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지1 - 신앙의 힘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도 한풀 꺾인 지난 주, 충남 보령으로 내려가는 고등학교 동기 2명과 동행하게 되었다. 수원에서 10시에 출발한 차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보령시 오천항에 있는 영보정(永保亭)에 도착했다.
이 곳은 조선시대 서해 방어의 요충이었던 충청수영성내 정자로서 천수만 입구의 여러 섬들과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한다.
과연 영보정에 올라 바다 안쪽에 들어선 포구와 고깃배들을 굽어보니 평화로운 바다 정취가 기막히다. 누각 안쪽에 걸려있는 다산 정약용의 유람기를 보면서 그도 같은 감흥이었으리라.
점심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기부부를 만났다.
졸업한지 50년만에 만나본 그는 아주 오래전 이곳에 정착하여 교회에 다니면서 목가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속을 씻어낸 듯한 그들의 편안한 표정에서 묘한 동경과 부러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오후에 근처에 있는 갈매못 순교지를 찾았다. 이른바 1866년 병인박해의 현장 중 하나이다. 원래 천주교를 그리 적대시하지 않았던 당시의 실력자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와 프랑스의 중국 침입 등 국제정세의 급변에 따라 들끓는 국내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돌연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1871년까지 무려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하였다.
이곳 갈매진두에서도 약 500명의 천주교신자들이 희생되었는데, 특히 프랑스 출신의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비롯하여 위앵과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황석두 5명의 순교 모습이 소개되어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하게 소천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찡한 신앙의 힘을 절감한다.
순교지 뒷편 언덕위에 세워진 승리의 성모대성당의 노천강당에는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자다' 는 다블뤼 대주교의 말씀이 적혀 있었다.
# 페이지 2 - 최치원과 김시습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 사찰이었다는 성주사지(聖柱寺址)에 들렀다. 통일신라 말엽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선종(禪宗)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전을 통하여 수행한 교종(敎宗)과 달리 별도의 불경을 터득하지 않고도 참선과 마음만으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종파이다.
절터 현장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소실되고 몇개의 석탑과 석등만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지만 중문, 석등, 석탑, 금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의 백제식 가람배치를 감안하면 꽤나 큰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금당이 있었던 자리옆에 이 절을 일으킨 무염대사(無染大師, 801~888)의 행적을 기록한 대낭혜화상탑비(大郎慧和尙塔碑)가 보였다.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된 탑비는 1천여 년의 풍상에도 수려한 풍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08?)이 지었다는 비문을 보면서 그를 생각해 본다.
최치원! 육두품출신으로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것으로 유명한 그는 귀국후 신라조정에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며 관료로 활동하였지만,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한 세태에 염증을 느껴 말년에 해인사로 은둔하였다 한다. 특히 유불선儒佛仙)에 모두 조애가 깊어 자연과 벗하며 전국산천을 주유하면서 바위나 사찰의 탑비문 등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 어떤 섭리가 통했을까? 다음 날 인근의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초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거의 평생동안 불가에 몸을 담았던 그는 한때 환속했었으나 결국 이곳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어릴 적부터 시문에 밝아 세종의 귀여움을 받았던 그가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중 세조의 왕위 찬탈소식을 듣고 관직을 포기하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였다. 나름의 정의가 무너졌다는데 절망했으리라. 그가 썼다는 금오신화에 꿈, 귀신, 저승 등을 소재로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볼 때, 멀리 도피하고자 하는 그의 심중을 짐작할 수 있다.
유불선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던 그가 직접 그렸다는 자화상을 보니 초롱한 눈매사이로 만사를 초월한 담백함이 느껴진다. 그의 체취가 묻어 있을 무량사 역시 본당인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고즈녁하고 안온한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건데, 고운과 매월당은 그 뛰어난 자질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뜻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은둔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인생이라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50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그들이 서로 만났다면 무슨 말을 주고 받았을까?
다른 길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의 소신을 존중한다. 아무튼 그들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무량사 우화궁 주련에는 진묵대사가 남겼다는 호방한 시가 눈에 띈다.
"하늘을 이불 땅을 요삼아
산을 베개하며 누웠으니
달을 촛불 구름을 병풍
서쪽 바다는 술항아리가 되도다
크게 취하여 문득 춤을 추다가
내 장삼을 천하 곤륜산에 걸어두도다"
# 페이지 3 - 국가 이데올로기
호족들의 도움으로 개국한 고려는 제 4대 광종에 이르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등 시행을 통하여 호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통일신라 시대 이래 귀족종교였던 불교가 본격적으로 대중신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조성된 불상 중의 하나가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알려진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도 소개됐던 이 석불은 18.12m의 거구로 보관을 쓴 얼굴부분이 크게 강조되어 상하반신의 균형이 맞지 않는 투박한 형상이지만, 최근들어 그 역동성과 서민에의 친근감이 재평가되어 국보(323호)로 승격되었다.
1743년(영조19년) 경내에 세워진 관촉사사적비에 따르면 광종19년인 968년 혜명대사가 석공100명과 함께 착공한 이래 무려 38년만인 1006년에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미륵불(彌勒佛)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지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이 땅에 현신하신다는 부처로서 직접 다가가 보니 과연 부처님을 상징하는 장삼자락이 나풀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앞에는 4각 화사석이 특징인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의 석등과 화강암으로 조성된 장방형의 배례석이 일직선으로 자리잡고 있어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던 당시의 시대이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연이어 찾아간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조선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648~1631)과 그 제자들을 모신 사당 겸 학당이다.
송나라 주자의 가르침을 받든 주자성리학에 의한 국가이념을 신봉했던 그는 이이(李珥, 1536~1584), 송익필(宋翼弼, 1534~1599)로 이어지는 서인에 속하였지만, 정치 당쟁에 몰두하기 보다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예도(禮道)' 에 기반한 국가 기강을 확립하려 했다.
이를 강조하듯 그를 모신 사당에는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의 숭례사(崇禮祠)란 현판이 걸려있었다. 사당 내부에는 주향인 사계 김장생을 중심으로 제자였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 ~1672),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고, 출입문 양편에 쳐진 담장에는 그들의 예학정신을 보여주는 듯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이 온갖 것을 등에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서원의 강학공간인 양성당(養性堂)과 응도당(凝道堂) 등을 둘러보면서 사계 김장생의 제자들이 나중에 노론의 핵심 세력이 되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소홀히 한 당쟁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씁쓸한 감을 지울수는 없을 것 같다. 예학을 위한 순수한 열정이 변질되면 오히려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수도 있는 법이다. 인간 세상은 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니까~
이 돈암서원을 포함한 우리나라 9개의 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페이지 4 - 소명의 길
무릇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문화 체계라고 한다면, 신의 섭리이든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든 그 영혼은 고귀할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종교는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늘 부침을 겪어왔다. 자칫하면 국가 이데올로기 구축을 명분으로 한 정쟁의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민주공화정에 들어서도 공동체의 유지발전을 위한 국가와 개인간의 협조와 견제관계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영원한 숙제임을 감안할 때, 종교의 역할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번 여정 중 보령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류칠현 목사님을 뵙고 나서 종교가 가지는 인간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전 참좋은교회의 목사인 그는 기도중에 터득한 의술로 보령 별채에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 선교를 곁들인 기맥침술로 환우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고 있었다. 또한 수시로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등 아시아권 빈민들을 위한 의료를 비롯하여 구호품과 장학금 제공, 집수리 등의 봉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구한말 서양 열강들의 치열한 이권 다툼속에서도 순수한 열정으로 우리나라의 의료, 교육, 계몽에 헌신하신 젊은 선교사들에 새삼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세운 아펜젤러,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 언더우드, 이화학당을 열은 스크랜튼 부인, 초대 YMCA회장이었던 언어학자 호머 헐버트, 광혜원에 거액을 기부한 루이스 세브란스 등등 많은 기독교 목회자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사랑을 실천했다.
당시 문명의 그늘에 허덕이던 우리 백성들에게 개화의 불씨를 가져다 준 그들은 이름없이 빛도 없이 그 어떤 댓가도 없이 주어진 소명(召命)의 길을 걸어 갔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임마뉴엘 칸트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