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시평 제256호 (2011년 8월 30일)
새로운 일본총리와 한일관계
최영호 (영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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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의 총리직 사임에 따라 어제 29일 민주당 대표 선거가 치러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현 재무상이 최종적으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곧 바로 새로운 내각 진용과 주요 당직자 인선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 30일 열리는 중의원과 참의원의 총리 지명 선거를 거쳐 제95대 62번째 총리에 취임한다. 그의 임기는 간 나오토 총리의 남은 임기인 내년 9월까지이다.
5명이 출마한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는 첫 번째 투표에서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현 경제산업상이 143표, 노다 102표,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전 외상 74표, 가노 미치히코(鹿野道彦) 농림수산상 52표,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전 국토교통상 24표를 얻어 5명 모두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했다. 이에 따라 가이에다와 노다에 의한 결선 투표를 치러야 했다. 제1차 투표에서는 가이에다가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간사장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로부터 전면적인 지지를 받는 가운데 가장 많은 표를 획득했다. 하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177표를 얻는데 그쳐 215표를 얻은 노다에게 패배했다. 오자와가 당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이를 우려하는 중간파 의원들이 노다에게 표를 몰아준 결과였다. 지난해 9월의 경선에서 간 나오토가 206: 200으로 가까스로 오자와 이치로에게 승리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선거에서는 반(反) 오자와 세력의 결집력이 더욱 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노다는 1957년 5월생으로 치바현(千葉縣) 후나바시시(船橋市)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육상자위대(육군) 대원이었다. 1976년 후나바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0년에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마쓰시다(松下)정경숙 제1기생으로 졸업했고 1987년 치바현 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시 최연소 당선을 기록했다. 1992년 ‘일본신당’ 결성에 참가하여 중앙정계에 입문했고 이듬해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일본신당’ 부대표 간사를 맡았다. 1994년 '일본신당‘이 해체되면서 ’신진당’ 결성에 참여하여 1996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2000년 새로 결집된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아 중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보수중도 세력과 중도좌파 세력이 혼재된 민주당에서 그는 ‘보수중도’ 노선을 견지했으며 하토야마 유키오와 간 나오토에 의한 Two Top 체제를 대신할 신세대 세력의 선봉 주자로 나섰다. 2002년에 당대표 선거에 신세대 통일 후보로 입후보했다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는 이 선거전을 일본 사회에 자신의 인지도를 결정적으로 높이는 계기로 만들었다. 그는 민주당에서 총무국장, 국회대책위원장을 역임했고, 하토야마 내각에서 재무성 부상, 간 내각에서 재무상이 되어 국가정책을 담당했다.
그의 총리 취임에 따른 한일관계를 전망해 볼 때, 재무상으로서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에 적극적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근본적인 협조 우호관계를 그르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치가로서 혹은 정책결정자로서 풍부한 경험을 갖지 못한 점이 자칫 대외정책에서 신중하지 못한 행태를 가져와 일시적으로 관계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온후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때때로 보수적인 색깔을 드러냈던 그의 정치적 성향으로 볼 때, 국내정치에서 대외정책을 둘러싼 야당과의 융화는 이루어지기 쉬운 반면에, 하토야마와 간 내각이 보여준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배려를 그에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역사인식 문제나 독도영유권 문제에서 주변국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한국과 중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소지가 많다.
과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을 때, 민주당 내부에서는 A급 전범 합사(合祀)를 이유로 하여 이를 비판하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노다는 A급 전범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전쟁범죄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야스쿠니 참배의 옳고 그름은 국제정치적 이해(利害)에 따른 것이지, 잘못된 A급 전범 이해(理解)에 기초한 시비론은 A급 전범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 침해이며, 인권과 국가의 명예와 관련되는 문제”라고 주장하며 당내에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그 밖에도 그는 ‘남경대학살 20만명설’을 부인하는 한편,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지속적인 대륙침략을 비판하는 ‘15년 침략전쟁설’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내 보수세력의 견해에 맞추어 주변국과의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보여 오고 있다. 2004년에 중국인 활동가 7명이 센카쿠제도(尖閣諸島)에 상륙했을 때, 그는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확인하는 국회결의를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같은 해 중국정부가 오키노도리(沖ノ鳥)섬에 대해 일본의 영유권은 인정하면서도 바위에 지나지 않는 곳을 배타적경제수역으로 설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 일이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남사제도(Spratly Islands)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중국이 그런 주장을 펼칠 입장이 아니라고 일축한 바 있다. 이제까지 다케시마(竹島)에 대해서는 그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된 일이 없다. 비록 영토의 실효적 지배를 중시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혀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면 그는 서슴치 않고 일본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재일한국인을 포함한 재일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 오고 있다. 2009년 민주당이 집권한 직후 지방참정권 법안 상정의 움직임이 나타나자, 그는 법안 제출을 둘러싸고 당내 의견이 분분해지는 것을 우려하고 의원입법이든 정부입법이든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참정권 부여 대신에 외국인에 대한 귀화 수속을 간략하게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노다 내각에 들어서서도 일본정부의 대북정책에서 근본적 변화는 없을 것이다. 국민 정서를 감안하여 일본인 ‘납치’ 문제를 최우선으로 제시하면서도 핵개발 문제와 국교정상화 문제를 포괄적으로 풀어가겠다는 입장을 견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과거 자민당 정권에서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정책기조가 되고 있다. 다만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노다 내각에 들어 기존의 지나친 대북제재가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 민주당 외교안보조사회는 보고서를 통해 과도한 대북 경제제재가 제재 효과를 상실한 반면에 오히려 북한과 중국 관계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했다고 하며 대북정책 수정을 요구하는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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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시평] 지난 호 자료는 한일민족문제학회 홈페이지 www.kjnation.org<한일관계시평> 또는 최영호 홈페이지 www.freechal.com/choiygho<한일시평>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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