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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영적인 지혜와 계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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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영적인 지혜와 계시
“그 기도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어,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니어도 영감(靈感)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영적인 감각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영감을 받았다.’라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줘서 받은 것이라는 뜻이 있고
신비롭게 영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쁜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영감을 받았다 하지 않고,
뭔가 위에서 뚝 떨어져 받게 된 것 같은데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책 또는 사람으로부터 좋은 영감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좋은 뜻이고 외부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감을 받는 사람과 비교할 때
남들이 받는 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뭔가 잘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돈을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는 것과
영감을 받지 못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에 더 민감합니까?
받아야 할 돈을 못 받은 것은 매우 속상해하지만
영감을 받지 못한 것은 무덤덤하고 둔감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인들을 위해
하느님께 비는데 다른 것이 아닌 성령의 지혜와 계시 주시기를 빌어줍니다.
저는 과거에 특히 북한 돕기 할 때 무엇을 도울지 깊이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 쌀을 보내는 것과 복음을 보내는 것 가운데에 어떤 것을
보내는 것이 그들에게 영적으로 더 선익인지 생각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그래서 제가 협동조합을 하고
식당을 통해 밥 한 끼를 무료 또는 저렴하게 제공하는 일을 하지만
궁극적 목적은 복음 선포이고 그래서 식당 봉사 전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도 오늘도 저희에게 사랑을 가득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이웃과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
같은 맥락으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지혜와 계시를 빌어주는데
이 성령의 지혜와 계시는 물론 이 세상살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천상 여정을 가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지혜와 계시는 갈라티아인들이 갖게 된 희망이 어떤 것인지,
천상에서 받게 될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런 성령의 지혜와 계시가 없으면
우리는 천상에서 받게 될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 모르고
그래서 이 상속을 희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젊을 때 그러니까 먹고 살아야 하는 것에 급급한 젊을 때는
천상 상속이니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그래서 그런 것을 희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지금도 우리가 희망하는 상속이 세속적이라면
이렇게 불행한 노년과 이렇게 불행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돌아보는 오늘 저이고 여러분이기를 바라고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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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한국인에게 지금 삶이 행복하냐고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까요? 아니면 “불행하다”라고 답할까요? 행복하다고 답변할 것 같지만, 불행하다고 답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행하다는 사람에게 왜 불행한지를 물어보면 다양한 이유로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타인과의 비교 등의 자기 불행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먼저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품 설문 조사를 보면, “이 제품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십니까?”라는 질문이 꼭 나옵니다. 이 질문을 받고서 어떻게 대답할까요? 대부분 좋은 점과 칭찬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나서는 자기가 구매한 제품을 좋아하게 된다고 하네요. 단순히 제품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것보다, 그 제품을 좋아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행복을 떠올리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행복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불행을 떠올리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불행만 생각날 것입니다. 즉, 무엇을 먼저 생각하려고 하느냐가 자기 생각을 채우게 됩니다.
행복하길 원하는 사람은 행복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불행을 생각하면 그 순간 행복은 전혀 떠올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잃으면 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 공감 가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억지로라도 자기 생각을 자기가 원하는 상태에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하길 원한다면 자주 행복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 증인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증인이 되는 것이 마냥 편하고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사람은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많은 걱정과 두려움을 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하면 본인의 불행만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보호에 있다는 굳은 믿음과 함께한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걱정 대신 기쁨을 갖게 될 것이며, 불행보다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보호 아래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명언: 아주 작은 것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자신의 삶을 매 순간 감사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때 찾아온다(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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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 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초래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항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는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어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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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고 인사를 하면 어색한 분위기에 빨리 적응하게 됩니다. 먼저 자기를 알리면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역시, ‘믿는 사람은 달라!’ 라는 의식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신앙에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식당에서 보면, 식사 전 기도를 하지 못하거나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귀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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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계란이 먼저입니까?’ 생물학적으로는 밝힐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 질문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도 가끔 합니다.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 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순간 당황할 것입니다. 엄마가 곁에 있으면 엄마가 좋다고 할 수 있고, 아빠와 함께 있으면 아빠가 좋다고 할 수 있고, 엄마와 아빠가 같이 있으면 엄마와 아빠 모두 좋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법’이라는 사고에 익숙해 있습니다. 낮과 밤이 있고,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가 있고, 건강한 이와 아픈 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사물을 이해하기 쉽고, 정의 내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분법적인 사고는 나와 상대를 가를 수 있고, 적과 아군을 나눌 수 있고, 때로 분열과 갈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병원에 두 명의 환자가 있었습니다. 두 명의 환자는 모두 현대의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힘든 질병을 얻었습니다. 한 명은 ‘에이즈’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말기 암’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달랐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환자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그런 나에게 벌을 주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환자는 세상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하루하루가 근심과 걱정이었고, 사람들을 피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가둬둔 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동안 건강을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암이란 병이 생겼기 때문에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환하게 웃었고, 자신보다 더 아픈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편안하게 삶을 정리하였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년 전의 일입니다. 칠레의 산호세 광산에서 구조작업이 있었습니다. 600미터 깊이의 지하 갱도에서 69일간 갇혀있던 33명의 광부가 구조되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어두운 지하에서 구조된 광부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칠레의 정부와 국민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구조되는 광부들을 환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구조된 광부의 말이 제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 ‘우리는 33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34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굶주림을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은 어두운 갱도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69일은 마치 하룻밤과도 같을 수 있었습니다. 광부들은 어두운 지하에서 구조될 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저는 나중에 올라가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지하에서 69일을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 주실 것이다.” 칠레의 광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먼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화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바로 우리들의 변화입니다. 고독과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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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말하면 주님께서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말씀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곳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늘나라 문 앞에 섰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주님을 아시오?’라고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네! 저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말고요.’
잘 몰라도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물론 천사들이 우리의 그런 말에 속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누군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번 만난 사람을 우리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혹은 몇 번의 식사를 했던 사람을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알려면 자주 만나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렇게 함께 지내는 시간이 다른 누구보다 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제야 우리는 조금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과연 주님을 알고 있을까요? 그분을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나요?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듣고 기억하려 하나요? 그분 삶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으려고 노력하나요?
이런 노력 없이,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없이 우리는 과연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중에 주님을 안다고 말하려면 말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문 앞에서 당당하게 ‘저는 주님을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그때 우리에게 ‘당신이 주님을 아는 것을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인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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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이라도….
저는 몇 개의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형, 1종 보통, 2종 소형, 수상 동력 면허….
대형 면허를 준비하던 때입니다.
버스 운전을 연습해야 해서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집에 버스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와 같은 시간에 거의 매일 학원에 나와서 연습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안면이 익어갈 때쯤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학생은 왜 대형 면허를 따려 하나요? 관광버스?’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경찰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준비 중입니다. 대형면허가 있으면 2점의 가산점이 있거든요. 2점은 큰 점수입니다.’
아직도 그 학생의 당찬 대답이 기억납니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얻으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 말입니다.
저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하늘나라 문턱을 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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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기도뿐이다
“기도와 성령, 회개와 겸손, 사랑과 지혜”
무려 24년전 오래전 “가을” 시가 이렇게 오늘 강론에 인용되리라곤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중년 넘어
마음 허전하다, 공허하다, 외롭다, 쓸쓸하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상이다
자연스런 일이다
봄의 환상, 여름의 정열 걷혔다는 것이다
마음이 비워져
순수하고 진실해졌다는 것이다
너그럽고 넉넉해졌다는 것이다
인생가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마음의 빈 뜨락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단풍 바라보며
여유롭게 거닐 일이다
향기롭게 살 일이다
가을공부에 전념하고 싶다”<2000.10.2.>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성월, 10월 지금은 묵주기도성월, 11월은 위령성월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공부의 계절이고 수확의 계절입니다. 인생가을이라면 특히 기도와 공부에 전념하며 풍요한 영적수확을 꿈꿔야 할 것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입니다. 모든 불행과 재앙이 무지로 인해 자초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무지의 그림자가 곳곳에 넘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이런 용기있는 고백자는 무지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반면,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런 비겁한 자는 그대로 무지의 두려움에 포획된 자들입니다. 그대로 우리 보통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안다고 용기있게 증언하는 이들이야말로 무지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유인들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의 주님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무지의 악이 얼마나 견고한지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이는 회개의 가능성이 있고 용서도 가능하겠지만 진리이신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바로 진리이신 성령께 자신을 닫아버린 자는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집요하게 진리이신 예수님께 스스로 닫아버린 완고하고 완악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 대상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안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진리이신 성령께 활짝 개방하는 것이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첩경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단락 말씀은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이 무지의 두려움이나 걱정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이 희망입니다. 성령의 지혜요 성령의 용기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개방을 뜻합니다. 바로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주님 향해 영혼을 활짝 개방할 때 성령의 선물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요, 이어 회개와 겸손, 사랑과 지혜가 뒤따라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점차적인 해방입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오늘 복음에 대한 근본처방이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주옥같은 에페소 서간의 기도가 순교의 죽음을 앞둔 수인 처지의 바오로가 로마에서 썼다는 것입니다. 에페소 신자들의 믿음과 사랑을 전해듣고 이들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감사하며 이들의 깨달음을 위해 쓴 기도입니다. 참으로 풍부한 내용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바오로의 깊은 신앙을 엿볼수 있는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 긴 기도가 한문장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바오로 사도야말로 그리스도의 박사요,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신 것입니다. 옥중의 사도 바오로의 영성이 온 우주를 닮고 있는 듯 참으로 깊고 신비롭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교회론은 얼마나 심오한지요!
“하느님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저절로 구원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처방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에 있음을 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 날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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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당신이
모든 사람들의
눈길 밖에서
외로워할 때에
홀로라도 따스한
눈길 보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당신이
뭇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에
비틀거릴 때에
그 사람들 바로 앞에서
당신을 품는 것이
사랑입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목숨을 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일 때
당신을 안다고
고백하며 죽는 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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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8-10)
순수한 신앙의 힘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림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다 고 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자를 모른다고 하시고 당신을 고백하는 자를 안다고 하십니다. 복음이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하고 그럴 수 없지요. 다 확실하거나 다 진실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죄가 없다면, 그분을 고백한 이들은 덕의 보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승리한 이들에게 왕관을 씌워 주신다면, 패배한 자들에게는 벌을 주셔야 합니다. 복음이 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혜도 입지 못합니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복음 때문에 순교한 이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리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순교자들의 고귀함을 더럽히지 맙시다 그들의 영광과 왕관을 망가뜨리지 맙시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합니다. 자신의 희망과 믿음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인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키프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자신의 어둠을 알아야만 하느님의 어둠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무명씨임을 알아야만 이름 붙여지지 않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참된 안식은 이 어둠 속에 있을 것이다. 존재의 종점은 어둠이거나, 숨어 있어서 알 수 없는 신성이다. 숨어 있어서 알 수 없는 신 성은 빛나되 “어둠이 이해하지 못하는”(요한 1,5 참조) 빛이다. 하느님의 빛은 어둠을 깨뜨리지 않는 빛이다. 혹자는 하느님의 빛은 따스하지만 광채를 발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를 받은 모든 것은 거기에서 순전한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하느님의 어둠은 빛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든 피조물이든 간에 모든 생명의 뿌리에 닿아 있는 역설이다. 하느님의 어두운 면에 대하여 더 말해 보자. 첫째로, 하느님은 완전히 어둡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어둠의 배후에 있는 어둠이다. 위-디오니시우스가 하느님을 가리켜 말한 대로, 하느님은 “본질을 뛰어넘는” 어둠”이다. 하느님의 어둠은 신비의 어둠이다. “무엇이 종점인가? 영원한 신성의 어둠의 신비가 그 종점이다. 그것은 과거에도 알려진 적이 없고, 지금도 알려지지 않으며,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머무른다. 그만큼 신성의 신비는 깊다. “하느님은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안에 둥지를 튼다. 영원한 아버지의 빛은 안에서 끊임없이 반짝인다. 그 빛은 어둠이 이해하지 못하는 빛이다.”(26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의 하느님 신앙은 ‘혼님' 에 대한 근원적 신앙이었기에, ‘혼' 이 지닌 무제약적 포괄자로서의 초월성, 무궁한 신령성 및 치세이화(治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하는 현실 창조 지향성으로 인하여 세계 종교들을 수용하고 토착화하는 모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면 특히 풍류도의 ‘혼’ 사상이 한국 종교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살펴 보자.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한민족이 불교를 접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이다. 고구려(372년), 백제 (384년) , 신라(527년)에 각각 불교가 공식으로 전해진 이후 1,600여 년 동안 불교는 한민족의 정신 세계, 곧 종교, 철학, 문학, 예술, 건축, 의학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1,600여 년 동안 한민족은 다양한 불교 전통을 꽃피웠지만, 특히 "한국인에게 선호된 것은 대승 불교의 가르침이었다. 특히 화엄 사상과 선불교는 한국 불교의 중심적 테마였다”는 불교학자 정병조의 말에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 불교의 특징 중 모든 것을 포용하고 초월히는 ‘하나’ 를 지향하는 일승(一乘) 정신, 경전 공부와 마음 닦음, 명상을 병행함으로써 참 진리 체득에 이르려는 교신(敎禪) 병행의 정신, 개인의 해탈만이 아니라 모두 더불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실천적 이타행 보살 정신은 한국 불교의 3대 특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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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예전 한참 잘 나갈 때, 처음 보는 분이 저를 잘 안다고 하기에, 저 자신도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데 ‘어떻게 저를 그렇게 잘 아십니까?’하고 불편한 내색을 거침없이 표현한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기준이 무엇이기에 처음 대면한 저를 보고 잘 안다, 고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처세술처럼 들리기에 이런 분을 만나면 저는 사실 힘들고 불편합니다. 논어 「안연」 편에 보면, 번지가 지혜에 대해서 공자께 묻자, 공자께서 『지혜란 사람을(=타인을) 아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樊遲問知 子曰知人) 그런데 공자께서 말씀하신 지혜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람을 아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를 잘 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얼마나 잘 알아야 타인 앞에서 그 사람을 참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타인을 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먼저 ‘내가 아는 것, 내가 알 수 있는 것,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는 곧 만나서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느끼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상대방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나이, 학교, 고향, 직업 등등)을 알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좀 더 세부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면서 관심사를 직접 물으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입니다. 이는 흔히 유유상종한다는 표현처럼 비슷한 가치(=신앙 등)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 쉽습니다. 비슷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관심사가 같기에, 우선 말이 잘 통하고 친근감이 들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2,8~9)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누군가가 나를 참으로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바로 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안다고 증언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신에 관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 앎이란 인격적 관계의 앎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앎이 깊어지고 넓어지면 그 관계의 깊이와 넓이도 그만큼 더 확장됩니다. 이런 관계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서 관계의 친밀감을 자연스럽게 타인들에게 표출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심화되고 친밀해지면 결국 예수님의 꿈이 나의 꿈이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을 살면서 실현하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 또한 내가 실현해야 할 최우선적인 가치이자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인격적 관계의 앎에서 기회가 좋든 나쁘든, 평온하든 힘들든 상관없이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고백이자 증언(=순교 martyr: 증인, 증거자)이지만,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모른다고 증언하는 것’은 배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성령을 따라 살려는 신앙인의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며 바른 태도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12,11.12)라고 강조하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도 성령의 도움이지만,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안다고 증언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생각들을 내려놓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내주하시고 활동하실 수 있도록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시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 (요15,26.27참조)
%%% 오늘은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 대축일이지만, 여러분 대다수는 본당에서 연중 28주일 토요일 미사를 드리기에, 평일 복음 묵상 글을 보냅니다. 기도 중에 저희 수도회를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제가 이 기간, 이곳 오상영성원을 찾아온 것은 저의 인생의 안내자이자 저의 영적 멘토였던 박 도세유스티노 신부님의 16주기가 바로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제1저녁 기도와 파티가 있어서 미리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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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이웃에게 예수님 증언하는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024-10-18 ㅣNo.176882
살면서 이런 생각을 가끔 한다.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하지만? 말만 신자이지 예수님과는 정녕 거리가 먼 이는 아닐지?’ 사실 믿는 우리는 자주 만나는 이에게 먼저 주님 증언하는 삶을 살자. 그들에게 풍기는 예수님 향기만이 그들에게 그분을 향해 머무르게 할 것이기에. 무심코 드러내는 말과 행동에서 그분 증언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믿음의 향기’이리라. 그건 신앙생활의 기간과 교회에서 그 어떤 위치에 달려 있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천사들 앞에서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나도 하느님 앞에서 모른다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는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 모독하는 이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란다. 성령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이다. 하느님 자신이시기에 사랑, 진리, 생명, 평화이신 것이다. 그러니 성령 모독은 곧 하느님 모독으로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증언하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게 없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신 바로 그 모습으로 필요시에 성령을 보내시어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다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할 말을 성령을 통해서 다 알려 주실 것이니까. 그러니 신앙생활에서, 세상의 위협에 그리 크게 걱정이 필요 없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는 없을 게다. 그러기에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회개를 거부하는 것이리라. 하느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들을 용서하신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고백한 신앙을 마음속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용감하게 증언할 수가 있어야만 할 게다.
사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전 삶이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일 게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로 하느님 자녀가 되고 교회의 울타리 안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그분과의 인연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리라.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랑이고 그분과의 만남의 조건이리라.
그러니 자신의 내면 전체가 예수님으로 가득 찬 이는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낸다. 그 향기는 세상의 풍파와 박해 속에서도 더욱 진하게 뿜어져 나올 것이고,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마저 바치는 순교의 그 빛나는 영광의 장소까지 계속될 것이다. 특히 신앙의 증언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삶의 결단이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리라.
따라서 내 삶의 방향과 정체성이 온전히 정립되어 있을 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게다. 내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알아서 답을 다 주시기에. 신앙을 일깨우는 증언은 삶 자체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일 때에야 더욱 힘을 발휘하리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믿음을 가진 이라는 확신만 준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을 증언할 게다. 믿음의 증언으로 참된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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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9.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루카 12,11) 끌려가게 된다면 미리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위험하고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당’을 말하는 것은, 아직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전에도 유다인 출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도 가셨고 예루살렘 성전에도 가셨으며,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회당과는 분리되고 배척을 받습니다.
로마의 박해도 곧 다가옵니다.
복음서가 작성되고 나서 이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회는 박해를 받았고,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순교자들을 기억하여 봅니다. 그들이 잡혀갈 때,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였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순교를 각오한 것이었고,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고자 할 말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도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지극히 단순하게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한다면, 그것은 순교자들만큼 우리의 신앙이 절실하지 않으며 우리가 목숨을 보전하고자 전전긍긍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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