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이스트강 유람선 자유의 여신상 조망
유람선을 타고 한참을 질주한 곳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만났다. 거대한 청동 동상이다. 자유의 여신상 근처에는 뉴욕에서 가장 긴 다리가 있다. 아침에 크루즈 배로 진입하면서 보았던 풍경이 지금 다시 재현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의 공식 명칭은 ‘세계를 밝혀주는 자유의 상'이다. 미국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허드슨강 입구의 리버티섬에 세워진 조각상이다. 프랑스가 1886년에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횃불을 치켜든 거대한 여신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각이지만 내부에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축물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작가 프레데리크-오귀스트 바르톨디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조각했다. 내부는 에펠탑의 설계자이기도 한 구스타브 에펠이 철골구조물에 대한 설계를 맡았다. 구스타브 에펠은 미국으로 옮기기 위해 자유의 여신상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역할도 맡았다. 여신상의 받침대는 건축가 리차드 헌트가 디자인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 리버티 섬 바로 앞에는 미국 이민사를 보여 주는 엘리스 섬이 있다. 자유의 여신상 바로 곁의 엘리스 섬에는 최초 이민국 벽돌색 건물도 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엘리스 섬은 가난을 극복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 갔던 곳이다. 초기에는 영국과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같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과 중동,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주해 오자 미국은 이민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엘리스 섬에 이민국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민에 대한 심사가 매우 까다로워져 가난한 이민자와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이곳에 머물다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어머니만 이민이 허락되고 아들은 허락되지 않아 돌아가야 하는 아픔도 서려 있는 건물이다. 이민자에 대한 철저한 심사로 유명했던 엘리스 섬의 출입국 관리소는 현재 이민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1층에는 당시 이민자들이 가져온 가방과 짐을 넣어 왔던 상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민에 관련된 수많은 사연이 실린 신문기사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미국 이민사에 관하여 알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박물관 2~3층에는 세계 각국에서 뉴욕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초대형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을 보면 어떤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민 박물관 앞 공원에는 이곳을 거쳐 간 이민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후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것으로도 100년 전 자유와 희망을 찾아 기회의 땅 뉴욕으로 들어왔던 이민자들의 애환을 느끼게 한다.
자유의 여신상은 배가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참으로 웅장하고 거룩한 여인의 형상이다. 자유와 희망,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준 우정의 상징이다. 프랑스는 미국의 어머니뻘이다. 여신상이 보는 곳으로 6시간 가면 프랑스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 맨해튼 바로 앞에 있는 리버티 섬, 당시 지명 베들레 섬에 세웠다. 그리고 미국 독립 100주년인 1876년 7월 4일에 공개하기로 했다. 동상은 프랑스에서 만들고, 동상을 올려놓을 받침대는 미국에서 만들기로 했다. 나라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건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모금액은 아주 적어 추진에 힘들었다. 모금 운동은 1875년에 시작되었지만 성금이 목표한 금액보다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자유의 여신상은 1881년에야 겨우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작자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자신의 어머니를 여신상의 모델로 삼고, 얼굴의 형태를 만드는 등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이 많은 어머니가 오랫동안 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어머니를 닮은 젊은 여인을 찾아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한 여인을 찾아냈다. 자유의 여신상의 모델은 프랑스 여성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모델이었던 그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는 실물 크기로 동상을 만들기 전에 4분의 1 크기로 축소된 동상을 만들었다. 여러 번 모형을 제작하여 문제점을 해결한 뒤 본격적으로 동상 제작에 들어갔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4년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여신상은 완성되었지만 곧장 미국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준비하기로 약속한 받침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받침대를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기로 했지만 성금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 과정에서 성금 모금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유명한 신문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였다. 미국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던 퓰리처는 자신이 운영하는 ‘더 월드’라는 신문을 통해 모금에 참여해 줄 것을 시민들에게 부탁하는 칼럼을 썼다. 그 결과 1885년 자유의 여신상을 올려놓을 별 모양의 받침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에는 온 인류에게 던지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다. 자유의 여신상은 전쟁, 독재, 가난을 뒤로하고 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을 맞아 주었던 자유의 상징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오른손에는 횃불을, 왼손에는 미국 독립 기념일이 새겨진 책을 들고 있다. 1886년 이후 오늘날까지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서서, 기회의 땅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웅장한 모습의 자유의 여신상전체 높이가 93m에 달한다. 받침대만은 47m다. 여신상 높이만은 46m다. 총무게 225t 달하는 거대한 동상은 완성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운반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대한 동상을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300개가 넘는 조각으로 나누었고, 기차를 이용하여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프랑스의 항구 도시 루앙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루앙에서 현재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리버티 섬까지는 프랑스 군함으로 옮겨 왔다. 리버티 섬으로 옮겨 온 자유의 여신상을 원래 상태로 조립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별 모양의 받침대 위에서 나누어 옮겨 온 여신상을 조립했다. 조각 1개가 수백 kg이나 되는 동상을 정확하게 조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첨단 건축 기술과 거대한 장비가 있었다면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공사였다. 드디어 1886년 10월 28일, 성대한 동상 제막식 행사가 거행되었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불리게 된 것은 나중이고 동상의 원래 이름은 ‘세계를 밝히는 자유’였다. 거대한 동상을 본 뉴욕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그 이전까지 만들어진 어떤 동상보다 아름답고 웅장했기 때문이다. 독립 선언서를 들고 별 모양의 넓은 기단 위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에는 무척 다양한 의미가 숨어 있다. 우선 오른손에 들고 있는 횃불은 자유의 빛을 상징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사각형 책자는 미국 독립 선언서를 상징한 것으로 앞면에 ‘1776년 7월 4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왕관에 달린 7개의 가시는 북극해, 남극해, 남대서양, 북대서양, 북태평양, 남태평양, 인도양의 7개의 바다와 전 세계의 대륙을 의미한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긴 옷은 민주주의를 실행했던 로마 공화국을 상징한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여신상은 쇠사슬을 발로 밟고 있다. 여신상이 밟고 있는 이 쇠사슬은 노예 제도 폐지를 의미하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제작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했지만 조각상을 세우는 데 기여한 사람은 따로 있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을 만든 귀스타브 에펠이다. 그는 얇은 청동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동상 안에 철재 구조물을 설치했다. 훗날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지탱하는 철재 구조물을 만든 것을 응용하여 파리 에펠탑을 만들게 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안에는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동상 안에 각종 자료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상이 아니라 받침대 안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만드는 과정을 비롯하여 사용한 재료와 모형, 도구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자유의 여신상 꼭대기인 왕관 부분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뉴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파리를 흐르는 센 강변에는 뉴욕 리버티 섬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비슷하게 생긴 또 하나의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센 강 그르넬 다리 아래 백조의 섬에 세워진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공교롭게도 뉴욕 쪽을 바라보고 있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이 훨씬 작지만 두 여신상은 전체적인 모양과 분위기가 무척 비슷하다. 물론 뉴욕 자유의 여신상은 넓은 바다와 세계 최고의 마천루로 불리는 맨해튼을 배경으로 서 있고,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나지막한 석조 건축물이 늘어선 곳에 서 있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두 동상이 비슷하게 생긴 것은 분명하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을 두고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이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 기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지기 1년 전인 1885년 파리 시에 기증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파리 자유의 여신상의 받침대를 뺀 높이는 11.5m로 뉴욕 자유의 여신상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실제 크기로 제작하기 전에 4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모형을 만들었는데, 파리 자유의 여신상은 바로 본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축소해 만들었던 작품이다. 나는 파리 탐방에서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그 자유의 여신상도 보았다.
‘자유를 바라는 그대여, 가난에 찌들어 지친 이여, 나에게 오라. 고난에 처해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이여, 나에게 오라. 나는 황금의 문가에서 횃불을 들리라.’를 외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다. 7개 광선은 7대주를 상징한다. 횃불은 누구든 뉴욕으로 들어올 때 환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거대한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가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전쟁으로 가족과 형제를 잃은 사람과 가난과 독재 정권에서 고통 받았던 사람, 그리고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무심코 부르던 자유의 여신상이 오늘 미국 뉴욕에 와서 가까이에서 조망하며 새롭게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토록 힘들게 탄생했고, 그토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니 다시금 위대한 지구의 유산물로 가슴에 새겨진다. 세계 곳곳 지구인 모두에게 자유와 평화, 희망이 더욱 진하게 전달되길 소망한다. 유람선은 한동안 자유의 여신상 주변을 왕복으로 돌며 전신을 보게 해준다. 지금 가장 뉴욕의 남쪽 섬에 와 있다. 여기서 배를 타면 여신상 섬에 간다. 섬에 내리면 탐방하는데 최소 2시간~3시간 소요된다. 그 섬에서 배를 잘못 타면 뉴저지로 가는 배를 타게 되고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다시 뉴욕으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제 유람선은 빠른 흐름으로 달려 선착장으로 간다. 비록 자유의 여신상의 외형만 보고 가지만 참으로 보람되고 흐뭇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