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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4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주께서 아들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며 또한 영화와 존귀로 관를 씌우셨습니다(시 8:5).
이는 곧 아들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가 쓸 영화와 존귀의 관임을 믿습니다.
지금은 가장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그 나라 아버지의 품에서 누릴 영광이요 우리의 소망이오니 잠시 잠깐 후면 들어갈 그 나라를 소망 가운데 기다리게 하소서.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며 얽매이지 않고 가장 자유한 모습으로 주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거운 것 곧 거리끼는 것이나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감당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경주 역시 나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로 인함인 줄 압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을 허락하소서.
그 분은 당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 등 온갖 수치와 멸시를 개의치 않으시다가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1-2).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힘과 능력으로 행하려던 자였습니다.
믿음과 은혜가 아니라 나의 의였음을 고백합니다.
이 아침에 다시 살아나는 나의 옛 사람과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가 되어 이 하루를 살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로 살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기 원합니다.
내게 주신 고난이 내가 받아야 할 몫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게 하소서.
주께서 그러셨듯이 나 또한 우리 주님을 위하여 받는 수모를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마 27:57-66
제목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은 우리 죄 아니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그 날 저녁 때 아리마대에 사는 부자 요셉이 와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청하였고 빌라도는 그 시체를 내주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하였다.
그리고 큰 돌을 굴려 무덤의 입구를 막고 돌아갔다.
이 무덤 맞은편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의 시체가 부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치된 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무덤에 장사되기 위함이며, 무덤에 장사되심은 또한 부활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사건을 통하여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새 생명을 주신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 연합하여 나도 매일 십자가에 나를 못 박으며,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나 역시 무덤에 장사됨을 뜻한다.
무엇보다 무덤에 장사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것이 목적이다.
무덤은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무덤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세상은 무덤이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 그 뒤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 곧 예수님의 피로 세움 받은 새 언약 백성들은 새 생명을 얻게 된다.
그렇게 얻은 새 생명은 반드시 무덤을 통하여 얻게 된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 자이다(요 6:46).
또한 예수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54).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6:46절의 믿는 자나 54절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동일하게 영생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와 같다는 결론이다.
주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수이다.
하여 그 살과 그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도 그 안에 거하게 된다(요 6:55-56).
결국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단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그의 부활에 동참하여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새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을 통하여 증명된다.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이 보여 달라는 표적은 지극히 세상적인 것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 네가 메시야라면 우리에게 메시야인 표적을 보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무언가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화끈한 것들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들의 요구는 이 땅에서 보란 듯하고 성공하며 부요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는 3A(Appearance, Achivement, Affluence)를 원하고 있다(마 12:38).
그들의 중심을 보신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구하는 표적이 바로 이 땅, 만물 안에서만 유효한 존재물에 대한 표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12:39).
이에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표적이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땅의 표적, 이 세상에 속한 화려하고 화끈한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전혀 상반되는 표적인 무덤의 표적을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바로 이 요나의 표적과 같은 무덤을 통해서만 생명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무덤 안에서 성전이 지어지는데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전혀 새로운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기존의 성전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그동안 내가 믿고 붙잡고 있었던 땅에 속한 성전을 허물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2장에서 이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는 일을 하신다.
그 안에서 장사하고 돈을 바꾸면서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실 때, 이를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한다(요 2:18).
그 때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신다(19).
그러자 유대인들이 조롱하듯 “이 성전은 헤롯이 46년에 걸쳐서 지었고 아직도 완성이 안 됐는데 네가 무슨 수로 이 어마어마한 성전을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한 해석을 21절에서 하고 있다.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에 있는 건물 성전은 신앙의 중심이요 목적이며 신앙 그 자체이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건물 성전이 무너져야만 진짜 성전을 세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붙들고 있었던 성전 신앙은 잘못된 것이며, 이제는 그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참 성전을 가질 수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내 자신이 성전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은 그저 지식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의 고백이었을 뿐 사실은 전혀 그렇게 살지 못했었다.
마치 반인반수처럼 나만의 안전선을 만들어서 반은 신앙인처럼, 반은 세상 사람처럼 철저하게 그 안에서 나의 유익을 구하며 살았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마태복음 26장 후반부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대제사장의 집으로 호송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한다.
‘멀찍이’는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는 거리다.
그에게 무슨 화라도 미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는 거리가 바로 ‘멀찍이’이다.
그는 그 ‘멀찍이’서 예수님을 지켜보다가 3번씩이나 부인을 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다름 아닌 내가 바로 이런 자이다.
예수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맡기면 왠지 내가 손해 볼 것 같고, 그렇다고 안 믿을 수는 없고 해서 나만의 안전선을 정해 놓고 그 이상은 다가가지 않는 그런 자가 바로 나였다.
교회 안에서는 신자요 세상에서는 불신자의 모습으로 살았던 나는 그야말로 영적 카멜레온이었다.
물론 나는 세상에서 대놓고 불신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를 잘 믿는 자처럼 보았지만,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나 자신만의 안전선 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회칠한 무덤으로 살았던 것이다.
‘멀찍이’는 나의 욕망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을 향한 정욕과 욕망을 불태우는 자의 모습을 은밀히 드러내는 말이다.
이런 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이다.
겉으로는 잘 믿는 것처럼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때로는 그런 기도의 열매도 맺는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섬기고 봉사도 한다.
예배 시간에는 눈물도 흘리고 정말 경건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이다.
또한 이런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아니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모래 위에 집을 멋지고 화려하게 지어 놓은 뒤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며 창수가 나면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 기도한다.
이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하면, 이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것도 빨리 무너질수록 본인에게는 유익하다.
그러나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면 내가 쌓아놓은 명성과 부(富) 그리고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타의식의 눈이 발동을 하여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다.
온갖 무화과 옷으로 치렁치렁 치장한 것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다.
성전 삼았던 그것이 무너져야만 반석 되신 예수님께 믿음의 기초를 두고 새롭게 성전을 세울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박 터지는 영적 전쟁을 한다.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욕망의 새를 쫓아내는 일에 투혼한다.
여전히 나는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관망하려는 건물 성전이 있다.
그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오늘 나의 할 일이다.
물론 그 일은 내가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복음을 통하여 내가 새 언약 백성임을 알게 되었고 새 언약 백성은 주님의 구속 사건에 동참하여 그와 연합한 자임을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내게 주시는 어떠한 상황도 감사함으로 받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과 義의 관계로 회복한다.
하여 무덤이 진멸의 전쟁터가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주의 귀한 성전임을 나는 믿는다.
따라서 오늘도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여 하나되는 연합을 이룬다.
특히 오늘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서 무덤에 계시는 시간이다.
나도 주님과 함께 그 무덤에 장사된다.
그리고 주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며 새 성전을 짓는다.
주님이 나의 성전이요, 또한 내가 성전이다.
그 안에서 일으킴을 받는 생명은 나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다.
그 생명으로 나는 오늘도 살아갈 것이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신다.
나는 주님과 함께 그것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예전에는 고난주간이 되면 그저 센티멘탈하게 감정적 감성적으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나도 그 고난에 동참한다고 기쁨과 즐거움도 잃어버린 채 우울 모드로 지내곤 하였습니다.
왠지 기뻐하면 죄송스럽고 그렇게 하면 안 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는 지극히 율법적이었고 복음을 모르는 자의 우매한 소치였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고난이요, 나 역시 주님의 무덤에 함께 장사되어 무덤 속에 거하지만, 결코 슬프거나 센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과 함께하는 그 무덤 속에서 새 생명이 살아난다는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을 오늘도 바라보며 십자가와 무덤 뒤에 찬란하게 비치는 주의 영광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이 주신 새 생명으로 오늘도 넉넉히 살아 햇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의 기쁨과 영생을 누리는 한 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