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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묵상글 (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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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11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고,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연주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하듯이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면 어렵기만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말을 잘 못합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둡니까?.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구역 반 모임에서 성경 통독을 합니다. 감사 노트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쓰시는 분도 계십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반응이 다양합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살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분이 함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영적 양식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야 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1베드3,15).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2,4).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오늘 11명의 예비자가 세례성사를 받습니다. 축하드리며 아울러 다시 예비자 인도에 마음을 모아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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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0 05:33
- 2022 < 전교 주일-나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나눔을 위해 오늘 전례를 처음서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본기도의 첫 구절이 눈에 꽂히면서 뜬금없이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기도의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는가?
이 점이 반성이 되며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로 파견된 예언잔데
그곳으로 가기 싫어, 도망치다 죽다가 살아난 뒤에야
니네베로 가 억지로 회개를 선포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도 요나 예언자처럼 니네베의 구원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민족의 구원을 싫어하지는 않아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닐까요?
싫어하는 사람은, 요나에게 니네베처럼, 다른 민족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고,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챙길 사랑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교주일을 맞아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남북이 화해하고 북한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본과 중국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일까요?
솔직히 우리의 사랑이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니네베도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에 못 미칩니다.
사실 나는 나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같이 아파할 정도로 행복하지 못하며
다른 이의 구원을 걱정할 정도로 구원을 사는 사람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이 마음 아프지 않으면 아직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이 걱정되지 않으면 아직 하느님의 구원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면서도 참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적어도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넘쳐 남에게까지 흘러가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행하게도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하여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본기도의 내용처럼 수확할 밭의 일꾼, 곧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모든 이가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지만
그 전에 내가 선교사로 파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구원과 사랑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를 포함하여 선교사들이
세상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본기도를 이어서 바쳐야겠습니다.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시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사로 힘을 얻어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나 새로운 강론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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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심리학자 마트 셀리그만은 삶에는 세 가지 여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즐거운 삶, 적극적인 삶, 의미 있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최고 상위에 있는 삶은 당연히 의미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삶에도 기여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냥 열심히 살면 될까요?
열심히 살면 즐거운 삶, 적극적인 삶까지는 접근 가능하지만, 열심히만 산다고 반드시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성에 대한 적극적인 각성, 나의 노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자주 자문해야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냥 단순히 열심히 하면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열심히 하면 즐거울 수는 있습니다. 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금세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항상 하시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했어. 최선을 다했어.”
열심히 하더라도 삶의 방향성이 명확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이 사라진 ‘열심’은 금세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께 맞춰진 ‘열심’은 의미를 발견해서 그 안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기쁨과 적극성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열심히 생활했던 제자들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의 열심과 적극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다락방에서 벌벌 떨어 숨어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의미를 찾아 나갑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듯이 의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제 의미를 찾아 나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단순히 열심과 적극성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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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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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바로 우리 자신의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주면서 우리를 초대합니다. “야곱의 집안아 ,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이사 2,5)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로마 10,13)라고 하면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나갔다.”(로마 10,17-18)고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그리하여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 이요, 그것을 “지키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라고 하십니다. 곧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을 살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제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교종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 오늘 복음에 따른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를 다시 올립니다.
어제 올린 것은 내일 복음에 따른 말.샘기도입니다. 착오가 생겨 죄송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는데, 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하시는데, 제 제 스스로가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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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신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슬람교도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의 계명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리스도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슬람교도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한 지붕 세 가족처럼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같은 하느님을 모시는 형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형제들은 같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3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민족이고, 언어도 비슷하고, 종교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죽이고, 죽어야 하는 어리석은 전쟁을 3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도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민족입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죽이고, 죽어야 하는 전쟁을 2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불꽃처럼 번져서 헤즈볼라, 후티, 이란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대고 선서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멈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멈출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지원을 멈추고,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라는 종교를 믿으면서 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인터넷이 있고, 각종 소통 수단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이 예전보다 어렵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전해주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입니다. 맛집은 멀리 있어도, 작은 곳이어도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맛집의 음식이 맛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알려주는 사람도 적고,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며 향기를 전해주는 분도 적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의 기쁨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신앙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께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런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의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어두운 밤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길을 찾듯이,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로부터,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사람들로부터 삶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전교이고,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낚시와 전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할까요? 첫째는, 밑밥을 꾸준히 주어야 합니다. 밑밥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고기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도 비슷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나눔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닫혀있던 상대방의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예전에 체험 사례를 발표하셨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새댁에게 자주 찾아가서 살림살이의 요령을 알려주고, 바쁘면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도움을 주니까, 결국 새댁은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같은 장소에 ‘찌’를 던져야 합니다. 밑밥이 쌓인 곳에 정확하게 찌를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손맛’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선교할 때도 비슷합니다. 선교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해야 합니다. 조금, 선교하다가, 어려우면 포기해서는 선교를 잘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용산 성당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요셉 형제님은 냉담하는 분들의 주소를 찾았습니다. 매 주일 주보를 보내고, 이사를 가신 분들은 이사 간 주소로 주보를 보냈습니다. 결국 그분의 노력으로 냉담 중인 많은 분들이 다시 신앙을 찾았습니다.
셋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물을 던졌지만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던 적이 있습니다. 찌를 바라보면서 끈기 있게 기다리면 찌가 높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선교를 하면, 결코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도 성당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알던 자매님은 결혼 생활 17년 동안 시부모님과 남편을 극진하게 섬겼다고 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남편이 결혼 17주년 선물로 가져온 것은 ‘예비자 교리 신청서’였다고 합니다. 남편은 극진한 마음으로 시부모님과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선물로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남편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는 축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즐거운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참된 나눔이, 오늘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이 이웃에게 주님을 전하는 커다란 선교가 될 것입니다. 가을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보는 계절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민족의 복음화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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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십니다. 믿도록 도와주지 않고,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믿음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이 아직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경험 해 보셨습니까? 학창 시절 수학을 공부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외웠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제게 그 문제를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알아들으려고 했을 때는 이해가 안 되더니 알아듣게 하려고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 이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이런 효과를 바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나는 이제 믿음이 강하다. 믿음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누구인지 알겠다.’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그 믿음을 전하려고 할 때 자신의 믿음이 더 확실해지는 효과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더더욱 전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단단히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이 교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파견됩니다. ‘미사’의 뜻이 파견이라는 것은 다 아시지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위해, 그리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사명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주님을 말하고 주님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파견이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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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락(樂)내리락(樂)
서울에 약속이 있으면 저는 전철을 이용합니다.
훨씬 편하고 빠르기도 합니다만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 저는 즐겁습니다.
전철을 이용하던 중 에스컬레이터 옆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포스터는 승강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질서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질서를 지키면 오르는 것도 내리는 것도 즐겁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오르락(樂)내리락(樂)
삶을 살다 보면 오르는 것이 즐겁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르는 것은 힘들고 또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의 경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리는 것도 즐겁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뒤처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의 모든 오름이 서로에게 즐겁기를 희망해봅니다. 모든 내림 또한 즐겁기를 바랍니다.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즐거움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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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선교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은 최고의 선교사이십니다.
그분들이 열정적이고 위대한 결과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총의 시작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베드로 성인은 3년이라는 세월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죽음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영광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예수님 살아 생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는 사건을 만난 후 깨달음을 얻고 사막에서 고행을 하는 동안 여러 번 주님을 직접 뵙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총을 받은 그들이었기에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직접 전하기 위해 그 먼 고난의 선교 여정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교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라면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 나의 일상이 주님을 떠나서는 어느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주님과 밀착된 사람,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라면 선교 또한 하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지만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어떻게 선교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다면 바오로와 베드로 성인의 선교의 길을 따라가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주님과 가까이,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영혼으로 주님을 만나고,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주님과 같은 사랑을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열정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선교를 떠나기 전에 기도로써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스스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며, 봉사와 박애정신의 실천을 보이는 생활, 나아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적극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열심히 다니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선교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당 미사에 참여하고 성경을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의 열정적인 선교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이 위대한 선교자가 되기 이전에 체험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선교를 원하고 있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3. 선교에 대해 경험한 것을 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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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삶
“기도하라, 공부하라, 복음을 전하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34,9)
오늘은 제98차 전교주일로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전교 주일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주일 담화문의 주제는 “가서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여라”(마태22,9참조)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하느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반드시, 선포되시는 그분의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야만 합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선포할 때, 그리스도의 선교 제자들은 그들 안에 맺어진 성령의 열매인 기쁨과 인내와 호의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압박이나 강요나 개종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밀감과 연민과 온유로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의 고유한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반영하면서 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끊임없이 복음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날로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며 이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삶의 자리가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좋으신 주님을 잘 반영할수록 복음 선포는 잘 이뤄질 것입니다. 이어지는 담화문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선교 활동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와 매력을 발산하는 아름다운 삶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의 삶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제2독서 로마서 말씀중 다음 고백을 그대로 믿으며 복음 선포의 삶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부르는 모든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고백의 기도입니다. 구원해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좋으신 주님을, 꽃다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고백하며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하라’에 이어 ‘공부하라’입니다. 평생기도에 평생공부가 주님을 닮아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 평화 공부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참으로 절박한 오늘날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우리를 격려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의 말씀을, 진리를 배우고 공부해야할 주님의 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을 사랑하듯 공부를 사랑하여 하느님 공부, 말씀 공부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배워 닮아가는 것입니다. 다음 이사야의 평화의 꿈도 우리의 평화를 공부하고 싶은 욕구를 붇돋웁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참으로 이 말씀이 절박한 오늘날의 시점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이요 너무나 아까운 생명들이 죽어갑니다. 무장하여 싸우는 병사들을 보면 흡사 인간은 실종되고 하나의 흉기로 변한 모습입니다. 참 불행하고 어리석은 무지의 현실이 반복되는 통탄스런 역사입니다. 오늘날보다 주님의 평화가 절실한 시대는 없습니다. 그러니 평화의 모범이 됩시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의 빛 속에, 평화의 빛 속에 걸어가는 삶을 삽시다.
기도하라, 공부하라에 이어 복음을 전하라입니다. 비상한 복음 선포의 삶이 아니라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주님의 평화를 전하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의 선교 자세를 바로 갖게 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아름다울수 뿐이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사람의 본질이듯, 말씀 역시 사람의 본질입니다. 마음 깊이에는 진리의 말씀을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우선 나 자신부터 말씀과 하나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우리들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우리의 숨통입니다. 우리의 영적 숨쉬기가 복음 선포의 선교요 선교없는 삶은 존재이유의 상실로 살아있으나 실상 죽은 삶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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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ㄴ)
있음조차 위태로운
작고 약한 벗들을
온전히 있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듯이
자신을 빼앗겨
있어도 없어야 할 벗들에게
그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아들 하느님께서
내가 되어주셨듯이
숨쉬기조차 힘든
묶이고 짓눌린 벗들에게
활기로 스미는 것입니다
성령 하느님께서
내 안에 스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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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자 전교 주일입니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1926년부터 해마다 시월 마지막 주일의 앞주일을 전교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의 본연의 사명의 선교의 삶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선교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는 선교는 기도안에서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마리아의 삶은 우리들에게 선교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가난 속에 주님의 여종이시고 베들레헴에서 갈바리아까지 아름다운 사랑의 모친이셨으며 그것을 넘어 하느님께 ‘예’라는 응답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순종의 동정녀이시고 헤브론까지 달려 가시는 선교사이셨습니다.
선교에 중심에는 십자가가 놓여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실현이며 믿음의 길입니다. 동방교회의 교부 신비가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에 사고의 중심을 두며 사는 인간이 주검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생각해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진보도 없을 것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반드시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 중 몇가지를 빠뜨리고 설교할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설교하지 않고는 선교할 없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네 종류의 착한 수도자들을 구분합니다. 이 구분은 선교열정을 살고 있는지 성찰케 하는 것이고 우리 신앙인에 적용하여 보고자 합니다.
첫째 종류는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지만 선행에도 열중하지 않는 착한 신앙인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이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쁜행실로 악한 표양을 주지 않습니다. 타고난 성격으로 평화스럽고 남과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들은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둘째 종류는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을 뿐더러 자주 선행에 열중하는 착한 신앙입니다. 이들은 절제, 정결, 겸손, 이웃사랑 기도의 생활에 때때로 열중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로 만족하고 더 완전한 생활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절제, 포기, 단식 일 등 모든 생활에서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더 높은 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셋째종류는 선행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나서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자기자신과 하느님께만 모든 관심을 쏟고 살기 때문에 선교 열정이 부족합니다. 이들은 이웃의 선익에 자기 자신의 평온을 앞세웁니다
.
넷째종류는 가장 완전한 신앙인은 위에 말한 세가지 종류의 착한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덕행을 가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만 덕행 생활에 열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모범을 따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 이끌기 까지 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 보나벤뚜라의 말씀대로 선교 열정으로 충만하여 완전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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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 게오르겐베르크-피히트/티롤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일어난 고귀한 성혈의 기적 사건
오스트리아-1310년
놀란 신부는 성스러운 피(포도주)를 더 이상 다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수도원장은 즉시 남은 부분을 성작을 닦은 수건과 함께 한 그룻에 넣어서 감실에 넣어 두었다. 이 기적 사건에 관한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마자 독실한 신자들이 이 성혈 앞에서 조배드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배드리는 신자들의 수는 해를 거듭하면서 늘어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각기 그나름대로 간청을 하면서 성혈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신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으로 확신되어지는 사랑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오르그 폰 브릭센(Georg von Brixen) 대주교는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1472년에 훌륭한 인품을 지닌 빌텐(Wilten)의 수도원장 요하네스 로쉬(Johannes Lösch) 신부와 지그문트 타우르(Sigmund Thaur) 신부, 그리고 카스파르 폰 압삼(Kaspar von Absam) 신부를 성 게오르겐베르크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 여러 명의 수도원 소속 원로 신부들은 선서를 하고서 그들의 선조들에게서 얘기를 들은 이 기적의 성혈 사건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목격자가 적지 않은 하느념의 특별한 은총을 증명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조사된 사실들을 설명했다.(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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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
- 폭풍우 후에 오는 고요함 -
여러분이 겪은 내적 시련 속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십시오.
폭풍우 후에,
여러분은 분명히
깊은 고요와 평화에 이를 겁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내적으로
마음속에서나 외부 상황으로부터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여겨집니다.
시련은 사랑을 그 목적으로 하며
더 깊은 평화와 성장을
가져다 줄 것임을 믿게 하소서.
-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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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날 /
박윤식 [big-llight] 24101919:34 ㅣNo.176901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가,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명령한 것을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한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려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인 유언이나 다름이 없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이 소명은 그분께서 지상에서 남기신 마지막 가장 큰 말씀일 게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속에서 예수님의 행적과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선사하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또한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주님 현존의 약속을 신뢰하며 희망한다. 과거와 미래를 주님 안에서 오직 믿음과 소통하는 자세는 그분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믿음의 참모습이 드러나리라.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수행하는 복음화와 선교 사명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단지 겉치레가 아니라, 우리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실존의 방식임을 보여 준다. 이런 시대에 신앙인의 역할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신앙인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언제 어디서나 실천하는 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일구어 내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이웃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니까. 보이지 않는 그분께서는 이웃 사랑으로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닌 전체로 체험된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렇지만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님 존재를 의심하였다. 그럼에도 당신께서는 이 막중한 임무를 그들에게 맡기신다. 제자들의 믿음이 다소 확고하지 않아도 복음 선포의 임무를 그들이 잘 해내리라고 그분께서는 믿으셨기에. 사실 그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언제나 함께하심으로써 그들이 당신의 향기를 피워 내도록 하셨다. 그 향기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을 좇아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레 피어오르는 거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이 곧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곧 교회의 존재 이유라 할 게다. 과거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선교라 불렀고, 그 의미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곳에 믿음을 전하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 대신 복음화라는 표현을 쓴다. 복음화가 선교와 다른 것은 단순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 역시 복음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거다. 나부터 복음대로 살지 못하거나, 복음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복음화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다시 응답하는 것이니까.
오늘은 ‘전교 주일’이다. 교회는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전교 지역의 교회를 돕고자 해마다 시월 마지막 주일의 앞 주일을 ‘전교 주일’로 정하여, 신자들에게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전교요 복음화이다. 이웃과 온 세상에 예수님을 알리자. 그분 힘과 능력을 전하자. 믿지 않으면 확신에 찬 말이 나올 수 없다. 자신은 망설이고 있는데 어찌 남을 움직일 수가? 믿음이 약했기에 선교도 약했을 게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다시 한 번 고백하는 날이 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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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이사야가 그려 보인 마지막 날의 모습,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은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거기에서 주님의 길을 배우며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전쟁 기술은 배울 필요도 없고, 칼과 창은 쳐서 농기구로 만드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티나의 상황을 보면서, 이사야 시대의 그곳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아하즈 임금 때는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이 남 왕국 유다로 쳐들어왔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다음 히즈키야 임금 때는 아시리아가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성읍이 정복되었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모든 지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 전쟁을 겪었기에 오히려 전쟁 없는 세상을 그렸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도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 유다인들과 팔레스티나인들이 서로 죽이는 모습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로마인들은 유다인들을 몰아냈고, 중세에는 십자군 전쟁도 있었으며, 지금은 지금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유다인들보다 덜 호전적이어서 그들을 덜 죽인 것도 아닙니다.
유다인들과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 근본적으로는 같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인데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의 날은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를 위한 날이지만,
오늘의 독서를 들으면서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가 참으로 ‘복음화’되어 주님의 길을 배우고 서로 맞서 칼을 쳐들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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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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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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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교합시다!
오늘 전교 주일입니다.
면소재지에서도 한참 들어오는 이 한적한 어촌에 살면서 어떻게 이웃 전교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봅니다.
초고령화된 지역에다, 사람들 만나기도 하늘의 별따기인데...
그러던 중 그것도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니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택배 배달을 위해 오시는 분들, 솔향기길 걷다가 피정 센터를 지나가는 분들, 공사하러 오시는 분들, 버스 운전 기사님들 등등,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를 찾아오는 분들, 스쳐 지나가듯이 만나는 분들이 다 소중한 전교의 대상입니다.
한번은 저희 피정센터로 중고물품을 가득 싣고 오신 운전 기사님을 만났습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간식이며, 커피며, 생수를 챙겨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아쉬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즉시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하시려고 점심도 제대로 드시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라면이라도 끓여들일까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라면 두봉지에 계란 두 개, 파 송송 썰어넣어 푸짐하게 한 그릇 차려드렸습니다.
마침 찬밥까지 남아있길래 챙겨드렸더니, 배가 고프셨던지 싹 비우셨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살짝 감동 받으셨던 기사님은 이것 저것 천주교에 대해서 묻기도 하시더니
마침내, 당신도 나이가 들면서 종교를 하나 갖고 싶은데, 천주교가 좋겠다고 그러셨습니다.
너무나 반가웠던 저는 즉시 사시는 것 주소를 물어보고 가까운 본당 사무실 연락처를 알려드렸습니다.
조만간 사무실 찾아가겠노라고 하시며, 혹시 다음에 또 근처 배달 오면 라면 또 끓여줄 수 있냐고?
좋다고 언제든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행해지는 우리의 작은 몸짓 하나 하나, 사소한 언행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깨달음입니다.
전교 주일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전교는 삶을 통한 전교인 듯 합니다.
삶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악한 표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면서,
천주교 믿으세요, 성당 나오세요,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3년간의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한계, 무기력을 진하게 체험하며,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시기는 어찌보면 전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과제이자 가장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또한 어떤 성인의 표현대로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보속입니다.
기회가 좋으나 나쁘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전교를 생활화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각자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눈빛만 봐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빛을 감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존재 그 자체로, 우리 매일의 삶을 통한 복음화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전교 주일을 맞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편안해하고 행복해합니까?
나를 보면 어떻게 해서든 함께 있고 싶어 붙잡고 늘어집니까?
전교 주일을 맞아 우리들의 삶에서도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나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흔적과 자취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성당 가자, 세례 받아라, 하지 않아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따라 하느님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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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 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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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교의 기본이자 시작: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 말하기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며 선교 사명을 주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선교는 곧 사랑 실천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강이 불어난 곳의 다리를 집에서 창문으로 보다가 다리가 끊기게 될 것 같아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재빨리 나가 차량을 통제한 적이 있습니다.
한 차량이 반대쪽에서 오자 손을 엑스자로 그리며 차를 막아섰고 그 차가 멈추었을 때 바로 그 앞에서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람이 집에서 TV만 보고 있었다면 과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언자직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직의 끝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예수님도 예언자직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가수가 공연하는데 사람들이 야유하며 다 떠나버린다면 마음이 어떨까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더는 가수가 아닐 것입니다.
사제가 강론이 두려워 미사를 꺼린다면 주님께 사제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미국 네브래스카주 한 시골 목장에 사는 12살 소년 ‘로건’이 휴스턴에 있는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에 전화해서 진행자인 마이크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소년은 울먹였습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송아지가 몸이 약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화한 것은 그 슬픔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왜 자신이 아끼던 송아지를 데려가셨는지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로건은 누구든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항상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는 이유는 하느님 체험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한 번쯤 나가게 만드는 마중물에 불과합니다.
지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한 번이라도 자신의 체험을 전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개신교에서 전교로 유명한 분 중의 하나가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목사’입니다.
그가 목사가 되기 전에 아내와 딸이 주일에 교회 가지 못하게 하고 스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크게 났고 불교 신자였지만,
하느님께 기도하여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전도 연습으로 끌려 나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중에 고구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람들을 고구마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란 그저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찔러 보는 것이라는 것.
그는 “예수 믿으십니까?”, “그래도 믿으셔야 합니다.”, “믿으면 참 좋아요.”,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네 마디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믿으십니까?”입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와야 그다음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라고 하십니다.
저도 한 선교왕을 아는데, 그분은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마다 “찬미 예수님!”을 합니다.
그런데도 1년에 30명씩 성당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선교하지 못해도 마음이 뿌듯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어떤 집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욕을 먹고 매를 맞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찬미 예수님!”은 강론 전이나 어머니와 통화할 때 정도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할 때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게 할 결심을 해 봅니다.
신자들과 길거리 선교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저 “찬미 예수님!”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입에서 누구 앞에서건 예수님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시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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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1) 우리가 복음 선포 활동을 하는 것은, 즉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고, 또 모든 사람이 함께 구원받기를 우리도 바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다음 말은,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잘 나타냅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40).”
사람들이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을 그 멸망에서 구하고 싶어서,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고, ‘살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활동입니다.
단순히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락한 세대’는 “죄 속에서 살다가 심판 때에 멸망을 당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라는 말은, “여러분은 심판 때에 멸망당할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그들과 함께 멸망을 당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벗어나서 구원을 받으십시오.”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살고 싶으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십시오.”입니다.>
이 말은, 종말과 재림과 심판이 곧 닥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날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남아 있는 날들이 얼마 되지 않음을,
즉 점점 더 가까워졌음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2)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면, 나 자신이 먼저 복음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먼저 복음화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곧 자기의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믿음’이 자기의 ‘삶의 중심’이고 ‘삶의 기초’ 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만일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주님을 의심하는 모습을 드러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더라도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자신도 안 믿으면서, 또는 믿음이 부족한 상태로, 남에게 믿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구원의 길’을 알려 주고,
그 길로 인도하는 일이고, ‘함께’ 구원받자고 권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마치 전쟁을 하듯이, 또 적을 굴복시키듯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미움’이라는 방법으로 ‘사랑’을 전하려고 하는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즉 모든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선교활동은 형제에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사랑’은 신앙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그의 신앙은 거짓 신앙이고, 그가 전하는 복음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서로 사랑하여라.”는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신앙인들끼리만 똘똘 뭉쳐 있으면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4) 세 번째는 ‘희망’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것’인데,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의 방향이 잘못되면, 인생 전체가 잘못된 곳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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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로마 10,9-18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의 의미와 중요성을 되새겨보는 ‘전교주일’입니다. 선교란 아직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해 알리는 일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은 공부를 더 잘하는 사람이 못하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영적 신앙적으로 더 뛰어난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게 선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선교에 대한 그런 잘못된 인식이 신앙생활을 먼저, 오랫동안 한 이들로 하여금 새로 신자가 된 이들에게 ‘텃세’를 부리게 만들 뿐만 아니라,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신앙도 깊지 않은 ‘평범한 신자’들은 감히 선교를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선교라는 것을 누가 어떻게 왜 실천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상하리만치 선교에 소극적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신앙적 영성적으로 부족한 자신에게는 선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를 하자고 하면 많은 분들이 ‘나는 말주변이 없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나는 교리에 대한 지식도 없고 영성적으로도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개신교 신자들이 선교에 대한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는 걸 부러워하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성경에 대해, 하느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지요.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뽑으실 때에도 하느님과 성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부들을 가장 먼저 부르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라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자기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그분께서 정말 부활하신 게 맞는지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선교는 신앙적, 영성적으로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맡겨진 특별한 직무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자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신교 신자들을 부러워하며 뒷짐 지고 있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시간 내서 열심히 읽고 기회될 때마다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 잘 알게 되고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들도 생기는 겁니다.
다음으로 알아볼 것은 선교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선교할 때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예수 믿고 천국가라’고 열심히 떠들고 다니면 될까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온 세상 사람들을, 그들이 어떤 문화와 신앙을 갖고 잇는지와 상관없이, 무작정 세례를 받게 하여 억지로 천주교 신자로 만들라는 뜻이 아닙니다. 중세시대에 그런 잘못된 방식으로 진행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선교는 여러가지 심각한 부작용들을 초래했지요.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이라면, 우리가 만난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희망해야 하는지를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해야 할 ‘신앙의 내용’은 교리지식이 다가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우리가 전해야 할 신앙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삶 그 자체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하는 그 실천을 통해 ‘기쁨’이라는 신앙의 좋은 향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풍겨야 하는 겁니다. 길을 가다가 좋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뒤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아직 신앙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가 내뿜는 신앙의 향기에 이끌려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알아볼 것은 선교의 방법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선교는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발로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과 슬픔 속에 신음하는 이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함께 어울리시면서 그들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아픔에 공감하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선교해야 합니다.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내주어야 합니다. 이해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해하며, 사랑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화려한 꽃이 되어 자기를 뽐내며 남들을 주눅들게 하기보다 어두운 땅 속에서 물과 양분을 찾아 줄기에 전달해주는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물과 거름을 주는 건 자신이지만, 그들이 ‘신앙’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생각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처럼 삶으로 선교하는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눈에 보이는 효과가 드라마틱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는 오직 이 길만을 우직하게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선교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 이유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선교를 계속 해 나갈 원동력이자 의지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그저 그것이 주님께서 맡기신 의무라서,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선교를 통해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을 믿고 그분 뜻을 받아들여 따르게 되면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기에 해야 하는 겁니다. 즉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 속을 걸어가며 그분 뜻을 충실히 따르게 되면,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나 갈등이 생기는 일 없이 모두가 평화롭게, 하느님 사랑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선교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고 좋은 일이니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맺어야 할 신앙생활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단 한 명도 신앙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충실한 생활로 남들이 나를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이끌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인도한 그 사람이 세례를 받았는가 아닌가 하는 결과나 실적을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실적이 아니라 정성과 노력을 보십니다. 우리는 선교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닮은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되기에, 그래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에, 선교해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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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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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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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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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0. 연중 제29주일(전교주일).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부르짖는 삶
<2024.10.20> 아침을 여는 묵상 (애 2:11~22절)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부르짖는 삶❞
❚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회복이 불가능한 멸망을 피할 수 없기에 회개하며 부르짖어야 합니다.
✔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11~17절).
예레미야는 어린이와 아기들이 성 광장에서 쓰러져 죽어 가고 있는 참상을 보면서 ‘...창자가 끊어지며...간이 땅에 쏟아졌으니...’라며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로 슬퍼합니다(11~12절). ‘창자, 간’이란 표현은 견딜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이나 슬픔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의 패망과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고, 이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13절). 이어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는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만 보았기 때문(14절)입니다. 헛된 예언을 듣고 믿은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대적의 비웃음과 조롱 가운데 패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15~16절).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멸망의 심판을 행하신 것은 이미 정하신 일이며 옛날부터 명령하신 말씀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심판에는 긍휼히 여기심이 전혀 없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니므이 사랑과 용서가 아닌 오직 심판과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이 멸망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며 세상의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행동입니다. 거짓되고 무가치한 세상을 따르고 그 속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하나님에 대하여 대적하고 불순종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죄인 됨을 인정하게 되고, 회개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적같이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항상 깨어 있어서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살되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여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회개하며 부르짖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18~19절).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을 향해서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라고 선포합니다.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강물이 쉴새 없이 흘러가듯이 눈물을 쏟아냄으로써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명령합니다(18절). 이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참담한 유다의 형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19절). 어린 자녀들이 굶어 죽어간다는 것은 미래가 암울하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부르짖는 자를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절망적 상황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마음을 물처럼 쏟아부어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회개할 때,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을 얻게 될 것이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생겨 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하나님만을 믿고 끝까지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믿음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20~22절).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살펴 주십시오...’(20절,쉬운성경)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겪는 참혹한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자비와 긍휼을 구함으로써 이 백성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인은 자기 아이들을 먹고, 제사장과 선지자는 주님의성소에서 죽임을 당하고, 늙은이와 젊은이는 길바닥에 죽어 있고, 처녀들과 청년들은 칼에 쓰러진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 항의하면서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21절). 계속 이어서 예레미야는 절기 때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처럼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셔서 철저히 심판하셨음을 아뢰고 있습니다(22절).
하나님은 계속해서 긍휼을 베푸시며 죄인이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끝내 그 기회를 외면하고, 긍휼을 거절하면 그 죄에 대한 심판은 철저히 이뤄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죄인은 심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하시고 형벌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죄를 멀리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죄인에 대하여 철저히 심판하시지만, 하나님께로 나아가 회개하는 자들은 돌아보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계속해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즐거움과 안정만을 보고 추구하는 불순종의 삶이 아닌 말씀에 대하여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결정하시는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고 회개하므로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애 2:11~2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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