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현(香峴)
박두진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다른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문장>(1939)-
해설
[개관정리]
◆ 성격 : 역동적, 남성적, 상징적, 자연친화적
◆ 표현 : 반복과 영탄을 통한 힘찬 율동감 표현
역동적 심상, 상징적 시어 사용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큰 산 그 넘어 산 안 보이어 →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
*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 시야를 막고 있는 앞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 2연 → 구름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산의 모습
온갖 동식물들이 뒤엉켜 살벌한 살육을 벌이고 있는 산의 모습
당시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어지러운 조국의 모습, 폭발 직전의 고요한
침묵의 상태.
* 사슴, 산토끼 → 일제 말기 우리 민족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말
* 누거만년 → 오랜 세월. 피압박의 악평온의 세월
* 지리함즉 하매 → 지리할 대로 지리할 것 같으므로
*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
→ 식민지하의 암담한 현실을 타개할 만한 혁명과 대변혁
강자에 의한 폭력과 불의를 사르는 정의의 불꽃
* 4연 → 답답한 세월과 침묵의 세월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혁명과 대동란이 화산
터지듯 일어나기를 갈망
혁명을 염원하는 완곡한 표현
무기력과 감상에서 벗어나 의욕적이고 대담한 자세를 보여줌
* 5연 → 선과 악, 약육강식, 힘과 힘의 투쟁의 원리 등을 부정하고 영원한 평화와
공존, 화해와 이상을 표현함(주제연)
대담한 혁명을 갈망하면서도 강자와 약자가 공존 공생하는 절대적 이상향을
추구함.
◆ 주제 : 영원한 화합과 평화에 대한 갈망
갈등을 극복한 평화와 공존과 화해와 이상의 세계 갈망
◆ 제목(산) :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인간 세계 비유
다양한 존재들을 포용하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의 세계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암담한 현실에 대한 인식
◆ 2연 : 대립과 갈등의 현상
◆ 3연 : 대립과 갈등의 현상
◆ 4연 : 현실 극복에 대한 기원
◆ 5연 : 화합과 평화에 대한 갈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일제 말기의 극한 상황을 인종(忍從)으로 초극하며, 새로운 세계의 도래(到來)를 기다리는 뜨거운 열망이 표백(表白)된 작품으로 <해>와 시상 전개 방법이 매우 유사하다. '여우'·'이리' 등으로 대표되는 '악'[악마 ― 파괴]의 표상과 '사슴'·'토끼' 등으로 대표되는 '선'[천사 ― 평화]의 표상이 함께 등장하는 '산'은 바로 선·악이 함께 뒤엉켜 존재하는 인간 세계이자 역사 발전의 장애 요인의 이미지로서 당시의 현실 상황을 상징한다.
화자는 숨막히는 일제의 폭압 아래서, 첩첩한 산 너머 존재하는 광명(光明)의 세계를 보기 위하여 '둥둥 구름을 탄다.' 그가 구름 위에서 내려다 본 산에서는 온갖 동식물이 뒤엉켜 생존을 위한 살벌한 살육(殺戮)을 벌이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당시 조국의 어지러운 현실 모습인 것이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개벽(開闢) 이래 오랜 세월 동안 그저 침묵하며 바라보고만 있는 산들은 아마도 지리할 대로 지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산마루에서 '대변혁' ― 혁명을 상징하는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죄다 불타 버린 그 산에 다시 풀나무와 짐승들이 하나 둘 모여 살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선과 악, 약육강식(弱肉强食), 힘과 파괴로 얼룩진 투쟁의 역사가 모두 사라지고, '핏내 잊은 여우 이리가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평화와 공존, 화해와 복락(福樂)의 종교적 이상 낙원이 달성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박두진 : 시인
출생 : 1916. 3. 10. 경기도 안성
사망 : 1998. 9. 16.
데뷔 : 1939년 문장 등단
수상 : 1993년 제15회 외솔상,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1988년 인촌상
작품 : 도서 60건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시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등을 발표하였다.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1998년 타계하였다. 『청록집[공저]』(1946),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야생대』(1981), 『포옹무한』(1981)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1984년에는 범조사에서 『박두진 전집』을 간행하였다. 이외에도 수상집으로 『생각하는 갈대』(1970), 『언덕에 이는 바람』(1973), 『그래도 해는 뜬다』(1986)와 시론서 『한국현대시론』(1970),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1976) 등이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3‧1문화상(1970), 예술원상(1976) 등을 수상하였다. 박목월‧조지훈과의 공저인 『청록집』은 일제 말기 한국인의 겨레 인식과 저항적 자세를 주로 자연을 제재로 하여 시화하고 있다. 「향현」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침묵 속에 지내온 산에서 힘차게 치솟아 오를 저항과 창조의 불길을 예기하는 시상을 드러내어 일제 치하의 암울함을 의기(意氣)로써 이겨내는 분노의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의식은 일제에 의해 민족주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인식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저항 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묘지송」에서도 죽음의 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예견하는 햇빛을 노래하여 조국의 미래를 소생케 하는 늠연한 기상을 종교적 의미까지 함축하면서 드러내었다. 또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부정적 힘에 대한 정면 대결의 시상을 펼쳐보여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평화 공존을 형상화한다.
박두진의 초기시는 이처럼 전통적인 여성적 정한(情恨)에서 벗어나 남성적인 기개(氣槪)를 시화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작품에 수용된 자연은 근원적으로는 순응과 화합의 지혜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창조적 결단성이나 생성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해방 후에 쓰여진 「해」는 신생 한국의 창조적 의지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후 『하얀 날개』에 이르기까지 박두진은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다루면서, 이념적으로는 절대적 가치의 추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치 추구의 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후기 시편들에서는 세속적 삶을 순화하며 혁신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즉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 무한』 등에 걸쳐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그것을 희생적으로 극복해 가는 시적 자아의 의기와 함께 구도적 정신의 높은 표적을 향한 시심의 심화를 보게 된다.
<경력사항>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수상내역> 1956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1962년 서울시문화상, 1970년 3‧1문화상,
1976년 예술원상
<작품목록>
청록집, 해, 현대시집 Ⅲ, 오도, 박두진시선, 시와 사랑-자작시 해설,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한국현대시론,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수석열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야생대, 예레미야의 노래, 포옹 무한, 해, 박두진전집, 해, 박두진 시집,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 박두진 전집, 그래도 해는 뜬다, 별들의 여름, 돌과의 사랑
돌의 노래, 불사조의 노래, 성고독, 일어서는 바다, 가시면류관, 들의 노래, , 서한체
빙벽을 깬다, 폭양에 무릎 꿇고, 고향에 다시 갔더니, 숲에는 새 소리가,
시적 번뇌와 시적 목마름, 한국 현대시 감상, 낙엽송, 도봉, 청산도, 향현, 묘지송, 비
[네이버 지식백과] 박두진 [朴斗鎭]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첫댓글 산이 품고 있는 것들
감사합니다
어제는 만나뵙고 악수도 못하고
헤여 졌습니다. 너무 아쉬웠어요.
저도 행사마치고 다른 약속이 있어서
더이상 머무를 수 없어서. 그냥 뒤돌아
왔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런지요?
암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이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