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내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 아침겸 점심으로 간단히 먹고 저녁은 발길 닿는 대로 가서 사 먹기로 했다. 동네에서 고정적으로 사먹는 것은 싫증이 났다.
지하철 2호선의 역 주변풍경을 음미하면서 다양한 음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건대역 근처 골목의 양 꼬치집이 좋았다. 삼성동의 인도음식점도 괜찮은 것 같았다. 어제는 강남역의 터어키 식당에서 처가식구들에게 저녁을 샀다.
일을 해서 저축한 약간의 돈으로 아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행복이다. 문득 지난해 선배부부와 방배동의 스페인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나누던 얘기가 떠오른다. 평생을 관직에 몸을 담았던 선배는 퇴직을 하고 부여의 백마강 기슭의 빈 농가를 사서 그곳에서 나머지 여생을 보낼 거라고 했다. 보살상의 마음이 넉넉한 선배가 시골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화유산 답사기를 써서 유명한 유흥준씨도 부여에 집을 짓고 사는데 오도이촌(五都二村)이라고 하다가 요즈음은 사도삼촌(四都三村)이라고 해. 일주일에 도시에 5일 시골에 2일 사는게 좋다고 하다가 점점 도시에 사는 날짜를 줄이는게 좋다는 거지. 우리부부도 그렇게 살려고 계획하고 있어.”
옆에 있던 선배의 부인이 남편의 말에 덧붙였다.
“부여에 가서 보니까 힘들어 하는 이웃이 있더라구요. 근처에 캄보디아의 삼십대 처녀와 결혼해서 사는 육십대 남자가 있어요. 나이 육십까지 총각으로 살다가 캄보디아 여자를 데리고 온 거죠. 캄보디아 여자가 시골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고 남편한테도 무시를 당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다가가서 아이들을 봐주기도 하고 말도 걸어주고 했죠. 그렇게 마음을 열어주니까 너무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거예요. 그 집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손자와 함께 수영장에 가기도 했어요. 나는 이제부터 작은 행복전도사가 되기로 했어요.”
거창하지 않고 가슴에 잔잔하게 다가오는 얘기였다. 웨이터가 음식을 가지고 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스페인식 바삭바삭한 가지튀김과 숙성시킨 얇게 저민 돼지고기 포가 흰 접시에 담겨져 나왔다. 선배부인이 말을 계속했다.
“시골집에 전기공사를 해야 하는데 일해 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우리 동네에서 작은 전기수리점 하나를 발견했어요. 조그만 방이 뒤에 딸려있는 좁은 가게에서 육십을 먹은 총각이 혼자 살고 있더라구요. 부여까지 출장 가서 일해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할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사람을 데리고 우리부부가 주말이면 내려갔어요.
같이 밥을 먹고 잠은 손님방에서 자게 했죠. 손님방은 병풍도 치고 고급이부자리를 마련해 두었어요. 골방에서 혼자 살던 사람이 좋았나 봐요. 다음에 또 내려와서 일을 해주는데 전기일 뿐만 아니라 못하는 일이 없어요. 수도도 뽑아주고 처마아래 창고도 만들어줬어요. 그러면서 돈은 알아서 조금만 달라고 하더라구요. 비싸면 다시는 자기를 안 쓸 거 아니냐는 거예요. 역시 사람한테 중요한 건 인정해주고 감사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괜찮았는지 나중에는 우리 부부보고 평생 머슴을 할 테니 써 달라고 하더라구요.”
선배부인은 나이답지 않게 항상 소녀 같은 분이었다. 남편이 고위관직을 지냈는데도 항상 재래시장이나 서민들이 모이는 곳을 돌아다녔다. 보통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남편에게 전달되어야 남편이 좋은 공직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구청 복지관에 가서 노인들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함께 밥을 먹곤 했다. 어쩌다 하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진짜 노인으로 그 사람들 속에 녹아드는 성품이었다. 남편의 성공은 그 아내가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선배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늙으면서 외롭지 않으려면 주위에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렇게 하려면 내가 다가가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