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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8코스(운림산방-남도국악원)
여행일 : ‘22. 7. 30(토)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의신면과 임회면 일원
여행코스 : 운림산방→운림예술촌→옥대마을→의신면소재지→만길마을→원두마을→송정마을→죽림마을→탑립마을→귀성삼거리(거리 및 시간 : 24km, 실제는 돈지마을에서 죽림마을까지 10.58km를 2시간5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 해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8코스를 걷는다. 7개로 이루어진 진도구간(123.8km)의 세 번째 코스이기도 하다. 이 구간은 김통정 장군의 퇴각로와 여러 곳에서 겹치는 아픈 역사의 길이다. 또한 돈지에서는 국견인 진돗개의 진수도 엿볼 수 있다.
▼ 들머리는 운림산방 주차장(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서영암 IC에서 내려와 일단 진도까지 온다. 18번 국도를 타고 진도읍으로 들어와 남동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왕온로’로 옮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운림산방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운림산방·첨찰산·쌍계사·상록수림 등이 있는 사천리 일대는 ‘사천관광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렇다고 관광진흥법에 근거한 관광지는 아니다. 그저 진도군이 관내 관광지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지리적 권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 ‘운림산방’과 ‘구성삼거리(남도국악원)’를 잇는 구간으로 길이가 24km나 된다. 그래선지 산악회에서는 ‘죽림갯벌체험장’까지 16.5km만 걷겠단다. 나머지 7.5km는 9코스에 추가시키겠다며. 우리 부부는 그보다도 더 줄여 의신면소재지인 ‘돈지’마을에서 시작했다. 볼거리도 없는 산길보다는 역사유적지인 ‘왕온 묘’를 둘러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다. 거대한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호국정신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이겠는가.
▼ 버스가 들어왔던 길(진도읍 방향)을 되돌아 나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버스에 남았다. ‘왕온 묘’가 있는 삼거리(‘왕온로’와 ‘운림산방로’, ‘돈지로’가 나뉜다)까지 버스로 이동시켜준다는 황사장님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 코스를 단축하면서까지 둘러보고 싶었던 ‘왕온 묘(王溫 墓)’의 주차장에 도착하니 ‘왕무덤재(또는 왕고개)’가 눈에 들어온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왕온’이 몽골 장수 홍다구에게 붙잡혔다는 곳이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용장성이 무너진 뒤 진도읍 방향으로 퇴각했으나 끝내 저 고개를 넘지 못했던 모양이다.
▼ 왕온은 ‘논수골(사천리 ‘사하마을’의 빗돌에 ’논수동‘이란 지명이 병기되어 있다)’에서 참살(慘殺) 당했다. 당시 고려군은 그의 참수를 반대했었다나? 목을 치느냐 마느냐로 논란을 벌였다고 해서 논수동(論首洞)이란 지명이 붙었고, 논수동 옆 개울은 삼별초군의 피로 물들었다고 해서 핏기내란 이름을 얻었다. 아무튼 그의 시신은 누군가에 의해 수습되었고 부근 산자락에 묻혔다. 이를 지자체에서 발굴해 역사유적지(기념물 제126호)로 보존·관리해오고 있다.
▼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석등으로 치장해 왕릉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맞다. 고려 정부로서는 반란군의 수괴(首魁)에 불과했겠지만 삼별초를 위시한 남녘 땅 사람들에게 ‘왕온’은 어엿한 왕(王)이었다. 진도를 황도(皇都)라 부르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니 말이다. 주변 섬과 육지를 공격해 터전을 넓혔음은 물론이다. 완도에 송징, 남해에 유존혁, 제주에 이문경을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 하지만 무덤은 ‘왕릉’으로서의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크기(직경 7m/ 높이 2.5m)도 작을뿐더러 석물도 보잘 것이 없었다. 무덤 앞 작은 문인석만이 연민을 자아낼 뿐이다. 참! 왕온의 묘 아래 2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무덤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이 묻혀있다고 한다.
▼ 실질적인 트레킹은 ‘의신119지역대’에서 시작했다. 돈지마을(의신면 소재지)의 뒤쪽으로 지나가는 18번 국도변에 위치하는데, 운림산방에서 시작된 서해랑길 8코스가 소방서 앞에서 마을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 이정표는 8코스의 길이를 24km로 적고 있다. 또한 이곳이 출발지에서 7.1km 떨어진 지점임을 알려준다. 산악회의 버스가 주차된 죽림갯벌체험마을은 종점을 7km쯤 앞둔 지점이다. 결과적으로 9.8km만 걸으면 되는 셈. 모처럼 ‘느림의 미학’이라도 추구하며 걸어볼 일이다.
▼ 진도농협의 울금가공사업소 안으로 들어가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울금(蔚金)’은 생강과에 속하는 ‘뿌리채소’다. 혈관청소와 염증치료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데, 국산 생산량의 70%가 이곳 진도에서 생산된단다. 진도에서 생산되는 울금을 모아 상품화시키는 공장이라고 보면 되겠다.
▼ 울금은 항암과 항염증에 탁월한 ‘커큐민’ 성분이 다량 함유되었다는 뉴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 축적되는 독성을 분해한다는 연구도 나왔다. 각종 식중독 원인균인 살모넬라와 비브리오균 등의 생육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단다. 그러니 집산지인 이곳에 울금판매장 하나쯤 없겠는가. 울금 분말을 활용한 ‘스파’까지 만들어 힐링과 쇼핑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했다.
▼ 탐방로는 ‘돈지(墩地)’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돈지’란 지명은 옛날 이곳에 돈대(墩臺)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만큼 요충지였다는 얘기고, 그게 지금은 의신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마을 앞 들녘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최후 싸움터이기도 했다.
▼ 이곳 돈지마을은 진도의 4대 생활권 중 하나로, 진도읍장 다음으로 큰 ‘의신장(義新場)’이 열린다. 매달 1·6일에 장이 서는데, 의류·과일류·생선류·반찬류까지 다양한 거래가 이루어진단다. 김과 미역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거래가 이루어진다니 날짜를 맞추면 질 좋은 특산품도 사갈 수 있겠다.
▼ 앗!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나? 이런 시골에서조차 부부 공동으로 문패를 달았는데,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은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있으니. 니것 내것 없이 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 돈지마을의 또 다른 명물은 ‘진돗개’다. 우리나라 개 중에서 진돗개가 한국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아무리 잘 먹고 편한 환경에 보내주어도 원래의 주인을 찾아가는 충직성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복단할머니의 ‘백구’다.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7개월 만에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돌아왔다. 길러준 주인을 잊지 못해 대전에서 진도까지 팔백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온 것이다. ‘백구테마센터’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일종의 기념관이다. 1층에 도·농 교류실과 북카페, 2층에는 다목적실(숙소 포함)을 배치했다.
▼ 운동장에는 ‘돌아온 백구’를 기념하는 여러 조형물을 세웠다. 백구는 1988년 돈지마을 박복단할머니 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대전으로 팔려간다. 하지만 7개월 만에 뼈와 가죽만 앙상한 채로 300km를 걸어 주인에게 되돌아왔다. ‘한번 주인이면 영원한 주인’인 이야기가 알려지자 백구는 탁월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모 컴퓨터회사의 광고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때 받은 모델료는 박 할머니의 식구가 사경을 헤맬 때 병원비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귀소본능에 충직성까지 더했다고나 할까? 요즘 정치인들에게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밥그릇 싸움이나 하는 정치인들이 백구로부터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 백구는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새끼까지 낳고 살다가 2000년 2월 13세의 나이로 주인 품에 안겨 숨졌다. 이런 백구의 얘기는 동화 ‘돌아온 진돗개 백구’와 애니메이션 ‘하얀마음 백구’로 세상에 알려졌고, 지금 우리가 둘러보고 있는 테마센터까지 세워졌다. 참! 그 옆에는 처녀의 몸으로 돈을 벌어 마을 발전을 위해 거금을 희사했다는 ‘희령 조희균여사’의 송덕비도 세워져 있었다.
▼ 종합안내판은 돌아온 백구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곳에서 열리는 논배미축제를 소개하고 있었다. 추수 후 논에서 즐기는 축제로, 짚공 차기·굴렁쇠 굴리기·벼가마 지고 달리기·논미꾸라지 잡기·물동이 이고 나르기·말뚝박기 등 어린 시절에 논배미에서 즐겁게 놀던 놀이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 ‘의신 들소리비’도 보인다. ‘의신들노래’는 지산면(진도군) 일원에서 불리던 남도들노래(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 51호)에 대비되는 노래로 의신면 일대에서 논일을 하면서 불렀다고 한다. 노래의 구성 등에 대한 설명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대체 뭔 소린지...
▼ 돈지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이제 널따란 들녘의 한가운데로 향한다. 돈지벌판은 패퇴하던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게 또 한 차례 살육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는 시체가 널렸다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많은 시체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 요즘은 과학영농이 대세다. 생명공학을 활용한 품종개량, 농업기계화, 정보기술을 활용한 관리시스템 도입 등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일지니 저 깃발에 적혀있는 항공방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 고개라도 돌려볼라치면 돈지권역의 전원풍경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돈지마을을 위시하여 향교마을, 옥대마을 중리마을을 포함하는데, 신비의 바닷길로 나가는 길목이며, 삼별초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 돈지들녘은 의신천(이정표 : 종점 15.6㎞/ 시점 8.4㎞)의 풍부한 물길이 흐르면서 옥토로 변한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에서 발원했으니 수량이 풍부할 것은 당연, 거기다 옥대천과 청룡천까지 보태 몸집을 부풀리며 들녘을 지나간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0분, 의신천을 건너 만길재로 향한다. 이 길은 김통정장군의 퇴각로이기도 하다. 논수골과 돈지들녘에서 연이어 패한 김통정은 저 고개를 넘어 금갑진으로 가서 배를 구해 제주도로 탈출하고, 확인되지는 않지만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 첫 만남은 ‘궁녀둠벙(또는 여기·급창 둠벙)’이다. 김통정과 함께 퇴각하던 여기(女妓)·급창(及唱)·궁녀 등이 몽고군에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며 몸을 던졌다는 연못이다. 간척공사로 메워진 탓에 지금은 비가 와야 물이 차고 크기도 손바닥만 하게 변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오는 날이면 둠벙에서 여인네 우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나?
▼ 궁녀둠벙은 백제 멸망 때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에 비견(규모는 작지만 바위절벽도 있다)되는 전설을 지녔다. 그런 호재를 지자체에서 놓쳤을 리가 없다. 유형유산(4호)으로 지정한 다음 둠벙에 난간까지 둘러 보호하고 있었다. 쉼터용 정자(동백정)를 지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 5분쯤 걸어 올라선 고개는 ‘만길재(이정표 : 종점 14.9㎞/ 시점 9.1㎞)’이다. 삼별초의 궁녀들이 이 고개를 넘다 몽고군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넘지 못했다는 마음 아픈 고개이다. 이 고개 너머에는 ‘부녀동(‘여인들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現 거룡리 ‘신정마을’이다)’이란 지명도 있다. 삼별초군이 함께 데려 갈 수 없는 부녀자들을 남겨놓고 갔다는 곳이다.
▼ 만길마을로 향한다. 김통정 군은 이 부근에서도 많은 시체를 남기며 패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지명이 ‘송장등(많은 시체가 널려있는 야산)’,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 송장등이란 지명 때문일까? 이 구간에서 우린 유난히도 많은 빗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7코스 때, 사우재실(祠宇齋室)이 줄을 잇던 용장마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 만길재를 넘은지 10분 만에 ‘만길(晩吉)’마을에 도착했다. 만길·도명·도목·도동·원두 등으로 이루어진 만길리(법정 동리)의 중심마을로, 낮은 구릉지 사이의 깊숙한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탐방로는 마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 참! 주의할 점도 있다. 마을회관 앞에서 곧장 직진하지 말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 마을을 빠져나와 100m쯤 더 걸었을까 삼거리와 마주했다. 도명마을과 원두마을로 가는 길이 나뉘는 지점인데, 이정표(종점 14.1㎞/ 시점 9.9㎞)는 원두마을로 갈 것을 지시한다. 이어서 ‘신길 영농조합법인’의 창고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는다.
▼ 고개를 넘자 ‘빈지머리들’이 널찍하니 펼쳐진다. 진도의 들녘은 저렇듯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발달되어 있다. 특히 남쪽의 들녘들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삼별초의 배중손장군이 진도에 진을 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웬만큼 모여 살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 널디너른 빈지머리 들녘을 횡단하자 ‘원두(元頭)’ 마을에 이른다. 법정 동리인 ‘만길리’에 속한 자연부락인데, 김통정의 군대는 이곳에도 흔적을 남겼다. 마을 앞 낮은 고개를 넘을 때 여몽연합군의 화살에 맞아 많은 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사마골’, 사람도 지치고 말도 지쳤으니 날아오는 화살을 어찌 막았겠는가.
▼ 이 마을은 원래 남해와 접한 해안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조제가 축조된 후 마을 앞은 널따란 농경지가 되었다. 덕분에 폭우 때면 TV 카메라에 나타나기도 하는 침수지역이지만... 참고로 만길마을에서 원두마을까지는 15분이 걸렸다.
▼ 마을을 빠져나온 탐방로는 원두교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이어서 송정저수지의 수로를 따라 높이 7.2m의 제방 위로 올라간다.
▼ 잠시 후 송정저수지(이정표 : 종점 12.6㎞/ 시점 11.4㎞)로 올라선다. 1926년에 축조되었다는 저수지는 무척 컸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풍경과는 다른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무기수 장씨의 16년’이란 부제로 내보낸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아내 살인혐의를 받아 무기 복역 중인 장동오에 대한 수사를 검증해본 시간이었다. 결론은 ‘수사결과를 못 믿겠다’이었을 게다.
▼ ‘이 멋꼬!’ 스님의 화두가 아니라 수면 위에 떠있는 저 시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혹시 ‘수질 측정’을 위한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2020년엔가 이곳 송정저수지의 수질이 농업용수로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었으니 말이다.
▼ 송정 저수지 부근에는 폐허로 변한 집들이 몇 채 있었다. 공가가 늘어나는 현실은 이곳 진도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 저수지 상류는 18번 국도(이정표 : 종점 12㎞/ 시점 12㎞)가 지난다. 탐방로는 도로를 건너 송정들녘(kakaomap은 ‘당매들’로 적고 있었다)으로 들어선다. 활착을 끝낸 벼가 무럭무럭 자라는 논이 좌우로 드넓게 펼쳐진다. 그런데 저 논은 어떻게 물을 댈까? 저수지보다 한참이나 지대가 높은데...
▼ 고개를 갸웃거리다보면 어느새 ‘송정(松亭)’ 마을이다. 5개 자연부락(송정·오촌·죽청·탑곡·활곡)으로 이루어진 송정리(법정 동리)의 본 마을로, 지명은 소나무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송정리의 특징은 낮은 산지로 둘러싸인 구릉지라는 점이다. 하지만 송정저수지에 접한 탓인지 이곳 송정마을은 논으로 둘러싸인 모양새다. 참고로 원두마을에서 송정마을까지는 25분이 걸렸다.
▼ 송정마을을 지나면서 주변이 온통 대파 밭으로 변한다. SBS ‘만남의 광장’에서 소개됐을 정도로 유명한 진도의 특산물이다. 그런데 ‘장마이되 장마답지 않은 장마철’이라던 어느 호사가의 말처럼 긴 가뭄에 지친 대파는 잎 끝이 누렇게 메말라간다. 오늘은 모처럼 비가 내린다. 이보다 거세지면 트레킹에 지장이 되겠지만, 이왕에 오는 비이니 수북하게 내려줬으면 좋겠다.
▼ 잠시지만 죽청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르기도 한다. 이곳 진도 아니 우리나라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고 싶은 길이다. 도로가 온통 꽃으로 치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로수 삼아 심어놓은 목백일홍(배롱나무)이 꽃망울을 활짝 열고 길손을 맞는데, 그 사이사이 백일홍과 금계국이 나도 있다며 활짝 미소를 보내온다.
▼ 탐방로는 이제 ‘매듭재’를 향해 오름짓을 시작한다. 부드럽게 너울대는 구릉지 위로 구불대며 흘러가는 농로가 참으로 매혹적이다. 아니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조물주가 아니면 그 누가 저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 구릉지라고 해서 논이 못 들어서겠는가. 물론 논에 댈 물부터 해결되어야겠지만. 그 해답은 ‘둠벙’에서 찾을 수 있었다. 물이 필요한 논농사를 위해 우리 조상들이 고안해낸 게 ‘둠벙’.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작은 웅덩이다.
▼ 둠벙으로도 해결 못하는 곳에는 밭벼를 심었다. 그런데 이삭을 내민 벼에 하얀 무엇이 붙어 있다. 벼꽃이다. 벼꽃은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흔들리며 제꽃받이로 나락을 여물게 한단다. 문득 흔들리는 벼꽃에서 3천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를 봤다던 어느 글이 떠올랐다.
▼ 고개를 오르다보면 들녘 너머에서 ‘죽청’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군락을 이룬 푸른 대나무가 지명으로 굳어졌다는데, 구릉지에 위치한 탓에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고 한다. 그게 요즘은 논농사보다 소득이 더 낫다지만.
▼ 그렇게 20분쯤 걸었을까 도로(이정표 : 종점 10.2㎞/ 시점 13.8㎞)에 올라선다. 상미마을(임회면 명슬리)과 죽청마을(의신면 송정리)을 잇는 2차선 도로(매실로)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임도로 들어선다.
▼ 이때 건너편 산자락에 들어선 태양광발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대학봉과 용수봉 잇는 능선의 남쪽 산비탈인데 크기가 만만찮다.
▼ 임도는 봉호산(193.2m)의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아간다. 그래선지 생각보다 훨씬 가팔랐다.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대신 좋은 점도 많다. 곳곳에서 조망이 터지는가 하면 편백나무 숲을 옆구리에 끼고 걷기도 한다.
▼ 그렇게 10분쯤 진행하자 ‘매듭재’다. 임회면 명슬리와 용호리의 경계인 고갯마루로, 죽청마을(의신면 송정리)과 죽림마을(임회면 죽림리)을 잇는 임도가 지난다. 하지만 지명의 유래나 얽힌 사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 고개를 내려가자 커다란 시설단지가 나타난다. 10개도 넘는 사일로에다 조선소에서나 볼 법한 크레인까지 갖췄다. 양돈장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 양돈장 근처 삼거리다.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갈림길이지만, 길을 잃은 사람들이 하도 많아 카메라에 잡아봤다. 이정표(종점 9.3㎞/ 시점 14.7㎞)까지 세워져있었는데, 길이 헷갈린 이유를 모르겠다.
▼ 매듭재에서 10분. 무지개재에 올라섰다. 임회면 용호리와 죽림리의 경계이자, 죽청마을에서 시작된 입도가 이 고갯마루를 지나 죽림마을로 내려선다.
▼ 고갯마루에는 ‘진도지맥 무지개재, 105m)’라고 적힌 코팅지가 매달려있었다. 진도지맥(珍島枝脈)은 해남반도와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진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이 47km의 산줄기다. 금골산·첨찰산·여귀산 등을 일구며 서망항까지 내려와 백도 앞 갯바위에서 그 맥을 다한다.
▼ 고갯마루를 지난 임도는 가파르게 내려선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평평하게 변하더니 죽림갯벌을 향해 길게 이어나간다.
▼ 이 무렵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옅은 해무가 깔린 바다는 가히 몽환적이다.
▼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걷다보면 어느새 죽림마을에 이른다. 죽림리(竹林里, 법정 동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죽림·강계·동헌·헌복동·탑림) 중 하나다. 아니 본래의 죽림마을은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일대의 해안을 모두 묶어 법정단위인 ‘죽림’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날머리는 죽림어촌체험마을 안내센터
도로(국도 18호선)를 건너 동헌마을 쪽으로 향한다. 서해랑길 이정표(종점 7.0㎞/ 시점 17.0㎞)는 어촌체험마을 안내센터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 죽림리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지정한 ‘어촌체험마을’이다.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갯벌을 체험하러 이곳을 찾는다. 무지개재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 걸렸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2시간50분 만이다. 앱이 10.58km를 찍고 있으니 모처럼 느긋하게 걸었나 보다.
▼ 안내센터 앞 바닷가에는 안내판을 내걸었다. ‘체험’에 ‘휴양’까지 더한 걸 보면 숙박시설을 갖추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조개잡이 체험은 강계마을과 동헌마을 사이의 갯벌에서 가능하다. 갯샘과 독살 체험도 할 수 있단다.
▼ 갯벌로 들어가는 입구는 조형물을 세웠다. 그런데 문설주 나무가 과일 대신 조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게 아닌가. ‘유전의 법칙’을 바탕으로 진화과정이 순환되다보면 과일나무에서 조개가 열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 죽림해안은 드넓게 열리는 갯벌이 큰 자랑거리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 양식업에 종사한단다. 10월부터는 김을 수확해야 하고 2월에 미역을, 5월 말에는 다시마를 거두기 시작해 7월까지 쉴 틈이 없단다. 여름 한때 잠시 쉬는 기간이지만, 이때는 또 어촌체험으로 분주해진다.
▼ 갯벌 탐방객들은 가족단위가 대부분이었다. 다들 소정의 입장료(성인 5천원, 학생 3천원)와 장비사용료(장화·호미·바구니 각 천원)를 냈음은 물론이다. 이용시간(간조시간 전후 1시간씩)과 채취량(빌린 바구니로 가득)에 대한 안내도 이미 받았을 것이다.
▼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갯샘’은 실물 대신 안내판으로 대신한다. 아이를 갖지 못하던 50대 여인이 샘물을 길어다 목욕물과 정화수로 사용한 뒤 아들을 얻었다는 신령스런 우물이다. 마침맞게 물도 빠져나갔지만 다가가보는 것까진 그만두기로 했다. 저 지난달 결혼기념 삼아 들렀던 제주도에서도 두어 번이나 구경했었기 때문이다.
▼ 보건소를 지나자 솔숲이 기다랗게 펼쳐진다. 일렬로 쭉 늘어선 곰솔이 철갑옷을 입은 장수들 같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막아내고, 소금 물방울을 맞고도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다. 어촌이던 죽림마을은 400년 전 마을 앞에 논을 만들면서 농업이 시작됐단다. 하지만 바닷바람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고, 주민들은 바다와 농토 사이에 나무를 심었다. 그러니 농업을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 분명하다.
▼ 세월이 흘러 나무는 숲을 이뤘고, 지난 2005년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2007년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받으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소나무와 사람의 공존, 사람은 숲을 가꾸고, 숲은 논과 밭을 해풍으로부터 보호하고 갯벌에 놀러온 여행객들에게는 그늘을 제공해준다.
▼ 동쪽 해안, 즉 강계마을로 향했다. 죽림마을의 어선이 정박된 포구는 갯벌의 서쪽 끝, 작은 모퉁이를 돌아가야 만날 수 있다. 썰물에도 배가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까지 가기 싫은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강계마을 앞에 50m쯤 되는 방파제를 쌓아 배를 댈 수 있도록 했다.
▼ 방파제에 서자 갯벌 너머 멀리 금갑해변이 드러난다. 김통정 장군이 잔여 병력과 함께 배를 탔다는 금갑포구(金甲浦口)는 저 해변의 뒤, 그러니까 길쭉하게 삐져나온 곶을 가로질러야만 만날 수 있다.
▼ 강계마을에 이르니 죽림해안의 진경이 펼쳐진다. 접도가 반도처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그 사이 바다에는 우후죽순이라도 되는 양 크고 작은 섬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 해안의 동쪽 끄트머리, ‘강계마을’에는 조개구이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수익원은 굴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기른 굴을 구워주는 모양이다. 간단한 주류와 함께 굴을 넣은 전·라면·떡국 등을 사이드메뉴로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겨울이 제철인 듯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로다.’ 대동여지도로 잘 알려진 김정호 선생이 진도홍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읊은 노래다. 그런 홍주를 제조하는 공장이 강계마을에도 들어서있었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있어 구입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애주가의 처임을 자부하는 집사람의 배경에 세우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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