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BS 드라마 《관촌수필》을 시청하던 1992년 연말은 내게 퍽 힘든 때였다. 나는 서초동에 있는
쪼만한 출판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수입이 거의 없어 월급이 나오는 달보다 안 나오는 달이 더 많았
다. 그 막막한 시절에 유일한 낙이 집에서 소주를 홀찌락거리며 《관촌수필》을 시청하는 일이었다.
즐겨 보면서도 개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상업방송사에서 저런 드라마로 수지가 맞을까 걱정하던
기억이 있다.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시청률이 낮아 광고 수주 측면에서는 썩 바람직하지 못할 듯해서
였다. 훗날 『SBS 10년사』를 집필하면서 《관촌수필》을 연출했던 이종한 감독에게 그 얘기를 했
더니, 자신도 연출하면서 수익성을 떠나 좋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SBS에 적잖이 감동
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 전후에도 《TV 문학관》을 비롯하여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드라마를 제작한 경우가 많았지만, 내
생각에는 《관촌수필》이 가장 수준 높은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돈도 못 벌어오면서 남자가 드라마
나 본다고 아내의 지청구가 자심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관촌수필》
을 시청했다. 그 드라마에서 받은 영감 덕분이었을까? 1993년부터 전국의 각 의료보험조합에 납품할
의학서적을 기획하여 직접 원고를 써서 납품하면서, 기아도 면하고 출판사도 살려냈다. 그때 권소정
이란 처음 보는 여배우가 연기를 썩 잘하여 흠뻑 빠졌었는데, 이후 연극에만 전념한다며 다시는 TV
에 출연하지 않아 몹시 아쉬워하던 기억도 아련하다.
이문구(1941~2003)의 「관촌수필」은 8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진 연작소설로서, 1977년 이를 한데
모아 「관촌수필」이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8편의 단편소설은 각각 독립적인 줄거리를 담고 있
으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주변 환경까지도 서로 연관성이 있다. 관촌은 작품의 배경이 된
작가의 고향마을※ 이름이고, 수필은 작가의 기억을 따라 자유로운 형식으로 집필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8편의 단편소설에는 각각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고향의 정경과 6‧25전쟁 전후의 혼란, 그리고
주인공들이 마을을 떠났다가 하나둘 돌아오는 실상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관촌수필」이 나온 이후부터 이문구는 충청도 사투리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 글이 너무 좋아 김훈에게는 되도록 시비를 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점만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관촌으로 문학기행을 떠난 김훈은 마을 이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촌부락’이라고 표현해놓았는데,
부락(部落)은 왜국에서 천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조선인
은 모두 천민이라는 악의적인 의도로 우리 시골마을을 일제히 부락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왜놈들의
의도도 모른 채 마을을 부락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스스로 천민임을 자처하는 꼴이 된다. 당연히 마
을 또는 동네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 이문구의 할아버지를 ‘마지막 이조인’이라고 한 표
현도 마찬가지다. 이조(李朝) 역시 왜놈들이 조선 왕가를 일개 영주 정도로 격하시켜 부르던 악의적
인 용어다. 김훈은 글은 잘 쓰지만 이러한 주체적 의식에는 둔감하다.
김훈은 용산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이문구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충남 대천시(1995년 보령
시로 개명) 대관동을 찾아갔다. 대관동은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할 때 관촌이란 마을이름을 개명한
것이다. 경부선을 타고 가다가 천안에서 장항선으로 갈라지면, 터널도 철교도 대도시도 없고 아기자
기한 농촌 풍경과 야트막한 야산만 잇달아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관촌마을은 대천시에서 기차
를 내려서 오던 방향으로 1㎞쯤 되돌아가면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한산이씨의 500년
세거지(世居地)다. 양지바른 마을에서 너른 들판을 바라보면 풍요로운 농경이 가져다주는 삶의 질감
이 보는 사람을 아늑하게 한다.
김훈이 찾아갔을 때 아기자기하던 작품 속의 들판은 ‘행정가의 무지막지한 볼펜 끝에서’ 네모반듯하
게 경지정리가 되어 있었다. 동네 한복판을 흐르던 개울도 도시계획에 의해 물길이 뒤틀렸으며, 집성
촌을 이루고 살던 한산이씨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마을 앞까지 찰랑거리던 바다는 간척사업으로 인
해 멀리 대천해수욕장까지 쫓겨나 있었다. 바다가 쫓겨난 자리에는 새로운 택지가 조성되어 낯선 외
지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개펄에 빠진 여우를 사냥하던 봉건시
대의 마지막 광경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문구의 할아버지는 주자학의 교양을 갖춘 조선의 마지막 선비였다. 그는 매의 눈을 하고 세상을 관
찰하고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의 눈짓에 의해 마을의 질서가 유지되고 집안의 기강이 섰다. ‘행정가
의 무지막지한 볼펜 끝’ 운운하며 경지정리를 비꼬던 김훈은 무슨 까닭인지 봉건의 추억을 낭만적으
로 늘어놓고 있다. 새마을운동=유신독재라는 독선에 빠진 좌파들의 고질병이다.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던 소설 속의 골목길도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반듯하게 구획된 도로 양 옆으로 틀에 찍어낸
듯한 건물들이 현대식 간판을 달고 서 있다.
이문구의 할아버지가 살던 옛집도 헐려나가고 그 자리에는 2층 양옥이 들어서 있다. 드넓은 마당에
도 여러 채의 주택이 들어서 있는데, 거기에는 할아버지가 신봉해오던 추상같은 봉건적 권위는 찾아
볼 수도 없다. 김훈은 어렵사리 한산이씨 가운데 최고령자인 이서구 옹의 집을 찾아가 한산이씨의 두
툼한 족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이 옹은 특이하게도 옛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자리를 일일이 지도로
그려 넣어 후손들에게 벌초와 성묘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 옹은 안방으로 김훈을 데려가 손바닥
으로 아랫목을 톡톡 두드리면서, ‘다들 고향을 떠났어도 나는 바로 요 자리에서 태어나서 요 자리에
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관촌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는 한산이씨 산해파의 종가집이 남아 있다. 고색창연한 골기와 지붕
에는 듬성듬성 이끼가 나 있지만, 그 크기와 모양만으로도 충분히 옛 영화를 상징하고 있다. 이문구
는 「관촌수필」 서문에 ‘무엇이 얼마나 변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왜 변하지 않았는가가 중요하
다.’고 써놓았다. 문학기행을 마친 김훈은 그예 변하지 않은 것들의 까닭을 알아냈다. 시간이나 공간
속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섭씨 26도 에서 30도 까지 오르내리는 이곳 날씨지만 북쪽에 위치하고 덤으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반팔 복장으로 지낼만 합니다. 24시간 한국 YTN 을 시청할수 있어 크고 작은 우리나라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 한파주의보 예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모자,목도리 필수적인 외출시 의 소품 입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