 단어는
‘생각하다(think)’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가 되면 ‘묵상’이
됩니다.
따라서 이 묵상은
하면 할수록 감사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감사가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위해 무엇이라도 보답해 드리려 노력하게 될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를 힘을 감사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시간인 것입니다.
나를 보며 우시는
예수님
-기경호신부-
쌀쌀하지만
청명한 하늘이 영혼 한켠을 돌아보도록 초대하는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아 당할 재앙을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결국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된다. 43절부터 ‘그리고’(καὶ)란 접속사가 5번 나오면서 파멸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고 탄식하신다.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평화의 길을 보지 못하는 데 대한 쓰라림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19,44)이었다. 여기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자.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아니 누구인가? 예루살렘은 내 뜻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과 하느님의 얼을 지닌 형제자매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19,37-38) 우리가 세례나 서약을 통하여 하느님께 드린 약속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하며 찬미하는 제자들의 몸짓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말씀을 멀리 하고, 내가 주인인양 착각하며, 다른
이들의 재판관처럼 살아가고, 희망이신 주님을 외면하고 불평불만과 절망 속에 살아가며, 죄에 무감각한 채 살곤 한다.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신 것은
이런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수난을 회상하고, 자기 영혼의 어둠을 바라보며 평생을 눈물에 젖어 살았다. 우리도 죄 많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시는 당신을 보고, 통곡하던 예루살렘 여인들을 보며,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하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먼저 슬퍼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죄이다. 이제 평화를 간직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며, 고통과 시련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견디고, 경직된 모습을 버리고 관대히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예루살렘은
또한 하느님의 선과 얼을 지닌 형제자매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선물 자체로서 예루살렘에 다가가셨다. 그분은 평화
자체로서 자신을 배척하고 죄 중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달려가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을 장터로 바꿔버렸다. 눈물에 젖어 분노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자매들의 얼굴이다. 예수님의 얼이 숨 쉬는 터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 왜 그토록 우리는 형제자매들의
좋은 점을 칭찬하는데 인색한가? 인색한 나의 태도가 바로 주님의 집을 장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한다는 뜻이며, 형제자매들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들 안에 오시는 하느님의 선과 선물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지금 내 영혼은 ‘기도의 집’인가 ‘강도의 소굴’인가?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19,44)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보며 오늘도 주님은 울고 계신다. ‘찾아오신 때’는 구원의 때와 심판의 때를 뜻한다. 곧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은 구원과 심판을 위해 오신다는 뜻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는 바로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나누지 않고, 남의 약점과 결점을 들추고 헐뜯는 사람에게 주님의 오심은 심판을 뜻한다.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은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나는 오늘도 예수님께서 나를 보며 우시도록 할 것인가?
-한상우신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도 평화가 없다면
사라지고 말 한낱 돌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내면의 간절한 그
무엇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평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길을
만들어 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우리의 생생한
실천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평화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끝내
체험되거나 살아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길들입니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길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등불이
되는 희생과 헌신의
또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이웃형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결코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오르지
않습니다.
이념과 정의를
뛰어넘는 십자가가
평화의 원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부모님같은
평화는 우리가 닮아가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삶임을
기억하는 평화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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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