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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집사 선택과 말씀운동
행 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1-7 / [일곱 집사를 선택하다] 그런데 신도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불만의 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다. 헬라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유대인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식량 배급을 받을 때 자기네 과부들이 히브리 말을 쓰는 과부들만큼 많이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였다. 2) 열두 사도가 모든 신도들을 불러모아 놓고 말하였다. `우리가 설교하는 데 써야 할 시간을 식량 분배하는 일에 빼앗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3)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 주위를 잘 둘러보셔서 현명하고 성령이 충만하여 이 일을 맡기기에 모두가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 일곱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4) 그래야 우리도 기도와 설교와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온 총회는 이 제안을 타당하다고 여기고 그 누구보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안디옥 사람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였다가 다시 그리스도인이 된 니골라, 6) 이렇게 일곱 사람을 선출하였다. 그들이 앞으로 나오자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손을 얹어 축복하였다. 7) 하나님의 말씀은 점차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의 수효가 크게 늘어났다. 유대교 대제사장들도 많이 개종해 왔다.
교회 내 구제 문제로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들 간의 갈등이 발생합니다. 사도들은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일곱 집사를 뽑아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합니다.
신자들의 원망(1)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도를 통해 제자가 더 많아지자 동시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교회 내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회당 예배에 참석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사람들은 주로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타인입니다. 소통의 문제도 있었고 팔레스타인에 있던 교회였기에 구제대상을 파악하는 일에 히브리파의 과부들 중심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신의 과부들이 구제에 빠지는 일이 발생하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과부를 돌보지 않는 것은 그 과부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커다란 수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연합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사도들의 결정(2-4) 사도들이 구제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은 결국 사도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사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진 것은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해서가 아니라, 늘어난 제자들 때문에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자신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접대를 나누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구제를 다른 일꾼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전념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나 다른 일꾼들의 구제 역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자리와 역할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곱 일꾼 선출(5-7) 모든 제자가 일곱 명의 일꾼을 뽑았습니다. 뽑힌 일곱 사람은 대부분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아마도 헬라파 과부둘이 구제에서 빠지는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들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자리와 영향력을 생각하지 않고 당면의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선발된 일곱 집사들은 구제 외에 복음 전파에도 큰일을 담당했습니다. 특별히 스데반은 그의 순교를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다른 지역으로 뻗어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빌립은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복음이 세계로 확장되는데 기여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저마다의 맡겨진 일에 충성할 때에 교회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말씀과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 말대로 살고 있는지 고민해야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가 병원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며 쓰레기를 치우고 잡무를 처리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신학대학을 나온 부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제쳐놓고서 배워본 적도 없고 전문적이지도 않은 수많은 잡무에 허덕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전문가를 택하여 이 일을 맡기고, 그들은 사도들처럼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써야 합니다. 그들에게 맡겨진 구역과 영혼들이 있는 한…
잡무를 배우든, 사람 살리는 방법을 배우든, 그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훈련받은 대로 사역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처음 세운 일꾼들
삼상 16:6-13, 행 6:1-7, 마 25:31-46 / 인명진 목사
의사요 심리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인 스캇 팩은 그의 대표작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보다 마음의 태도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재능이나 환경보다도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문제를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바른 사람은 행복을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행복한 인생=문제없는 인생이라는 공식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대표적인 오해는 행복한 교회=문제없는 교회라는 공식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만나는 믿음의 인물들 중에 문제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 닦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방주를 만들어서 새 세계를 시작했던 노아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주 비겁한 인간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요 해방의 영도자 모세는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 살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한 파렴치한입니다. 한결 같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손에 들려져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결코 문제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산적한 문제 앞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는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와 시각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 없는 문제까지 만들어서 인생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교회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부르신 교회지만 문제없는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눈 닦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처음 세워졌던 예루살렘교회도, 이방선교를 처음 시작했던 안디옥교회도, 소아시아의 선교 중심지 에베소교회도, 주님을 열렬하게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없듯이 문제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미국은 청교도 신앙 위에 세워진 국가입니다. 그런데 나라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울 때마다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다는 것이지요.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고 영적으로 해결할 줄 알았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2백여 년의 짧은 역사 가운데 크게 4차례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중에서도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 대각성운동은 1850년대에 일어난 3차 대각성운동입니다. 남북전쟁으로 얼룩진 상처와 폐허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했습니다. 이 3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어난 그것도 주일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적갱신운동이었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인물이 디엘 무디 선생입니다. 그는 안수 받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디 선생이라 말합니다. 그는 평신도로써 미국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가 집회를 열고 간 도시마다 YMCA가 생겨났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YMCA가 아니라 청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순수 선교회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지요. 이 YMCA운동에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우리나라에 목사, 의사, 간호사, 선교사로 들어와서 엄청난 헌신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젊은이 한 명이 무디 선생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는 무디 선생에게 다짜고짜로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그 동안 교회를 옮긴 것이 벌써 세 번째인데, 지금 교회도 문제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선생이 말합니다. “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한 군데 알고 있기는 한데 당신한테 추천해 주지는 못하겠소!”했습니다. 젊은이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해하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왜요?” 무디 선생은 답변합니다.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날부터 그 교회는 완전함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여러분 교회의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은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는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더 큰 문제를 양산해 낼뿐입니다.
교회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성장하고 문제와 함께 성숙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만나는 교회, 최초로 세워진 교회, 역사상 가장 좋았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지만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시작될 수도 없었고, 박해를 이겨낼 수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넘쳐 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이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냥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둘로 갈라질 위기 앞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기에 이런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전한 교회, 성숙한 교회로 단정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없이 자라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란 성령을 받았다고 갑자기 눈덩이처럼 커질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연단되어지고, 자신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도 성령을 충만히 받기만 하면 그 순간 콩나물 자라듯 믿음이 자라나는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야기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개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한 계층이 구제에서 소외되면서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갈등이 심각하여 교회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질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때 교회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거나 확대시키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그 문제를 효율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원칙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해 나가면서 문제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관점입니다. 어떤 성도라도 또 어떤 교회의 목회자라도 자신이 직접 몸담아 섬겨 나가고 있는 교회가 완전하기를 바라고, 문제없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는 천사도 아니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섬겨도 흠과 티가 있고, 아무리 잘 믿어도 우리에겐 언제든지 많은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고 예루살렘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약 2년도 못되어서 벌써 교회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산 증인들이 있는 교회요,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사로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려고 했던 바로 그 교회요, 사도들이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교회, 교회 중에 가장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교회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모인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이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고, 믿음으로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점에서 본받아야 할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에 어떤 문제점이 생겼습니까?
1. 구제문제로 서로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교하는 문제로 교회가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배하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히브리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는데, 헬라파 사람들은 늘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주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사회복지인데, 이것은 분배정의 문제입니다. 콩 한쪽을 잘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통째로 먹고, 어떤 사람은 콩가루도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원망했습니다. 이 일로 교회 안에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갈라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대개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조건이 비슷한 사람끼리 혹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칩니다. 히브리파 사람들과 헬라파 사람들이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주류 히브리파와 비주류 헬라파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들의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날마다 믿는 사람이 더해가는 교회였는데 분배 문제로 말미암아 교회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도 보면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돕기 위해 엄청난 구호물자를 보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를 공부할 때 보니 한국에서 필요한 물자가 10개라는 선교보고서가 올라오면 저들은 중간에 떼먹을 것까지 생각해서 12개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는 교회에서 분배를 잘못하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50년 전의 일을 들먹이면서 6.25 구호물자를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차지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불평이 단순히 배급 문제에서 그치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 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되었고, 성도들 서로 간에 미움이 커져갔다는 점입니다. 아군이 적군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자들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아군들끼리 전투를 벌일 지경까지 갔습니다. 더 이상 교회가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것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회가 매력적인 곳도 아니요,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넘쳐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곳이 되고 만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2. 문제점은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만 행했습니다.
구제를 하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구제와 봉사를 위해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내적인 징표는 말씀과 예배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외적인 증거는 구제나 선한 증거를 통해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선교와 구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결코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봉사하게 하는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교회는 교회다운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말씀 전하는 것보다 구제가 우선되다보니 교회에 심각한 문제점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꾸만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싶고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자꾸만 받고 싶어집니다. 나중에는 섭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점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했습니까? 사람이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꾼을 세웠습니다. 구제를 전담할 일곱의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처음 세운 일꾼들입니다. 교회가 처음 세운 일꾼은 그냥 자리를 준 것 아닙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준 직분도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 하라고 세운 사람들도 아닙니다. 구제를 전담하기 위해서, 선교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선교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꾼을 세우면서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현장을 잃어버린 직분, 섬김을 잃어버린 직분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갈릴리교회는 처음 세운 일꾼처럼 선교의 현장에서 섬기는 사람을 찾아 세우려는 것입니다. 몸을 드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웠습니까?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도대체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는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쉰 목소리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체험을 날마다 순간마다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영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교회 직분자들 중에 자기 고집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 공간도 없고, 또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과 반드시 충돌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낮추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이지 않고, 자기 잘못이 잘 보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의 잘못은 크게 보이고, 자기 잘못이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임재의식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허물이 먼저 보이는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구멍이 보이면 자기 몸으로 그것을 막는 사람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지혜로운 개인을 뽑았다기보다는 교회의 선택이 지혜로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일곱 집사로 뽑혀진 사람들을 보면 히브리 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일곱 명 모두 가 헬라 사람이거나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주류인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주류가 자기 자리를 다 비워서 비주류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지혜가 없었다면 주류가 자리를 독식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없었다면 히브리파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지혜로웠기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로 구제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여 교회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성서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교회 안에 주류, 비주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외인이요, 나그네를 형제 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 아닙니까? 복음서 말씀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것,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주류를 선택해서 주류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고궁이나 오래된 성벽을 가보면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즘은 규격화된 벽돌이 공장에서 찍혀져 나오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돌을 깎아서 담장을 쌓거나 성벽을 수축했습니다. 그런데 성벽을 확장하거나 늘이려고 하면 새 돌만 깎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벽이 되어 있는 오랜 돌도 새 돌에 맞추어서 맞물려 깎고 자리 자리를 내어주어서 비로소 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초대교회는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의 돌이 되게 하기 위해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내어주었고, 거기에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집사로 뽑혀서 교회를 평화롭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3. 칭찬 듣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하는 일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생활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하여 말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일 묵묵히 감당하여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 기름을 부으려고 기름병을 들고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요즘처럼 아들이 한 명이나 두 명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집에는 아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아들 엘리압부터 시작해서 일곱 번째 아들까지 다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막내이자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은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처음 세운 일꾼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심지어 제사장의 무리까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문제 앞에서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문제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처음 교회 일꾼처럼 교회의 부족함을 메우고, 목회자들의 손발이 되어서 좋은 교회를 세워서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꾼
양인순 목사
어떤 사람이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왕국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 그는 "여러분, 당신들은 내 건물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내 공장들을 불사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재산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나의 중요한 참모들만 주면 잃어버린 왕국을 재건하겠습니다." 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건물이나 공장이나 재산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을 더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이나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조건에 맞는 좋은 인재를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고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이나 꿈이 있어도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나 멤버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잘 뽑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부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일군을 세우고, 은사에 맞게 배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 일군을 세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성령을 받고 힘있게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번 설교를 하면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초대교회는 비록 12사도를 중심으로 120명이 모여 시작하였지만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인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짧은 시간 안에 대형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원망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다같이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overlooked, neglected)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제자들이 더 많아졌는데 신바람이 나야지 왜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깁니까? 사람은 많아졌지만 효율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군이 부족했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구제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구제하는 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방법론을 놓고 의견이 갈라지고 원망이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두 부류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밖에서 살던 해외파 사람들입니다. 헬라 문화권 속에서 살던 흩어진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살아온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게 된 국내파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굴러온 돌이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박힌 돌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의해 자기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가난한 과부들과 극빈자들이 교회 내외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파 교인들이 헬라파 교인들을 의도적으로 구제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제하는 방법을 놓고 알력이 생겼습니다. 서로간에 원망과 불평이 생겼습니다. 결국은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초대 교회 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 안에서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창립할 때부터 있던 교인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교인들이 늘어납니다. 새로운 교인들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창립 교인과 새로운 교인들 간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립이 발생하면 교회는 부흥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은 신앙의 선배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과 격려로 감싸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 돕고, 협력하고, 격려할 때 교회는 성장합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갈등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자 사도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를 합니다. 2절을 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의 역할이 있고, 제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기다 보니 사도들이 본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구제 문제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즉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본질적인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문제가 생깁니다. 사도들의 임무는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갈등이 있습니까? 처음 은혜 받았던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왜 우리가 앞으로 달려가도 시원치 않은데 자꾸 뒷걸음질 칩니까? 첫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믿음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사도는 어디서, 무슨 이유로 첫 사랑을 잃어버렸는가를 생각하고 빨리 돌이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첫 사랑의 자리로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개입하여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본질의 회복이 바로 부흥입니다. 루터가 외쳤던 종교개혁이 바로 본질의 회복운동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를 이 곳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본질의 회복이 바로 교회 부흥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 성지(聖志)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聖) 뜻(志)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바로 본질의 회복, 교회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새롭게 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바로 그 교회'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질 때 성지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읽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6:3)
교회의 일군을 세우는 기준은 세상의 자격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일단 학벌이 중요합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그러나 교회의 일군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재산의 유무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의 일을 힘있게 하려면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경력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많이 했느냐가 자격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12제자가 오늘날 면접시험을 쳤다면 한사람도 합격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학력, 경력, 재력,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시고, 세상을 뒤집는 놀라운 일군으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은 무엇입니까?
1. 성령충만한 자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누가 성령충만한 자입니까? 예배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찬은 진정한 일군의 자격미달입니다. 주일날 얼굴한번 인사하듯 비추는 예배생활은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의 영적인 대화를 계속하는 자입니다. 구제와 봉사를 통하여 남을 섬길 줄 아는 자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줄 아는 자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 쪽지가 있어서 옮겨봅니다. 나는 성령충만한 자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나쁜 버릇이 고쳐집니다.
2. 자기를 절제할 줄 압니다.
3.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4. 문제를 해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5. 반대의견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6.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7.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8. 자기의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9. 모든 면에 믿음을 근거로 한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10.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믿음의 일군 되기를 위하여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자입니다.
지식은 책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위로부터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6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거룩과 순결을 추구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만드는 자가 됩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넓은 마음으로 감싸 줍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긍휼히 여깁니다. 삶 속에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한면을 보고 판단하거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거짓이 없고, 정직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내 안에 부족하다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이 있어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면 실수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지혜있는 자는 문제를 지적하기 보다는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누가 칭찬을 받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성령충만하고, 지혜 충만하면 칭찬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신앙과 인격을 귀중히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인기있는 자가 되지 말고 칭찬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연기를 잘하면 인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은 받기 어렵습니다.
칭찬은 인격의 변화가 따라야합니다. 교회 어디에 있어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 칭찬받는 자입니다. 서양란처럼 화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윽한 향기를 발하는 동양란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자가 칭찬받는 자입니다. 우리 성지교회 안에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동양란같은 칭찬받는 많은 일군들이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는 제자들이 모여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일곱집사를 피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집사들이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르, 니가노르, 디몬, 바베나, 니골라입니다. 이들 모두가 헬라식 이름을 가진 헬라인들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공동체에 대다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헬라파 유대인들이 집사로 선출된 것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몰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평상시에는 별 문제없이 지내다가도 선거만 하면 지연, 혈연, 학연에 매이는 것이 우리의 선거풍토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다수인 히브리파 교인들이 해외파인 소수 헬라파 교인들에게 표를 몰아주어 일곱집사를 모두 헬라인 교인들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중심이 다수파인 히브리파에서 소수파인 헬라파에게로 옮겨가는 일대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일 이후, 헬라파 유대인들의 활약은 눈부시게 빛이 납니다. 7장에 스데반의 설교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 안에만 계신다고 굳게 믿던 유대인들에게 그가 행한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나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서 살던 헬라파 유대인이었기에 가능한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인에게 전도한 헬라파 유대인 빌립 집사의 활약이 나옵니다. 옛날 북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수르 제국에 망한 뒤 혼혈정책으로 인해 이방인의 피가 섞였습니다. 그로인해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을 짐승처럼 취급했습니다.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는 정통 유대인들이 짐승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아가 기독교 역사상 이방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직접 베풀어 준 사람 역시 빌립입니다. 빌립이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는 헬라파 유대인의 거두인 사도바울의 회심과 활약이 시작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셨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감히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듣고 가장 먼저 땅 끝을 향해 뛰어간 자들이 바로 헬라파 유대인인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그리고 사도행전 13장부터는 아예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의 독무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의해 시작된 사도행전의 역사가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완성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넘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입곱집사로 모두 세워준 믿음의 용기가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룬 단초가 되었습니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의 아집과 편협함에 빠졌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사도행전의 역사는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완벽한 협력 속에 주님이 명하신 복음전파의 명령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편협함으로 나가면 교회는 주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는 남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생각을 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교회 안에 어떤 사람이 귀한 일군이 될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겸허함이 있을 때 우리는 귀한 일군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희생과 협력의 결과 초대교회는 어떤 역사가 일어났을까요?
7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1.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 제자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말씀 앞에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으로 화답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삶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도 이런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제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숫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부흥이 임하자 교인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13년 예수생명잔치를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50일 동안 전적으로 매달려 기도해봅시다. 우리 모두 5가지 기도의 제목을 정하고 열심히 새벽을 깨우며 기도해봅시다. 먼저 자신 안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놀라운 부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고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흥분시키시면 수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소원은 삼삼삼의 비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삼백명의 헌신된 리더를 세우고, 삼백개의 건강한 소그룹을 이루어, 삼십 명의 사역자를 열방에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기도하면, 우리가 기대하고 전도하면 우리의 비전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줄로 믿습니다.
3. 형식적인 제사에 매달렸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들이 말씀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중심으로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배를 채웠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성령이 임했습니다. 조직을 정비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마른 땅처럼 강퍅했던 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성령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일군이 많아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파워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선한 믿음의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변화되면 다른 사람도 변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면 다른 사람도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지혜로워지면 주변의 사람도 지혜롭게 됩니다. 내가 칭찬받는 자가 되면 주변의 사람들도 칭찬받게 됩니다. 내가 바로 그 선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 2013년도 표어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는 해"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좋은 군사로 거듭나려면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처음 믿음의 자리,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좋은 군사는 자기 생활에 매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르신 자를 위해서 충성합니다.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섬깁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믿음의 군사가 됩니다. 기도의 군사가 됩니다. 전도의 군사가 됩니다. 그 속에 우리 성지교회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고, 부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금주부터 부흥성회와 예수생명잔치를 위한 특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우리 오기를 품고 함께 새벽을 깨워봅시다. 우리 모두 합심해서 일만 시간을 주님 앞에 드려봅시다. 각 구역을 중심으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교구장님들이 앞장서서 구역장과 권찰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구역장님들은 구역원들을 독려하여 새벽을 깨우십시오. 성전이 머신 분들은 가까운 교회에 가셔서 새벽을 깨우십시오. 우리 한번 해봅시다. 5가지 기적을 일으킬 기도제목을 품고 기도해봅시다. 반드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0월 둘째 주에 장로님 3분을 피택합니다. 지금부터 마음에 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는 귀한 일군이 피택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먼저 성령충만, 지혜충만, 칭찬받는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주십시오.” 라고 응답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들로 채워질 때 날마다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꿈의 현상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찬송가 320장 <나의 죄를 정케하사>를 결단의 찬양으로 올려드립니다.
나의 죄를 정케하사 주의 일꾼 삼으사 구세주의 넓은 사람 항상 찬송합니다.
내게 부어 주시려고 은혜 예비 하신 주 주의 은혜 채워주사 능력 있게 하소서
죄의 짐을 풀어주신 주의 능력 크도다 나를 피로 사신 예수 내 맘속에 오소서
주여 내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사 생명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옵소서
(후렴)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고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교회, 양면성을 지닌 신앙공동체
이수영 목사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신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곧 하나님나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세상보다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의 신앙이 다 바로 서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며 교회에 나아와 앉아있기는 하지만 생각은 세상에 가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하는데 삶은 신앙적이기를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하기를 싫어하고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주님의 말씀인데도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도 않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교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의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싶어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당장 그 삶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먹기도 힘들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더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다고 인정은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의롭게 변화하는 것은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삶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성도로 완전히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도이며 동시에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입니다.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이중성 또는 양면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의인들의 무리임과 동시에 죄인들의 무리라는 양면성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양면성의 어느 하나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으며 또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입니다. 따라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의 무리임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며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과 악의 공격과 세상의 비방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으며 넘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자각하는 가운데 항상 말씀 위에 바로 서고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닌 양면성은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교회가 지닌 양면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행2:41, 47, 5:14). 대제사장과 그 측근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기도 하며(행5:17-18) 공회 앞에 끌어다 세우기도 하고(행5:27) 채찍질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도 했지만(행5:40)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행5:42). 그 결과 교회는 더 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더 많아진 것입니다(본문 1절). 그런데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다 보니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돌보는 데에 사도들의 눈과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빠짐없이 골고루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 안에는 크게 두 무리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긴 하지만 헬라문명권인 지중해연안에 흩어져 살다가 조국 땅에 돌아와 살게 된 사람들인 헬라파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서 살며 히브리말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 말하자면 본토 유대인들인 히브리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히 이 두 무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서로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갑자기 많아진 교인들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매일의 구제”란 “주간 구제”와 함께 전통적인 유대인사회의 구제방식의 하나였습니다.
본래 “주간 구제”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빈민에게 열네 끼를 먹기에 충분한 돈을 매 금요일에 지급하는 것인 반면, “매일의 구제”는 상주하지 않는 궁핍한 사람에게 양식과 음료를 그가 머무는 집으로 매일 찾아가 배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 가운데 이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기자 히브리파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사도들을 도와 이 구제 일을 하던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서로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만나 교제할 기회가 없거나 적다 보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일부 헬라파의 과부들이 구제를 받는 일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겼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태를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고 곧 그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인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본문 2-4절). 사도들의 이 말을 온 무리가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본문 5-6절). 이렇게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자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본문 7절).
우리는 여기서 사도들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구제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본문 4절) 한 말에 주목합니다. 교회에 두 가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념해야 할 기도와 말씀 사역이 있는가 하면 또한 집사들이 맡아야 해야 할 구제사역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본래 구제사업 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서고 성장하게 되면 자연히 그 사역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역을 소홀히 하거나 잘못하면 교회 안에서부터 문제와 분쟁이 발생하고 원망하며 시험 드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다 성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에 대한 오해와 나쁜 소문과 그릇된 인식이 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씀과 기도라는 고유하게 영적인 사역과 함께 구제와 같은 봉사 사역이라는 사역의 양면성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 두 가지 사역을 다 잘 해야 성장하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양면성을 지닙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의 사역의 양면성을 보여주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가 지니는 또 다른 사역의 양면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무리로서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힘써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방황하며 몸부림치는 세상의 형편에도 눈을 돌리고 세상 사람들의 무지와 고통을 해결해주며 근본적으로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와 질병을 치유하여 복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한 가장 근원적인 사역인 복음전도의 사역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 외에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신자들끼리만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만족하는 데 그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고 증언하며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가지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수직적이면서 또 수평적이어야 하는 교회의 사랑의 양면성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 사랑을 다 실천할 때 교회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건, 영성은 뜨거운 이웃사랑, 성실한 사회적 책임, 건강한 정치참여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 교회의 모든 봉사, 사회참여, 정치활동은 바른 신앙, 경건,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양면성 중의 어느 하나에만 치중하고 다른 한 면을 망각한다면 교회가 성숙한 신앙공동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또 다른 한 가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과 이 세상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빌3:20)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늘 분명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나라 백성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몰두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에는 관심 없이 그저 오늘 이 세상의 삶을 즐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교인들이 허다합니다. 또 이 세상의 삶 속에서 겪는 일시적 실패와 낙심과 좌절과 분노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의 복된 삶의 소망과 확신으로 다스리며 극복하지 못하고 한숨짓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만사를 주장하시며 일시적인 악의 창궐과 불의의 만연을 내버려두시며 세상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며 결국은 당신의 선한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의심하고 괴로워하며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확실한 도래와 그 복된 완성에 대한 소망을 주고 위로와 삶의 의욕과 기쁨을 되찾게 해주는 사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 실패한 자리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한숨짓는 이들이 찾을 수 있고 그들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함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다시 머리를 들고 멀리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하며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롭고 복된 나라에 대한 믿음을 품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니는 사역의 또 다른 양면성입니다. 교회는 허구헌 날 모여서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일들과 오늘의 이 세상 이야기만 나누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무리이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고 영원한 세상을 꿈꾸며 변함없는 진리를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는 신앙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오늘 이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궁극적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마6:33)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관점에서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나라를 앞당겨 살며 거기에서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제시해줄 책임감이라는 교회 사역의 양면성에 대한 의식이 또한 항상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이 세상을 살며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는 백성의 무리입니다. 그런 교회가 진정으로 소망이 있는 신앙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지닌 여러 가지 양면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 모두를 온전히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
성흥모 목사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부흥의 주역인 좋은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120명의 성도가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던 중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복음 전파가 활발하였고, 교회는 부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6:1에는 “그 때에 제자가 많아졌는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란 예수님의 12제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 시대가 되면서 예수님의 12제자는 12사도라고 불렀고, 제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120명의 성도에서 3000명으로, 다시 남자만 5천 명으로, 그리고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돌아왔으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돌아왔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복음을 전파하면 양적으로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주석가 렌스키에 의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2만에서 2만5천명의 성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 같은 아람어를 사용하므로 의사소통에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 헬라파 유대인이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들인데, 로마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이방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의사소통에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민사상이 강하고 배타적인 생각이 강하였기에 헬라파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열외 시켰으며,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질적인 성장이 따르지 못하거나, 탄탄한 조직력이 뒷받침 되지 아니한다면 와해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어려운 극빈 교우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같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한 동리에 살면서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도와주지 않았기에 우리 기독교회가 전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교회마저도 가난한 과부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들은 생활고를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12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외쳤습니다. 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 공궤하는 일, 접대하는 일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궤를 일삼는다, 접대를 일삼는다.”는 말은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여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삼는다는 열심히 일한다는 말인데,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삼는다는 말이 “디아코네인”이라고 하는데 영어의 집사를 'Deacon'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디아코네인’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구제라는 말이 ‘다이코니아’라는 말인데, 그 말은 봉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도들이 하는 기도와 말씀 사역은 위대한 일이고, 교인들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일은 저급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나누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요,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리와 소명의 사역이 있기에 그것이 우선적인 일이라는 것뿐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기독교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주님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로서, 교회의 존폐를 가늠하는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이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세움을 입었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의 선후를 알았고,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을 알았고, 교회가 커져감에 따라 일을 나눠 맡아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들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주님에게 받은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하는 말씀 사역과 그를 위한 기도 사역에 힘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확고한 의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고 하였습니다. “힘쓰리라”는 말은 전무한다는 말인데, 전력 질주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지속하고 꾸준히 하고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교인들의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 원망이나 듣고 있다면 우선순위를 모르고, 그런 일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얼마든지 위임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한 주간 힘들게 살다가 상한 심령으로 교회를 찾아오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교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소망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 앞에 일꾼을 택하여 세우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3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라고 했습니다.
일곱 분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편의상 집사님으로 호칭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이나 성서신학자들은 이 처음 안수하여 세우는 일곱 명의 일꾼을 장로의 역할을 감당한 분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직분이기에 이들은 후에 자연스럽게 장로의 직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곱 집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일곱 집사라고 불러봅니다.
초대교회가 세운 일곱 집사는 몇 가지 자격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또한 지혜가 충만해야 하고,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격을 다 갖춘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실 것이지만 세움을 입고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힘써야 하고,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이 되고,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첫째 되는 자격이었습니다. 실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력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영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요, 복음 전파의 권능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꾼들은 모두다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일꾼은 머리 좋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이라면 됩니다.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에 교회는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수반되지 아니하는 열심은 자기를 위한 열심일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가끔 대단한 열심을 가진 일꾼들을 보게 되는데, 자기의 실력과 인간적인 야망과 자기 기준으로 언제나 앞서 나가려고 하는 때문에 때로는 열심 없는 사람보다도 더 어려운 인간관계를 낳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13:7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에게 “즐거움으로” 그 사역에 힘쓰도록 용기를 주시고, 격려하는 이가 있습니다. 주의 종들로 하여금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꾼들은, 교회로 보나, 자신에게로 보나 유익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은 당장 그만두어야 하는 소모적인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 일은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지혜도 충만해야 합니다. 여기 지혜란 인간의 지식이나 똑똑함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인하여 받은 은사로서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사리 분별에 참 빠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고, 조언하기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지혜로운 이들은 정도(正道)를 따르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순리를 따르고, 이치에 맞게 처신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은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사리판단에서 능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이 있어야 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데서 나오는 결과가 칭찬 듣는 신실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나, 사회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에 있어 평판이 좋고,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모범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건전한 사고력을 가지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며,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아야 좋습니다.
그런데 왜 꼭 일곱을 택하라고 하셨는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수는 거룩한 수요, 완전수요, 행운의 숫자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를 자연스럽게 정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하면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7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관습을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나라는 한 지역을 원만하게 지도하기 위하여 7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하여 어떤 일을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7명 정도의 일꾼이라면 당시의 구제 사업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7분의 집사님을 세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떤 직분이나 사역에 있어 자격을 말한다면 그런 자격에 능히 합격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2-13, 15)고 했습니다.
우리는 되고, 되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고나서, 점진적으로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하나 일단 장로가 되고, 장로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어떤 직분을 받기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힘쓰다가도 일단 되고 난 후에는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 15)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런 제안을 들은 온 교회가 기뻐하고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이들에게 안수하여 일꾼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안수하여 일꾼을 세우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울 때에 안수하고 기도하여 세웠습니다. 교회가 누구를 안수하여 세운 것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성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안수하는 것입니다.
일곱 집사의 이름을 한번 외워봅시다. “스빌브니디바니” 방언같은 소리이지만, 일곱 분의 이름의 첫 자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이상 7분입니다. 이들 중에 스데반집사님은 사도들을 제치고 첫 번째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고, 빌립은 누구보다도 전도에 열심을 내었던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입교하였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는 배교자로 간주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사도를 이어 교회를 이끌어 오신 이레니우스와 터튤리안 같은 교부들은 니골라가 요한계시록2:6-15에 나오는 이단의 무리인 니골라당을 세운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니골라 한 사람만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고, 안디옥이라는 이방에서 온 점을 설명하는 것’도 그의 배교를 뒷받침한다고 보았습니다. 12제자의 한 사람 가룟유다가 배반하였고, 집사에는 니골라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7인의 일꾼을 세운 후에 교회는 안정되었고, 사도들은 더욱 힘을 얻어 말씀을 전파하였고, 교회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왕성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왕성한다’는 말은 ‘증가한다’는 말이요,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들인데, 저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들어오기에는 교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는데도, 기독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사장들이 돌아오는데, 허다한 제사장들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고,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유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기독교회로 돌아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었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이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되십니다.
오늘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분의 일꾼을 세우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의사들이 필독하고 암송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을 병원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처음 부분에 있었습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의사라는 직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야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고귀한 소명으로 알고,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직원으로 세움을 받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일과 세상의 부름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직분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명예로운 직분이 없습니다. ‘멍에직’입니다. 명예직과 멍에직은 참으로 다릅니다. 국어사전에도 멍에직이란 말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한 말입니다. 멍에는 아무나 메는 것이 아닙니다. 한참 일한 수 있는 젊은 소에게 코뚜레를 걸고 멍에를 메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특권 중에도 특권이요, 사실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명예를 얻는 순간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진정한 성공은 나의 나됨을 아는 것이요, 내가 받은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모두 다 대접할 사람들이요, 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정말 가치 있는 삶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베풂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은혜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고, 지식도 나누어야 합니다.
해리트루먼 대통령이라고 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겸손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도 미국에서, 10가지 리더십의 원리를 가지고 미국 역사상에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 다섯 명을 확정한 바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이었습니다.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비서를 부를 때 사용하던 호출용 벨을 없애버렸습니다. 본인이 직접 문을 열고 비서실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공손히 맞이하여 들였다고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장식하고는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위하여 환영 만찬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군인 ‘유진 리스트’ 하사가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유진 리스트가 아무나 악보를 좀 넘겨 달라고 부탁하자 트루먼이 먼저 나가서 피아노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하사의 명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대통령은 끝까지 서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나중에 리스트가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내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다니, 한번 상상해보시오. 우리 대통령은 그런 분이라오”라고 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절대 잊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리더는 섬기는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지혜 충만을 사모하고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칭찬 듣는 사람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크게 성장하는 교회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첫머리에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 했습니다. 또 본문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 합니다. 이미 예루살렘교회는 무섭게 성장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장의 속도와 규모가 점점 더 커갔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놀라운 교회성장의 요인 몇 가지를 보게 됩니다.
우선 본문이 전하는 예루살렘교회의 문제상황이 무엇인지를 봅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다 보니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돌보는 데에 사도들의 눈과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빠짐없이 골고루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이 전하는 상황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 안에는 크게 두 무리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유대인이긴 하지만 헬라문명권인 지중해연안에 흩어져 살다가 조국땅에 돌아와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며 헬라권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친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히브리파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서 살며 히브리말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 말하자면 본토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자연히 이 두 무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서로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갑자기 많아진 교인들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매일의 구제"란 "주간 구제"와 함께 전통적인 유대인사회의 구제방식의 하나였습니다. 본래 "주간 구제"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빈민에게 열네 끼를 먹기에 충분한 돈을 매 금요일에 지급하는 것인 반면, "매일의 구제"는 비상주민으로서 궁핍한 사람에게 양식과 음료를 그가 머무는 집으로 매일 찾아가 배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 가운데 이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기자 히브리파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사도들을 도와 이 구제 일을 하던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서로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만나 교제할 기회가 없거나 적다 보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일부 헬라파의 과부들이 구제를 받는 일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인 일을 놓고도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곳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태를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고 곧 그 대책을 세웠습니다. 본문 2-4절에서 보듯이 교인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둘째는 이 일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인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 셋째는 사도들은 구제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사도들의 이 말을 온 무리가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즉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구원하시고 성화시키시며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 속에서 분명하고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여기서의 안수는 책무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들이 행하는 책무는 사도들의 권위 아래서 행해지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며 그들 뒤에는 사도들의 지지와 후원이 있음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의 문제가 해결되자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7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제사장들은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반대하는 핵심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허다한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예루살렘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요인들이 무엇인지를 짚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사도들이 취한 자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원망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 일부 과부들이 구제 받는 일에서 빠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공동체 안에서 약한 소수라 할지라도 그들의 소외와 아픔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원망이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 전체에 끼칠 폐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갈등 때문에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나뉘는 것은 빨리 그리고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런 일로 인해 그들 본연의 사역인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는 것이 교회성장에 가장 치명적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보인 문제상황의 인식뿐 아니라 대처방식 또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그들은 온 교인들과 의논했습니다. 그들은 문제해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되 교인들 전체와 책임을 나누며 그들의 의사를 존중했습니다. 본문 2-4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전체 교인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일방적으로 일곱 사람을 지명한 것도 아닙니다. 전체 교인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해결하라고 무책임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신앙적 지침을 전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스스로 일꾼을 뽑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6절에 보면 사도들은 교인들이 뽑아 세운 일곱 사람을 받아들여 두 말 하지 않고 기도하고 안수했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들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교인들의 권리와 의사를 전적으로 존중한 것입니다.
사도들뿐 아니라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이 보인 태도 또한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구제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습니다" 하자 본문 5절에 보면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했다"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 제안에 일체 반대하거나 따져 묻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에 대한 신뢰와 절대적인 협력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인들 사이에서 잠시 일어났던 원망이 사라지고 기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뜻을 잘 이해하고 사도들이 요청한 그대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은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했지만 교인들은 "이 말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나이순으로 일곱을 정했더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 출신들은 다 배제하고 뽑았더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인들이 택하여 세운 일곱 사람은 모두 헬라파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사실도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구제에 빠지곤 하자 그 일을 할 사람 일곱을 모두 헬라파 사람들로 택하여 세우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를 안배해야 한다거나 동수로 해야 한다거나 하는 논쟁이나 힘겨루기 없이 단번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의 성숙함과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곱 사람이 다 헬라파이지만 그 중에 제일 끝에 언급된 니골라는 본래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었습니다. 즉 해외동포출신이 아니라 완전히 외국인인데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니골라처럼 아예 유대인의 혈통이 아닌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가장 소수이고 가장 소홀히 여겨질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겠는가 짐작해 봅니다. 혈통과 출신지역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게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려는 의지를 엿보게 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공동체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결과가 무엇인지를 사도행전의 저자는 본문 7절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예루살렘교회의 성장의 역사의 한 토막인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모든 교회의 성장을 위한 몇 가지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차별이나 소외나 그로 인한 원망이 없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역자와 교인들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성장에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 전하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루살렘교회에서의 문제상황은 일부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진 것이었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상황은 그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 본연의 사역인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교역자들이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없다면 교회성장의 주된 동력이 멈추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교역자들만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교인들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저런 일로 교역자들의 시간과 힘을 다 소모시키고 탈진시킨다면 교회가 성장할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비본질적인 일들로, 비신앙적인 태도로, 교역자들을 피곤하게 하고 괴롭히며 주눅 들게 만들고 사역의 의욕과 기쁨을 꺾어놓는다면 교회는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편안하고 기쁨 마음으로 교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기도와 격려로 교역자들을 돕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교회성장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교역자들의 책임은 그 무엇보다도 큽니다. 교인들 사이에 어떤 원망과 불평과 갈등이 자리 잡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권위주의에 빠져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교인들의 권리와 의사를 무시하며 제왕적 전횡을 일삼는다면 교회는 큰 시험에 들고 엄청난 진통을 겪으며 온 교인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을 기도로 위로하며 말씀으로 확신과 기쁨을 주는 교역자들이 되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교역자들이 기도하지 않으며 말씀을 준비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은 교역자이기를 포기한 것이고 교회성장을 거부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말씀은 교회의 성장과 활력의 중심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셔서 예루살렘교회가 빠르고 힘있게 성장하자 사탄 또한 가만히 있지 않고 교회성장을 해치려는 시도를 거듭했습니다. 첫째는 사도들을 위협하거나 잡아가두는 등 교회가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게 한 일이었습니다. 둘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교인들이 탐욕과 거짓에 빠지게 함으로써 내부로부터 병들게 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시도가 다 실패하자 교회성장에 가장 치명적인 일 즉 사도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게 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력하지 못하게 하기를 도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예루살렘교회 온 교인들이 합력하여 이 시험을 이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는" 놀라운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새문안교회도 담임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역자들과 온 교우들이 새롭게 각성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안팎에서 닥쳐오고 일어나는 온갖 시험을 이기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기도와 말씀에 힘씀으로써 크게 성장하는 교회 되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교회의 문제해결
김경년 목사
한번은 어떤 청년이 영국의 유명한 부흥사 스펄젼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이런 부탁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돌아다녀 보아도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 문제가 없는 교회를 소개 해 주세요.”
그때 스펄젼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가 돌아다니다가 만약에 그런 교회를 한번 찾게 되면 나에게 꼭 연락을 해주게. 그러면 나도 그 교회에서 목사로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하고싶다네.”그리고 한마디 더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절대로 그 교회에 가지 말게. 왜냐하면 자네가 그 교회에 가는 순간, 그 교회는 다시 문제가 생길것이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초대교회는 정말 은혜가 넘치고,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있었고, 날마다 성도의 수가 부흥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교회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누구보다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팀을 이루어서 목회를 했던 교회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 안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을 보면 오늘 이 세상의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의 문제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문제를 해결했던 모습을 보면서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초대교회는 민족간의 갈등이 문제였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때에 제제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헬라파와 히브리파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흩어졌던 유대인들로, 고향을 떠나서, 헬라 문화 속에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히브리파 사람들이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지키며, 고향 말인 아람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을 가르킵니다.
이들은 같은 민족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한마디로 말하면, 토박이였던 히브리파 사람들과 타향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들 간의 갈등입니다.
요즘도 어떤 교회에서는 토박이 성도들과 새로 들어온 성도간의 갈등이 있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토박이 교인들은 처음부터 교회를 개척해서 어렵게 교회를 지켰기 때문에 자기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토박이의 기득권을 뺏기 위해 서로 갈등과 분열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즉 여러분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배당이 덥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춥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설교가 짧다고 하고, 어떤 분은 길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가족적인 분위기라서 좋다고 하고, 어떤 분은 너무 촌스럽다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는 너무 너무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다가 보니까 교회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고, 서로간의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전혀 이런 문제를 이상하게 보면 안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초대교회의 문제는 구제하는 일 때문에 생겼습니다.
본문 1절 하반절입니다.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초대교회는 매일 구제하는 일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일 때문에 생깁니다. 교회가 일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없는 교회는 일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일하는 교회는 어디든지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특별히 교회가 좋은 일을 하다보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싸우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다 좋은 일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좋은 일을 하다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구제하는 일을 하다가 생긴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구제하는 일을 하다가 서로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즉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기 사람들을 구제할 때는 많이 주면서,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구제를 받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실 구제를 받는 입장에서는 그냥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구제를 받는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요즘 교회에도 자세히 보면 받으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요즘 나이가 많다고 나이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오래 됐다고 고참이라고 인정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일 했다고 칭찬 받으려고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실 더 받으려는 마음을 없애면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셋째, 초대교회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사람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여기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모든 문제가 사람을 통해서 생기는 것 처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5절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초대교회는 이와같이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을 세워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받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움직였던 교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헌신적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에 이끌리는 성도들이 있어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반대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키려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지만, 교회의 문제를 더 크게 확대하고 더 복잡하게 문제화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사람에게 칭찬 듣는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사람들이 신뢰합니다. 그의 말을 따릅니다. 그는 무슨 문제든지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본업에 충실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잘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든지 구제를 잘하고, 교육을 잘하고, 선교를 잘해도, 목회자가 말씀을 잘 전하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본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목회자들이 말씀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잘 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렇습니다.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더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는 열심히 일하다보면 생깁니다.
일하지 않으면 문제도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중에 열심히 일하지 않는 분들은 시험에도 들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 시험에 듭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가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결 론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사람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교회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또한 주의 종들은 오직 말씀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의 종들이 말씀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교회가 더욱 부흥하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