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 사랑채와 별채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6) 석파정과 아소정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안채, 사랑채, 정자 등으로 구성된 고풍스러운 한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으로, 그의 호 석파(石坡)에서 명칭이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곳의 원래 주인은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으로서 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김흥근(金興根)이었다. 석파정의 주인이 김흥근에서 흥선대원군으로 바뀐 역사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또 다른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석파정의 주인이 바뀐 까닭은?
석파정의 원래 이름은 ‘삼계동(三溪洞) 정사(精舍)’였다. ‘삼계동’이라는 말은 세 개의 시냇물이 모이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이곳은 인왕산 자락에서도 계곡이 깊고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다. 바로 이 근처의 무계동 계곡에는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이 세운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었다. 인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무계동 계곡을 배경으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사랑채 안쪽에는 '석파정'을 사랑했던 흥선대원군이 사용하던 방이 있다.
김흥근이 삼계동 정사라고 이름을 짓기 전 이곳은 숙종 대의 문신인 조정만의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석파정 앞 계곡의 바위에는 1721년(경종 1)에 새긴 ‘소수운렴(巢水雲廉:둥지와 같은 물과 구름이 드리운 집)’이라는 글씨를 볼 수가 있다. 조정만의 별장이 위치했던 석파정은 철종 대 이후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 김흥근(金興根):1796~1870)의 소유가 되었고, 삼계동 정사로 불렸다.
인왕산 자락에 풍광이 뛰어나고 계곡이 흐르는 곳에 위치한 삼계동 정사를 탐낸 인물은 흥선대원군이었다. 1863년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올린 후 섭정을 통해 최고 권력자가 된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의 별장을 차지하고 싶어했다.
한국과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조화된 석파정(정자)
어느날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에게 하루만 별장을 빌려 달라고 한 후, 고종을 이곳으로 모셔왔고 주무시게 하였다. 현재 석파정 위쪽 건물에는 고종이 머물렀던 방의 모습을 기억하도록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왕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왕 소유가 되기 때문에 김흥근은 실질적으로 강탈을 당하였고, 결국 흥선대원군의 소유로 넘어갔다.
삼계동 정사를 차지한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바위 언덕이 많은 것에 감탄하면서, 자신의 호를 ‘바위 언덕’이라는 뜻으로 ‘석파(石坡)’라 하였다. 이후 삼계동 정사는 ‘석파정(石坡亭)’으로 바뀌게 되었다.
바위산으로 유명한 인왕산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거대한 바위 '너럭바위'는 코끼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코끼리 바위'로도 불린다.
건물은 총 8채로 구성되었는데, 안태각(安泰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등이 있다. 본채 건물이 위치한 곳 앞에는 넓은 바위가 있고, 바위에는 ‘삼계동(三溪洞)’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계곡 위쪽에 있는 유수성중관풍루는 청나라 양식을 가미하여 그 모양이 특이하다. 석파정 가장 위쪽에는 매우 큰 바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코끼리와 닮았다고 하여 코끼리 바위라고 불린다. 인왕산의 영험한 기운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흥선대원군 사후 석파정은 고종의 친형이자 흥선대원군의 장자인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 흥친왕의 아들 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鎔), 이준용의 양자가 된 이우(李鍝:의친왕의 차남)에게로 세습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뒤에는 천주교에서 코롬바 고아원으로 사용했으며, 이후에 개인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에도 여러 번 경매에 오르는 등 소유자가 자주 바뀌었다.
2012년 석파정 입구에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개관했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그러나 문화재 보호 구역이라 소유권 이전이 쉽지 않았고, 군사시설 보호구역인 점도 재산권 행사에 불리하게 다가왔다. 오랜 기간 비공개 지역으로 묶여 있던 이곳은 2006년 안병광 유니온약품 그룹 회장이 이곳을 낙찰받아 석파정 입구에 미술관을 설립하면서 공개 지역으로 바뀌었다. 2012년에 개관한 미술관의 이름은 ‘석파정 서울미술관’이고 석파정은 미술관을 통하여 입장할 수가 있다.
석파랑 내에 있는 석파정 별당
현재의 석파정에서 홍지문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석파랑(石坡廊)’이라는 전통 한옥 모양의 음식점이 보인다. 그리고 석파랑의 위쪽에 한옥에 벽돌로 벽을 쌓은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석파정 경내에 같이 있었으나 1958년에 서예가 손재형(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자신의 집 바로 위인 현재 자리로 옮겨, 작품 활동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석파정 별당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석파정 본채 건물과 함께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받았다. 1981년 손재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옥은 타인 소유로 넘어갔으며, 1993년에는 한정식 식당 석파랑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건물 측면 끝마다 붉은 벽돌로 쌓은 벽을 두었으며 벽 가운데에 창을 두었는데 서쪽 창은 원형, 북쪽 창은 반원형, 동쪽 창은 사각형이다.
석파랑 안채와 동산에 위치한 석파정 별당
전통 한옥 양식이지만, 외관은 19세기 후반 유행한 청나라 건축 양식의 영향을 가미한 모습이다. 석파정 별당과 비슷한 양식의 건물로는 종로구 부암동에 위치한 부암정(傅巖亭)이 있다. 부암정은 19세기 개화파 윤웅렬(尹雄烈), 윤치호(尹致昊) 부자의 별장이다.
권력을 잃은 후에 거처했던 공간, 아소정
석파정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대표적인 별장이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에 있었다. 현재 서울디자인고교 자리에 위치해 있는 아소정(我笑亭)이 그곳이다. 석파정이 흥선대원군이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김흥근에게 강제로 뺏은 별장이라면 아소정은 권력을 잃은 시기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공간이다.
흥선대원군은 근대사의 전개와 함께 부침을 거듭한 인물이었다. 1863년 고종의 즉위를 계기로 섭정을 했지만 10년 만인 1873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의 섭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최익현(崔益鉉)의 상소가 결정적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별장 아소정에 걸었던 현판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추대하여 정치 일선으로 이끌었다. 잠시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개화 기구를 폐지하고 군대 구조를 예전과 같이 돌리면서 권력 회복에 나섰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임오군란은 실패로 끝나고, 흥선대원군을 통제하기 인물로 파악한 청나라는 그를 톈진으로 압송하였다.
많은 수모를 당하며 3년간 유폐 생활을 한 대원군은 난초 그리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이때의 난초 그림 석파란(石波蘭)은 청나라에서도 유명해졌다.
1885년 청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을 조선으로 돌아가게 했다. 청나라에서 벗어나려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아소정은 말년을 보낸 대표적인 별장이었다. ‘아소정’은 흥선대원군 시 ‘아소당(我笑堂: 내가 웃는 집)’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는 장지연이 편한 대동시선에 수록이 되어 있다.
내가 날 저버렸으니 그 책임 가볍지 않구나
나랏일 물러나 한적한 날 술잔만 기울인다
지난 일들 모두가 꿈이었구나
남은 삶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전생과 이생을 생각하며 웃는다
- 대동시선, 장지연 편, 아소당(我笑堂)
아소당(我笑堂) 의 마지막 부분에, ‘나는 전생과 이생을 생각하며 웃는다(我笑前生又此生:아소전생우차생)’라 쓰고 있다. 이태백의 유명한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도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나에게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웃으면서 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한가롭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 시와도 제목과 의미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날 일제는 아소정에 머물던 고령의 흥선대원군을 경복궁 앞으로 오게 했다. 명성황후 살해를 계획하면서 며느리와 대립했던 흥선대원군 세력이 주도한 일로 꾸미려는 의도였다. 마지막까지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흥선대원군은 1898년(고종 35) 2월 2일 79세의 나이로 운현궁 노안당(老安堂)에서 생을 마감했다.
흥선대원군은 1898년(고종 35) 운현궁 노안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부인 여흥 민씨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만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었다. 『고종실록』 1898년 2월 2일의 기록에는 흥선대원군이 승하하자 고종이 조령(詔令)을 내려, 장례를 주관하는 예장청(禮葬廳)을 설치하고 대원군 부인과 합장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보인다.
흥선대원군의 무덤 흥원(興園)이 처음 조성된 곳도 말년에 자주 머물렀던 아소정이었다. 아소정은 당시 공덕리 본궁으로 불렸음이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흥선대원군 묘소는 1906년 파주시 대덕리로 이장하였다가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소정 자리에 흥선대원군의 묘소가 위치하면서 한때 이곳을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소정은 해방 후 국유지가 되었고, 1955년 동도공업 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개교하였다. 아소정의 건물 상당수는 동도공업 고등학교 증축 공사 때 헐려서 일부는 서대문구 봉원사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우물의 디딤돌만이 남아 있다. 봉원사의 대방(大房) 건물은 아소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도공업 고등학교는 2004년 서울디자인고로 교명을 바꾸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흥선대원군 권력의 상징은 ‘석파정’, 그리고 권력에서 물러나 스스로 웃을 수밖에 없었던 집 아소정은 흥선대원군의 빛과 그늘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이다.
◆출처 : 내 손안의 서울 2023.05.10.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