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양서원 서 배위 류중엄 파산 손홍량 정평공의 외외손자.
성명: 류중엄 Ryu Jungeom 柳仲淹
이칭 별칭: 경문(景文),희범(希范),파산(巴山),유중엄.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문(景文)·희범(希范), 호는 파산(巴山). 할아버지는 류자온(柳子溫)이고, 생부는 참봉을 지낸 류공석(柳公奭)이며, 어머니는 권응삼(權應參)의 딸이다.
후사가 없는 류공계(柳公季)에게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
부인은 이문량(李文樑)의 손녀이다.
활동 사항:
류중엄(柳仲淹; 1538∼1571) 향년 33세.
조선 중기의 학자 류중엄柳仲淹의 자는 경문(景文)·희범(希范), 호는 파산(巴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안동(安東)출생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공석(公奭)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응삼(應參)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의 뜻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학문과 덕행이 남달라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에 비유되었다.
안동 일직의 타양서원(陀陽書院),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류중엄(柳仲淹, 1538~1571)은 류운룡(柳雲龍)·류성룡(柳成龍)·황준량(黃俊良)·오건(吳健) 등과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문 선배들이 그를 두고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타고난 성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하므로 공자 문하의 안자(顔子, 안회)라 일컬었다.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파산일고(巴山逸稿)』 1책이 있다.
이황과 주고받은 서찰 30여 통을 수록한 「사문수찰(師門手札)」에는 경전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방법과 상례 등 예절에 대하여 질의 응답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상훈과 추모:
안동에 있는 타양서원(陁陽書院)과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 되었다.
파산일고 목판: 사진 생략.
파산일고는 조선 중기의 학자 류중엄의 시문집으로 불분권 1책의 목판본이다.
1808년 종 후손 류이좌가 편집 간행하였다.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20.
제작 일자: 2009.9.18.
제작: ㈜여금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저작권: 한국국학진흥원.
류중엄(柳仲淹;1538-1571)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자는 경문(景文) 또는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巴山)이다.
안동 하회에서 생부 류공석(柳公奭)과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막내 숙부인 류공계(柳公季)에게 입후되었으며 조부는 류자온(柳子溫)이다.
류중엄은 사촌 형인 입암(立巖) 류중영의 두 아들 겸암(謙菴) 류운룡, 서애(西厓) 류성룡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모두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1570년(선조 3년) 겨울에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12월 25일에 류중엄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4세였다.
사후 타양서원(陀陽書院)과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류중엄의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증손이고 이문량(李文樑)의 손녀이며, 진사 이학수(李鶴壽)의 딸이다.
류중엄은 류학룡(柳學龍)·류경룡(柳慶龍)·류종룡(柳從龍) 등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류학룡에게 아들이 없어 둘째인 류경룡의 아들 류담이 그 대를 이었다.
1564년(명종 19) 종형(從兄) 입암공(立巖公)이 황해도 감사(監事)가 된 그해 겨울에 겸암, 서애 두 사람과 함께 해주(海州)의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몇 달 동안 공부를 하였다.
그 해 청량산(淸凉山) 보현암(普賢庵)에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여러 제자들과 같이 산에 들어와서 유람할 때 맞아 모시고 곳에 따라 시(詩)를 주고받았는데, 퇴계는 류중엄의 시에 차운해 “아름답다! 그대의 침착한 성질과 사치를 멀리함이여. 나의 배움은 흡사 뱀의 말을 붙임이나 다름없구나. 절 방을 찾아와서 저녁별이 빛나도록 대화하게 되니, 창 밖에 꽃 없음을 혐의(嫌疑) 적게 여기지 않노라"라고 했다.
이를 통해 그에 대한 퇴계 이황의 기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류중엄은 한강(寒岡) 정구와 교유했는데, 그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왔을 때 올린 제문에서 “공의 깨끗한 품행과 침착한 자질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보기 드물었다”고 하였고, “상종(相從)하여 갈고 닦는 공부에 참으로 존경하는 친구로 대하였고, 평생에 기대함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훗날에 원대한 뜻을 가짐은 본래 하류 친구는 알 수 없는 바였다”고 했다.
류중엄이 세상을 떠나자 겸암(謙菴) 류운룡은 송암(松巖) 권호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르길 “희범 숙(叔)이 전월 25일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집 가화의 참혹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재주를 품고 기구한 운명에 부딪쳤으며 명이 또 길지 못하니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고 하면서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요절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류중엄은 타고난 성품이 아름답고 실천의 학문에 전심(專心)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는 데 뜻이 독실하고 배움에 열심이어서 퇴계의 기대가 컸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약관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여 일 년 복을 마친 뒤에도 상복을 벗지 않으려고 하자 스승인 퇴계가 “선왕이 제정한 예를 어길 수 없다” 하자 드디어 상복을 벗었다.
또한 퇴계학파의 선배들은 그를 두고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천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하므로 공자 문하의 안자라 일컬었다.
남긴 저작으로는 그의 글을 모은 『파산일고(巴山逸稿)』가 있다.
파산정:
겸암과 서애의 종숙인 파산 류중엄이 지은 정사이다.
모두 4칸으로 좌우가 방, 중간이 마루다. 파산은 1564년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후학을 키우려는 의지를 갖고 스승인 퇴계 선생에게 물었는데, “형편에 맞게 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를 애석하게 여겨 1960년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파산정이라고 이름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정자 앞을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파(巴)자를 닮았다고 하여 당호로 삼은 데서 연유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아주 소박하다.
하회마을을 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 위에 건립되어 화천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풍천 면소재지에서 광덕으로 가다가 낙동강과 마주치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파산정이 낙동강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그 위용을 드러낸다.
류중엄(1538∼1571)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자는 경문(景文), 희범( 이며 호는 파산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남치리와 동문수학하였다.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문(景文)·희범(希范), 호는 파산(巴山). 할아버지는 류자온(柳子溫)이고, 생부는 참봉을 지낸 류공석(柳公奭)이며, 어머니는 권응삼(權應參)의 딸이다.
후사가 없는 류공계(柳公季)에게 입양되어 대를 이었다.
부인은 이문량(李文樑)의 손녀이다.
[활동사항]
류중엄(柳仲淹, 1538~1571)은 류운룡(柳雲龍)·류성룡(柳成龍)·황준량(黃俊良)·오건(吳健) 등과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문 선배들이 그를 두고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타고난 성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하므로 공자 문하의 안자(顔子, 안회)라 일컬었다.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파산일고(巴山逸稿)』 1책이 있다.
이황과 주고받은 서찰 30여 통을 수록한 「사문수찰(師門手札)」에는 경전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방법과 상례 등 예절에 대하여 질의 응답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상훈과 추모]
안동에 있는 타양서원(陀陽書院)과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류중엄 파산의 묘소: 경북 안동시 서후면 능골.
2025.4.8. 화. 타양서원 향사 후에 방문 예정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