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전 바둑판은 가로 세로 각 15줄 |
지난 여름, 남북한이 공동으로 발굴한 북한 개성 고려왕궁터에서 800여 년 전 국내 최고(最古)로 추정되는 고누놀이판이 나왔다.
만월대 7호 건물터였는데, 바닥을 장식한 가로 세로 30cm 짜리 벽돌(전·塼)에 새겨져 있었다. 얕은 선으로 사각형을 4개 만든 뒤 여기에 대각선을 그은 것으로, 사각형이 세 개인 오늘날의 ‘참고누’와 유사했다.
발굴단은 “왕궁 마당에서 한가하게 고누를 두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며 “벽돌 제작자들이 벽돌을 구우면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새겨 놓고 놀았던 것인데, 왕궁에까지 깔게 된 것”으로 추정했다.
말(=알)을 사용하는 놀이로는 바둑과 장기가 대표적이다.
국내에 가장 오래된 바둑판은 2004~2005년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발굴된 1300년 전 바둑판이다. 역시 흙벽돌에 만들었다.
가로 42cm, 세로 43cm에 각 칸의 너비는 평균 2.8cm로, 현대 바둑판 규격(가로 세로 약 42cm×45㎝, 각 칸 너비 2.3㎝)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이 바둑판은 가로 세로 각 15줄이며, 화점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가로 세로 각 19줄인 요즘 바둑판과는 포석 등이 달랐을 것이다. 한데 14세기 전반에 침몰된 원나라 무역선인 전남 신안 해저유물선에서도 가로 세로 각 15줄짜리 목제 바둑판이 출토된 바 있다. 바둑서지연구가 안영이씨는 “15줄로도 바둑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나 중세에는 15줄 바둑이었다는 말일까?
- ▲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하사한 바둑알통. 백제 예술의 세련미와 백제 바둑 문화의 수준이 높았음을 웅변한다. /나라박물관
- 반증 자료가 있다.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보물 창고)에 있는 바둑판은 19줄짜리다. 낙타 등 각종 동물이 화려하게 장식된 이 바둑판은 백제에서 건너갔다고도 하고, 혹은 당나라 전성기 때 것이라고도 한다. 화점이 17개(현재는 9개) 표현된 것 외에는 요즘 것과 동일하다.
쇼소인은 일본 쇼무(聖武·701~756)왕이 사망하자, 그의 명복을 빌면서 왕비가 유품을 도다이지에 바치면서 생겨났다. 일본 왕실 최고의 ‘보물 창고’이다. 쇼소인에는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년)이 당시 일본에서 대신(大臣)으로 명망이 높던 후지와라(藤原鎌足·614~669)에게 하사한 화려한 장식의 바둑알과 바둑알통도 있다. 이 바둑알은 후지와라의 손녀가 일본 쇼무왕의 비(妃)가 되면서 쇼무의 애장품이 됐다가 쇼소인에 들어가게 됐다.
쇼소인에 보물이 소장된 과정을 기록(서기 756년)한 ‘국가진보장’(國家珍寶帳)에 따르면, 의자왕은 후지와라에게 바둑알과 알을 담는 통 4개를 하사했다. 코끼리무늬 등을 장식한 목제 바둑통에는 붉은 색과 감색(紺色) 바둑알(각 160개), 그리고 흑백 바둑알(각 140개)이 담겼다. 바둑알 지름은 1.5~1.7㎝, 두께 0.6~0.9㎝이다. 이중 붉은 색과 감색 바둑알은 상아에 색칠을 한 뒤, 선을 깎아서 야생 오리와 꽃무늬 등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무늬가 없는 흑백 바둑알은 각각 석영과 사문석(蛇紋石)으로 만들었다.
‘백제 바둑알’은 백제 미술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동시에, 백제의 ‘바둑 문화’가 얼마나 수준 높았던가를 증명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은 바둑에 빠졌다가 정사(政事)를 망치고 장수왕에게 침략을 당해 죽음을 맞는 것으로 적혀 있다. 한국 바둑의 1인자 적통이 조남철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등 모두 백제의 후예, 호남 출신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이같은 ‘역사성’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바둑에 비해 좀더 대중적인 장기판이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예는 아직 없다는 게 정설이다. 충북 단양8경으로 꼽히는 사인암에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장기판이 돌에 새겨져 있다. 토지박물관이 소장한 장기판(조선시대 추정)에는 “한 수를 무르고자 하면, 사람의 아들이 아니다”(壹數欲退 非父之子)라는 문장이 장기판 한 가운데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