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가지지 말라'>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습니다.(6,13)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로 ‘증거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임과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그들이 파견 받고 가서 한 일입니다.
곧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