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거울 (고전10:1-11절)
사람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속에 지식을 받아들일 때 무엇을 보는 수단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본다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보고자 하는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고쳐주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소경은 처음 사물을 보는지라 그 대상을 잘 알지 못하고 ‘나무 같이 것이 것어 다니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소경에게 ‘다시 눈을 감으라.’고 하시고 그 눈에 안수하시고 소경에게 다시 눈을 떠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소경이 사물을 밝히 보고 주님께 감사를 드린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엇을 보고자 하는 대상이 분명할 때 우리는 밝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누가 보느냐 하는 보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먼저 나 자신이 있고, 거기에 내 눈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존재해도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합니다. 흑암 속에 오래 살았던 물고기는 눈이 퇴화되어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셋째, 대상과 주체가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의 조명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물체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캄캄한 흑암 중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비추어주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도 성경을 알 수 없으나 성령님의 조명이 있으면 성경이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를 보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나를 보고자 하지마는 볼 수가 없습니다. 내 귀와 내 눈은 내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류가 만든 것이 거울입니다. 반사되는 물체에 나를 투사 함으로써 비로소 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보는 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저 외모만 보려면 거울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내 속사람을 보려면 마음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거울에 먼지가 앉고 더러워지고 깨어져 있다면 나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설령 본다고 하여도 빗나간 자기 인식만 초래하는 것입니다.
*렘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거짓되고’라는 히브리어 ‘아코브’는 ‘반역적’이라는 뜻이며, ‘부패하고’라는 히브리어 ‘아나쉬’는 병들었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은 가장 반역적이며 치유할 수 없는 병든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 거짓 되고 부패하였으니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어린아이 신앙을 비유할 때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라고 합니다. 거울을 보는데 왜 희미하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그 당시의 거울은 잘 닦은 금속이나 청동으로 만들었으므로 희미한 상밖에 반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문명사회가 되면 밝고 맑게 보이는 거울로 보게 되는 것 같이 우리의 신앙도 그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거울은 16세기경부터인데 바울의 예언과 같이 이 거울이 아니고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다니 참으로 신기한 물건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 거울이 처음 들어 왔을 때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시골의 어느 선비가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낙방을 하고 돌아오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에게 선물을 주려고 거울을 하나 샀습니다. 집에 오니 아내가 방에 없기에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아내가 들어와 보니 벽 쪽에 어떤 낯선 예쁜 색시가 한 사람 서 있습니다. 이 순간 그 아내는 생각하기를 “이 양반이 과거를 보러 갔다가 서울 첩을 하나 얻어 왔나 보네” 하고는 목 놓아 웁니다. 친정어머니가 그때 딸에게 왔는데 그 소식을 듣고 방에 들어와 보니 벽 쪽에 어떤 할머니가 서 있습니다. ’이 사람 이왕 첩을 얻으려면 색시를 얻지 다 늙은 여자는 왜 데려와.‘ 하면서 우는데 그 때 신랑이 방에 들어오니 벽에 자신의 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아이구 아버지가 어찌 된 일이십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또 웁니다. 삽시간에 온 집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나를 안다는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제자들에게 한 말이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걱정하고 감옥에 들어와서 탈옥을 권유하는 제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남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죽을 형편에 처해 있는지를 먼저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1:21-25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우리는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거울입니까?
1. 첫째로 우리의 이웃이 나의 거울입니다.
어떤 두 청년이 굴뚝 청소를 합니다. 청소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두 청년은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네 얼굴이 왜 그 지경이냐.‘ 고 서로 흉을 봅니다. 얼굴이 새까맣다고 서로 비웃은 것입니다. 상대방이 검은 얼굴이면 내 얼굴도 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세대에 의인은 없습니다. 나 자신을 보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통하여 나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이웃이 바로 나의 거울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고 진실하게 대하거든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지만 만나는 사람이 어쩐지 불친절하거나 불쾌하게 대하거든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거울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6: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볼 때에 나의 실수를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줄 아는 거울을 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약1:23-25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거울을 볼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달으나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는 사람은 아무 결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새 마음으로 먼저 나를 살피고 나를 고치고 곧 실행에 옮기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하실 때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고 하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2.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본문에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지도 아래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으나 그들은 또한 많은 죄를 범하였고 그로 인해 무서운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구원의 약속이 마침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간 생활한 후에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출애굽은 이제 고난의 세월이 끝이 나고 가나안을 향한 대장정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만 하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살 줄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그 행로는 순탄하지 않으며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많은 시련이 있는 광야의 여정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은 택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 주셨습니다. 백성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셨고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은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신앙의 훈련장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체험했고 기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백성들이 원하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한 불만을 터뜨렸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인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과 어울려 우상숭배로 자신들을 더렵혔습니다. 이 모든 죄악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중죄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은 죄악이 만연한 세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의 성례전 용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여 어느 누구도 맛보기 힘든 신령한 은혜를 나누고,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마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고전10:1-4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울은 여기서 구름의 인도를 받고 바다 가운데로 지난 두 사건을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라는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을 뜻하는데 만나는 왜 신령한 식물이라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적적으로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 그것이 영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성도들이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인 떡 먹는 것에 비유함으로서 성만찬의 참예가 마치 구원의 보증인 것처럼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 말씀은 광야 생활 당시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으므로 이 물 역시 성만찬 시의 포도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죄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광야에서 죽고 소수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음을 지적하여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예한 사실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지 못하고 교만하면 결국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같이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0: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구약성경은 단순히 기록이 아닙니다. 즉 과거의 행위를 뿌리로 하여 현재에도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을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본보기‘라는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거울‘이라고 했는데 ’거울‘ 이라는 헬라어 ’튀포스‘는 일상적으로 얼굴을 보기 위해 사용하는 거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내려치다‘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로 고대 사회에서 도장이나 주물 빵틀 등 어떤 형태를 동일하게 제작하기 위한 원형의 틀을 말합니다. 성경의 대부분에서는 이것을 표준, 귀감으로 사용하여 “본”이라 번역합니다.
*빌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벧전5:3 맡은 자들에게는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이스라엘의 멸망이 우리의 거울이 되었다는 것은 악을 행하다가 멸망한 자들의 모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난 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유를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고린도 교인들도 우상과 제물에 대해 지식 있는 자들이 우상숭배의 신전 의식에 참여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졌느니라.
둘째, 간음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간음 사건은 모압 여인의 유혹을 받은 바알브올의 사건을 말하는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도 간음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셋째,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여러 번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을 뜻하는 것으로 특히 불뱀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넷째, 원망하는 일입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을 불신하고 비난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네 가지 죄악 된 모습과 그 결과는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과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거울은 무엇일까요.
*엡5:1-2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 같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거울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 사랑에 나를 비추어보면 나의 사랑이 얼마나 허위였으며 거짓되고 포장되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주님 앞에 진정으로 무릎이 꿇어지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인생이 죄인인 것을 깨달을 그때에야 나를 보게 되며 하나님도 보게 되고 이웃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거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봅시다.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엄청난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바울은 빌립보 교인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7-11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원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했습니다. 왜냐면 그 길만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는 어디에다 내 모습을 비춰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거울 앞에 설 때에 똑바로 비춰보아야 합니다. 잘못된 거울을 사용하면 내 모습은 찌그러지고 일그러지고 기형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거울을 볼록 거울이라 하는데 관광지에 많이 설치해 놓고 그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이 어떤 때는 난장이로 보이고 어떤 때는 거인으로 보이게 합니다. 이 거울은 정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서 진지하게 나의 참된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감추어진 내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 안에서 나의 참모습을 보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고 주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이 충만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