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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학청
기극비란(枳棘非鸞)
탱자나무와 가시나무 덤불은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못 된다는 뜻으로,
인품이 고귀한 사람은 아무 곳이나
함부로 자리를 잡지 않는다는 말로,
지조와 덕이 있는 선비는 아무 벼슬이나
함부로 얻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枳 : 탱자 지
棘 : 가시 극
非 : 아닐 비
鸞 : 난새 난
출전 : 삼국연의(三國演義) 第2回
선거철이 지나면 작은 공적을 가지고도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부패한 권력 밑에는 권력을 쥐고
횡포를 일삼는 관리도 많아진다.
그런 경우는 권위주의 권력 시대에 더 심했으며
왕권 치하에서는 권력이 부패할수록 심했다.
구한 말 동학혁명이나 임오군란 등이 발생한 것도
그런 여유에서이며 자유당 시절에
부정부패가 심했던 것도 그런 여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시기일수록 뜻있는 사람,
지조 있는 선비, 꿈이 큰 사람은 그런 탁류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은둔의 길을 걷게 된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은둔하는 올곧은 선비들은
간웅들이 들끓는 난세에 그들과
몸과 마음을 섞지 않으려 했다.
우린 그런 지조 있는 선비들의 은둔을 두고
'탱자나무에는 봉황이 깃들지 못하는 법
(枳棘叢中 非樓鸞鳳之所)이니
차라리 은둔하여 봉황의 깃털을 손상하지 않고
웅비의 기회를 찾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진나라 조정은 부패하여
십상시(十常侍)들이 황제를 농단하고 있었다.
그 어지러운 틈을 타서 장각 일당이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각지에서 호걸이 나타나
황건적의 토벌에 동참하였다.
유비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건달처럼 지내던 유비는 어느 날 관우와 장비를 만나
도원의 결의를 하고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가는 곳곳 승리하여 병사들이 늘어나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며 쪼잔한 이득을
구하지 않았기에 명성이 높아갔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십상시들이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충언하는
충신들을 모함하여 죽이므로 황제의 눈과 마음을
흐리게 하여 백성의 생활이 궁핍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많은 장수와 호걸들이 황건적 토벌에 나서
위태로운 나라에 공을 세웠음에도
십상시들은 자기들의 위세가
꺾일까 두려워 그들을 멀리하였다.
원망이 높아가자 십상시들은
호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황제에게 주청하여 일부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그것도 아주 형편없는 지방 벼슬이었다.
유비도 그중의 하나였다.
유비는 증산부(中山府)의 안희현(安喜縣) 현령이란
말직을 제수받아 그날로 부임하였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장병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라고 돌려보내고
관우와 장비 등 아주 가까운 사람 20명 남짓만
데리고 안희현으로 가서 업무를 보았다.
유비는 모든 일을 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조금도 사욕을 채우지 않았고,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려 주었기에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이 감동하며 따랐다.
그때도 유비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 장비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잤으며 동고동락했다.
몇 달이 지나자 조정에서 전공으로 벼슬한 관리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는지를 살피기 위해
곳곳에 감찰사를 파견하였다.
유비가 있는 안희현에는
독우(督郵)라는 감찰사가 파견되었다.
유비는 모든 예를 다하여 독우를 영접했지만,
독우는 유비를 호령하면서
"유 현위, 그대는 어디 출신인고?"하면서 물었다.
유비는 "나는 한실(漢室)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으로
탁현(涿縣)에 살다가 이번 황건적의 난에 작은 전공을
이룬 탓으로 이 자리를 얻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현리(縣吏)가 말했다.
"독우가 위엄을 부리는 것은 뇌물을 바라고
하는 짓이 아니면 달리 이유가 없습니다
(督郵入威, 無非要賄賂耳).”
유비가 하소연했다.
"나는 백성과 같이하면서 추호도 백성의 것을
손대지 않았는데 무슨 재물이 있어서 그에게 준단 말인가
(我與民秋毫無犯, 那得財物與他)?"
독우는 역관에서 현리(縣吏)들을 불러 닦달하면서
유비의 허물을 실토하라고 했다.
유비는 직접 가서 해명하려고 했으나
문지기에 제지만 당했다.
이때 장비가 술을 몇 사발 먹고 역관 앞을 지나다가
백성들이 통곡하는 것을 보고
물으니 노인들이 대답했다.
"독우가 현리들에게 억지로
핍박하여 유공(劉公; 유비)을
해치려 하기에 우리들이 와서
모두 애써 죄가 없음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가 들여보내지 않고 도리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쫓아냅니다."
장비가 대노하여 역관으로
달려 들어가 독우를 잡아채
현청 앞으로 끌고 와 매질을 해댔다.
유비가 현청 안에 있다가
밖이 소란해 이유를 물으니
장비가 독우를 끌고 와 매질을 한다고 했다.
유비가 나와 장비를 꾸짖어 매질을 멈추게 했다.
관우가 옆으로 돌아 나와 말했다.
"형님이 큰 공을 많이 세우고
겨우 현위자리 하나 얻었는데,
지금 도리어 독우에게 모욕을 당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탱자나무와 가시나무 덤불은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못됩니다.
독우를 죽인 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달리 원대한 계책을 도모하는 좋을까 합니다.
유비는 관인을 독우의 목에 걸고 꾸짖고서 그곳을 떠났다.
오늘날은 예전에 비해 많이 밝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패한 관리는 도처에 있다.
부패가 번지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사회다.
특히 권력을 빙자한 부패는
척결돼야 할 제일 중요한 과제다.
관우가 말한 난새와 봉새는
이상주의를 뜻하기도 한다.
이상이 짓밟히는 곳에 무슨 내일이 있겠는가.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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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