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1개월 만에 9급에서 지방청장까지 그는 스스로 성공신화를 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비(非)고시 출신의 9급 공채로 세무공무원에 발을 디딘지 38년1개월 만에 ‘넘버 3’ 서울지방국세청장 자리에 오른 박찬욱 청장.
어려운 가정환경, 주경야독, 일 벌레, 조직에서의 두터운 신망 등 그의 성공이력은 다른 고졸신화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하지만 세무공무원으로서 각종 유혹과 압력을 이겨내면서도 공정·투명·신뢰의 세정을 펼치고 청렴, 명예의 길을 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박 청장의 성공신화는 하늘이 도운 게 아니라 스스로 쓴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한 새뮤얼 스마일즈의 4대 복음론(자조론·인격론·의무론·검약론)을 통해 박찬욱 청장의 성공스토리를 조명해 봤다.
박청장은 1949년 8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지 백일이 채 안 되어 부친이 타계하여 홀어머니와 조부 밑에서 외동아들로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모친 역시 농사일을 하며 박 청장을 키우다가 그가 20대 초반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 수원에서 중학교를 마친 박 청장은 서울로 올라와 친척집에서 경동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했다. 이런 탓에 9급 세무공무원 공채시험에 응시해 합격, 공직에 입문했으며 주경야독으로 명지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6급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독학을 통해 세무사시험에 합격하여 세무사자격을 취득하고 초임 사무관 때는 국세공무원교육원 교관으로 후진 양성에도 일조를 했다. 일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자기계발로 9급 공무원에서 5급 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하는 데 평균 30년이 걸리던 것을 16년11개월로 절반으로 단축했다.
1988년 관악세무서 법인세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90년 국세청 국제조세2과3계장, 1991년 서울청 법인세2계장 1계장, 1994년 국세청 법인세2계장 1계장을 거쳐 1995년에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5급이 되어 고시 출신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서기관 승진에 9년8개월(평균 11년), 부이사관 승진에 8년(평균 10년)으로 고속승진을 거듭하다 1년반 만에 국세청 조사1과장에서 서울청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실제로 박 청장은 2005년 4월 국세청 조사1과장에서 서울청 조사4국장으로 승진했으며, 올해 4월 1일 국세청 조사국장으로 승진한 뒤 4개월여 만에 서울청장에 올랐다. 직위로 보면 1년4개월 만에 서울청 조사4국장에서 서울청장에 올랐고 직급으로는 3급 승진 후 1급 관리관이 되기까지 3년3개월이 걸린 것이다.
지난해 6월 국세청은 강남의 기획부동산업체를 급습하면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선 적이 있다. 이를 담당한 곳이 당시 박 국장이 맡고 있던 서울청 조사4국이었다. 조사4국은 기획부동산업체 말고도 유흥업소·건설업체·자영업자·사채업자 등 국세청이 펼치고 있는 첨예하고 까다로운 세무조사를 도맡아 했다. 당초 론스타 등 외국계 펀드 조사업무도 국제거래관리국에서 맡았다가 조사4국으로 이관됐을 정도다.
기업들에 대한 정기조사 외에도 할 일이 산더미로 쌓이고 직원들의 업무과중도 심했다고 한다. 박 국장은 기획부동산업체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원들을 위해 사비를 털어 간식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
서울청 조사4국은 청와대 특명조사국으로 국세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졌었다. 2003년에는 사상 최초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고 전임 국장은 하향전보, 전임 과장은 구속되는 등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그런 조사4국을 맡은 박 청장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부하직원들을 독려하며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박 청장이 국세청 조사국장으로 다시 서울청장으로 잇따라 발탁됐지만 국세청 내부에서는 전혀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될 사람이 됐다는 게 중론이다. 그가 조직 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과 아랫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조직 전반에 신뢰를 쌓아 왔고 따르는 후배들도 많다.
지난 5월 27일 박찬욱 당시 국세청 조사국장의 장남 결혼식이 삼성동 도심공항터미널에서 있었다. 국세청 전·현직을 비롯해 몰려든 하객만 1000여 명에 달했다. 조사국장의 자리에 하객수를 보면 축의금과 화환이 넘쳐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화환은 국세청 이름으로 된 몇 개에 불과했고 축의금은 아예 받지도 않았다. 찾아온 기업체 관계자뿐만 아니라 사무실 선후배·동료, 향우회 등 절친한 지인(知人)들의 봉투도 거절했다.
박 청장이 재력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조부 및 모친으로부터 용인 수지 소재 논과 밭·선산 등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수지지구 택지개발지역에 포함되면서 보상금을 받은 것이지 투기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박 청장은 장인 장모를 모시고 14년 간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강남구 역삼동의 한 아파트에서 장남 내외와 살고 있다. 아들들도 장남이 학군단 출신으로 중위로 전역했고 차남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 전방에서 중위로 근무 하고 있다.
박 청장의 입지전적인 성공신화가 단순한 비고시 출신에 대한 배려가 아님은 그의 성품과 업무에서 드러난다. 국세청 핵심보직인 조사국을 거치면서 조사업무와 법인세 업무에 정통한 그는 지독한 일벌레로 탁월한 업무 수행능력을 보여 왔다.
조사국장 시절에는 중요 현안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웬만한 사안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아 자물쇠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지난 2001년 있었던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에도 세무조사의 실무였던 조사1국 1과장을 맡은 바 있다. 서울청 조사4국장 시절에는 대구국세청 중심으로 실시됐던 포스코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도 원만한 과세가 이루어질 수 있게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지난해 내 외국자본에 대한 과세차별을 없애기 위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론스타 등 외국계 펀드에 대한 세무조사도 성공적으로 치른 바 있다.
박 청장은 7월 31일 취임식에서 세정 방향에 대해 치밀한 사전준비로 세무조사를 줄이는 등 냉혹한 세법집행 대신 납세자 중심의 따뜻한 세정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예컨대 세무조사건수 대폭 축소와 현장조사기간 단축, 기업활동과 경기를 위축시키는 무리한 징세활동 자제, 고소득자영업자를 비롯한 음성·탈루소득자, 자료상 등 탈세범에 대한 엄정 대처 등을 주문했다.
박 청장은 부조리의 굴레에서 과감히 벗어나 당당해지고, 청렴과 명예를 공직자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하위직 후배들을 향해 “나와 함께 일한 기간이 훗날 소중하게 기억될 수 있도록 자신부터 열심히 노력하겠다”며 “얼마나 오랜 기간 함께 근무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열정을 갖고 어떻게 일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찬욱 청장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 서울지방국세청장이 되었다.
사람이란 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만 있으면 못할일이 없는것같다.
주위에 성공한사람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나 자신부터 개선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