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원제 : Gaslight
1944년 미국영화
감독 : 조지 큐커
원작 : 패트릭 해밀턴
출연 : 잉그리드 버그만, 샤를르 보와이에, 조셉 코튼
메이 위티, 안젤라 랜스베리, 바바바 에버레스트
'가스등'은 원래 1940년 영국에서 만든 스릴러 영화였습니다. 패트릭 해밀턴 원작의 희곡을 영화로 각색작 작품이지요. 이걸 불과 4년만에 할리우드 MGM 에서 리메이크를 한 것입니다. 같은 영어권 영화를 이렇게 빨리 리메이크 하는 것도 이례적이지요. 보통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흑백에서 칼라로, 타 언어 영화를 영어권 영화로 리메이크 하기는 하지만 4년만에 똑같은 영어권 영화가 리메이크 되다니요. 그것도 톱스타인 샤를르 보와이에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앞세웠습니다.
샤를르 보와이에는 당시 40대의 중견 스타였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카사블랑카'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연달아 히트하면서 정점을 찍고 있는 여배우였습니다. 여기에 '시민 케인' '위대한 앰버슨' '의혹의 그림자'에 출연한 멋쟁이 배우 조셉 코튼까지 합세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스웨덴에서 넘어온 이후에 확실하게 할리우드 톱스타로 정착할 수 있었고, '가스등'이 스릴러 장르여서 그런지 이후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에 연달아 캐스팅되기도 했습니다. 1944년 작품인 가스등은 4년뒤인 해방후 우리나라에 1948년 봄에 개봉되었습니다.
이후 '가스등'은 추억의 고전 명작으로 남았고 우리나라에서도 고전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보았을 영화가 되었습니다. '죽기전에 꼭 봐야할 1001편의 영화'에도 선정되었지요. 반면 1940년 작품은 그 존재조차 희미해졌죠. 배우의 레벨도 컸고, 할리우드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영국 고전이라는 점도 있었고.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훤해지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고전영화 팬들도 40년 영화의 존재 자체를 몰랐습니다.
아무튼 40년 영화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고전 명작으로 높이 평가받았던 44년 '가스등'이 4년만의 리메이크 작이었다는 사실과 전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온 영화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과평가 받은 작품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구나 MGM이 전작인 40년 작품의 프린트를 모두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다는 건 매우 치사한 일입니다. 다행히도 40년 작품의 프린트가 남아서 지금도 존재하게 되었지만.
두 편의 영화를 보면 확실히 44년 영화가 스토리도 더 확장되었고 재미가 높습니다. 특히 주인공 폴라(잉그리드 버그만)들 도우려는 남자를 전작의 노인에서 근사한 외모의 조셉 코튼으로 설정한 것도 좀 더 흥미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죠. 이러한 시도 등이 잉그리드 버그만의 열연 등과 맞물리면서 썩 재미있는 40년대 고전으로 탄생하였습니다. 확장적 리메이크 작으로 성공했으며 리메이크라는 사실조차 감추려고 은폐를 시도한 덕택도 보았습니다.
제목인 '가스등'은 요즘 상대를 세뇌시킨다는 가스라이팅 이라는 용어로 많이 쓰일 정도로 이 영화의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특히 최근 화제가 된 남현희 사건은 이 영화와 매우 비슷하죠. 숨쉬는 것 빼고 모두 가짜인 남편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여 곤란에 빠진 아내의 이야기니까요. 물론 영화에서는 남편이 큰 음모를 벌이기 직전 백마의 기사 같은 남자가 나타나 구해주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가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어느 유명 가수가 살해당하고 10년뒤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딸 폴라가 이모의 뒤를 이어 가수가 되려고 연습하다가 작곡가인 그레고리(샤를르 보와이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런던 광장에 근사한 집을 갖고 싶다는 남편을 위해 10년만에 이모가 살았던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알고 보니 이모를 살해했던 살인마였고 이모의 보석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폴라에게 접근했던 것이죠. 그것도 모르고 폴라는 남편을 사랑하고 많은 것을 베풀지만 그레고리는 오히려 폴라를 정신병자로 몰고 외부의 접촉도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가스라이팅 당하던 폴라는 브라이언(조셉 코튼) 이라는 탐정의 도움으로 남편의 흉계를 알게 되고 극적으로 구조됩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스웨덴에서 7년 정도 주연급 배우로 활약하다가 1939년 '별리'로 할리우드에 데뷔했고 이후 1942년에 출연한 '카사블랑카'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4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가스등'으로 두 번째 후보에 올라 수상을 하였습니다. 미모와 지성을 가진 여배우로 손꼽히지만 실제 우리는 스웨덴 시절의 20대 초반 그녀의 미모를 감상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가장 젊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영화는 1939년 '별리' 지요. 24세에 출연한 작품입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크게 성공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불륜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지만 극복을 하고 이후 두 번이나 더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전설로 남았습니다. '가스등'은 그녀의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공연을 한 샤를르 보와이에는 1930년대에 이미 스타덤에 오른 몸값 비싼 배우였는데 '가스등'에서는 악역 주연공을 연기했습니다. 이 역할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저에겐 '악역 배우'로 인상이 깊었고 워낙 비호감 역할이어서 싫어하는 배우였습니다. 어떤 배우를 어떤 영화로 처음 만나는가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후의 여러 영화에서 접하면서도 '가스등'의 주인공의 인상이 항상 따라다녔으니까요. 그렇지만 많은 할리우드 배우가 바람둥이인 것과는 달리 샤를르 보와이에는 평생 한 명의 아내와 결혼하여 함께 했고 아내가 죽은 후 따라서 자살을 했을 정도로 순정파였습니다.
'가스등' 촬영 때 샤를르 보와이에의 키가 작아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더 커보이는 상황 때문에 촬영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함께 공연한 조셉 코튼은 키가 훤칠하여 잉그리드 버그만과도 잘 어울렸는데 심지어 하녀로 출연한 안젤라 랜스베리 조차도 키가 커서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흥미로운 고전 '가스등'은 4년전의 원전을 가리고 오랜기간 고전 팬들에게 사랑받은 명작이었습니다. 요즘 40년 영국 원전을 우리나라에서도 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뒤늦게 나마 진짜 원전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지고는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44년 할리우드 리메이크 작이 매력적인 영화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ps1 : 원래 아카데미 시상식의 예상은 '이중배상'의 바바라 스탠윅이 유력했다고 합니다. 바바라 스탠윅은 배우로서의 위상도 매우 높았지만 그럼에도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지 못한 상복없는 여배우였습니다. 그럼에도 잉그리드 버그만의 수상에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고 하죠. '이중배상'에서의 연기를 감안하면 누가 수상을 해도 이견이 없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자체는 '이중배상'이 더 뛰어났습니다. 몇 손가락에 꼽힐 필름 느와르 걸작이지요.
ps2 : '제시카의 추리극장'으로 유명한 안젤라 랜스베리의 데뷔작입니다. 영화 개봉 당시 불과 19세였습니다. 하녀 역할로 제법 비중이 높죠.
ps3 :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인데 가스등을 키면 다른 곳의 불빛이 약해지나 봐요. 가스선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나보죠? 가스등 구조에 대해서 잘 몰라서...
ps4 : '미니버 부인'에서 품위있는 귀부인으로 등장했던 메이 위티가 이웃집 수다쟁이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최초로 데임 칭호를 받았던 여배우라고 합니다
[출처] 가스등 (Gaslight, 4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