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절은 원래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양사(華陽寺)라고 이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의상이 중국에서 돌아와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다시 전국에 화엄10찰을 지어 전교(傳敎)했다고 하였는데 이 화엄10찰 중에는 화양사가 들어있지 않다. 또한 현재 절에는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며, 미륵전에 봉안되어있는 미륵불이 고려 말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늦어도 고려 말기 이전에는 절이 창건되어 있었다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창건 이후 절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395년(태조 4)에 이 절의 등불이 궁궐에까지 비친다고 하여 용마산 아래의 군자동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중곡동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이후 절은 조선 후기에 번창했던 것 같다. 서울시립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 나타난 화양사의 모습은 중앙의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회랑이 둘러져 있고 미륵당이 앞쪽에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김정호가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1851(철종 2)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편찬한 『여도비지(與圖備志)』에도 화양사란 절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화양사는 19세기경까지 사세를 유지해 왔고 또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07년에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겨 영화사로 고쳐 불렀으며, 1909년에 도암(道庵)스님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1992년에 송월주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는데 옛 극락전을 허물고 대웅전을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주문, 설법전, 불교회관 등을 연차적으로 건립하였다.
영화사 입구 안내석
영화사 일주문
영화사 불교회관
영화사 대웅전
영화사 대웅전내
영화사 요사
영화사 삼성각
삼성각내 칠성탱
삼성각내 산신탱
삼성각내 독성탱
영화사 미륵불상
미륵전에 봉안된 미륵불상은 높이 약 4m, 너비 1.7m 두께 약 40cm의 중량감 있는 거체불(巨體佛)로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원각상이기는 하지만 신체는 장방형의 석재를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편편하면서 각이 져있고 조각이 부조에 가까워 입체감은 다소 떨어진다. 육계를 갖춘 소발의 머리와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에 커다란 귀를 갖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으로 안에 내의와 띠매듭이 보이나 옷주름이 도식적이다. 수인은 왼손은 여원인(與願印)을 하고 있고 오른손은 아래로 반듯이 내리고 있다. 원래 머리 위에는 둥근 갓돌이 올려져 있었으나 불상을 실내에 봉안하면서 갓은 미륵전 옆에 내려놓았다. 미륵불은 전신에 호분이 칠해져 있어 본래의 모습을 잘 알아 볼 수 없으며, 머리에 비해 어깨가 좁아 전체적인 비례도 맞지 않는다.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미륵불은 본래 중곡동의 옛터에 있던 것을 여러 대의 우마차를 동원하여 며칠에 걸쳐서 옮겨왔다고 한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가 많이 훼손되어 있는데 이는 민간에서 불상의 신체 일부를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에 따른 기자(祈子)신앙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영화사 미륵전
영화사 석가탄신 공휴기념비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1986년에 건립되었다. 방형으로 2단을 기단을 마련한 후 그 위에 귀부와 몸돌이 올려져 있는 모습으로 지붕돌 위에는 탄생불이 서있다.
영화사 찾아가는 길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에서 광장사거리방향으로 가다 나오는 첫 번째 사거리에서 삼일주유소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아차산길로 들어선 다음 계속 직진한다. 약 500m 쯤 갔을 때쯤 나오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0m 정도를 가게 되면 동의초등학교가 보이며, 그 옆으로 영화사의 일주문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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