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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2인자 파진찬 흥원은 진평왕의 서자인 호원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태양공주이다. 그녀의 행실이 너무 개방적이었기에, 진평왕의 혈통인지가 의심스러워서 호원부터 왕위계승권에서 배제되었다. 그렇지만 흥원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쳐 진골인 김춘추에게로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흥원은 제통帝統이 자기에게 있다고 혼자 생각하면서 조정을 원망했다. 이에 누이동생을 흠돌의 첩으로 삼고 흠돌과 결탁했다.” 흥원은 흠돌이 풍월주로 있을 때 그의 부제였고, 문무왕 8년에 특수군단인 계금당罽衿幢(신라시대 군사조직으로 654년 태종무열왕 1년에 설치)의 총관에 오른 인물이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23세 풍월주이며, 그의 아들 천관은 30세 풍월주로 흠돌의 사위이다. 군관은 문무왕 원년과 8년 에 남천주총관과 한성주행군총관을 역임했다. 그의 인품이나 무인으로서의 자질은 『화랑세기』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흠돌의 아들 흠언(31세 풍월주), 진공(26세 풍월주)의 아들 신공(흠돌의 조카, 32세 풍월주)도 반란에 가담하여 모두 주살당했다. 『화랑세기』에 나타난 흠돌, 진공, 흥원은 악인의 화신, 삼간三奸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반란의 전말을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흠돌은 무열왕 초에 태자인 김법민(후에 문무대왕)이 김유신의 딸인 신광을 태자의 정비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문명왕후에게 밝혔다. 흠돌은 “신광이 김법민의 첩으로 있기에 신광을 내세워 후계자를 이어가야 가야파의 앞날이 순탄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렇지만 법민의 완강한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무왕 말년 김흠돌은 화랑 행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문명황후가 죽은 후 기댈 언덕이 없어진 김흠돌 무리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초조해졌다.
“문명태후가 돌아가시자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해했다. 게다가 흠돌의 딸도 신문왕의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하였다”(『화랑세기』 필사본). 흠돌은 문무왕의 태자 정명(신문왕)을 축출하고 야명궁주가 낳은 왕자 인명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일을 꾸몄던 것이다.
필사본에서는 김흠돌의 죄상이 네 가지로 정리·요약된다. 첫째, 농단이다. 즉 낭정을 마음대로 요리했다. 둘째, 외숙모인 문명태후의 권세를 믿고 설쳤다. 셋째, 음해를 일삼았다. 처음에 자신의 첩으로 삼고자 한 자의가 태자(김법민)의 비가 되자 덕이 없다고 험담하고, 그 자리에서 쫓아낸 뒤 신광을 앉히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넷째, 아첨을 일삼으면서 문명왕후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를 기회로 흠돌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바쳤다.
김흠돌에게 있어서 문무대왕은 자신의 연인을 빼앗아간 연적이었기에, 문무대왕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김흠돌의 막강한 세력을 제거할 수가 없었고, 또 자신의 사후 김흠돌과 왕실이 크게 대립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문명태후의 막후 중재로 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정치적 타협을 본 것이다. 그러나 정명태자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필사본에 의하면, 문무대왕이 임종하기 직전 김흠돌과 사이가 나쁜 자의왕후는 만약의 사태(김흠돌의 반란)에 대비하여 지금의 원주에 있는 김오기를 불러들여 호성장군(왕실의 호위부대장)으로 삼으려 했다. 말하자면 계엄사령관의 중책을 맡기려 한 것이다. 그러나 흠돌 일행의 거센 반발로 오기는 호성장군직을 넘겨받지 못한다. 문무대왕이 숨을 거두자 흠돌 일행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몰래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들은 지방군사를 끌어들여 경주 월성을 장악하려 했으나 한 낭도가 오기공에게 흠돌 일행의 반란계획을 일러바쳤다. 반란군은 서불한 진복공이 거느린 수병手兵과 김오기가 거느린 왕당파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삼간은 처형되었다.
반란의 결말과 화랑도의 폐지
아버지 문무대왕의 임종을 지켜보고 왕위계승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줄 알았던 신문왕에게 흠돌 일행의 모반은 대명천지의 날벼락이었다. 그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8월 16일자 『삼국사기』에 실린 교서에 잘 나타나 있다.
“...과인은 보잘것없는 몸과 두텁지 못한 덕으로 숭고한 왕업을 이어 지킴에,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자리에 들 때까지 여러 신하와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했더니, 어찌 상중에 서울京城에 반란이 일어날 줄 생각이나 했던가!”
이어서 분개한 신문왕은 흠돌·흥원·진공 등 삼간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다. “역적의 우두머리 흠돌·흥원·진공 등은 벼슬이 재능으로 오른 것이 아니요, 관직은 실로 은전恩典으로 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고 어질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관료들을 업신여겼으며, 아래 위 가릴 것 없이 모두 속였다. 날마다 탐욕스러운 뜻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보이고 포학한 마음을 멋대로 부렸으며,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불러들여 궁중의 근시近侍들과 결탁해서 화가 안팎으로 통하게 했으며 나쁜 무리들이 서로 도와 날짜와 기한을 정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내가 위로는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는 조상의 신령스러운 돌보심을 입어, 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 음모가 탄로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문왕이 이찬 군관을 죽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왕은 군관에게 자살을 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임금을 섬기는 법은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요, 신하의 도리는 두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반역자 흠돌 등과 관계하여 역모 사실을 알고도 미리 말하지 아니하였다. 군관과 맏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온 나라에 포고하여 두루 알게 하라.”
김흠돌 반란에는 퇴역 및 현역 화랑이 다수 가담하였다. 이에 반란 진압 후 화랑도가 폐지되었다.
“자의태후가 화랑을 폐지하라 명하고 오기공에게 낭도의 명단을 만들어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고 직職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의 낭정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실직悉直이 가장 성행했다. 오래지 않아 그 풍속이 다시 서울에 퍼졌다. 중신들은 모두 오래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國仙이 됨을 허락했다. 화랑의 풍속은 그리하여 크게 변했다”(『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p. 140).
그 후 다시 화랑도가 부활되었지만 왕권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으며, 그 기능은 무사와는 거리가 먼 득도로 변질되었다. 화랑이 국선이라는 형태로 언제 어떻게 부활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왕실에서는 옛 화랑에 대한 숭배나 추모제사 등을 철저하게 금하였다. 간신히 살아남아서 명맥을 유지한 화랑들은 무사로서의 활동 외에도 교육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졌다. 심신을 수양하면서 제사를 받들거나 향가를 짓는 등 악사로도 활약하였다.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야성을 상실했다. 신라 중대 이후 국경이 안정되고 전란이 없는 태평성대가 지속되자 화랑의 역할도 변한 것이다. 신라인들이 숭무정신을 함양하며 삼한통일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세속오계의 정신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흠돌의 반란사건이 화랑도의 폐지와 그 변질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즉위 한 달 만에 엄청난 반란의 충격을 겪은 신문왕은 이것을 전제왕권 확립의 명분으로 삼았다. 정치세력을 재편하여 태종무열왕계에 도전하는 진골 귀족세력을 숙청하였으며, 동시에 불가피하게 통일과정에서 세력이 증대된 가야계 및 고구려계를 억눌렀다. 또 중앙 정치기구와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조직을 완비하였다.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였다. 나아가 유학사상을 강조하고 유학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불교라는 종교적 힘에 더욱 의지했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세력은 약화되었다. 박씨 세력이나 가야 및 고구려계 귀족은 점차 정권에서 소외되었다. 특히 통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전공을 세웠던 김유신 가문을 중심으로 한 가야파는 권력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삼한통일을 이룬 신라는 과연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을까?
첫댓글 잘 봤읍니다 ,,,근데요 어려워요 ,,
저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검색을 자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